박이득 ⑦<br/>재생 이명석 그리고 포항의 옛 풍경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박이득 선생은 이분의 행적은 꼭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생(再生) 이명석(1904∼1979). 일제강점기, 광복, 분단, 전쟁 등 혼란과 파멸, 궁핍의 시기에 포항에서 애린(愛隣) 정신을 실천하고 문화예술의 씨를 뿌린 분. 1904년 영덕 삼사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고)와 일본 간사이(關西)미술원에서 수학했으며, 1933년 포항에 정착한 후 줄곧 포항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
“1933년 포항에 정착한 이후 줄곧 지역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던 이명석 선생은 6·25로 고아들이 넘쳐나자 선린애육원·애린공민학교를 세워 뒷바라지에 나서 다들 먹고살기 힘들 때 문화예술 단체를 만드는 등 포항예총의 기반도 닦았지”
“요즘 시내를 걷다보면 가습이 답답해질 때가 있어. 고향서 향수병을 앓는 것이지 포항은 강과 섬, 호수의 도시야. 해도·송도 일대 갈밭은 철새들의 낙원이었어”
임종석(임) : 포항의 원로들이 옛이야기를 꺼내면 한결같이 이명석 선생을 언급합니다.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박이득(박) : 그분의 품이 그만큼 넓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자기 한목숨 부지하기 힘든 시절에 가난한 이웃을 보살피며 문화예술의 씨를 뿌리고 키웠으니. 그렇다고 그분이 풍족하게 살았던 것도 아닌데.
임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박 : 6·25전쟁 때 포항 시가지가 초토화되고 골목마다 전쟁고아들이 넘쳐났지.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불러모아 밥을 먹이고 교육했는데 그 기관이 선린애육원이고 애린공민학교야. 그런 기관을 세우고 뒷바라지하셨지.
임 : 고아들 먹일 양식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박 : 이명석 선생은 고아들을 굶길까 싶어 늘 걱정이었지. 미군이 주둔하던 오천 부대를 거의 매일 들러서 C-레이션 같은 먹을거리를 구했어. 미군이 선린애육원을 방문해서 고아들과 어울리고 수도산에 함께 소풍도 갔는데 이런 일도 다 주선했고. 애린공민학교에서 고아들과 성인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지.
임 : 나환자를 보살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박 : 나환자들이 천시를 받으며 거리를 떠돌아다녔지. 이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정착촌을 만들어준 거야. 누가 그런 마음을 낼 수 있었겠어. 나환자촌이 조성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명석의 장남인 이진우(전 국회의원) 형과 한밤중에 나환자촌을 방문한 적이 있어. 전기 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 늦은 밤의 방문이라 힘들게 길을 찾고 있는데 긴 횃불 행렬이 보이는 거야. 나환자들이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횃불을 만들어 길을 밝혀준 거지. 그들을 만났더니 이명석 선생 잘 계시냐며 안부를 묻고 또 묻더군. 얼마나 고마워하던지.
임 :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셨지요?
박 : 다들 먹고살기 힘들 때 문화예술 단체를 만들어 예술인들을 격려하고 후원도 하셨지. 포항문화원의 전신인 포항문화협회를 결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박인호, 김삼일도 힘을 보탰어. 1952년에 발족한 포항문인협회에도 큰 힘이 되었고, 포항예총의 기반도 닦았지. 포항 문화 행사의 효시인 개항제가 1966년 처음 열렸는데 대회장이 이명석 포항문화원장이었어. 그분의 역할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지. 사회 환경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지역에 건강한 문화예술을 뿌리내려 보자는 열정은 뜨거웠고, 이걸 이끌어준 분이 이명석 선생이지.
임 : 당시 문화계 인사들이 청포도다방에서 자주 모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 : 이육사가 포항의 미츠와(三輪)포도원에 왔다가 ‘청포도’란 시를 구상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 사진작가인 박영달이 문화계 인사들의 사랑방인 다방의 문을 열면서 그 이름을 이육사의 ‘청포도’에서 착안한 거야. 그 다방에서 이명석, 한흑구, 박영달이 자주 어울리며 포항의 예술 시대를 열었고, 나는 그때를 ‘청포도 살롱 시대’라고 부르지.
임 : 이명석 선생의 발자취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박 : 지금은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포항시민헌장’을 이명석 선생이 기초했고 손춘익이 완성했어. “대한의 새벽날이 밝아오는 이 고장”으로 시작하는 ‘포항시민의 노래’와 포철공고, 오천중학교 등 10여 개 학교의 교가를 작사하기도 했지. 그만큼 지역에 대한 애정이 깊었어. 여러 사람이 이명석 선생의 감화를 받았는데, 특히 손춘익과 김삼일, 나는 선생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모셨어. 김삼일은 포항 근현대사 100년을 다룬 연극 ‘형산강아 말해다오’를 2014년 무대에 올리면서 이명석, 하태환, 박일천 등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의 삶을 다뤘지.
1998년 포항 지역 문인들이 뜻을 모아 이명석이 자주 찾던 수도산 덕수공원에 문화 공덕비를 건립했다.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이사장 이대공, 이명석의 삼남)은 이명석의 뜻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1년부터 애린문화상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으며, 재생백일장도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이명석의 일대기를 정리한 단행본 ‘재생 이명석’은 2018년 발간되었다.
대담을 마무리하며 포항의 옛 풍경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부분 사라져버린 포항의 아름다웠던 풍경을 선생만큼 실감 나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선생의 수필 한 대목을 옮긴다.
물의 땅 영일만과 형산강가에서 자라고 늙어 파파노인이 되어 가는데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자꾸만 고향이 그리운지 모르겠다. 나는 고향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고향을 잃어버렸다. 언제 어떻게 고향을 잃어버린지도 모르겠다.
형산강 언덕에 서서 어디를 둘러보아도 내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의 고향이 아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고향은 어디로 갔을까? 형산강 그 푸른 강변의 연가는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이른 봄 영일만의 그 물빛으로 토하는 봄의 소리는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 박이득, ‘영일만, 그 푸른 해변의 노래’ <월간문학, 2017년 2월호, 231쪽>
임 : “고향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고향을 잃어버렸다”는 문장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박 : 포항 시내를 걷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있어. 어릴 때 마음껏 뛰어놀던 그 아름다운 자연이 시멘트로 아스팔트로 거의 다 뒤덮였으니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고향에서 향수병을 앓고 있는 셈이지.
임 : 사라진 옛 풍경 중에 송도를 아쉬워하는 목소리를 가끔 접하게 됩니다.
박 : 시내와 송도 사이에 검정색 콜타르를 칠한 나무 다리가 있었는데 이걸 검둥다리라 불렀지. 검둥다리를 건너면 길 양편에 수십 년 된 측백나무 가로수가 하늘을 덮고 있었어. 여기를 지나가면 한기를 느낄 정도였지. 숲의 터널을 지나가면 높다란 모래언덕이 나타났고, 여기에 올라서면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어.
임 : 송도 송림의 풍경은 어땠습니까?
박 : 내가 어릴 때 송도 송림이 10만 평쯤 되었을 거야. 큰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빽빽해서 혼자 다니기는 무서울 정도였어. 다람쥐, 청설모, 노루, 꿩이 뛰어다녔고 온갖 새들이 울어댔지.
임 : 해도(海島)에서 성장하셨으니 그곳 풍경이 눈에 선하겠습니다.
박 : 해도뿐만 아니라 송도, 죽도, 대도, 상도는 온통 갈대밭이었지. 갈밭 습지는 새들의 낙원이자 동해안에서 가장 큰 철새 도래지였어. 개개비, 물떼새, 도요새, 청둥오리, 기러기, 두루미가 계절마다 하늘을 덮었는데 한마디로 장관이었지. 여기에 염전이 많아 동해안의 최대 소금 산지이기도 했고.
임 :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군요.
박 : 포항은 강과 섬, 호수의 도시지.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금 도심으로 배가 다니고 조개를 잡고 낚시도 하고 멱을 감았어. 그 후로 산업화, 도시화되면서 물이 오염되고 강과 호수를 매립하거나 복개하면서 옛 풍경을 거의 잃어버렸지.
임 :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박 : 복개한 도심 하천을 복원한다는 소식이 있던데 잘되었으면 좋겠고, 포항의 옛 풍경을 되찾을 수 있도록 시민 모두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 포스코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되겠고. 해도 갈밭 사이로 숭어 새끼들이 헤엄쳐 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끝>
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박이득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