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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파도 넘어 포항에 정착, 수필 명작 남겨

등록일 2021-11-01 20:09 게재일 2021-11-02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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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득  ⑤<br/>한흑구의 삶과 문학(2)
포항 송도해수욕장을 산책하는 한흑구. /사진 제공 : 한동웅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한흑구는 해방공간의 소용돌이에서 남한으로 향한다. 미군정에서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잡지만 이를 내팽개치고 포항에 정착한다. 평양에서 미국을 거쳐 다시 평양에서 서울로 향한 ‘검은 갈매기’의 여정은 포항 바닷가에서 마무리된다.

 

임종석(임) : 한흑구는 귀국 후 평양에서 활동하게 되는군요.

박이득(박) : 광복 무렵 고당(古堂) 조만식(1883∼1950)을 만나 활동해. 하지만 공산당이 한흑구처럼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은 평양 외곽으로 격리하지. 한흑구와 조만식을 따르던 젊은이들이 조만식에게 남한으로 가자고 권하지만 조만식은 북쪽에 남겠다고 해. 그리고는 트럭 한 대를 구해 젊은이들에게 남한으로 가라고 하지. 한흑구는 그 트럭을 타고 남한으로 왔는데, 그때 조만식과 함께 오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여러 번 말했어.

 

한흑구의 부친인 한승곤과 흥사단을 이끈 안창호, ‘조선의 간디’라 불린 조만식은 한흑구를 이해하는 열쇠 말이다. 그리스도교에 바탕한 안창호와 조만식의 사상과 행동에는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 안창호가 별세하자 조만식이 일제의 방해를 뚫고 장례위원장이 되어 장례를 집행한 것도 짚어볼 대목이다. 조만식이 월남을 거부한 상황은 아래 글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해(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한국의 신탁통치를 가결하자 여기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진영과 찬성하는 공산주의 진영이 나뉘게 되었고, 이것이 조선민주당(당수 조만식)의 결말을 가져왔다.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와 김일성은 수차에 걸쳐 조만식에게 신탁통치를 지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조만식)는 끝까지 거부하였고 이로써 1946년 1월 5일 소집된 소위 평남인민정치위원회는 위원장인 조만식을 축출하고 그를 ‘반민족주의자’로 날조 매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참여했던 이윤영 등 민족진영은 월남하여 서울에서 조선민주당을 재건함으로써 평양에서의 민족진영 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월 5일 회담 이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조만식은 그를 구출하려는 청년들이나 그를 방문한 미군정청의 브라운에게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겠소”라며 월남을 거부한 채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였다. -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해방공간의 소용돌이 속 남한으로 향한 한흑구 선생은

영일만에 반해 1948년 식구를 데리고 포항에 정착했지

미군통역관으로 일하다 포항수산대서 교수로 모셔갔고

문인들과 ‘흐름회’ 만들어 지역문화예술계 부흥 이끌어”

“일제강점기 많은 문인이 친일 대열에 섰지만 선생은 이를 거부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 헌사 받기도”

문인들과 경주 불국사에서. 오른쪽이 끝이 한흑구, 왼쪽 끝이 김동리.  /사진 제공 : 한동웅
문인들과 경주 불국사에서. 오른쪽이 끝이 한흑구, 왼쪽 끝이 김동리. /사진 제공 : 한동웅

임 : 남한으로 온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미군정이 들어서고 서울시장의 통역 담당 보좌역으로 발탁돼. 당시에 그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어. 그런데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 자리가 편안할 리 있었겠나. 온갖 청탁과 유혹, 압박이 있었겠지. 한흑구 성품에 그걸 어떻게 견뎌내겠어. 결국 서울시장에게 부탁해 미군정 도서관으로 옮기게 돼. 이때 영미시를 번역해 발표하고 나중에 이 원고를 묶어 출간했지. 미군정 때 서울에서 문학 하는 사람치고 월급 받는 사람은 한흑구가 거의 유일했어. 한흑구가 월급 받는 날이면 문인들이 모여 거하게 한잔했다고 해. 한흑구는 월급의 반쯤은 배고픈 문인들에게 나눠주었어. 이승만이 한흑구에게 공보처장을 권했는데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고 자신은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임 : 포항과는 연고가 없을 텐데 어떤 이유로 오게 되었습니까?

박 : 문인들과 고적지를 순례하려고 경주에 왔다가 포항이 좋은 곳이라는 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일행과 떨어져 포항에 잠시 온 게 계기가 되었지. 한흑구가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당시엔 난치병이었어. 의사가 바닷가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요양하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영일만을 보고는 바로 여기다 싶었던 거야. 그래서 서울로 간 후 곧바로 식구를 데리고 포항으로 왔지. 그때가 1948년이었어.

 

한흑구가 포항의 바다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그의 첫 수필집인 ‘동해산문’(일지사, 1971) 서문에서 느낄 수 있다.

 

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동해변으로 온 지가 꼭 20년이 되었다.

거의 하루같이 바닷가를 걸어 보았다.

인생 자체를 항해에 비하지만, 나는 바닷가에 혼자 서서, 나의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임 : 포항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셨습니까?

박 : 처음에는 미군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1958년에 포항수산초급대(현 포항대)에서 교수로 모셔갔고, 여기서 정년을 맞아. 그후에 효성여대에서도 강의했지.

임 : 지역 문화예술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박 : 포항에 정착한 뒤 ‘서울 문단’과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지만 ‘서울 문단’과 이어진 유일한 통로였지. 지역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어. 시인 박경용, 아동문학가 손춘익, 김일광과 함께 ‘흐름회’를 만들어 문화예술계를 이끌었지. 한흑구 덕분에 지역 문화예술의 수준이 높아졌고, 한흑구 없이는 포항의 문화예술을 이야기하기 힘들어.

 

문단에서 한흑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동해산문’에 실린 서정주의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30년대에 6여 년의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서 돌아온 뒤 몇 해 동안 우리 시단에 그 글을 보이더니, 이래 1945년의 해방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우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지내 왔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다시 붓과 소주를 벗해 서울에 나타나서 1950년의 6·25 사변 가까울 무렵까지 우리를 기쁘게 하더니, 또 이내 어디론지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다. 뒤에 들으니 신라 고도 경주에서 산 하나 넘어 포항의 바닷가에서 누가 그를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20여 년, 그는 그의 글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벙글거리는 항시 동안(童<984F>)의 얼굴도 우리 앞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동해 바닷가의 이십 수년의 정신의 체험을 문장화하여 이 정선(精選)한 수필집을 우리에게 다시 보이게 되었다.

포항 송도해수욕장의 한 식당에서 황순원과 함께(1978). /사진 제공 : 한동웅
포항 송도해수욕장의 한 식당에서 황순원과 함께(1978). /사진 제공 : 한동웅

한흑구의 문학적 위상은 다음의 글에서 가늠할 수 있다.

그의 작품 활동은 그 시대의 신문이나 잡지에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매우 활발했으며, 그것도 문학 전반에 걸쳐진 것으로 보이나, 특히 1930년대에서 비롯되는 미국시 및 그 밖의 역시(譯詩) 활동은 8·15해방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휘트먼과 흑인시의 번역 소개는 물론, 미국 문학 및 작가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져 있음은 당시의 다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도미(渡美) 유학까지 했었던 경력으로 미루어 그의 전신자적(轉信者的) 역할은 보다 정확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 김학동,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일조각, 1981, 206∼207쪽.

 

임 : 환갑이 지나서야 ‘동해산문’, ‘인생산문’ 두 권의 수필집을 냈습니다.

박 : 출간 과정에서 손춘익이 역할을 많이 했지. 한흑구는 책을 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서상은, 손춘익, 김삼일, 김일광이 한흑구를 잘 모셨지.

임 : 부인 방정분 여사도 지역에서 교편을 잡고 많은 제자를 길러내셨지요.

박 : 한흑구는 누님 두 분과 여동생이 있었어. 이화여전 성악과를 다니던 여동생이 동기동창을 한흑구에게 소개했지. 그분이 방정분(1913∼1989) 여사야. 황해도의 이름난 부잣집 딸이었고 홍난파와 같이 공연도 했어. 포항의 공립학교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지. 포항제일교회 합창단을 만들기도 했고.

임 : 가까이서 느낀 한흑구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박 : 점잖은 신사였지. 얼마나 이야깃거리가 많겠어.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는 잘 안 했어. 그것이 아픈 일이든 좋은 일이든. 자기 자랑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지. 포항에 한흑구가 왔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야.

 

일제강점기에 많은 문인이 친일 대열에 합류하지만 한흑구는 이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라는 헌사를 바쳤다. 미국 시절부터 상당한 양의 시와 수필, 소설, 평론, 번역시를 발표했지만 그의 이름으로 발간된 책은 두 권의 수필집과 한 권의 편역서(‘현대미국시선’(1949))뿐이다. 2009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흑구 문학선집’이 나왔고, 2012년에 두 번째 문학선집이 출간되었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니 그를 아는 사람은 많을 수 없지만, 그를 접하게 되는 순간 그 품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실감하게 된다. 한흑구의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박이득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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