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김두호 ① 포항 미술의 태동기
예술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도시의 매력을 찾아낸다. 도시는 예술가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고 예술가의 눈에 띈 도시는 작품 속에 남는다. 지역의 근현대사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예술사를 밝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척박한 환경에서 지역에 미술의 뿌리를 내리고 화단(畫壇)을 꽃피운 이가 있다. 6·25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포항에서 미술을 배우고, 1970년대 고향으로 돌아와 3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한 김두호 선생. 포항 미술의 산증인 김두호 선생을 만났다.
열두 살 때 전쟁고아가 되었어. 구룡포에 있는 아버지 친구집서 좀 살다가 선린애육원에 들어간 뒤 거기서 포항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를 졸업했지. 1956년 중학교 입학식 날, 포항미술을 개척한 서창환 선생님이 미술반에 꼭 들어오라는 거야. 그 계기로 평생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지. 어릴 때부터 재생지에 혼자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게 됐지만 그 과정은 만만찮은 고독한 전쟁이었어. 겨우 대학은 졸업했지만, 졸업만 한다고 되나.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고생을 꽤 했지.
배은정(이하 배)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김두호(이하 김) : 특별한 건 없고 화실에 나와서 그림을 그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화폭에 담지. 간혹 제자들이 찾아오면 차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배 : 선생님은 지역 미술과 함께해온 분입니다. 포항의 현대미술은 언제, 누구에게서 시작되었습니까?
김 : 포항 미술의 태동기는 1950~60년대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포항 출신인 장두건 선생이 한국 화단의 거두였다면, 포항에서 활동한 1세대로는 포항중학교 미술 교사였던 서창환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야. 당시는 포항에서 미술 활동을 한 분이 많지 않았어. 장두건 선생이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가로 포항 미술을 빛낸 분이라면, 서창환 선생은 포항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며 지역 미술을 개척한 분이지.
초헌(草軒) 장두건(1918∼2015)은 포항에서 태어나 메이지(明治)대학교 법학과와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한국 미술계의 거장으로 꼽히며, 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학과 학과장, 성신여대 예술대학 학장, 동아대 예술대학 학장을 거쳤다.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201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포항미술관에 장두건 상설전시관(초헌관)이 있다. 2005년부터 장두건미술상이 운영되고 있다.
서창환(1923∼2014)은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나 일본 니혼(日本)대학교 예술학부를 졸업했다. 1946년 월남해 영주농고를 거쳐 1947년 포항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1959년 경북중학교로 부임하면서 대구에 정착했다. 구도자의 자세로 나무와 숲을 주로 그렸으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배 : 선생님께서 처음 접한 미술 작품을 기억하십니까?
김 : 나를 직접 가르친 서창환 선생의 그림을 기억해. 대학에 들어가서야 다른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어. 서양화보다 수묵화가 친숙하던 시절이었지. 포항에서는 한때 수묵화의 인기가 굉장히 높았어. 포항종합제철이 건립되면서 외지 사람들이 포항에 몰려 들어올 때 수묵화 붐이 일었어. 덕분에 수묵화가 잘 팔렸지. 외지에서 온 동양화가들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그림을 많이 그렸어. 여관에 방을 얻어놓고 그렸고, 주로 다방에서 전시하며 팔았지. 당시 권영호(전 경남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선생이 무분별한 동양화 전시를 못마땅하게 여겨 불매 운동을 벌이기도 했어. 본격적인 서양화 전시는 1981년 포항향토미술회가 만들어지면서 이루어졌을 거야.
포항에서 동양화 붐이 일어난 것은 1960년대이고, 1970∼80년대에 극성을 부렸다. 당시 상황은 ‘포항시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70년대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지역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표구화랑들의 극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표구화랑이란 작품 표구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매매도 겸하는 점포로서, 이들 업주는 당시 지역의 급속한 경제성장에서 발생하는 반사이익을 노려 지역민들의 미술에 대한 무지를 악용, 서울에서 활약하는 동양화가들을 불러들여 다방이나 여관방을 주무대로 작품 매매를 일삼았다. 이들의 무제한적인 미술 상행위는 그 후 오랫동안 지역 미술계나 미술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는 독소가 됐다.
-『포항시사』제3권, 2010, 106쪽.
배 : 장두건 선생이 포항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하셨고, 서창환 선생은 이북 출신으로 포항에서 활동하셨다면, 김두호 선생은 포항 출신으로 포항 미술의 터전을 만든 셈이군요. 당시 포항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김 : 내 호적에 구룡포로 기재되어 있는데 정확한 건 잘 몰라. 당시 부모님이 구룡포에서 살았던 것 같아. 구룡포 읍사무소에 내 호적을 만들어놨더라고.
배 :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나는 열두 살 때 전쟁고아가 되었어. 6·25전쟁 때 포항에 인민군이 들어오는 바람에 동해면 임곡까지 걸어서 피난 갔지. 형산강 너머로는 인민군이 못 넘어왔거든.
배 :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누가 돌봐주었나요?
김 : 구룡포에 아버지 친구가 있었어.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친구와 나누던 이야기가 기억나. 아버지 고향은 충북 청주인데, 열다섯 살 때 부모님이 혼인을 강요하니 고향을 등지고 친구와 도망갔다는 거야. 처음엔 둘이서 만주에 갔다가 나중에 구룡포로 왔다고 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친구분 집에서 좀 살았어. 그런데 어떤 분이 내게 “여기 있으면 학교도 못 다닌다”고 하더군. 학교 보내준다는 말에 그분을 따라나섰는데 선린애육원에 넣어주었어. 거기서 포항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를 졸업했지. 그때 안 따라갔으면 학교도 못 다녔을 거야.
배 : 부친의 친구분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김 : 엿장수였어. 그 형편에 남의 자식을 학교에 보낼 생각은 할 수 없었겠지.
배 :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나요?
김 : 어머니는 동생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어. 그 후 아버지도 돌아가셨지. 그런 곡절을 겪으면서 선린애육원에 들어가게 된 거야. 동생도 일찍 죽었어. 동생이 있었으면 내 삶에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외톨이로 오늘까지 살아온 거야.
배 :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역경이었을 것 같습니다.
김 : 오죽했겠어. 그림 덕분에 극복했던 것 같아. 어릴 때부터 재생지에 혼자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 학교에서도 그림 잘 그린다고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지만 과정이 만만치 않았어. 고독한 전쟁이었지. 겨우 대학은 졸업했지만, 졸업만 한다고 되나.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고생을 꽤 했지. 대학 졸업하고 곧바로 포항으로 왔으면 고생을 덜했을 텐데….
배 : 주민등록이 잘못돼 정년퇴임도 빨리하셨다고요.
김 : 주민등록에는 1937년생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41년생이야. 일제 때 태어나서 소화(昭和) 몇 년으로 기입되어 있었거든. 1960년대 주민등록법이 시행되면서 모든 국민은 주민등록을 하게 했지.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할 때였는데, 구룡포 읍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을 만들라는 거야. 2월이라 미대 입시로 바쁠 때였어. 구룡포에 갔는데 기한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사람이 많았어. 직원에게 부탁해놓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소화(昭和) 연도를 서기(西紀)로 옮기면서 1937년생으로 잘못 적은 거야. 전화해서 고쳐달라고 하니 재판을 해야 한다더군. 학원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재판까지 할 틈이 어디 있었겠어? 젊을 때야 나이 몇 살 더 먹고 덜 먹는 게 중요하다고는 생각 못 했지. 그 바람에 공짜로 네 살이나 더 먹어버린 거야. 교직에서 정년도 빨리 맞게 되었고.
배 :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운 시기가 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죠?
김 : 1956년 3월 포항중학교 입학식 날, 강당에서 누가 나를 부르더군. 누군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는데 알고 보니 서창환 선생님이었어. 손을 들고 나가보니 나더러 클럽 활동 시간에 미술반에 꼭 들어오라는 거야. 그래서 미술반에 들어가니 선배들이 많더라고. 서창환 선생님이 나더러 미술에 재능이 있다고 하면서 선배들에게 나를 잘 이끌어주라고 말씀하셨지. 그게 계기가 되어 평생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야.
배 : 서창환 선생님이 어떻게 먼저 알아보신 걸까요?
김 : 국민학교 6학년 때 포항 지역 학생 전시가 있었는데, 내가 수업시간에 그린 그림을 담임을 맡았던 김두익 선생님이 출품한 모양이야. 나는 그런 전시가 있는지도 몰랐고 무슨 그림이 출품되었는지도 몰라. 그때 서창환 선생님이 내 그림을 유심히 봤던 거지. 미술반에 들어가 보니 선배들이 꽤 많았는데 다들 서창환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 서창환 선생님이 포항중학교에 있으면서 배출한 화가는 나와 노태룡, 이방웅 등이 있어. 나와 이방웅은 서라벌예술대학을 갔고, 노태룡은 홍익대에 갔어.
김두호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6·25전쟁 무렵 부모님을 잃고 선린애육원에서 성장했다. 포항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를 졸업했고, 포항고등학교에 다니다가 한 선교사의 권유로 경주문화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죽장중학교, 대동중·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포항미술협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1995∼1996년 지부장을 맡았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화폭에 담아낸 ‘서정적인 구상’을 지향하면서 개성적인 필치로 독자적인 미술 세계를 구축했다.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 앙데팡당(Indé pendants)전, 1986년 대구중앙미술관 초대전, 1992년 일본 히로시마(広島) 시모카마가리(下蒲刈) 란토가쿠(籣島閣)미술관 초대전, 1997년 중국 옌지(延吉)시 화원 초대전 등 국내외의 많은 전시회에 출품했으며, 2010년 포항시립미술관 초대 개인전 등 7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제5회 경북예술상 본상, 제6회 애린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