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공 ⑧<br/>포항공대 설립에 도움을 준 사람들 그리고 포항공대의 미래
포항공대는 박태준 회장의 교육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아낌없는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의 미래에 투자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노벨상 수상자를 낼 수 있는 대학, 첨단 학문을 연구해 미래 먹을거리를 찾아낼 수 있는 대학을 만드는 것이라는 의지가 포항공대 설립을 현실화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포항공대의 오늘을 있게 했는지 궁금했다.
“포항공대 설립에 서울대 공대 교수들, 조선내화 회장, 대아그룹 회장 등 힘 보탰고,
포항제철이란 국영기업이 교육에 투자하니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지”
“포항공대는 김호길 박사를 초대학장으로 학자들 우대 정책을 폈지. 최고대우였지.
1987년 첫 입학생을 받았고, 노벨상 받는 학교·포스코에 도움주는 학교 되길 바라”
홍 : 포항공대 설립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시죠.
이 : 학교 허가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기 위한 학사 계획을 제출해야 했다. 어떻게 학생을 뽑고, 어떤 연구시설을 지을 것인지, 또 어떤 연구자를 교수로 임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상황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분들이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었다. 당시 서울대 공대 학장은 서울대 전체 컴퓨터 용량보다 더 큰 용량의 컴퓨터를 갖추고자 하는 우리의 열정적인 창학(創學) 의지를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분야에서 240명의 학생만 선발하라는 조언도 했다. 당시 문교부 대학정책실장도 큰 도움을 주었다. 포항공대 설립에 힘을 보탠 사람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사원 주택 부지 10만 평을 포항제철 연수원 부지와 기꺼이 바꿔준 조선내화 회장, 4만 평의 땅을 기증한 천신일 세중 회장, 훨씬 비싼 땅을 후대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땅과 맞바꿔준 황대봉 대아그룹 회장 등이 포항공대가 만들어질 수 있게 도움을 준 분들이다.
홍 : 포항공대 설립 과정에 여러 사건과 일화가 있을 듯합니다.
이 : 주거지역을 학교 지역으로 바꾸는 허가를 낼 때는 당시 이상배 경북도지사가 도움을 줬다. 만약 포항공대 설립 허가가 나지 않으면 다시 주거지역으로 바꾼다는 조건부 허가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문교부 간부와 내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문교부 대학정책실장과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조언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포항공대는 돈을 벌기 위해 만든 대학이 아니라 돈을 쓰기 위해 만든 대학이었다. 포항제철이란 국영기업이 교육에 투자하려는 뜻을 이해한 많은 사람의 도움이 빠른 시간 안에 학교 설립을 가능하게 했다.
홍 : 포항공대 초대 학장인 김호길 박사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이 : LG가 경남 진주에 4년제 대학을 만든다고 해서 재미과학자협회장이던 김호길 박사가 한국에 왔다. 하지만 그 작업이 지지부진했다. 그러자 김 박사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연암공전이 4년제 대학이 될 것이라 알고 들어왔는데 정부가 속였다. 그러니 국호를 대한민주공화국이 아니고 대한사기공화국으로 바꾸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대단한 기백이고 또한 괴짜가 아닌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해서 모시려 했는데 거절하다가 포항제철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믿고 포항공대 초대 학장이 되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김호길(1933~1994) 박사는 물리학자이자 교육행정가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메릴랜드대학 교수와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 선임과학자, 연암공과대학교 학장을 거쳐 1985년 포항공대 초대 학장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가속기물리학자이자, 한국 첨단 과학기술 교육의 기틀을 닦은 과학교육 개혁가로도 평가받는다.
홍 : 그런 분을 초대 학장으로 모신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 : 박태준 회장과 김호길 박사가 처음 면담할 때 자리를 함께했다. 노벨상을 받는 학교를 만들겠다, 고부가가치 연구에 중점을 두겠다, 철강이 아닌 다른 먹을거리도 찾아내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대뜸 김호길 박사가 박 회장에게 “당신은 쇠만 만드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뭘 아는 사람이네요”라고 했다. 하긴 전두환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니 그런 말을 못 할 것도 없었다. 나는 중간에서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앞으로 20년 후 포항제철 부속 포항공대가 아닌, 포항공대 부속 포항제철이 되면 박 회장이 내 밑으로 들어오시라”는 말에 박태준 회장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그날 밤에 내게 지시했다. “초창기에는 김호길 같은 사람이 필요하니 다른 사람 찾지 말고 무조건 김호길 박사를 학장으로 모셔오라”고.
홍 : 김호길 학장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겠습니다.
이 : 김호길 박사와 독일 아헨 공대(RWTH Aachen University)에 갔을 때다. 김 박사는 박태준 회장이 기업을 운영하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교육 전문가가 아닌데 좋은 대학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런 의문을 씻어준 일화다. 우리가 머물던 아헨의 호텔로 박 회장이 전화를 걸었다. 마침 국제철강협회 일로 영국 런던에 있을 때였다. 박 회장이 내게 “포항공대에 오려는 학자들이 많으냐? 그분들은 주로 무슨 질문을 하더냐”라고 묻길래, “박 회장은 교수들 조인트도 까느냐라고 물어서 철강 공장에서 신는 안전화 앞부분엔 철이 들어가 있다. 그걸 확인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조인트를 까는 것이 아니다. 유치원 젊은 교사들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사람이 박태준 회장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박 회장이 크게 웃었다. 이 대화를 옆에서 듣던 김호길 박사가 “기업의 최고 경영자와 부하 직원이 이처럼 격의 없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는 분위기를 보니 포항공대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홍 : 교수 초빙 과정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이 : 포항공대는 처음부터 학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최고 연봉을 받던 다른 사립대 교수보다 월급을 20퍼센트 더 지급했다. 학교가 세워질 즈음 나와 김호길 학장 둘이서 세계를 돌며 스무 군데가 넘는 대학을 다녔다. 한국 교수가 많은 대학 도시들이었다. 미국 보스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다. 포항공대와 인근에 연구 조건, 생활 조건, 자녀들의 교육 조건까지 고려한 여러 시설을 만들었다. 연구자 우선의 풍토가 생긴 것이다. 교수들은 자녀 교육을 제일 중요시했다. 이를 예언한 듯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까지 포항에 만들어 최고의 교육 환경을 조성했다. 교수로 올 분들에게 “서울 이상의 자녀 교육 인프라를 갖춘 도시가 포항”이라고 홍보했다. 최근에 한전공대를 만드는 팀들이 찾아와 포항공대 설립 노하우를 묻기에 가장 먼저 교수 자녀들을 위한 교육 환경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홍 : 포항공대가 첫 입학생을 받은 게 1987년인가요?
이 : 그렇다. 기대 이상으로 좋은 학생들이 왔다. 서울대 공대 커트라인인 학력고사 280점 이상 학생에게만 응시 자격을 줬다. 그게 어떤 효과를 가져왔냐면 ‘포항공대는 불합격한 학생도 280점 이상의 고득점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응시 자격을 제한하는 게 기회균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으나, 로펌에 문의하니 문제될 게 없다는 답변이 왔다.
홍 : 지금 포항공대에 거는 기대는 어떤 건지요?
이 : 건학 이념의 실천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학교, 고부가가치 연구를 통해 포스코의 경영 다각화에 도움을 주는 학교가 되길 바란다. 1989년에 노벨상 수상자 부부 10명을 포항에 초청했다. 그들을 포항제철이 만든 초등학교로 모셨다. 노벨상 수상자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만약에 아빠와 엄마의 팔이 세 개라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나요”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1~2학년들은 신이 나서 손을 들고 “높은 선반에 놓인 과자를 쉽게 먹을 수 있어요”, “농구를 하면 최고의 선수가 될 것 같아요”라며 시끌벅적 대답을 내놓는데 고학년 교실로 갈수록 손을 들고 대답하는 아이가 없었다. 그때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이 “왜 학년이 높을수록 학생들이 경직돼 있나요? 이 학교에선 1년에 유리창이 몇 장이나 깨지죠?”라고 물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한 장도 깨지지 않는다”고 답하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이 학교 학생들 중에선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없을 것 같아요.” 이 에피소드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홍 : 앞으로 한국 교육이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 아이들의 적성을 살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르치는 사람들부터 다음 세대의 발전 포인트가 어디에 있고, 어떤 인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미래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 중 가장 가치 있는 게 교육에 대한 투자라고 믿는다. 박태준 회장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기도 하다. 교육에 투자하는 건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 있다.
홍 : 끝으로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시죠.
이 :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서는 후세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한 번쯤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우선 먹기 좋은 달콤한 곶감보다 현재는 고생되지만 앞날의 열매를 수확하려 노력을 아끼지 않는 청년들을 응원하고 싶다.
이대공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