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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선봉에 서다

등록일 2022-08-29 18:37 게재일 2022-08-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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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웅 ③ 대학 입학과 4·19혁명
고려대 졸업식에서 한동웅.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한 한동웅 선생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3학년 때 4·19혁명이 터지고 청년 한동웅은 대열의 선두에 선다. 그리고 고려대 모의국회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1951년 전쟁 중에 나는 포항중학교에 합격했지만, 동지중학교 하태환 설립자와 아버지의 친분으로 동지중학교에 입학하게 됐지.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에 포항고등학교에 진학·졸업 후 서울대 인문계에서 가장 높은 영문학과를 지원했는데 불합격했지. 근소한 차로 불합격됐다고 그러더군. 그래서 재수를 해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했고, 대학교 3학년때 4·19 혁명을 겪었지. 대열의 선두에서 집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테러를 당한거야. 깡패가 휘두른 갈고리에 턱을 맞아 심한 부상을 입었지. 그때의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어….

김 : 1951년 전쟁 중에 중학교에 입학하셨더군요.

한 :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고 공립을 선호하는 분위기였지. 나는 포항중학교에 지원해 합격했어. 국민학교 때 공부를 별로 안 해서 중학교 입학 성적은 신통치 않았어. 그런데 실제로는 동지중학교에 입학하게 돼. 동지교육재단 하태환 설립자가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거든. 하태환 씨가 아버지에게 나를 동지중학교에 보내달라고 부탁한 거야. 그러면 3년간 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했고. 결국 아버지가 하태환 씨의 청을 못 이겨 동지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지.

김 : 중학교 시절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한 :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했지.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서상원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쳤어. 서상원 선생님은 서상은 전 영일군수의 형이지. 국어 교과서에 아버지의 수필 ‘나무’가 실렸는데, 수업시간에 서상원 선생님이 이 수필의 필자가 누군지 아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었어. 아이들은 묵묵부답이었고, 선생님은 너희들의 친구 한동웅의 아버지라고 말했지. 그 순간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어땠겠어.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전교생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언행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지.

 

김 :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인 1954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한 : 고등학교는 포항고등학교로 가려고 했어. 대학을 가려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야 하니까 당연한 판단이었지.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고. 그런데 동지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인 장부두 선생님이 한사코 안 된다고 하는 거야. 동지중학교와 한 지붕 아래 있는 동지상고로 가라는 거지. 상고로 진학하면 대학 진학에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나는 포항고등학교로 가야 한다고 버티면서도 참 난감하더군. 결국 원서 접수 마지막 날 오후가 되어서야 장부두 선생님이 원서를 작성해서는 교무실 바닥에 탁 던져버리는 거야. 그걸 집어 들고 두호동에 있는 포항고등학교에 서둘러 가서 가까스로 제출했지. 포항고등학교에 가니까 심기철 교장선생님(제2대)이 반갑게 맞아주시더군. 장부두 선생님은 훗날 유성여고를 설립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지.

 

김 : 당시 고등학교의 교육 여건은 어땠습니까?

한 : 교사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정상적인 교육이 안 되었어. 체육 교사가 국어를 가르치기도 했지. 그 체육 교사는 국어 시간에 말문이 막히면 “그 어떠냐 하면…”이라고 운을 떼고는 시간을 끌곤 했어. 두호동 210번지에 있던 포항고등학교는 비가 오면 교사(校舍)와 운동장이 물에 잠겨 등교가 불가능한 경우가 더러 있었지. 1학년 2학기가 시작되던 9월에 대신동 74번지 신축 교사로 이전했어. 그때 전교생이 책걸상을 들고 그 먼 길을 걸어가는 진풍경이 펼쳐졌지.

 

김 : 고등학교 시절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신다면.

한 : 3·1절과 광복절 때 시가행진을 하는데 어느 고등학교가 선두에 서느냐를 두고 포항고와 동지상고의 신경전이 대단했어. 내가 1학년 때 양교의 규율부장이 맨주먹으로 겨뤄서 승자의 학교가 선두에 서는 걸로 했지. 대결 장소는 포항의료원 앞이었어. 세상에 그런 구경거리가 어디 있겠나. 포항의료원 주변은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지. 그런데 두 사람이 붙자마자 원투 펀치에 포항고 규율부장이 나자빠진 거야. 동지상고 규율부장이 권투를 했거든. 얼마나 맥이 빠지던지 어깨가 축 처져 학교로 돌아가던 게 기억나.

 

김 : 포항고등학교 동기는 누가 있습니까?

한 : 당시 포항고는 한 학년에 동(東)반, 서(西)반 두 개 반이 있었고, 졸업동기는 157명이었어. 허화평, 재생(再生) 이명석 선생의 차남 이태우, 로얄와이셔츠 대표 박엽래, 1군 사령관 허정, 비왕산업 대표 임용우가 동기야. 성적은 허화평이 1등이었고, 나도 곧잘 하는 편이었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허화평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은 이태우의 친형 이진우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었어. 그때 우리 동기들은 허화평을 밀었으니 이태우는 섭섭했을 거야.

 

김 : 아버지 영향으로 영어를 좋아하셨겠군요?

한 : 아버지 서재에 있던 수많은 영어책 덕분에 영어와 친숙한 환경에서 성장했지. 포항고등학교 시절 정규용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쳤는데 내 영어 실력을 아주 흡족하게 여기셨어. 대학도 처음에는 서울대 영문학과에 가려고 했어. 당시 서울대 인문계에서는 영문학과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거든. 영어를 좋아했고 이왕이면 가장 높은 곳에 지원해보자고 생각한 거야. 결과는 불합격이었지. 서울대 영문학과에 이양하 교수라고 있었어. 평남 강서 출신으로 수필가와 영문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분이지.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아버지가 이양하 교수에게 내 성적을 물어보니 근소한 차로 불합격되었다고 했다더군.

 

김 : 그래서 재수를 선택하신 거군요?

한 : 후기를 지원하느냐 재수를 하느냐 고민하다가 재수를 택했어. 그런데 공부가 마음대로 안 돼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데, 여름에 서울에서 재수하던 박춘식이라는 친구가 찾아왔어. 박춘식은 죽도시장에서 가장 큰 미곡상인 의성상회 아들인데, 훗날 고려대 농과대를 졸업하고 포항학원을 세웠지. 그 친구가 나더러 이러면 안 된다며 서울 가서 공부를 제대로 하자고 하더군. 그렇게 서울 가서 뒤늦게 공부에 열을 올렸지. 종로3가 EMI 학원에서 안현필 원장의 강의를 들었는데, 명성대로 실력이 대단했어. 두 번째 대학 지원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택했지. 서울대에 지원했다가 또 떨어지면 낭패니까 안전 지원을 한 거야. 정치외교학은 내 영어 실력이 통할 수 있는 분야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경쟁률이 무려 12 대 1이어서 긴장이 되더군. 다행스럽게도 무난히 합격하고 신세계백화점 옆에 있는 중앙우체국에 가서 아버지에게 합격했다는 전보를 보냈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한흑구의 수필 ‘나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한흑구의 수필 ‘나무’.

김 : 대학에 입학하니 어떻던가요?

한 : 대학교 입학 환영식 때 이흥렬이 직접 작사·작곡한 ‘바위고개’를 불렀는데 참 감동적이었어. “언덕을 혼자 넘자니 / 옛 임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지. 그 감흥을 담아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로 보냈어. 그러고 보면 나도 부모님을 닮아 예술적 감성이 있었던 모양이야.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정치외교학과 신입생 중에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 출신이 거의 8할이더군. 포항 출신은 나밖에 없고. 학과별로 총학생회 대의원을 한두 명씩 선출했는데 나도 당선되었어. 당선되어 총학생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지.

 

김 : 대학 3학년 때 4·19혁명이 겪게 되는데요.

한 : 알려진 것처럼 고려대 학생들은 4월 18일 교문 바깥으로 나가 태평로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고, 이게 4·19의 도화선이 되었지.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바깥으로 나갔는데 신설동 로터리에서 학생처장이 자동차 위에 올라가 학교로 돌아가라고 외쳤지만 소용없었어. 나는 대열의 선두에 있었지. 시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학생들을 지지했어. 그런데 국회의사당 앞에서 집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테러를 당했어. 당시 청계4가에 천일백화점이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나다가 체인과 갈고리, 몽둥이를 든 깡패들한테 습격을 당한 거야.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어. 이 사건은 4·19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지. 대열의 선두에 있던 나는 근처 포목점에 숨었는데 깡패가 휘두른 갈고리에 턱을 맞아 피가 많이 흘렀어. 깡패가 사라지자 그제야 경찰이 나타나더군. 깡패와 경찰이 미리 짰다는 이야기지. 나는 경찰차를 타고 이화여대 의과대학 응급실로 가 상처를 꿰맸는데, 하얀 턱뼈가 보일 정도의 부상이었어. 응급처치가 끝난 후 다시 경찰차를 타고 현인동 집까지 왔지. 턱부위의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어.

 

김 : 당시 고려대 모의국회는 대학 사회에서 꽤 유명했지요?

한 : 고려대 모의국회는 전국 대학생 행사 중 가장 컸지. 50여 개 대학교 대표가 참가했고,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열렸어. 모의국회가 열리면 극장이 미어터졌고, 극장 바깥에 스피커를 달아놓을 정도였어. 나는 2학년 때 모의국회 의사국장, 3학년 때 부의장을 맡았어. 4학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의장을 맡고 싶더군. 모의국회 의장 14명 중에 8명이 국회의원이 될 정도로 의장의 위상이 높았어. 경쟁자는 같은 과의 김재묵이었는데, 군 복무를 마치고 늦게 입학해서 나보다 대여섯 살 많았지. 그런데 모의국회 의장은 총학생회장이 결정하게 돼 있었어.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나는 부산 영도 출신의 이상갑을 밀었고, 김재묵은 제주 출신의 고승민을 지지했어. 나는 이상갑의 찬조 연설을 하는 등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고, 개표 결과 거의 두 배 차이로 완승했지.

 

김 : 국회의장은 따놓은 당상이었겠습니다.

한 :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져. 5·16군사정변이 터진 거야.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어. 나는 무기력하게 물러설 수 없었지. 정경대 학장을 찾아가 모의국회 전통을 이을 수 있도록 내부무장관을 찾아가 설득할 테니 허락해달라고 했어. 학장이 그렇게 하라고 하더군. 그래서 당시 내무부장관인 한신 장군을 찾아갔지. 을지로2가에 있던 내무부에서 한신 장군을 만나 모의국회가 개최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어. 한신 장군은 가능하다고 하더니 조건을 다는 거야. 5·16 주체 세력이 내세운 의제를 다루라고 말이야. 그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고 내무부를 나왔지. 대학생들의 순수한 행사에 군사정변 주체 세력이 내세운 의제를 다룬다는 게 말이 되겠어. 그렇게 했다가는 모의국회가 어용국회가 되는 거지. 학교로 돌아와 정경대 학장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잘했다고 칭찬하더군.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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