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일 ②<br/>고래와 헤엄치던 소년, 연극배우가 되다
울산 장생포에서 살던 소년 김삼일은 작은 고래와 헤엄치고 놀며 평화로운 시절을 보낸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그의 삶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와중에 연극을 만나게 된 것은 인생의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6·25 전쟁 때 우리집은 피난민들의 거처였지. 장생포서 고래 삶은 집으로 유명했어. 유랑극단 사람들도 먹고 자고, 고마움에 연극을 해줬는데 그 때 처음 연극을 했었지”
“1963년 포항방송국 라디오 드라마 성우로 뽑히고, 성우들과 극단 ‘은하’를 창단…. 내가 쓴 선언문엔 “저 하늘의 은하수처럼 우리 극단도 영원하자”는 열정이 있었어”
헌 : 울산 장생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는데 장생포는 고래가 유명한 곳이지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김 : 나는 우체국에서 근무했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었지. 지금 포항 동빈내항은 수심이 얼마 안 돼 큰 배가 못 들어오지만 과거 장생포항은 수심이 깊어 큰 상선들이 많이 들어왔어. 다섯 살 때부터 수영을 배웠고 수영이라면 자신이 있지. 집에서 방문을 열면 바다가 환히 보였어. 내가 어릴 적에는 참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가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잡혔지. 고래가 내항으로 들어와 장관을 이루면 우리도 고래 옆에서 같이 헤엄쳤어. 작은 돌고래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서 그렇게 같이 놀 수 있었고 수많은 갈매기가 그 위를 날아다녔지.
헌 : 말만 들어도 환상적인 장면이군요. 그렇다면 연극은 어떻게 접하게 되었습니까?
김 : 6·25전쟁이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는데 나 또한 그렇지.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전쟁이 터졌는데 많은 사람이 남쪽으로 피난 가게 되고 유랑극단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어. 포항도 인민군에게 함락되어 안전한 곳이라고는 울산과 부산밖에 없었지. 그런데 우리 집이 피난민들의 거처가 된 거야. 우리 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장생포에서 하나뿐인 고래 삶는 집으로 유명했어. 솥에 고래고기를 삶아서 우리 식구와 피난민들이 함께 나눠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유랑극단 사람들도 다른 피난민들처럼 우리 집 마당과 고래 창고에서 잠을 자고 밥도 같이 먹었지. 먹고 자는 일이 해결되자 그들은 고마운 마음에 돈을 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 30대 초반의 삼촌이 연극 소품을 구해주었고. 그러다 삼촌이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주인공도 했지. 나도 어쩌다 극 중에 꼬마 역할이 있으면 참여하게 되었어.
헌 : 전쟁 중에도 연극은 했고 그것이 선생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네요.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 : 울산 장생포동 205번지가 우리 집이었는데 150m 떨어진 곳에 농막이 하나 있었어. 그 농막에서 삼촌이 발성 연습을 했지. 삼촌이 연극에 완전히 빠진 거야. 휴전이 되어 유랑극단이 떠나자 삼촌이 유랑극단을 조직해서 방어진 읍내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지. 삼촌이 신파극단 주인공으로 활약하면서 나도 덩달아 연극에 대한 열망이 커졌어. 국민학교 시절, 독립군으로 열연하는 삼촌을 보고 감동을 받았지. 삼촌처럼 멋진 연기자가 돼 무대에 서보고 싶은 꿈을 품게 된 거야. 그런데 삼촌은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그 농막에서 일찍 돌아가셨지. 그 터는 지금 그대로 남아 있어.
헌 : 전쟁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요?
김 : 1954년에 장생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3년 후에 울산 대현중학교를 졸업했지. 그리고는 울산 농림고등학교 축산과에 입학했는데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말았어.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실패했거든. 이 바람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쌓여 반항의 나날을 보냈고, 부산 영도에 있던 할머니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가게 되었지. 영도 대평동에 있는 대평약방에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가기로 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어. 온종일 일만 해야 하는 탓에 야간 고등학교에 가는 건 엄두를 낼 수 없는 거야. 그러니 얼마나 실망하고 불안했겠어. 그때 4·19혁명이 터졌지. 대평약방 주인이 자유당 부위원장을 지냈거든. 학생들이 약방 앞에 몰려와 항의하고 난리가 났지. 나는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고 약방이나 지키고 있는 처지를 비관하다가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부모님께 편지를 썼지.
헌 : 포항에는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습니까?
김 : 1959년 그 유명한 사라호 태풍이 지나간 이듬해 식구들이 포항으로 이사를 왔어. 포항은 정조부 때부터 8대에 걸쳐 200여 년 조상이 살았던 곳이야. 우리 가족이 정착한 곳은 항구동인데, 당시 항구동은 오징어, 노가리, 가자미 등을 말리는 천혜의 생선 건조장이었지. 식구들이 포항에 먼저 와 있었고 나는 부산에서 포항으로 가게 되었지. 부산에서 동해남부선을 타면 종착역이 포항역이었거든. 포항역에 내리니까 식구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어. 그렇게 포항에 와서 생선 말리는 일 등을 하며 생계를 도았지.
헌 : 학업은 어떻게 이어갔습니까?
김 :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았으니까 어떻게든 다시 다녀야 했지.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울산으로 가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울산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고, 1964년 경희대학교 사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
헌 : 그리고는 다시 포항에 오시게 되는데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 : 경희대학교에 입학한 후 KBS 포항방송국에서 전속 성우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했는데 합격되었지. 그렇게 취업이 되고 나서 포항수산대학 경영학과에 재입학했어. 성우 생활과 대학 생활을 병행한 거지. 이때 평생 스승으로 모신 극작가 겸 연출가 신상률 선생과 인연이 되었고, 대학학보사 기자로 일하면서 편집 주간인 한흑구 선생을 만났어.
헌 : 학창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없습니까?
김 : 6·3한일협정반대운동 때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잡혔지. 밤샘 조사를 받고 풀려나 근신 처분을 받은 기억이 나는군.
헌 : 당시 학생들의 문화 활동은 어땠습니까?
김 :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문화 활동을 열심히 했지. 대표적인 예로 KBS 포항방송국에서 포항학생방송서클이 진행하는 방송을 내보낸 거야. 포항수산대학에서는 김영호와 내가 주축이 되고, 포항고 양정봉, 동지상고 안석수, 포항여고 최순향과 이순예, 포항수고 김성태가 중심이 되었지. 그 외에도 봄가을에 이명석 선생이 운영하는 애린공민학교 강당에서 예술제를 개최했어. 시 낭송, 연극, 독창, 기악 연주 등 다양하게 했지. 소박하긴 해도 이런 활동 하나하나가 포항 문화예술의 씨를 뿌린 게 아닌가 싶어.
헌 : 선생님은 연극계에 어떻게 입문하게 되었습니까?
김 : 1964년에 대구에서 극단 ‘태백산맥’이 창단되면서 배우를 뽑았어. 그때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태백산맥’의 창단 멤버가 되었고, 그해 10월 크라브첸코의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의 주인공 역을 맡았지. 이때 평생의 연극 동료가 되는 탤런트 이원종과 연출가 이필동을 만났고.
헌 : 포항에서 본격적으로 연극이 시작된 것은 언제인가요?
김 :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1963년 12월 KBS 포항방송국이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기 위해 극작가와 성우를 모집하거든. 이듬해 신상률 선생이 극작가로 당선되고, 나를 포함해 전영치, 공설자, 강신홍, 김옥자가 성우로 뽑히지. 신상률 선생이 연출을 맡아 주 1회 30분 분량의 드라마를 제작했어. 한 회를 만들기 위해 성우들끼리 모여 1주일 내내 연습했지.
헌 : 라디오 드라마와 연극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요?
김 : KBS 포항방송국 차철훈 국장이 극단을 만들어 지역을 계몽해야 한다고 했지. 그런 격려도 있었고 나를 비롯한 동료들도 연극에 대한 열정이 있었어. 그렇게 KBS 포항방송국 성우들이 주축이 돼 1964년 12월 극단 ‘은하’를 창단하게 된 거야. 세찬 겨울바람이 부는 영일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저 하늘의 은하수처럼 우리 극단도 영원하자’는 취지였어. 창단 선언문은 내가 썼지.
여기 불모지에 꽃을 심으렵니다.
그 꽃이 시들어지고 또 짓밟혀 쓰러져도
그치지 않고 또다시 심으렵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샘물을 찾아
우리는 발버둥 쳐 푸른 화원을 이 고장에 이룩해 보렵니다.
- 극단 ‘은하’ 창단 선언문
헌 : 1964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군요?
김 : 그해 내 인생에도 포항 연극계에도 의미 있는 일이 잇달아 있었지.
김삼일
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