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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무를 닮는다”

등록일 2022-08-17 18:39 게재일 2022-08-1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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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우 ⑥<br/>노거수회 활동과 남은 과제
이삼우
이삼우

꽃샘추위라 했던가. 초여름인 듯 올라갔던 기온이 떨어졌다. 벚꽃은 졌고 이팝나무 꽃이 피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철쭉 꽃망울이 조금씩 색을 입어가던 날 오후에 찻집 ‘꽃멀미’에서 이삼우 원장을 다시 만났다. 마지막 인터뷰였다. 계절 탓인지 혹은 서로에게 익숙해진 탓인지 밝은 목소리로 맞아주셨다.

내가 노거수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은 40년 전이었어. 신광면 비학산과 동리 집들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거목 한 그루가 눈에 확 들어왔지. 순간 감탄사가 나왔어. 두아름 반쯤 되는 300여 년 묵은 상수리나무였어. 저런 귀한 생명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위기의식에 노거수를 찾아 나섰지. 그후 1991년 봄에 노거수회를 창립했고, 첫번째 모감주나무 군락지를 포항 첫번째 천연기념물로 등재하는 등 향토순례 행사를 활발히 했지.

포항의 시목·시화를 해국과 모감주나무로 바꾸는 운동이 결실을 맺지 못했고, 죽장면 산남의진 장병 추모 위령비 건립도 좌절, 블루밸리 산업단지로 황보씨 집성촌 등 향토 역사가 사라지는 걸 막지 못해 아쉬움이 남아 .

김 : 노거수회는 원장님께서 기청산식물원만큼 정성을 기울인 모임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 그 이야기에 들어가려면 먼저 들어야 할 것이 있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패전국이 된 독일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 50페니히(Pfennig) 주화에 참나무 심는 여인상을 넣었지. 독일의 국목(國木)이 루브라참나무거든. 그리고 법으로 정했지. 참나무는 230세 되어야 벌채할 수 있다고. 나무는 100세부터 노거수 축에 드는데, 100세부터 229세까지 자란 참나무 노거수가 국토 곳곳에 많아지게 한 거지. 벌기령(伐期齡)이 왜 하필이면 230세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걸작인 것이 게르만 민족이 우수한 민족이 되도록 하는 방편이라고 하더군. 국민들이 참나무 노거수를 무시로 접하면서 이 나무를 닮아 참되고 의연해지기 때문이라는 거야. 나무는 사람을 닮지 않지만 사람은 나무를 닮게 돼 있거든. 결국 서독은 종전 후 불과 10여 년 만에 유럽 일등급 국가가 되었지.

김 : 230세라. 우리나라에서 그만한 노거수는 손에 꼽을 정도일 텐데요.

이 : 그렇지. 내가 노거수를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은 40년 전이었어. 추수를 앞둔 가을 어느 날, 신광면 토성마을 앞 들판 길을 차를 몰고 지나가고 있었지. 비학산과 동리 집들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거목 한 그루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라. 순간 감탄사가 나왔어. 저 나무 한 그루 덕분에 마을 풍광이 사는구나. 두 아름 반쯤 되는 300여 년 묵은 상수리나무였어.

김 : 그렇게 노거수회가 시작된 것입니까?

이 : 저런 귀한 생명 문화재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큰일 나겠구나, 하는 위기의식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틈날 때마다 노거수를 찾아 나섰지. 1987년에 『영일군사』 편집위원장을 맡게 되었는데, 집필위원들이 쓴 원고를 세심하게 검토하려면 현장을 일일이 확인하러 다녀야 했어. 각 마을의 역사를 직접 집필해야 하니 주말마다 자연부락이며 전설이 있을 법한 산천을 조사하게 되었지. 마을 연혁을 조사하다 보니 어느 마을이든 당산목이나 마을 숲이 있는 거라. 당산목은 민초들의 토속신앙 흔적이 구구절절 쌓였거나 정자목이 되어 여름철 노인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런 거목이나 마을 숲이 없었다고 상상해봐.

김 : 차를 타고 가다 당산목이 서 있는 마을을 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저 마을은 유래가 깊겠구나, 저 나무 밑에서 마을의 이야기가 비롯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 그게 노거수의 역할이지. 그런데 노거수를 조사하다 보니 온전한 노거수가 점점 사라지는 거야. 노거수에 대한 식견과 애정이 부족한 시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심지어 관에서 노거수를 보호한다고 조치한 일이 오히려 해롭게 하는 경우가 빈번했어. 그냥 방치할 일이 아니라 어떻게든 나서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1990년 『영일군사』 편찬을 끝낸 후 본격적으로 노거수 연구를 해보니 이 사업이 혼자서 감당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래서 1991년 이른 봄에 뜻있는 사람들과 노거수회를 창립했지. 노거수 보호 운동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거야.

포항 신광면 마북리 느티나무 막걸리 주기 행사.
포항 신광면 마북리 느티나무 막걸리 주기 행사.

김 : 30여 년 전이군요. 그동안 많은 일을 해내셨을 것 같습니다.

이 : 첫 번째는 모감주나무 군락지를 찾아내 포항의 첫 번째 천연기념물로 등재한 일이지. 이 군락지는 하늘이 내려준 귀한 선물이야. 처음 눈에 띈 것은 장기면 모포리 소재 뇌성산 기슭이었고, 그 후 영일만 일대를 조사해보니 동해면 흥환, 발산, 대동배리에 꽤 큰 군락지가 있더군. 포항 시내에서도 찾아냈는데, 양학동, 환여동은 물론, 제산, 장기면에도 자생하고 있더라고. 전체적인 규모가 세계적으로 커. 100만 년 전에는 이 일원이 거대한 호수였다는 귀중한 지질학적 의미가 있기도 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발산리 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받게 되었어. 그다음으로는 마북 느티나무를 구해낸 일이야. 노거수회 회원 50여 명이 보호수 도목(道木) 1호인 신광면 마북리 600년생 느티나무를 찾아갔어. 향토순례 행사였지. 비료 주기와 잡목 제거 등 무육(撫育) 작업을 하고 있는데, 신광면 상록회 회장과 마을 주민들이 막걸리와 음료수를 들고 찾아왔어. 그리고 이야기를 해주는데 이 나무가 곧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는 거야. 우리가 언론기관에 제보하고 협조를 요청해서 이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결국 이식하게 되었지. 그 밖에도 경상북도 수목원이 자리하고 있는 매봉 북쪽 북골 거대한 참나무 숲이 개벌될 것을 무산시켜서 보경계곡 12폭포 계곡이 폭우 때 황폐화되는 것을 막은 일, 보경계곡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는 등 난개발 계획을 막은 일, 죽장면 하옥 계곡 향로봉 서편 자락을 뒤덮은 국내 최대 규모의 참나무 천연림이 산림청의 무육 사업으로 훼손당할 뻔한 것을 막은 일, 해당화 군락지를 무육한 일 등 많은 일을 했지.

김 : 많은 일을 하시는 동안 아쉬운 일도 있었지 싶은데요.

이 : 포항 송라면에 화진해수욕장이 있지. 그곳에서 임진왜란 때 벌어진 이야기야. 일본의 수송선 한 척이 화진 인근에 정박하고 노략질을 일삼았어. 송라 아래쪽 청하 월포리에는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있었고, 덕천리에는 찰방(察訪)이 있었거든. 그 시절 청하현은 꽤 잘나가는 곳이었어. 월포리와 덕천리의 군사와 의병이 야밤에 화진에 있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했고, 장시간 백병전 끝에 양쪽이 거의 몰살했어. 그리고는 경황이 없어 백사장 한구석에 시신들을 대충 묻었지. 그곳을 ‘썩은숭이네고랑’이라 한다는 얘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이 달밤에 ‘썩은숭이네고랑’을 찾아가 제단을 차리고 통곡하며 제를 지냈다는 거야.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민족적 자존심이 팍 상했지. 그래서 노거수회에서 2004년부터 17년간 해마다 위령제를 지냈어. 이 전투의 기록을 찾아내지 못하고 위령비를 세워주지 못한 게 안타까워. 죽장면 입암에 산남의진(山南義陣) 장병들을 추모하는 위령비 건립을 시도했는데 그것도 좌절됐어. 포항의 시목(市木), 시화(市花)를 해국과 모감주나무로 바꾸는 운동이 결실을 맺지 못한 것도 아쉬워. 포항의 시화와 시목이 무엇인지 아는가?

김 : 시화는 장미, 시목은 해송 아닌가요?

이 : 맞아. 20여 년 전 30여 명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에서 정했지. 1차 회의에서는 해송과 해바라기가 선정되었어. 내가 제안한 모감주나무와 해국은 2등으로 밀렸지. 해바라기가 당시 소련의 국화인 데다 해를 따라 얼굴을 돌리는 행태가 아부성이다, 하는 여론이 있어서 1년 후 재심의를 했어. 그 결과가 해송과 장미야. 내 제안은 또다시 2등이 되었지. 그런데 그게 납득이 안 돼. 일단 해송은 잘못된 표기야. 곰솔이 맞지. 그리고 장미는 전국 20여 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상징화로 삼고 있어. 그만큼 희소가치가 없다는 말이지. 그것 말고도 아쉬운 게 여럿 있어. 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노거수와 황보 씨 집성촌 등 소중한 향토 역사가 사라지는 것을 막지 못했어. 겸재 정선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청하를 진경산수화의 메카로 조성하고 청하읍성을 복원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되더군. 그래도 많은 일을 해냈으니 위안을 삼아야겠지.

김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 다른 것은 기억하지 않아도 좋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시게. 노거수를 해코지한 사람은 필히 사고를 당했다는 것, 마을 숲을 훼손한 사람들은 거의 다 오래가지 않아 힘들어졌다는 사실을.

마지막 인터뷰가 끝나고 이삼우 원장이 식물원 입구까지 배웅해주셨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 식물원 안으로 들어가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며 한 그루 나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 나무와 식물과 땅과 함께하여 그들의 향이, 본성이 몸에 밴 그는 한 그루 노거수였다.

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사진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제공:이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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