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윤2<br/>리얼리즘 정신과 국내외 공모전 수상
평생 예술을 한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세계관이 있기 마련이다. 이도윤 선생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작가 정신은 무엇일까? 그에게 대한민국 미술대전(國展)과 국제사진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들의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좁고 꽉 막힌 암실서 작업할 땐 아내는 내가 살았나 죽었나 농담을 던지고, 항상 나를 따라다니며 도와줬어. ‘사진작가 이도윤’을 만든 건 내 아내였지”
“섬세한 표현을 하기 위해 중형카메라를 사용하고 새벽에 인화 작업을 했지. 魂 집어넣어 살아있는 사진을 찍었더니 국내외 대회서 좋은 결과를 얻었지”
조 : 사진작가로 살아간다는 게 참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 : 아내 도움이 컸지. 육거리에서 사진관을 할 때였는데 한 여성이 사진을 가르쳐달라고 왔더군. 그게 인연이 되었지. 내가 사진에 빠져 사는 바람에 가정에는 거의 신경을 못 썼어. 연탄 한 장, 쌀 한 가마니가 얼마인지도 몰랐지. 사진 촬영대회가 있을 때면 아내가 항상 따라가고 사진 작업도 많이 도와줬어. 좁고 꽉 막힌 암실에서 작업할 때는 아내가 30분에 한 번씩 노크해. 내가 살았나 죽었나 농담을 던지며. 사진작가 이도윤은 내 아내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조 : 암실 이야기를 하셨는데 흑백 사진은 작업하기가 상당히 까다롭지요?
이 : 요즘 디지털 작업과는 비교가 안 돼. 한 예로 흑백 사진을 만드는 마지막 과정에 수세(水洗)가 있는데 정착액을 씻어내는 것이지. 이게 참 중요하고도 어려워. 흐르는 물에 종이 인화지를 두 시간 정도 담궈야 하거든. 수세를 제대로 안 하면 사진이 금방 변해. 사이즈가 작은 사진은 대야에 담그면 되는데 큰 사진은 어디에서 하겠나. 수돗물도 귀한 시절인데.
그래서 냇가에 가서 수세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 나는 새벽 1시에 인화지를 자전거에 싣고 형산강에 가서 인화지를 강물에 담그고 돌을 얹어 한참 놔두고 수세를 했지. 요즘 그렇게 하라고 하면 누가 하겠나. 솔직히 요즘 사진은 사진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게 있어. 시간이 나면 한국사진작가협회에 나가서 흑백 사진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안타까워.
조 : 선생님 사진을 보면 인물의 솜털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 섬세한 표현을 하기 위해 중형 카메라를 사용했지. 중형 카메라는 필름이 크기 때문에 확대 사진을 만들면 사진 품질이 소형 카메라로 촬영한 것보다 좋을 수밖에 없어. 사진을 만들 때도 인화 과정에서 흔들리면 안 되니까 차가 안 다니는 새벽에 작업했지.
조 :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두 번 입선하셨지요?
이 : 사진으로 국전(國展)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였지. 지방에서는 특출나게 좋은 사진이 아니고는 입상이 힘들었어. 1975년 24회 국전에서 ‘리듬’으로 입선했고, 1979년 28회 국전에서 ‘출어 준비’로 입선했지. 1982년에 사진 부문이 분리되면서 대한민국 사진대전으로 명칭이 바뀌었어. 사진을 왜 국전에서 뺐는지 항의 서한을 보내려니까 사진계의 선배인 박영달 선생이 윗사람들한테 밉보인다고 말리더군. 그래도 내가 항의 서한을 썼지.
조 :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 공모전에서도 여러 차례 상을 받으셨습니다.
이 : 국내에서 상을 받으니까 국제 공모전에도 도전하고 싶더군. 마침 프랑스와 대만에서 공모전이 있다고 사진작가협회에서 공고가 났길래 영어 잘하는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작품을 보냈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군. 그 당시 사진 하는 사람들은 국제대회에 거의 관심이 없었어.
조 : 선생님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카메라에 담아오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 : 사람의 내면이 살아 있는 모습을 포착해야 진짜 사진이라고 생각해.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가면 찍을 수 있는 풍경 사진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진이라 하기가 어렵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게 진짜 사진이고 사진의 본질이라고 생각해. 나는 리얼리즘이 결여된 사진은 사진으로 보지 않아. 그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한 점도 있지만 사진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야 하고 리얼리즘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어.
조 : 선생님 작품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리듬’이라는 작품이 눈에 띄던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 : 포항제철소에서 기름 탱크 작업을 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인데 국전 입선작이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일하는 사람의 모습이 피아노 건반을 디디는 것 같잖아. 음악적인 리듬이 생각나 제목을 ‘리듬’이라 붙였고 호평을 받은 작품이지. 후배 작가 몇 명은 ‘리듬’을 보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도 해. 이 사진에는 에피소드가 있어. 가로 사이즈는 짧고 세로는 길어서 세로 파노라마로 표구해서 국전에 냈거든. 그런데 사진은 액자로 내야지 동양화처럼 표구로 내면 문제가 생긴다는 거야. 결국 표구 때문에 감점이 돼 입선에 그친 아쉬움이 있지.
조 : ‘돼지몰이’는 1980년 프랑스 국제사진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지요?
이 : 심사위원들이 아주 세밀하게 작품을 검토하고 상을 주었어. 작품 속의 여성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는 작대기를 쥐고 돼지를 쫓는 모습, 그리고 돼지의 발걸음까지 섬세하게 살펴보더군.
조 : ‘쟁탈’은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이 : 그 작품은 여남 바닷가에서 찍었지. 당시에 카메라가 표준 렌즈밖에 없었어. 갈매기가 물을 차고 탁 들어가는데 렌즈 안에 갈매기가 작게 담기면 생동감이 떨어질 것 같아 목까지 물이 차는 줄도 모르고 바다로 들어갔지. 그렇게 온몸을 던져 겨우 한 장 얻어낸 거야.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렸지. 그런 일이 다반사였어.
조 : 그 밖에 생각나는 사진이 있으신가요?
이 : 하루는 전시회를 하고 있는데 키가 훤칠한 청년이 나에게 다가오더군.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담소’라는 작품의 한 사람이 자신의 할머니고 등에 업힌 아기가 본인이라는 거야. 1980년대에 연일에서 찍은 사진이지. 그래서 청년에게 그 작품을 준 생각이 나. 1980년 동아국제사진살롱 입선작인 ‘빨래하러 가는 길’은 한국적이면서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이지. 나는 “사진도 연극처럼 무대를 만들어서 혼을 집어넣고 스토리를 만든다. 그러나 연출 냄새가 나지 않고 일상생활에 어울리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라고 배웠어.
조 : 어느 글에선가 “사진가의 길이 내 삶을 구제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며 사진가의 자세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을 것이다. 종교처럼 신앙심을 갖고 카메라를 잡을 것이다”라고 하셨더군요.
이 : 사진에 젊음을 바치고 나의 생을 건다고 생각했지. 쉽게 말해 사진에 미쳤던 거야. 사진을 안 하고 다른 걸 했더라면 더 잘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나는 사진에 관해 세 가지 소신이 있어. 첫째 인간의 삶을 표현하고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기록한다. 둘째 리얼리즘 정신을 일관되게 추구한다. 셋째 사진은 종교처럼 내 생을 걸 만큼 중요하다.
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이도윤
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