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 ⑥ 포항미술협회의 출범과 현재
포항은 도시 규모에 비해 미술협회 출범이 늦은 편이다. 협회를 구성하기 위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987년 20여 명의 인원으로 한국미술협회 포항 지부가 설립되었고, 현재는 25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며 지역 미술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척박한 땅에서 미술의 싹을 틔우고 경북 최대의 미술 단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들어본다.
포항일요화가회는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 동호회일 거야. 지역에서 미술인이 드물던 1970년대에 활동했지.
1987년 포항미술협회가 출범하고 조희수 선생이 초대 지부장을 맡았어. 서양화, 한국화, 서예, 도자기, 디자인 5개 분과가 있었고, 각 분과에 5명 정도 되었을 거야.
1995년부터 2년간 포항미협 지부장을 맡았고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미술협회 지부장과 인연이 되어 연변에서 전시를 했어.
포항 작가들의 작품을 해외에 소개한 첫 사례였지.
그리고 일본의 자매도시 후쿠야마 시립미술관 초대전도 기억에 남아.
히로시마의 시모카마가리 란토가쿠 미술관의 순회 전시도 갔고. 해외 어딜 내놔도 될 만큼 협회 규모가 커졌으니 뿌듯한 일이지.
지금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크지. 회원만 200명이 넘으니까. 이제는 어딜 가도 당당해.
배 : 포항미술협회가 출범하기 전에 활동하던 미술 단체가 있었습니까?
김 : 포항일요화가회는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 동호회일 거야. 지역에서 미술인이 드물던 1970년대에 활동했지. 내가 포항에 오기 전부터 활동하고 있더라고. 나더러 그림 지도를 해달라기에 흔쾌히 함께했어. 회원들이 꽤 많았는데 포항사진협회를 만든 박원식 사진가도 회원으로 활동했어. 유채화를 주로 그렸던 기억이 나.
배 : 포항일요화가회는 어떤 활동을 했나요?
김 : 일주일에 한 번씩 야외 스케치를 나갔는데 인근에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많이 다녔어. 일요화가회전은 전시가 귀했던 시절에 시민들에게 그림을 접할 기회를 제공했지. 박수철 선생처럼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화가도 있었고. 포항에서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활동한 최초의 미술 단체로 보면 돼.
포항일요화가회는 포항 최초의 미술 동호인 단체다. 1970년대 중반부터 활동하다가 1979년 창립식을 가졌다. 김두호가 지도교사로 활동했으며 박수철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미술인뿐 아니라 포항제철 직원, 관공서 기관장 등 다양한 분야의 회원들이 참여해 미술 문화의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배 : 포항미술협회가 조직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김 : 협회를 조직하려면 5개 분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만한 인원이 없었지. 서양화, 한국화, 서예 분과의 몇몇이 다였어.
배 : 미술협회의 필요성이 대두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김 : 당시 경북의 지방자치단체마다 미술협회가 하나씩 생겨나는데 가장 큰 도시인 포항에만 없는 거야. 포항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미술협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
배 : 당시 경주 미술계는 어떤 분위기였나요?
김 : 경주에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온 원로 작가들이 있어서 포항보다 훨씬 앞섰어. 포항은 그림 분야가 빈약했기 때문에 경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지.
배 : 1987년 포항미술협회가 출범했습니다.
김 : 조희수 선생이 초대 지부장을 맡았어. 지금 아흔이 넘었을 거야. 경주에 계시는데 그림에만 전념하다 보니 생활이 어려웠어. 1980년대 초반에 선생님 자녀가 포항 환여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는 바람에 조희수 선생도 포항에 정착했지. 그때 우리와 교류가 많았어.
배 : 포항미협 창립 당시 인원은 몇 명입니까?
김 : 서양화, 한국화, 서예, 도자기, 디자인 5개 분과가 있었고, 각 분과에 5명 정도 되었을 거야. 그렇게 인원을 확보했고 그 후로 차츰 인원이 늘어나서 여기까지 온 거지.
배 : 선생님은 1995년부터 2년간 포항미협 지부장을 맡으셨더군요?
김 : 포항미협의 기틀이 잡혀 있을 때였지.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회원들이 잘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어. 부지부장이던 배현철 선생이 많이 도와주었지.
배 : 배현철 선생과는 대동중·고등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으셨죠?
김 :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의 최영조 교수가 서라벌예대 선배인데 학교에 자리가 없냐고 연락이 왔어. 포항에 가고 싶어 하는 제자가 있다고. 당시 내가 맡은 미술 수업이 너무 많아서 학교에 미술 교사를 더 뽑자고 얘기했지. 다행히 학교에서 내 뜻을 수용해주더군. 그렇게 오게 된 사람이 배현철 선생이야. 배 선생은 작가로서 참 괜찮은 사람이야. 지금도 시골 화실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지.
배 : 지부장을 역임하던 무렵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나요?
김 :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 미술협회 지부장과 인연이 되어 연변에서 전시를 했어. 포항 작가들의 작품을 해외에 소개한 첫 사례였지. 그리고 일본의 자매도시 후쿠야마(福山) 시립미술관 초대전도 기억에 남아. 히로시마(広島)의 시모카마가리(下蒲刈) 란토가쿠(籣島閣) 미술관의 순회 전시도 갔고. 해외 어딜 내놔도 될 만큼 협회 규모가 커졌으니 뿌듯한 일이지.
배 : 선생님의 귀한 자료가 거의 없어 안타깝습니다.
김 : 모아둔 팸플릿이며 그림이며 사진 자료는 1998년 태풍 애니 때 모두 잃어버렸어. 당시 기상관측 이래 최대의 폭우라고 했는데, 어마어마했지. 대잠못 둑이 무너져 도로가 침수되고 단전에 단수는 물론 전화도 안 되었어. 대동중학교 부임하면서부터 20여 년 사용한 화실이 상가 1층이었는데 완전히 물바다가 되어버렸지. 작업실 바닥에 깔아놓은 그림이며 팸플릿은 흙탕물 범벅이 되어 모두 내버려야 했어. 그나마 유화 작품 몇 점은 말려서 닦으니까 좀 괜찮더라고.
배 : 포항미술협회에서 현재 지역 미술사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지역 미술의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포항 미술이 이제는 많이 성장했지요?
김 : 지금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크지. 회원만 200명이 넘으니까. 이제는 어딜 가도 당당해.
배 : 후배 작가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 :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지. 하지만 어떻게 그려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고 그린 그림이 올바른 그림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림은 손끝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려야 해.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이 즐거움과 희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작가들의 몫이겠지.
<끝>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