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은 바닷가에 날아온 검은 갈매기

등록일 2021-10-26 19:02 게재일 2021-10-27 13면
스크랩버튼
박이득4<br/>한흑구의 삶과 문학(1)
포항수산초급대학(현 포항대) 교수 시절의 한흑구(1957). /사진 제공 : 한동웅
포항수산초급대학(현 포항대) 교수 시절의 한흑구(1957). /사진 제공 : 한동웅

수필가인 박이득 선생은 포항문인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한국예총 포항지회장을 맡으며 지역 문화예술의 수준을 높이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문화예술 분야에 많은 이야기가 있겠으나 우선 흑구(黑鷗) 한세광(1909∼1979)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들어보았다. 그의 삶과 문학에는 그만한 무게와 깊이가 있는 까닭이다.

 

“수필 ‘보리’로 유명한 한흑구… 평양서 태어나 검은 갈매기 ‘흑구’라는 필명을 사용

평양 최초 목사가 된 아버지 한승곤씨의 영향으로 스무살에 미국으로 건너갔었지.

아버지는 1913년 미국으로 망명, 독립운동단체서 활동하다 1947년에 돌아가셨어”

“미국서 만난 고향 친구 안익태의 도움으로 템플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에 합격…

교민단체 신문 등에 시·평론·소설 발표… 그 후 평양에서 활발한 문학활동을 했지”

임종석(임) : 한흑구는 문학적 위상에 비해 조명과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필 ‘보리’로 유명한 분이시지요.

박이득(박) : ‘보리’는 1955년 동아일보에 발표했는데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수필 문학의 백미(白眉)지.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한흑구, ‘보리’ 부분

 

박 : 한흑구를 이해하려면 그분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특히 부친 한승곤(1881∼1947)을 알아야 해. 평양에서 최초로 목사가 된 분으로 기독교계에서 명성이 높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12년에 평양 산정현교회 제1대 담임 목사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1911년에 ‘105인 사건’이 터져.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을 조작해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이지. 이때 평양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계 항일세력이 많이 검거돼. 이 사건에 연루된 한승곤은 1913년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에서 흥사단(興士團)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데 의사장(議事長) 등 중책을 맡지.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와 가까웠고, 장이욱(1895∼1983)과 함께해. 장이욱은 서울대학교 총장을 하고 미국대사도 한 분이야. 독립운동사 자료를 보면 한승곤, 안창호, 장이욱이 함께한 사진이 있어. 1936년 귀국한 한승곤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흥사단 동지들과 투옥돼. 1947년에 돌아가셨고,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지.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민족운동단체다. 1937년 5월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운운’이라는 인쇄물을 산하 국내 35개 지부에 발송했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모두 181명이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최윤세, 이기윤은 옥사하고, 김성업은 불구가 되었다. 안창호도 수감되었다가 1937년 12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별세했다. 다른 수감자들은 5년여에 걸쳐 석방되지만 사건 관련자 상당수가 친일파로 전락하고, 흥사단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미군정청 통역관 시절의 한흑구(1946).
미군정청 통역관 시절의 한흑구(1946).

임 : 한흑구가 미국으로 간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겠습니다.

박 : 그렇게 봐야지. 평양에서 태어난 한흑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가 1929년 스무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노스파크대학교(North Park Univ.)에서 영문학을,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Temple Univ.)에서 신문학을 공부해. 검은 갈매기, 흑구(黑鷗)라는 필명은 일본 요코하마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 갑판에서 떠올린 거지.

 

하룻밤을 자고 나서 갑판에 올라, 갈매기가 다 달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배꼬리 쪽을 살펴보았더니, 웬일인지 검은색의 갈매기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긴 나래를 펴고 쫓아오고 있었다. 그 검은 갈매기 한 마리는 하와이에 올 때까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그냥 한 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옛것을 버리고 새 대륙을 찾아서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

이런 구절을 일기에 쓰다가, 문득 나의 필명(筆名)으로 사용하기로 생각했다. (중략)

나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여야 하는 갈매기와도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 한흑구, ‘나의 필명(筆名)의 유래’(1972) 부분

 

임 : 네 살 때 헤어진 아버지를 스무 살에 만나러 미국으로 가는군요. 미국 생활도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박 : 나라 잃은 처지에 이역만리에서 고학했으니 오죽했겠어. 간혹 거친 흑인들과 부딪쳤는데 주먹이 강해서 밀리지 않았지. 선천적으로 체력이 좋았고 축구도 잘했어. 고향 친구인 안익태를 만나 한동안 함께 지내며 도움을 주는데, 그 이야기는 수필에 실려 있지.

 

그 수필은 ‘인생산문’(일지사, 1974)에 실린 ‘예술가 안익태-젊은 시절의 교우기’를 말한다. 이 글을 보면 한흑구가 안익태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한(한흑구) 군! 자네 학교 음악과에 잘 말해서 나를 장학생으로 좀 넣어주게나. 자넨 총장을 잘 알지 않나.”

안은 침착한 태도로 말하였다.

안의 말대로 나는 찰스 베리(Charles Buery) 총장을 만나 안을 소개해서 내가 다니고 있던 템플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에 외국인 장학생으로 무난히 넣을 수 있었다.

 

임 : 이 시기에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요.

박 : 교민단체에서 발간한 ‘신한민보(新韓民報)’라는 신문과 흥사단 계열에서 발간한 ‘동광(東光)’이란 잡지에 여러 편의 시와 번역시, 평론, 소설을 발표했지.

 

‘신한민보’는 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민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로 창간되었으며,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교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안창호와 관련이 깊고, 1914년에 춘원 이광수가 이 신문의 주필로 내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에 가지 못하고 귀국한 일화가 있다.

‘동광’은 1926년 5월 20일자로 창간된 종합잡지다. 안창호가 1913년 미국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흥사단을 배경으로, 또 같은 계열의 단체로 1926년 1월에 조직된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성격을 띠고 발행되었다(최덕교, ‘한국잡지 백년 2’, 현암사, 2004.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이광수가 창간을 주도했고 주요한이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임 : 모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1934년에 귀국하는데, 그 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게 됩니까?

박 : 한흑구의 모친은 한흑구가 귀국한 1934년에 작고해. 한흑구는 평양에 머물면서 ‘대평양(大平壤)’과 ‘백광(白光)’의 창간에 참여하고 문학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백광’에는 쟁쟁한 문인들이 참여했어. 이효석이 평양에 왔을 때 한흑구가 ‘백광’에 원고를 부탁했고 이효석이 승낙했는데 마감을 안 지키더라는 거야. 그래서 한흑구가 이효석을 찾아가 받아낸 원고가 ‘낙엽을 태우며’라는 수필이라고 해.

미국에서 돌아온 한흑구는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친다. 1935년 한 해만 보더라도 ‘신인문학’에 시 ‘밤의 사막’(3월), ‘님은 나의 산’(6월) 등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에 ‘D.H. 로렌스(Lawrence)론’(1935. 3. 14∼15), ‘조선중앙일보’에 ‘윈덤 루이스(Windham Lewis)론’(1935. 9. 17∼9. 22), ‘조선문단’에 ‘바이런(Byron)의 생애와 그의 시’(1935. 5)를 발표했다.

1934년에 창간된 ‘대평양’과 1937년에 창간된 ‘백광’은 평양에 기반한 종합잡지다. ‘대평양’은 1934년 11월 11일 창간된 종합잡지로 편집 겸 발행인은 전영택, 주간은 한흑구다. 한흑구는 창간호에 창간사, 시, 소설, 논문, 잡문 등 10편 이상을 수록했다(최덕교, 위의 책 참조).

‘백광’은 1937년 1월부터 그해 6월까지 통권 6호를 발간했으며, 평양에서 조선 전역을 상대로 발행된 최초의 종합잡지다. 전영택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편집 실무는 주간이었던 백선행의 양아들 안일성과 한흑구가 담당했다(‘한국 근대문학 해제집 III-문학잡지(1927~1943)’, 현암사, 2017, 117∼119쪽 참조). 한흑구는 창간호에 ‘명사순례기’와 소설 ‘인간이기 때문에’를 발표했다.

한흑구의 고향 선배인 소설가 전영택(1898~1968)은 1930년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했고 한흑구와 가까웠다. 두 사람은 귀국 후에 평양에서 ‘대평양’과 ‘백광’의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임 : 연보를 보면 1937년에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속되는데 어떤 이유입니까?

박 : 흥사단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수양동우회 사건’이지. 부친 한승곤도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초를 당해. 그런 맥락에서 한승곤, 한흑구 부자(父子)를 이해하려면 흥사단을 깊이 알아야 해.

박이득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