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일 ①<br/>일제강점기 포항 연극의 태동
한국 연극사는 1908년에 시작되고, 포항 연극사는 1914년에 시작된다. 불과 6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포항 연극은 100년을 넘어 올해 107주년을 맞이했다. 예술의 변방에서 한평생 연극의 길을 걸었던 한 사람의 인생을 들어본다. 세찬 겨울바람이 부는 영일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은하수처럼 영원하고 싶었던 김삼일 선생의 이야기다.
포항 하면 포항제철소가 있는 곳으로나 알려졌을까, 문화예술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척박한 땅이다. 굳이 말한다면 가까운 영일만에서 일제강점기부터 고래가 잡힌 덕에 수산업으로 돈의 유통이 다소는 경기를 돋우었는지 아니면 인근 백사장에서 재배되는 부추와 해송(海松)이 특산물이라는 특징이 있었을 뿐, 포항은 저만치 밀려난 변두리 포구에 불과했다. 그런데 전국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되자 심사위원들은 물론 연극계에서도 그 예상치 못한 결과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포항에 무슨 연극이 있었지?” 하는 믿기지 않은 의구심이 더 컸었다.
“한평생 연극의 길 걸어온 김삼일 선생. 1914년 시작된 포항 연극 올해 107주년 맞아
1922년 포항교회서 포항기독청년회가 창립됐고, 이 단체가 민족 계몽에 앞장섰지”
“일제강점기때 청년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마을창고에서 연습하고 공연을 했지.
당시 시대를 고발한 ‘백합이 지던 날’ 등 공연 수익금으로 야학당 운영비도 보탰지”
- 차범석, ‘김삼일론’ 부분
헌 :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김 : 가끔씩 지인과 만나 밥 먹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며 그렇게 소일하고 있지.
헌 : 선생님을 뵙기 위해 포항 연극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봤는데 올해로 포항 연극이 태동한 지 107주년이 되더군요. 포항 연극의 역사가 이렇게 오래되었는지 솔직히 놀랐습니다.
김 : 그럴 수밖에 없겠지. 지역사를 정리한 ‘일월향지(日月鄕誌)’를 보면 1922년 영일 유학생 회장 허방 일행이 여름방학을 맞아 포항시 동빈동 성재수댁 마당에 가설무대를 설치해 놓고 5막극 연극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나와. 바로 이것을 포항에서 공연한 첫 번째 근대 연극 공연으로 보는 것이지. 일본 도쿄에서 신극의 개척자 김우진과 홍해성, 홍난파 등이 연극 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를 발족한 게 1920년인 걸 고려한다면 포항에서 연극이 얼마나 일찍 태동했는지를 알 수 있지.
헌 : 포항의 연극 역사를 살펴보니 포항기독교청년회가 연극 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김 : 1922년 포항교회(현 소망교회)에서 포항기독청년회가 창립되었고, 이 단체가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지. 연극 공연을 비롯해 음악회, 동화 구연, 웅변대회, 좌담회 등을 주도하면서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어. 창주(滄洲, 현 구룡포)청년회에서도 1924년 12월 10일 구룡포 바닷가에서 마련된 극장에서 촌극과 음악회를 했다는 기록이 ‘포항시사’에 남아 있지. 여남청년회도 교육기관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연극 공연을 했다는 신문 기사도 있어.
영일군 형산면 여남청년회는 1925년 3월 8일 오후 7시 지방 발전과 교육기관 설립을 위한 모금 활동의 일환으로 연극 공연을 했는데 많은 성금이 탑재되었다. 얼마나 우리 교육에 목말라했기에 절약 농가가 속출하고 만주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는 동포들이 많은 시기에 기부금을 스스로 내놓았는지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 ‘동아일보’ 1925년 9월 18일자
헌 : 일제강점기 때 청년들이 연극을 통해 민족 계몽에 앞장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 밖에 다른 기록도 남아 있는지요?
김 : 영일군 기계청년회에서도 청년회 운영 자금을 만들기 위해 연극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당시 신문에 남아 있지. 하지만 1930년대부터 일본의 억압으로 민족 사상을 고취하는 연극은 약화되기 시작했고 1940년대에는 거의 말살되다시피 했어. 그러다가 광복 후에 청년들의 연극 운동이 다시 불붙기 시작해.
헌 : 기계청년회 활동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신다면.
김 : 포항·영일 지역에서는 기계 청년들이 선봉 역할을 하면서 연극을 통해 광복의 감격을 만끽했지. 기계면 봉계리 치동마을 청년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라는 희곡을 집필해 1945년 10월부터 4개월 동안 마을 창고에서 연습한 후 1946년 정월 보름부터 치동마을에서 공연을 해.
유승광 전 포항시 북구청장에 따르면 봉계리 치동마을의 연극 공연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1955년 정월 보름 마을 창고에서 막을 올려 대성공을 거두지만 창고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공연하는 것은 풍기문란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당초 2회 공연에서 1회로 줄여 당시 시대상을 고발한 계몽극 공연을 했다.
그리고 1957년 2월 기계면 봉계리 비료 창고에서 장막극 ‘백합이 지던 날’(각본·연출 이기우, 감독 김연대)을 공연했고, 그 수익금은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야학당 운영비에 보탰다.
1962년 추석에는 기계면 현내리 이상완의 창고에서 ‘종아 울어라’라는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은 인기가 많아 기북, 죽장, 신광 등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연극 공연을 했던 기계면 현내리 창고는 현재 음악실로 운영되고 있다.
헌 : 포항 연극사에는 일제강점기 때 아동극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더군요.
김 : 일제강점기 말기에 접어들면 문화예술 말살 정책으로 친일 연극이 판을 쳐. 그때 포항남부국민학교에 연극에 조예가 깊은 교사가 있었는데 신영식이라는 분이야. 이분이 우리글 우리말을 잘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쳤지. 신영식 선생은 희곡 ‘눈 내리는 겨울밤’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연습을 시켰는데, 이때 발탁된 아이가 KBS 대구방송국장을 역임한 최규열, 동지상고 교장을 역임한 김태영 등이지.
헌 : 지역 방송계의 원로인 최규열 선생이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군요. 참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 후로 포항 연극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
김 : 권영호가 있지. 경주 강동 사람인데 1950년대 중반 포항수고에 입학했어. 그리고 포항수고 학생들을 모아 연극부를 만들었지. 연극에 소질이 있고 열정도 있었던 거지. 창단 공연으로 유치진의 ‘별’을 올렸는데 직접 연출도 하고 출연도 했어. 포항수고 연극부를 이끌고 포항을 비롯해 구룡포, 감포, 안강, 영천, 강구, 영덕, 축산, 후포, 평해, 죽변, 울진 등지로 순회공연을 다녔어. 지금은 엄두도 안 나는 일이지. 당시에 이 지역 사람들이 연극 공연을 한 번이라도 본 일이 있겠어. 그러니 ‘별’을 보고 얼마나 좋아했겠어. 권영호는 미술에도 소질이 있었지. 5막의 배경이 되는 거대한 장치를 혼자 힘으로 모두 제작했다는 거야. 동지여중 연극부를 지도해 희곡 ‘피묻은 선죽교’로 포항시 연극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어. 여하튼 권영호는 대단한 인물이야.
헌 : 지금 고등학교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군요.
김 : 권영호의 역할은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야. 포항여고에 연극부가 만들어지는데 그것도 권영호 덕분이지. 권영호의 연극 열정이 포항여고로 옮겨 간 것이니까. 1956년부터 포항여고는 해마다 예술제를 개최했어. 당시 학교 연극부에서는 엉터리 악극단을 공연하는 게 유행이었지. 여성 연극인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고. 포항여고 출신 공설자가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제1기 성우 시험에 합격했는데 포항 연극 최초의 여성 연기자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지.
김삼일
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