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윤 ④<br/>포항의 변화와 사라진 풍경
어느 도시나 변화를 겪게 되지만 포항은 철강도시가 되면서 변화의 속도가 어느 도시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사라진 마을도 있고 새로 조성된 동네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서서히 사라지지만, 사진은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진의 가치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난다.
조 : 그동안 사진전을 모두 여섯 번 하셨더군요.
이 : 첫 번째 개인전은 1973년 중앙동 맥심다방에서 했지. 그때는 다방이 문화계의 사교장이었거든. 다방에 사람들이 가득 찰 정도로 성황이었어. 다방에서 사람들이 담배를 얼마나 피워대는지 담배연기가 온몸에 배었지. 여섯 번째 개인전은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2012년 8월 포항시립미술관에서 했어. 지역에서 관심을 많이 보여주어서 여러모로 고마웠지.
“첫 번째 개인전은 1973년 맥심다방에서 했지. 다방은 문화계의 사교장이었어.
여섯 번째 개인전 ‘그리운 포항, 사람들’은 2012년 8월 포항시립미술관서 했지”
“전시회를 하게 되면 사진은 기록이라는 나의 소신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돼.
글 쓰는 사람은 글로,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으로, 사진 찍는 사람은 사진으로”
‘포항시사’ 3권(2010, 113쪽)에서는 이도윤의 첫 번째 개인전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1973년 지역에서는 최초로 본격 개인전을 열었다. 그전까지 박영달, 김상용, 박원식 등이 개인 전시를 했으나 본격적으로 하지 못하고 청포도다방이나 자기 사진실에서 10여 폭 미만의 작품을 걸어두고 지인들이 찾아오면 작품을 설명해주는 수준에 그쳤다. 이 시기에 이도윤이 최초로 본격 개인전을 열어 자신의 사진 예술의 전부를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변변한 전시공간 하나 없던 때라 번화가에 있는 다방의 벽면을 빌린 조촐한 자리였으나 당시 수준으로 제법 형식과 틀을 갖춘 전시회였으며, 전시장에 예술사진을 관람하는 관람객이 붐벼 큰 바람을 일으킨 전시회라는 평가를 얻었다.
조 : 전시회를 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이 : 기분이라기보다는 사진은 기록이라는 나의 소신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돼. 글 쓰는 사람은 글로,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으로, 사진 찍는 사람은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런 마음, 그런 자세로 사진을 찍고 전시회를 하고 사진집을 낸 거야. 스무 살 이전부터 사진을 시작해서 사진에 나의 온 생이 들어 있어. 내 삶에서 사진을 빼면 이야기할 게 없어. 사진이 전부야. 아직 전시할 사진이 많은데 힘들어 하지 못하고 있어. 누가 기획을 해주면 좋을 텐데. 내가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이 모두 포항의 역사인데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모르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야.
조 :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숙연해집니다. 이번 대담을 기회로 선생님의 사진 세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전시도 가능해졌으면 합니다. 앞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선생님은 포항에 정착한 후로 포항의 급격한 변화를 지켜보고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누구보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습니다.
이 : 이야기를 듣고 보니 포항제철 구경 간다고 형산강 나루터로 자전거 타고 가던 사람들이 생각나네.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포항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있었지. 나는 가슴 설레며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고. 마을이 통째로 없어지는가 하면 염전과 논밭에 새로운 길과 마을이 생겼지.
조 : 해도 염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 : 해도뿐만 아니라 송도에도 염전이 있었지. 송도 가는 다리를 놓기 전에 송도에도 염전이 있었어. 아마 송도에 염전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다리를 놓기 전에는 배를 타고 송도에 들어갔어. 동빈내항에서 낚시도 하고 아이들이 헤엄치고 놀기도 했어. 근래 운하를 만들어서 물길을 트고 준설도 하면서 수질이 좀 깨끗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멀었지.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송도의 그 좋던 명사십리가 사라지고 환경문제가 심각해져 과거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관광도시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포항제철 덕분에 포항이 경제적으로 융성해지고 그 파급효과가 대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야.
조 : 혹시 송도에 다리 놓을 때 찍은 사진이 있는지요?
이 : ‘소달구지’라는 작품이 송도 다리 공사할 때 찍은 것이지. 기초를 쌓을 때 나무다리를 먼저 놓아야 하거든. 강원도에서 나무를 싣고 왔는데 바다로 온 것인지 강을 따라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소달구지로 건져서 싣고 갔어. 송도 다리가 엉성해서 차가 지나다가 빠졌는데, 해녀들이 건져내기도 했지.
조 : 칠성천 주변은 어땠습니까?
이 : 내가 포항에 왔을 때는 칠성천에 맑은 물이 흘렀지. 포항제철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칠성천이 점점 오염되더군. 도시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 어쨌든 칠성천 주변에는 늘 활기가 넘쳤어. 부둣가에 배가 들어오면 생선을 내리잖아.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생선을 줍거나 훔쳐서 팔기도 했어. 그래서 배가 들어오는 날은 아이들이 바글바글했지. 나는 그걸 찍으러 시장을 돌아다녔고. 동빈동과 남빈동은 오징어 덕장이었어. 그물과 그물을 잇대서 오징어, 노가리, 가자미 등을 말렸지. 그곳에서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지. 축축하고 비린내 가득한 그물 밑에서도 아이들은 즐겁게 놀고 잘 자랐어. 굿도 잊을 수 없지. 굿이 너무 재미있어서 항구에서 몇 날 며칠을 자며 구경했어.
조 : 말씀을 들어보면 1970년대 포항은 산업도시로 변모하면서 활력이 넘쳐나는 곳이 아니었나 싶군요.
이 : 그렇게 볼 수 있지. 도시에 역동성이 있었고 사진작가인 나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포항제철 건설과 함께 새마을운동이 맞물려 돌아갈 때지. 포항에서도 새마을운동을 많이 했는데 부인들이 열심히 했어. 부녀자들이 리어카를 끌고 악착같이 일했지. 포항 MBC 앞에서부터 시내까지 다 논밭이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다 없어졌어. 외지 사람들도 포항에 많이 왔어. 대구, 영천, 구미 사람들이 회 먹으러 단체로 기차와 버스 타고 몰려오고 그랬지. 포항역과 시외버스 터미널에 사람들이 북적거렸거든. 죽도시장과 중앙상가가 번창할 수밖에 없었지.
조 :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 사진은 선거 때 찍은 사진이군요.
이 : 중앙상가에 있는 포항우체국 앞이군.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우체국 계단에서 연설했어. 눈에 잘 띄고 동서남북 길이 열려 있고 소리도 잘 퍼져나가니 집회와 연설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지. 포항의 정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장소야.
조 : 이 사진은 큰 공사 현장입니다.
이 : 포항제철 배수로 공사할 때 찍은 거네. 포항제철소 안에 이런 관이 수천 개 박혀 있을 거야. 정말 힘들고 대단한 공사였지. 지금도 그렇지만 포항제철에는 아무나 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수 없어. 그때 포항제철 직원들이 얼마나 큰 사명감을 갖고 일했는지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조 : 포항 구석구석이 선생님의 사진 속에 담겨 있군요. 포항의 사진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사진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 내 호주머니에는 늘 필름이 가득 들어 있었어. 자나 깨나 필름을 보면서 분석하고 공부했지. 사실은 포항의 사진 역사를 쓰려다가 여러 사정으로 못 쓰고 있어. 이걸 쓰려면 포항에 사진이 맨 처음 전수된 시기와 전수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드네. 선배들한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어. 내 손으로 이걸 해보고 싶은데 이제는 욕심이 아닐까 싶군.
이도윤
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
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