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웅 ②<br/>포항 정착과 부산 피난 시절
1945년 11월 38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한 한동웅 선생 가족은 3년여 만인 1948년 가을에 포항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2년이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은 포항 시내까지 밀려온다. 한동웅 선생 가족은 또 짐을 꾸려 부산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김 : 광복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에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한 : 남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일신국민학교로 옮겼어. 아버지 수입이 좋았던 덕분에 가정부를 두었지. 가정부한테는 20대 아들이 있었는데 키가 크고 몸이 좋았어. 가정부 아들이 아침에 리어카를 몰고 일을 나갈 때면 나를 학교까지 태워주었지. 혼자 학교 다닐 때는 심심했는데 리어카 타고 다닐 때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하든지. 공부보다 노는 게 훨씬 더 좋았던 시절이지.
1948년 가을 갑자기 포항으로 오게 되었지. 아버지가 난치병을 앓고 있었는데 신선한 해산물을 먹으면 좋다는 의사의 권유와 곧 전쟁이 터질 수 있다고 예감했기 때문이었지. 처음에는 여천동 큰 기와집에 잠깐 살다가 남빈동 530번지 집을 사서 이사 했어. 아버지는 미국공군 통역관으로 일하다 1954년에 포항수산초급대학 교수로 초빙되었지.
그리고 얼마 후 전쟁이 일어났어.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갔지. 초량동 동광병원의 방 한 칸을 얻어서 살았어. 길거리에서 양담배도 팔았고, 다른 피난민에 비하면 형편이 나왔던 편이지.
김 : 당시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면.
한 : 이, 벼룩이 많아 DDT를 막 뿌렸고 독한 약도 많이 먹었어. 회충을 몸 바깥으로 나오도록 하는 데 좋다는 미역도 자주 먹었고. 그땐 콜레라로 죽은 사람이 많았지. 콜레라로 사망하면 집 앞에 새끼줄을 쳤어. 그 앞을 지나가면 한기가 들 듯 으스스했어.
김 : 그때 교회는 다니셨습니까?
한 : 할머니(박상복 여사)가 돌아가신 후 교회에서 할아버지(한승곤 목사)에게 새 인연을 맺어주었지. 새 할머니를 따라 영락교회에 다녔어. 동생과 둘이서 교회 안을 다람쥐처럼 쏘다니면 할머니가 우리를 찾으러 다녔지.
김 :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인데 선생님 댁은 윤택한 편이었으니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많았겠습니다.
한 : 우리 집이 괜찮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이북에서 많이 찾아왔어. 38선이 허술한 때여서 가능했지. 아버지는 적잖은 돈을 쥐어주며 그래도 고향이 좋다시며 돌려보냈어. 그런데 한종호라는 먼 친척뻘 되는 청년이 한사코 남쪽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아버지는 정 그러면 동생으로 호적을 올리자고 해서 세영(世英)이라는 이름을 짓고 아버지의 친동생이 되었어. 남쪽에서 살아가려면 그렇게 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고 판단한 아버지의 호의가 아닐까 싶어. 나한테 졸지에 삼촌이 생긴 거지.
김 : 포항으로 오신 게 1948년이지요?
한 : 그해 가을 갑자기 포항으로 오게 되었어. 아버지의 결정이었지. 이유는 두 가지야. 하나는 아버지가 당시 난치병인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걸 치료하려면 바닷가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신선한 해산물을 먹으면 좋다는 의사의 권유 때문이지. 또 하나는 곧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어. 《타임》과 《뉴스위크》를 들고 다녔던 아버지는 시국에 밝았거든. 이 두 가지를 충족할 수 있는 곳이 어디겠어? 남쪽의 바닷가잖아. 아버지가 문인들과 경주에 고적지 순례차 왔다가 포항 바다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는 일행과 떨어져 포항에 잠깐 들렀지. 포항 바다를 본 순간 바로 여기다 싶었던 거야. 그 직후 우리 식구는 서울에서 열두 시간 가까이 열차를 타고 포항으로 왔지.
김 : 포항에 와서는 어디서 기거하셨습니까?
한 : 해군 제독이 살던 여천동 ㄴ 자 큰 기와집에 잠깐 살다가 남빈동 530번지 집을 사서 이사했어. 방 세 개가 있는 집이었는데, 달전 사람이 70년 전에 지었다고 했지. 집이 오래되어 용마루가 파도처럼 울퉁불퉁했어.
김 : 어느 국민학교에 다니셨는지요?
한 : 포항국민학교에 다녔어. 여전히 공부는 재미없었지만 미술에는 소질이 있었어. 4학년 때 미술 솜씨가 선생님 눈에 띄어 교실 환경판 그림은 전부 내가 그렸거든.
김 : 포항에 오신 한흑구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한 : 전쟁 때 프로펠러 전투기인 F-51 무스탕(Mustang)과 제트 엔진 전투기인 F-86 세이버(Sabre)가 우리 집 위로 계속 지나갔어. 포항 쪽으로 전선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지. 그런데 아군 쪽에서 오폭(誤爆)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어. 인민군이 고지를 점령해 미군 전투기가 출격하면 그사이에 국군이 고지를 다시 점령하는 경우가 있었지. 그렇게 되면 미군 전투기가 국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오폭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던 거야. 통역이 원활했다면 그런 사고가 없었겠지. 그래서 미군이 아버지를 찾아왔고, 아버지는 K-3 미국 공군 통역관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1954년에 포항수산초급대학 교수로 초빙되었지.
김 : 남빈동 시절에 기억나는 장면은.
한 : 한번은 어머니가 독감에 걸려서 고생을 심하게 하셨어. 이러다가 어머니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하고 식구들이 걱정할 정도였지. 그때 아버지가 미군 부대 폐자재를 갖고 나와서 응접실을 만들었어. 어머니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지. 응접실 선반은 내가 만들었고. 거기에 2천여 권의 책을 진열했어.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갖고 나온 포켓북을 소중하게 여겼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등이 쓴 소설책이 생각나는군. 그 영어책 덕분에 나도 영어와 가까워졌어. 그 후 별채도 만들었어. 별채는 등유로 난방했는데 한번은 아찔한 일이 있었지. 어느 겨울날, 아침 일찍 깨보니 별채가 벌겋게 달아 있는 거야. 깜짝 놀라서 별채로 급하게 뛰어가니 문이 잠겨 있지 뭔가. 큰일 났다 싶어 문을 따고 들어가니 아버지가 이상한 거야. 산소 부족 상태였던 거지. 조금만 늦었으면 큰 화를 당할 뻔했어.
김 :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겪게 됩니다.
한 : 포항에 온 실향민들이 죽도시장에 많았어. 평양냉면집은 딱 한 군데 있었지. 8월 10일 아버지가 그 냉면집에서 술을 드시다가 인민군이 달전까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거야. 이튿날 새벽에 아버지가 피난 가야 한다며 짐을 꾸리라고 하시더군. 어머니가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하니까 아버지는 몸만 살면 먹을 것은 생긴다면서 최소한의 짐만 꾸리라고 하셨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은수저 스무 벌을 담요 안에 넣던 기억이 나.
김 : 피난은 어느 쪽으로 가셨습니까?
한 : 죽도시장에 살던 친한 실향민과 우리 식구까지 합쳐서 모두 73명이 해도를 거쳐 형산강에 도착했어. 강둑을 따라 연일 쪽으로 가는 피난민들의 기나긴 행렬이 보이더군. 형산강 입구는 미군 헌병이 지키고 있었지. 아버지가 헌병과 대화를 나눈 후에 헌병이 형산강을 건너도록 허락하더군. 우리 일행은 오천을 지나 감포 쪽으로 방향을 잡았어. 오천에 K3 비행장이 있으니까 비행장 안전 때문에 그쪽 길은 피난민들이 지나갈 수 없도록 통제했던 것 같아.
김 : 울산 방향으로 가셨군요?
한 : 그렇지. 울산에 도착하니까 일행의 의견이 갈렸어. 울산이면 안전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온 거지. 결국 우리 식구 다섯 명만 부산으로 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울산에 남기로 했어. 울산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니 부산 동래가 보이더군. 포항에서 출발한 지 일주일 만이었어. 온천 근처 다리 밑에 자리를 잡았지.
김 : 부산 분위기는 어떻던가요?
한 :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온 산이 하얗더군. 피난민들이 밤에 덮었던 이불을 말리느라 관목 위에 올려놓은 거야. 그 풍경이 장관이었어.
김 : 다리 밑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었을 텐데요.
한 : 아침에 일어나니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어서 짐을 꾸려서 다리 위로 올라오라고 하는 거야. 다리 위에는 미군 두 명과 쓰리쿼터가 있었어. 그걸 탔는데, 초량동에 있는 동광병원 앞에 도착하더군. 우리 가족은 그 병원의 방 한 칸을 얻어서 지내게 되었지.
김 : 다른 피난민에 비하면 형편이 나았던 편이군요.
한 : 그런 셈이지. 그 방에 큰 책상이 있었는데, 서랍을 열면 아버지가 급여로 받은 빳빳한 신권(新券)이 꽉 차 있었어. 그중 한두 장을 빼서 시내에 나가면 놀기 좋았지. 전차를 타고 여기저기 구경 다니고 영도다리도 건너보고. 도떼기시장(현 국제시장)에 갔던 기억도 나. 그런데 아버지는 자식들도 자립해야 한다는 생활철학이 있었어. 그래서 나더러 동생과 둘이서 장사를 한번 해보라고 하는 거야. 카멜(Camel), 럭키 스트라이커(Lucky Strike), 체스트필드(Chesterfield) 같은 양담배를 구해주더니 길거리에 나가서 팔아보라고 했지. 그걸 들고 길거리에 나갔는데 한 아저씨가 한꺼번에 다 살 테니 따라오라고 하더군. 웬 떡인가 싶어 한 건물 앞까지 따라갔지. 그런데 그 아저씨가 보따리에 담배를 모두 담고는 돈을 가지고 곧 온다며 건물 안으로 사라졌어. 그러고는 안 나타났어. 보기 좋게 사기를 당한 거지.
김 : 포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습니까?
한 : 11월 어느 날 아버지가 포항 집으로 가자고 하셨지. 남빈동 집이 무사하다면서.
김 : 전쟁 때 포항 도심이 초토화되었는데 선생님 댁은 용케 남아 있었군요. 만약 댁이 무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 포항에 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김 : 포항 집으로 가게 된다니 기분이 어떻던가요?
한 : 서울에서 본 전차를 부산에서 다시 보게 되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그런데 포항에 가면 전차를 볼 수 없잖아.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섭섭하더군. 그래서 전차표 한 묶음을 사서 동생 동명이와 둘이서 온종일 전차를 타고 다녔어. 대신동에서 서면, 서면에서 동래온천까지 계속 다녔지.
김 : 포항에 도착하셨을 때 풍경이 기억나시는지요?
한 : 트럭을 타고 늦은 오후에 포항 효자에 들어섰어. 거기서 시내를 바라보니 폭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거야. 제일교회(현 소망교회) 건물만 솟아 있고 멀리 송도 솔숲이 보이더군.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제공 : 한동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