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br/>김두호 ⑤ <br/>김두호의 미술 세계
김두호 선생과의 인터뷰에 제자들이 동석했다.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추억담이 이어지면 김두호 선생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씩 덧붙이곤 했다. 그는 배려하는 데 익숙했고 낮은 목소리에는 사족이 없었다. 선생의 그런 태도는 작품과 다르지 않다. 그가 흔들림 없이 추구해온 미술 세계는 자연이다. 그가 좋아하는 물과 돌과 산을 그린 화폭에는 푸른 정적이 흐른다. 파도가 치는 바다도 그렇고, 바람 부는 겨울 들판에도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정적이 감돈다. 이 점은 그의 그림에 기교가 없는 듯이 보이게 한다.
내 그림의 소재는 풍경이야. 나는 자연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그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위와 물이지. 태어난 곳이 포항 바닷가여서 그런지 물을 대할 때면 마음이 편안해져. 개울이나 계곡도 많이 그렸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어.
나는 후배들에게 무언가 독보적인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소재를 그려야 한다고 말해. 시대의 조류에 마냥 따라가지 말고, 시류를 반영하더라도 결코 얽매이지 말라고 하지.
배 : 첫 번째 개인전은 언제 어디서 했는지요?
김 : 용다방이라고, 중앙상가 우체국 앞 건물 2층에 있었어. 그때는 갤러리가 없어서 다방이나 시공간 부설 전시관,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전시했지. 1978년 2회 개인전은 최동하외과 지하의 수갤러리에서 했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포항에서 전시시설을 갖춘 첫 번째 갤러리야.
배 : 포항의 최초 전시 공간은 1952년 문을 연 청포도다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1970년대까지 다방이 전시장 역할을 했는데, 다방에서 전시가 자주 열린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 : 다방 업주 입장에서는 손님이 몰려 돈이 되었고, 예술 공간이라는 인식이 생기니까 품격도 있어 보였을 거야. 화가로서는 임대료 없이 관람객을 만날 수 있으니까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지. 내가 첫 전시를 했던 용다방 주인은 여성이었는데 그림을 아주 좋아했어.
배 : 선생님께서 거쳐간 개인전 공간은 포항 전시 공간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더군요. 1974년 용다방에서 시작해 1978년 수갤러리, 1985년 육거리 천마화랑, 1993년 아솜터갤러리, 2000년 포항대백갤러리 그리고 2010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하셨습니다.
김 : 1970년대는 주로 다방에서 전시했고, 1980년대 넘어오면서 작은 갤러리들이 생기긴 했는데 지속적으로 운영되지는 못했어. 대백갤러리가 1991년 개관되어 전시가 많이 열렸고, 1995년 개관한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장두건 선생의 전시가 처음 열렸어.
배 : 장두건 선생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나요?
김 : 장두건 선생이 포항에서 개인전을 한 1986년쯤 처음 알게 되었지. 한국화 붐이 한창 일어날 때였어. 장 선생이 은퇴하고 고향인 흥해읍 초곡리에 오면서 지역 작가들과 교류가 많아졌어. 그만한 경력을 가진 대가가 포항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워. 후배들도 존경하며 많이 따랐고.
배 : 1970∼80년대 포항에서는 주로 어떤 분들이 전시를 했나요?
김 : 판매를 위한 수묵화 전시가 많았어. 서양화 전시는 대부분 미술 교사가 했지. 친구 이방웅은 동지중학교와 유성여고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풍경화 등 구상화를 주로 전시했어. 포항고등학교에 있던 김건규 선생은 나중에 대구로 갔는데 포항에서도 개인전을 했지. 미술 교사들이 미목회(美睦會)를 만들어 전시도 했어. 나도 참여했고.
배 : 선생님의 그림을 보면 자연을 일관되게 추구해왔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김 : 그렇지. 내 그림의 소재는 풍경이야. 나는 자연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그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위와 물이지. 태어난 곳이 포항 바닷가여서 그런지 물을 대할 때면 마음이 편안해져. 개울이나 계곡도 많이 그렸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어.
배 :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무엇인가요?
김 : 송도 솔숲에서 그림을 많이 그렸어. 송도는 소나무 숲이 좋고 동빈내항 쪽으로 보면 갈대가 많았어. 가을이면 갈대숲이 멋들어지게 펼쳐졌지. 갈대 주변이 그림 소재로 너무 좋은 거야. 조선소 역시 그림 소재로 최고였어. 교직에 있으면서 주로 그린 풍경이 조선소야. 배를 들어올리는 모습이나 파손된 배가 소재로 좋아서 여러 점을 그렸지. 그때 그려놓은 조선소 풍경이 몇 점 남아 있어.
배 : 조선소가 그리기 좋았던 이유는요?
김 : 조선소 주변 분위기가 좋았어. 지금처럼 정비된 조선소가 아니고 허름했지.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레일을 놓고 배를 만들고 수리했지. 정돈된 것보다 허름한 조선소 분위가 좋더라고.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겠지만 당시 내가 봤을 때는 그만한 풍경이 없었어. 어딜 다녀 봐도 송도 조선소 분위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사라져서 아쉬워. 정비된 조선소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는 어려운 것 같아.
배 : 바다와 솔숲이 어우러진 송도야말로 선생님께서 선호하는 소재가 한곳에 모인 곳이군요. 요즘도 송도 숲에 나가보시나요?
김 : 지금도 한 번씩 가봐.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옛 풍경이 기억에 남아 있어 감회가 새롭지.
배 :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은 못 본 것 같습니다.
김 : 인물화는 대학 시절, 모델을 그린 것 말고는 거의 안 그렸어. 마음에 안 들더라고. 인물화를 그리려면 꾸며야 하는데 나는 그런 작업은 별로야. 억지로 만드는 느낌은 내 그림 속에 별로 없어.
김 : 자연을 그릴 때는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군요?
배 : 물과 바위는 변함이 없으면서 깊은 느낌이 있지.
다음의 글은 김두호의 미술 세계를 잘 설명해준다.
김두호의 그림에는 잘 보이게 하려는 과장이나 기교가 없다. 그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그림은 자연을 담담하게 담아내려 한다. 온갖 기교와 눈속임 방법을 동원하여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 없이 순수하게 그렸다는 말이다. 따지면 자연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허위와 허식이 없다. 계절과 시기에 따라 정해진 순서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참 순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 임창섭, 「自然은 자연이고, 그의 그림은 그림이었다」, 『아름다운 여정-포항 원로 작가 김두호전』, 포항시립미술관, 2010, 10쪽.
배 : 그림도 삶도 과욕하지 않고 순리에 따르는 자연을 닮아가는 것일까요? 공모전을 일부러 멀리하셨다고요?
김 : 대학 시절 목우회(1958년 설립된 한국 구상미술 작가들의 미술 단체)에 작품을 출품한 적이 있어. 심사를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들 중 목우회 회원들이 했는데 계산 빠른 친구들은 교수들을 찾아다니는 거야. 그런 친구들은 큰 상을 타고, 나처럼 그림만 그리는 사람은 운이 좋아야 입선이야. 그걸 몇 차례 겪고 나니 그림 세계가 이래서는 안 된다 싶더라고. 그 후로 공모전 출품은 안 했어. 상을 타려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상을 위해 그리는 그림이 과연 순수한 것인지를 한동안 고민하다가 나름의 결론을 내린 거야.
배 : 그림을 그리는 자체로 충분하다는 말씀이군요.
김 : 경력을 쌓기 위한 개인전도 마찬가지야. 요즘은 개인전을 하려면 돈도 많이 들어. 물론 열심히 하는 건 좋아. 그렇지만 수상과 경력 쌓기가 목적인 전시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 작업 자체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야기야.
배 : 자연이라는 소재는 변함없더라도 소재를 대하는 태도나 화풍에는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물론 그림마다 같을 수는 없어. 형태나 색깔을 바꾸게 되지. 왜 파란색을 많이 쓰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더군. 나는 파란색을 좋아해. 색상과 소재를 선택하는 기준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지. 나는 후배들에게 무언가 독보적인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소재를 그려야 한다고 말해. 시대의 조류에 마냥 따라가지 말고, 시류를 반영하더라도 결코 얽매이지 말라고 하지.
배 : 선생님은 자연주의적 화풍을 지키면서 색다른 경향을 보여주셨지요. 1970년대 후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앙데팡당(Ind<00E9>pendants)전 출품작은 선도적인 현대 회화 경향으로 평가받았고, 1980년대 중반 대구중앙미술관 초대전의 말린 생선 그림은 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김 : 앙데팡당전에는 실험적인 작품이 주로 전시되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빨래집게를 그려 시간의 연속성을 표현한 작품인데 아쉽게도 사진이나 팸플릿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대구중앙미술관 초대전에 출품한 말린 생선 그림은 반응이 좋았던 걸로 기억해. 그 작품은 소장하고 있어.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