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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교육재단 교가 작사자는 시인 정지용”

등록일 2021-11-02 18:27 게재일 2021-11-03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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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득6<br/>하태환과 동지교육재단
송도 시절의 포항대학교. /사진 제공 : 포항대학교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하태환(1916∼1991)은 중·고등학교 네 곳과 전문대학을 설립한 교육자다. 정치인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세상에 남긴 유산은 교육 쪽에 무게가 좀 더 실린다. 그의 분신인 동지교육재단과 포항대학 설립에 얽힌 일화를 들어본다.

 

“하태환 선생이 중학생 때 태풍으로 큰 불이 났지. 하급생을 구하려다 다리를 다쳤고

두 발과 지팡이, 세개 꼭짓점이 평면의 삼각형을 만들어 걷는다고 호를 ‘평보’ 로 했어”

“동지중·고, 동지여중·여고, 포항대학을 설립… 학교법인을 ‘동지교육재단’으로 했지.

정지용 시인이 교가 작사를 했는데 그 당시 납북 문인으로 묶여 공개할 수 없었어…

개교 이후 오랫동안 작곡자 언급을 못하다가 납·월북 문인이 해금된 후 공개되었지.

임종석(임) : 선생님은 하태환 선생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박이득(박) : 우리 아버지가 포항 해도(海島) 토박이어서 이름 있는 분들이 집 안에 자주 드나든 덕분에 그들의 행적을 남들보다 많이 알게 되었지. 하태환 선생은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여서 우리 집에 자주 오셨어.

임 : 1930년대에 유학을 갔는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박 : 지금이나 그때나 대개 가정 형편이 좋아야 외국 유학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분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 그런데 10대 후반에 고생스러운 무전여행을 하다가 서울 용산에서 한강 다리를 건너기 위해 한강 둑에 다다랐을 때 보트 놀이를 즐기던 대학생들을 보게 된 거야. 그 모습을 보고는 고학을 해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그게 계기가 되어 두 형이 자리잡고 있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지.

임 : 호(號)가 평보(平步)인데 어떤 뜻입니까?

박 : 1935년 하태환 선생이 교토 료요(兩洋)중학교 4학년일 때 간사이(關西) 지역에 큰 태풍이 닥쳐. 그때 학교 건물이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큰불이 났지.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갔으면 되는데 미처 피하지 못한 하급생을 구하려다 다리를 다치고 말았어. 그래서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가 되었지. 지팡이를 짚고 걸으며 자신의 호를 생각했다고 해. 수학의 기하공리(幾何公理) 중에 세 개의 꼭짓점은 평면을 이룬다는 명제가 있어. 두 발과 지팡이가 세 개의 꼭짓점이 되어 평면의 삼각형을 만들며 걷는다고 자신의 호를 ‘평보’라고 지었다고 해. 비록 다리는 불편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걷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지.

동지 교가.
동지 교가.

임 : 하태환 선생은 동지중·고등학교와 동지여자중·고등학교, 포항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네 곳을 운영하는 학교법인의 명칭도 동지교육재단입니다. 동지(同志)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했나 봅니다.

박 :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모아야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 그래서 학교 이름도 동지라고 한 거야. 나를 볼 때마다 “포항중학교 가면 안 돼. 동지로 와야 해”라고 말했지. 하태환 선생은 일본 교토에 있는 리쓰메이칸대학을 다녔는데, 이 도시에 도시샤(同志社)대학이라고 있어. 시인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1917∼1945)가 이 대학 영문학과에 다녔고, 두 분의 시비가 이 대학 교정에 있어. 하 선생은 도시샤대학을 무척 좋아했나 봐. 그래서 이 대학의 이름을 자신이 세운 학교에 적용한 측면도 있지. 과거 한동안 동지중학교의 교표(校標)가 세 개의 역삼각형이 교차한 모양이었는데 도시샤대학의 교표와 비슷해. 그리고 내가 동지중학교에 입학해서 교가를 배우는데 작사자와 작곡자 이름이 없었어. 당시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서 동지상고 김영 교장을 우연히 만나 얘기를 듣게 되었지. 김 교장이 조심스럽게 교가 작사자가 정지용 시인이라고 말하는 거야. 솔직히 깜짝 놀랐지. 정지용 시인이 ‘납북 문인’으로 묶여 있어서 그의 이름을 꺼내는 게 금기시될 때 이야기거든.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교가 작사자를 밝히지 못하다가 납·월북 문인이 해금된 후에야 공개되었지.

임 : 그렇다면 정지용 시인에게 교가 작사를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되겠군요.

박 :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고향인 포항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싶으니 교가를 지어달라고 정지용에게 부탁했고, 개교 전에 교가를 받아서 갖고 있었던 거지. 두 사람 사이의 공통분모는 일본 교토에서 유학했다는 것이고. 그런데 6·25전쟁이 터진 후 정지용이 납북되고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납북 문인’으로 분류되었어. 그리고는 납·월북 문인 작품이 해금될 때까지 정지용을 언급할 수 없게 된 거야.

동지교육재단의 교가 작곡자는 해방공간에서 이름이 높았던 이건우(1919∼1998)다. 이건우는 김순남(1917~1986), 윤이상(1917~1995)과 함께 활동했으며,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사정으로 동지교육재단 각급 학교는 개교 이후 오랫동안 교가의 작곡자를 공개할 수 없었고, 납·월북 예술인이 해금된 후에야 공개했다.

박 : 개교하기 전에 교가의 작사자와 작곡자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교가를 부탁할 수 있겠지. 더군다나 전쟁이 터지고 남북이 분단된 상황인데. 그런데도 교가를 원곡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은 하태환 선생이 남다른 소신과 뚝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동지교육재단 교가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과 작곡가가 만들었으니 최고의 교가가 아닐까.

임 : 말씀을 듣고 보니 동지교육재단이 평범한 교육기관으로 출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 : 동지를 모아서 학교를 설립했고 동지들이 교편을 잡았지. 그렇게 만든 학교가 자유당 아성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1950년대 동지교육재단의 교직원과 학생 중 적어도 70%는 설립자 하태환의 열렬한 지지자였어. 학부모와 포항 시민도 동지교육재단에 거는 기대가 컸지.

임 : 포항대학은 수산초급대학으로 시작하는데 혹시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려는 시도는 없었는지요.

박 : 애를 많이 썼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뜻대로 안 되었지.

임 : 하태환 선생에 대해 더 하실 이야기는 없습니까?

박 : 리쓰메이칸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는데 문학에도 안목이 높았지. 한흑구 선생을 포항수산초급대학 교수로 모셨고, 포항전문대학을 나온 손춘익이 1966년 조선일보와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니까 동지상고 교사로 채용했어. 사람 보는 눈이 있고, 사람을 챙길 줄 알았지.

평보 하태환. /사진 제공 : 동지교육재단
평보 하태환. /사진 제공 : 동지교육재단

임 : 동지교육재단이 한때 농구부를 운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 : 1951년 남인우라는 영어 교사가 동지중학교에 부임하면서 동지중학교와 동지여중에 농구부를 만들었어. 1950년대 중반에 동지여중이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해 전국을 깜짝 놀라게 했지. 그 핵심 선수가 이귀복, 이춘자야. 둘 다 영흥국민학교를 졸업했고, 나와는 국민학교 동기지. 당시 서울에 농구부가 있는 여자고등학교는 이화여고와 숙명여고 두 곳뿐이었어. 두 사람은 이화여고에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했는데 내가 다니던 인창고등학교와 가까이 있어서 내가 이화여고로 찾아가기도 했지. 두 사람은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맹활약했어. 그때가 우리나라 여자 농구의 전성기였거든. 여자 농구의 전설인 박신자와 함께 세계대회 2위를 차지하기도 했지. 윤보선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청와대 방문도 했고.

임 : 체육 이야기가 나온 김에 거의 잊혔지만 기록에 남겨야 할 체육계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박 : 1950년대 영일중학교가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한 걸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연일읍에 초가집밖에 없던 시절의 이야기지. 영일중학교가 축구 명문인 서울 중동중학교와 결승전에서 맞붙었는데 다들 중동이 이길 거라고 예상했지만 영일중학교가 1 대 0으로 이긴 거야. 축구계가 발칵 뒤집혔어. 대체 영일중학교가 어디에 있는 학교냐고 물어보고 난리가 났지.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에 분위기가 험악해지더니 패싸움이 벌어진 거야. 그때 영일중학교 설립자이자 국회의원인 김익로가 경찰을 동원해 영일중학교 선수들이 경기장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조치했지. 아마 대한민국 건국 후에 읍(邑) 단위 중학교가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기록일 거야. 우승한 선수들을 계속 키워주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어.

박이득.
박이득.

박이득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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