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 ③ 서울 생활과 귀향
세상에 홀로 남겨진 김두호. 그때부터 세상살이는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그림만이 그를 위로했다. 다행히 어려운 시기마다 손을 내밀어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때인들 예술가에게 호락호락한 시절이 있었던가?
삶이 고단할수록 예술혼은 치열했다. 대학 입학부터 귀향까지의 여정을 들어 본다.
대학시절 이명석 선린애육원 원장님과 서병언 선배 등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어. 친구 하숙집에 얹혀살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쳤지. 졸업 후엔 서라벌예술대학 장리석 교수가 서울에서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어. 그래서 서울 서대문에 미술학원을 냈지. ‘불량상품 전시회’를 하며 돈까지 날리고 서울 생활을 끝냈지. 그렇게 포항에 내려와 죽장중을 거쳐 대동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어.
배 : 대입 관문은 통과했다지만 서울 생활이 녹록치 않았을 텐데요. 대학 등록금도 그렇고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김 : 대학 가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어. 친구 하숙집에 얹혀살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고군분투했지. 생활비며 미술 재료비를 전부 혼자 해결해야 했으니까. 막막하던 차에 서병언 선배를 만나게 되었지. 선린애육원 원장이던 서두필 장로의 아들로 당시 서울대 공대를 다니고 있었어. 생활비를 마련하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기다려보라고 하더군. 나중에 연락이 와서 가보니 어느 가정에 아이들이 모여 있는데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지.
배 : 미술을 지도했나요?
김 : 국어, 산수, 과학, 사회 과목을 가르쳤어. 그렇게 번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생활비로도 썼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친구 하숙집 방에 돌아오면 하늘이 노랄 정도였어. 내가 대학을 졸업한 건 어떤 면에선 기적이지.
배 : 이명석 선린애육원 원장도 도움을 많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김 : 내가 선린애육원에 있을 때 원장이셨어. 수도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뒤에 서서 잘 그린다고 칭찬을 해주셨지. 이명석 원장님은 대학 다닐 때도 도움을 많이 주셨어. 학비를 마련해준 적도 있고, 한 번씩 찾아와서 도움을 주셨어. 미술 교사 시절에는 작업실을 마련하도록 해주셨고. 원장님은 내가 못 잊을 분이야. 그리고 부례문 선교사도 학비 일부를 도와주셨지. 그렇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지금까지 살아온 거야.
배 : 대학 졸업 후에는 서울에 계셨더군요?
김 : 졸업 후에 서라벌예술대학 장리석 교수가 고향으로 가지 말고 서울에서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어. 서울에 있어야 그림을 그리지 고향 가면 못 그린다고 말이야. 원래는 포항에 가서 교직 생활을 하려고 했거든. 당시는 미술과 졸업만 해도 교사 자리를 구할 수 있었어. 그래도 교수의 말을 믿고 서울 서대문에 아폴로미술학원을 냈지.
배 : 장리석 교수가 김 선생님을 많이 아꼈나 봅니다.
김 : 나를 좋게 봤나 봐. 그림으로 성공하라고 서울에서 그림을 그리라고 하신 것 같아.
장리석(1916∼2019)은 평양 출신으로 1960년부터 서라벌예술대학 강단에 섰다. 그의 교수법은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학생들의 작품에 과감한 가필(加筆)로 유명했다. 뭉툭뭉툭한 붓 터치와 강렬한 색채의 대비에 의한 가필에 고등학교에서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고 올라온 학생들의 세밀한 그림은 다시 손보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렸다고 전한다.
배 : 학원 운영은 어땠습니까?
김 : 학원 근처에 이화여고가 있어서 미술반 학생들이 많이 왔어. 이젤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학원생들이 많았지. 수입이 괜찮아서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되었어. 그런데 종종 화실에 놀러 오던 지인이 실내 디자인을 해보자고 하는 거야. 당시 명동에 미장원이나 옷가게가 우후죽순 생겼거든. 디자인만 해주면 된다는 거야.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는 그 말만 믿고 종로3가 단성사 앞에 사무실을 마련했어. 충무로, 종로, 명동에 상권이 마구 생겨날 때라 처음에는 수입이 괜찮았지. 그러다 그 지인이 이번엔 보건사회부와 상공부가 주관하는 불량 상품 전시회를 맡아보자고 제안하더라고. 사업권은 본인이 따낼 수 있으며, 계약금의 절반 이상은 남을 거라고 하면서 말야. 당시 서울시청 앞에 국립공보관 건물이 굉장히 넓었는데 그곳을 가득 채우는 일이니 사업이 꽤 컸지.
배 : 불량 상품 전시회라니 독특한 행사였네요.
김 : 그때는 불량 상품이 수두룩했으니까. 문제는 보건사회부 직원들이야. 저녁마다 공무원 대여섯 명이 오면 술을 사줘야 하는데 술값이 말도 못 해. 그것도 연못에 배를 띄우고 술을 먹는 생전 처음 보는 술집에만 가는 거야.
배 : 불량 공무원이었네요?
김 : 기막힌 일이 많았어. 도중에 다른 업체가 보건위생과 직원을 구워삶아 사업을 따내려고 달려든 거야. 선린애육원 이명석 원장의 아들인 이진우 국회의원을 찾아가서 사정을 토로하니 보건사회부에 전화를 넣더군. 그제야 상대 업체가 손을 뗐는데 국회의원 힘이 대단하다고 느꼈어. 그렇게 일은 시작되었는데 그 넓은 전시공간을 채우기에는 시간이 촉박했어. 또 박정희 대통령이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얼마나 재촉하는지. 거기다 선금은 공무원 회식비라며 10퍼센트를 떼고 주더군. 그 돈으로 판자며 각목, 못 같은 재료를 사서 밤낮으로 일했어.
배 : 불량 상품은 어떻게 모았는가요?
김 : 보건사회부 직원들이 시중에 수집하러 돌아다녔어. 그러니 물품제조 업체 관계자들이 찾아와서 야단인 거야. 자기네 회사 물건이 전시되면 아무도 안 산다고 난리를 치는 거지. 공사하랴 그런 업체 막으랴 정말 가관이었어. 행사를 끝내고 정산해보니 적자가 났더군. 학원을 운영하며 모아둔 돈까지 날렸지. 세상 물정 모르고 욕심을 부린 탓이었어. 그때 학원은 수강생이던 미대 졸업생에게 맡기고 서울 생활을 끝냈지.
김두호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게 만든 불량 상품 전시회는 역설적이게도 연일 성황을 이루었다.
상공부와 보사부가 공동 주최로 국립공보관에서 지난 10일부터 오는 30일까지 여는 ‘불량상품전시회’에는 하루 평균 1만 5천여 명씩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전시장을 꽉 메운 관람객은 한결같이 이번 전시회를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면서 ‘조금 일찍 했더라면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고 악덕 상인이 지금쯤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신문, TV, 방송 등에 요란한 광고를 내는 소위 일류 메이커의 제품 등 총 1천539종이라는 엄청난 양의 불량상품이 전시된 회장엔 저녁때가 되어도 ‘고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부끄러운 인기 최고」,『조선일보』1970년 9월 13일자.
배 :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어디로 가셨나요?
김 : 대구에 대학 동기인 최병소가 있었거든. 지금도 대구에서 활동하는 친구인데, 대구 상서여상 미술 교사였어. 교직에 몸담기 전에 운영하던 학원이 있었는데 그걸 맡아달라고 부탁하더군.
최병소(1943∼ )는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1970년대 박현기, 이강소 등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운동의 획을 그은 대구현대미술제 주축 멤버로 활동했다.
배 : 포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습니까?
김 : 대구로 가면서 권영호 선생한테 어디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싶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권영호 선생이 죽장중학교 권태환 교장과 연결해주더군. 권태환 교장이 대구에 와서 나를 만났고, 그 직후 죽장중학교 발령을 받았어. 사실 권영호 선생이 대구여고 미술 교사 자리를 권했지만 응하지 않았어. 포항에서 미술 교사를 하고 싶었거든.
배 : 죽장은 지금도 포항 도심에서 버스로 한 시간 넘는 거리인데 당시엔 오죽했을까 싶습니다. 생활은 어떠셨어요?
김 : 교장 사택에 비어 있는 아랫방을 사용했어. 최소 3년은 근무하기로 약속했는데 2년도 못 버텼어. 학교에 전화기가 없어서 우체국까지 가서 공중전화를 썼지. 막상 들어가 보니 너무 외진 데다 그림 그릴 여건이 안 되는 거야. 밤마다 동료 교사들이 어울리는데 거절하기도 쉽지 않고. 이따금 학생들 견문을 넓혀주려 대구로 사생대회를 다녔는데, 최병소가 나더러 골짜기에 살더니 촌놈 다 되었다고 말했을 정도지.
배 : 그래서 대동중학교로 옮기신 건가요?
김 : 포항에서 활동하던 서예가 박인호가 대동중학교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어. 박인호 선생과의 인연은 대구에서 시작되었지. 대구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할 때 포항여고 다니던 딸을 데리고 왔더군. 그 딸이 주말마다 대구에 와서 내 지도를 받았지. 그때 박인호 선생이 고향으로 가서 활동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어. 대동중학교로 부임하는 과정은 일사천리였어. 동인교육재단 초대 이사장이 김경섭 동인병원 원장인데 그 아들이 중학교 동창이었어. 미술 교사 자격증이 있느냐기에 그렇다고 하니 바로 김현호 교장(1969년 대동중학교 초대 교장, 1972년 대동고등학교 초대 교장 역임)과 연락이 닿았고, 마침 그때가 2월 말이어서 며칠 후에 출근했지.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