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원로는 그 지역의 작은 도서관이자 박물관이다. 박이득 선생을 만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은 정치, 경제, 문화, 체육 등 다방면의 이야기를 구성진 말솜씨로 풀어냈다. 우선 정치 부문의 이야기를 전한다. 일제강점기, 광복, 전쟁, 혁명, 군사정변 등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를 헤쳐나간 포항 정치인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포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최원수는 포항에서 머리 좋기로 소문났지. 이상(理想)이 높은 큰 지도자 타입이야.
죽장중과 기계중 그리고 청하중의 전신인 해아(海阿)중을 모두 최원수가 설립했어”
“저는 이 나라 이 세상의 병을 고치는 데 전념하겠습니다”라고 했다니 그 포부를 알 만하다.
“말솜씨가 탁월하고 명석한 인물이었어. 뛰어난 언변으로 분위기를 압도했지”
포항 제1의 갑부 집안사람이면서 부부 의사로 편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임종석(이하 임) : 선생님께서는 포항 역사를 가장 잘 아는 원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정치 분야부터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선생님은 많은 정치인을 지켜보거나 보좌하셨는데 정치를 잘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박이득(이하 박) : 철이 없다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시근머리 없다’고 하지. 정치를 잘하려면 ‘시근머리’가 있어야 해. 역사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냉철하게 살펴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해. 물론 그게 쉽게 될 리는 없겠지. 내가 여러 정치인을 모셨는데, 그들이 부족한 점을 둘러보게 하게나 보듬어주는 게 내 일이었어.
임 : 그럼 본격적으로 정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948년 5월 10일에 제헌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현재 포항시에 해당하는 당시 영일군 갑구·을구 선거구에서 의원을 선출하게 되지요.
박 : 제헌의원 선거는 처음 하는 선거라 비교적 조용히 치른 편이지. 2대 선거부터는 출마자도 많고 양상도 복잡해져. 육거리를 중심으로 영일군 갑구와 을구로 나누었는데, 갑구는 박순석, 을구는 김익로가 당선되었어.
제헌의원 선거는 정당정치가 틀이 잡히지 못해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정당은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뿐이었고, 사회단체들이 정당과 유사한 성격을 띤 채 치러졌다. 영일군 갑구 당선자 박순석(45·무소속)은 경성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였고, 김익로(44·무소속)는 소학교 졸업 학력의 신문국장이었다. 박순석은 2대 선거에 낙선한 후 3대·4대 민의원 선거에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되고, 김익로는 2대·3대에 잇달아 당선되며 역시 3선 의원이 된다.
박 : 박순석은 지역에서 정치에 진출한 최초의 기독교계 인물이 아닌가 싶어. 김익로가 열정적인 활동가였다면 박순석은 점잖은 편이었지. 국회의원이 된 김익로는 지략이 뛰어났어. 당시에 땔감이 부족하니까 사람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베고는 했지. 그러다가 경찰에 걸리면 파출소로 연행되었어. 김익로가 그 소식을 듣고는 파출소를 찾아다니며 “시골 사람들이 생나무라도 베어야 먹고살지”라며 풀어주라고 했다는 거야. 그 장면을 보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겠어. 국회의원은 저렇게 해야 한다면서 김익로를 칭송했지. 김익로가 국회의원이 되어 가장 잘한 일은 영일중학교를 설립한 거야. 나중에 최상하 선생이 학교를 인수해 더 번듯하게 키웠지. 김익로가 또 잘한 일은 국책사업으로 오어지(吾魚池)를 만든 거야. 오어사와 보경사는 포항을 대표하는 고찰(古刹)이잖아. 못을 막아 오어지가 조성된 덕분에 오어사의 경치가 더욱 수려해지고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 나중에 항사(恒沙) 위쪽으로 못을 막았는데, 그것이 오천(烏川) 주민들의 식수원으로도 쓰였어.
임 : 1950년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제헌의원 임기가 2년으로 정해졌기 때문이지요. 당시 지역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1949년 8월 15일 포항읍이 시로 승격된 것입니다. 기존의 영일군 갑구·을구에 포항시가 더해져 선거구가 3개가 됩니다. 13명이 출마한 포항시 선거구에서는 대한청년단의 김판석(30)이 당선되고, 8명이 출마한 영일군 갑구에서는 최원수(39)가, 역시 8명이 출마한 을구에서는 김익로가 당선됩니다. 이 중에 최원수라는 인물이 눈에 띕니다. 그는 일본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예과 2년을 중퇴했고 영일군수를 지냈으며, 포항신문사 사장을 맡았더군요.
박 : 일제강점기 때 포항에서 머리 좋기로 소문난 두 명이 있는데 최원수와 김장섭이지. 최원수는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제1고보(京城第一高普)를 다녔는데 졸업은 못 했어. 이상(理想)이 높은 큰 지도자 타입이지. 죽장중학교와 기계중학교 그리고 청하중학교의 전신인 해아(海阿)중학교를 모두 최원수가 설립했지. 점잖은 분이었고 하태환과는 먼 친척이었어. 2대 선거에 당선된 후로는 번번이 낙선하고 말아. 이 지역에서는 정치적으로 비주류였기 때문이지.
‘포항시사’에 소개된 최원수의 행적이 범상치 않다.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수석으로 합격되었다고 하니 파격의 대경사로 흥해 고을이 떠들썩하였다. 3년간 수학하다가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학교를 중퇴한 후 고향에 돌아와서 손에 책을 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 부친 최봉래 공(公)이 “내가 한약의생 경영하니 너도 한약방을 경영하여 나의 후계자로 양성하고저 한다”고 타이르니 20세 미만의 소년이 “아버지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데 전념하십시오. 저는 이 나라 이 세상의 병을 고치는 데 전념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그 포부를 알 만하다고 할 것이다. (중략)
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포항시 승격 추진 운동을 전개하여 이일우, 박동주, 박일천 등과 더불어 시 승격 진정차 상경하니 내무부 어느 국장이 농담조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되면 영일군수의 산하에서 이탈 행정구역이 독립되는데 군수가 솔선하여 시 승격 운동을 하러 상경하여 진정하는 예(例)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어찌 최 군수는 앞장서서 진정을 하러 다닙니까” 하고 물으니 최원수 군수가 말하기를 “내가 백 년 동안 영일군수로 있는 것도 아닌데 포항은 내 고장이라 영일군의 발전보다 포항이 시가 되어 번영하는 것이 국가백년지대계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포항시사’, 1987, 879∼880쪽>
임 :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살펴보면 포항시, 영일군 갑·을 3개 선거구에 모두 29명이 출마합니다. 그중 유일한 여성 출마자인 변석화(41)라는 인물이 궁금합니다.
박 : 포항시 선거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는데 포항 최초의 여의사지. 남편이 역시 의사인 김두수라고, 포항시의사회 회장을 여러 번 했어. 변석화는 말솜씨가 탁월했는데 그만큼 명석한 인물이었어. 선거 유세장에서도 뛰어난 언변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고 소문이 자자했지. 그때 당선되었다면 박순천 같은 큰 정치인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다음의 글을 보면 변석화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지역민들이 한결같이 포항의 여성 선구자로 꼽고 있는 변석화는 1908년에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33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세브란스의대 출신 김두수와 결혼, 시댁이 있는 포항에 정착했다.
변석화는 결혼 후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해방과 6·25전쟁으로 혼란한 시기에 이 고장 여성과 청소년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여성이 사회적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시절, 포항 제1의 갑부 집안사람이면서 부부 의사로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건국 후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의료정책연구소, ‘우리나라 근현대 여성사에서 여의사의 활동과 사회적 위상’, 2012, 75∼76쪽>
임 : 광복 이후에 포항 정치계에 걸출한 인물들이 활약했다는 것을 선생님 말씀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3대 총선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당시 정치 지형에 대해 잠시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박 : 1951년 12월 23일에 자유당이 창당되는데 포항에서는 아무래도 자유당 계열이 강했지. 자유당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이 민주당 계열이 되는데, 어떤 면에서 민주당의 발상지는 전라도가 아니라 대구라고 봐야 해. 그때는 대구가 대한민국 최고의 야당 도시였어.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대구, 경북은 공화당의 중심에 서게 되지.
박이득
1942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와 건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포항 MBC, ‘영남일보’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