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윤 ③<br/>포항의 사진 역사와 사진 서클
포항의 사진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어떤 사진작가들이 영향을 미쳤을까? 또한 어떤 단체와 교육과정을 통해 사진을 접하게 되었을까? 그 밖에 포항에서 맨 처음 열린 사진 촬영대회는 언제인지 등에 대해 이도윤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조 : 포항의 사진 역사에 대해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포항시사’를 살펴보면 사진이 다른 장르보다 먼저 사단법인이 결성됩니다. 사단법인 포항사진작가협회가 1965년 9월 4일 인준되었고, 그 과정에서 박영달 선생이 역할을 하셨더군요.
이 : 내 선배 세대로 박영달을 선생을 비롯해 김상용, 박원식, 김덕수, 허치권 선생이 있었지. 박영달 선생과 친목 모임을 함께하면서 여름에 기타 들고 오어사, 보경사에 가기도 했어. 사실 포항 사진은 대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 6·25전쟁 이후에 대구는 사진의 수도였거든. 많은 작가들이 대구를 무대로 활동했지. 대구의 구왕삼 선생이 한 달에 한 번 포항에 와서 사진 강의를 했어. 구 선생은 좋은 작품은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도록 직접 작품을 보여주면서 가르쳤지. 대구 사진의 선구자인 신현국 선생도 포항에 공모전 심사가 있으면 다녀갔는데 그분 영향도 있었고. 그 후 포항의 사진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어. 허치권의 ‘내 것 사이소’, 박영달의 ‘시집가는 날’, ‘노도의 위험을 뚫고’가 동아 사진콘테스트에서 입상했지.
박영달 선생 역할로 포항사진작가협회 1965년 인준
대구 구왕삼 선생이 한 달에 한 번 포항서 사진 강의
1968년 개항제 때 처음으로 사진촬영대회 열려
1971년 예술인 단체 ‘나울회’ 창립전 ‘포항예총’ 모태
1978년 서클 ‘칠광회’ 결성으로 좋은 후학 양성 힘써
박영달은 1913년에 태어나 1986년에 작고한 사진작가다. 1958년 조일국제사진살롱에서 입상한 것을 비롯해 국내외 유수의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했다. 미술평론가 박경숙에 따르면 박영달은 1938년 대구일보 포항지사 기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이후 47년간 포항을 지키며 한국 사진 예술사와 포항 문화 예술계에 굵은 발자취를 남겼고, 그런 측면에서 포항 문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운영한 ‘청포도다방’은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2016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박영달 회고전이 열렸다. 구왕삼은 1909년에 태어나 1977년 작고한 사진작가로 이명동, 임응식 등과 리얼리즘 사진 이론을 전개하며 사진 평론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동요 작곡, 음악 평론 등 음악 분야에서도 폭넓은 활동을 했다. 신현국은 1924년에 태어나 1997년 작고한 사진작가이며 매일신문 사진부장으로 활동했다. ‘생존’등의 사진집을 남겼다.
조 : 구왕삼 선생은 “사진은 무성(無聲)의 시(詩), 시(詩)는 유성(有聲)의 사진”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구 선생이 리얼리즘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선생님의 사진관(觀)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 사진은 화가가 데생하듯이 그리는 게 아니고 ‘사진이 아니면 안 된다. 사진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찾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카메라를 들어야 해. 나는 사진을 살롱 사진과 리얼리즘 사진으로 구분하지. 쉽게 말해 살롱 사진은 아름다운 풍경 사진이고, 리얼리즘 사진은 휴머니즘이고 살아 움직이는 사진, 순간을 놓치면 재현할 수 없는 사진이야. 내가 왕성하게 활동할 무렵에는 살롱 사진이 드물었어.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쉽게 하는 사진은 안 하고 싶어. 구왕삼 선생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런 면에서 구 선생의 사진관과 맥을 같이한다는 의견에 동의해. 구왕삼, 최민식 선생의 사진은 정말 배워야 할 가치가 있어. 두 분의 사진에는 휴머니즘이 생생하면서도 깊이 있게 살아 있지.
최민식은 1928년에 태어나 2013년 작고한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인간을 소재로 한 사진을 평생 찍었다. 제1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선 이후 국내외 여러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하였으며 옥관문화훈장(2000) 등 많은 상을 받았다. 1968년 개인 사진집 ‘인간(Human)’제1집을 펴낸 후 2010년 제14집까지 출간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사진집을 냈다.
조 : 선생님은 어느 분한테 사진을 배우셨습니까?
이 :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이름을 떨쳤던 이명동 선생께 배웠지. 이 선생한테 사진을 배우러 서울에 가기도 했고, 이 선생이 포항에 오면 내 집에서 숙박도 했지. 그분은 김두한이 연설하다 단상을 엎은 사진도 찍었어. 두들겨 맞을 각오를 하고 찍었지. 1960년 3·15 마산 의거 때는 카메라를 세 대 메고 다녔던 분이야. 카메라를 뺏길 것에 대비해 예비 카메라를 들고 다녔지. 사진 찍는 사람은 그런 근성이 있어야 해. 매일신문 신현국 선생을 찾아가 그분 암실에서 현상하는 방법을 배웠어. 사진 현상은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 하거든. 신 선생도 배울 게 참 많은 대단한 분이었지.
한국 사진 역사 그 자체라 불리는 이명동은 1920년에 태어나 2019년 타계했다. 6·25전쟁 때 육군 7사단 종군 기록 사진가로 활동하며 무공훈장을 받았고, 4·19혁명을 비롯한 격변의 현장을 앵글에 담았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 창설을 이끌었으며 월간 ‘사진예술’을 창간했다.
조 : 과거에 사진작가를 포함해 예술인들의 모임이나 단체가 있을 법했겠습니다.
이 : ‘나울회’라고 있었지. 문학, 미술, 서예, 사진, 음악 이렇게 다섯 분야의 사람 중에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 모인 단체였어. 예술에 대한 뜻과 생각을 너울지듯이 펼치자는 취지로 모였지. 1971년에 창립전을 열었고. 고문은 최영태 교수가 맡았고, 서예가 신대식 선생이 많이 도와주었어. ‘나울회’가 포항예총의 모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조 : 선생님은 모임이나 단체를 만든 적이 없는지요?
이 : 나는 서클을 만들었지. 1978년 ‘칠광회’를 시작으로 ‘포영회’, ‘영상동인회’를 만들었어. 이 서클을 통해 좋은 후배와 제자를 길러내고 싶었지. 아마 포항에서 제자를 길러낸 사진작가는 내가 처음일 거야. 이 서클이 계속 이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사진도 후배들이 잘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은 내가 작업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경이 좋아졌잖아. 역설적이게도 환경이 좋아지면서 진정한 사진의 길은 어려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력이 회복된다면 사진 강의를 더 하고 싶군.
조 : 그러잖아도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지요?
이 : 포항전문대학(현 포항대학교)과 선린전문대학(현 선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 정식 교과는 아니고 사회교육원에서 사진 수업을 했어. 여성문화회관에서도 강의를 했고. 열심히 가르치고 배웠지. 포항의 두 대학 사진반에서 사진 촬영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어. 재미있는 건 두 대학의 사진반 학생들이 경주 동국대학교 사진반 학생들과 연락해 한데 뭉친 거야. 그렇게 모여서 즐겁게 놀고 사진도 열심히 하더군. 교수들도 많이 도와주고. 참 좋을 때였지.
조 : 여성에게 사진을 권한다는 선생님의 칼럼을 읽었습니다.
이 : 사진은 여성이 하기에 좋은 것 같아. 여성이 꼼꼼하고 섬세하잖아. 카메라의 세세한 부분을 이해하는 데 잘 맞고 감성적으로 여성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여성문화회관과 포항종합제철 직원 부인들 대상으로 ‘주부를 위한 카메라 다루는 법’이라는 강좌를 개설해 강의했지.
조 : 그렇게 강의를 하고 후학을 양성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사진을 오래 하다 보면 사명감이 생겨. 일종의 역사의식 같은 것이지. 예쁜 꽃만 찍는 것은 사진이 아니야.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찍어서는 안 돼. 생활 현장에서 생생한 삶의 모습을 포착해야지. 작가로서 사진에 대한 이런 신념을 사회에 알리고 확산해야 한다고 생각해.
조 : 포항에서도 사진 촬영대회가 열렸을 텐데 최초로 열린 대회는 언제입니까?
이 : 1968년 개항제가 열렸는데, 꽤 큰 규모의 문화 행사였지. 그 행사 중에 포항에서 처음으로 사진 촬영대회가 열렸던 걸로 기억해.
‘포항시사’ 3권(2010, 113쪽)에서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68년 포항에서 처음 문화제가 열렸으니 제1회 개항제가 그것이다. 제1회 개항제는 이명석이 주도했으며 오실광(초대 상공회의소 회장), 김유(상의의원), 정명바우(상의의원) 등 지역 상공인들이 크게 도왔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처음 보는 문화제요 예술제인데다 개항제 행사의 일환으로 미인대회를 겸한 모델대회가 열렸는데 포항에서 모두가 처음 있는 일이라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였다고 한다.
당시 번화가 인근으로 포항 시민의 최고 휴식처인 수도산에서 2차에 걸쳐 모두 50여 명의 사진작가들이 치열한 사진 촬영 경합을 벌였는데, 당시만 해도 촬영대회 자체가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번화가에서 뜻밖에 열리는 행사였으므로 매우 성공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 등 장비가 열악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사진 예술에 대한 관심을 드높인 의미 있는 행사라고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도윤
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
대담·정리 : 조혜경(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