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김두호 ④ <br/>1970년대 포항 미술교육의 풍경
김두호는 1970년대부터 포항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에 목말랐던 학생들은 그의 화실에 모여들었고,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의 화실은 학생들이 미술에 대한 갈증을 푸는 공간이었다. 포항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의 미술 모임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김두호가 배출한 제자들은 현재 포항 화단의 구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그리면 배고파서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도 많이 들었어. 그림 그리면 굶어 죽는다고 할 정도로 사회 분위기는 미술에 우호적이지 않았거든. 안타까운 일도 있었어. 대동중학교 미술반에 그림을 워낙 좋아하고 소질도 뛰어난 한 학생이 있었는데 부모가 반대했어. 그런데 그 학생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자살해버린 거야.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되니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지. 그 학생의 부모가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면서 나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 왜 미술을 가르쳤냐는 거지. 미술반을 만들어 지도한 내 잘못이 아닌가 자책을 많이 했어.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배 : 1970년대는 미술을 전공한 교사가 드문 시절이죠?
김 : 예체능 계열 전부 전공 교사가 드물었지. 교사들의 수업시수를 고르게 하려고 다른 과목을 떼어 맡기기도 했어. 수업시수가 적은 예체능 교사들은 더 그랬고. 대동중학교에 부임하니 한문도 가르치라고 하는 거야. 나는 음악을 맡겠다고 했지.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어서 중학생은 가르칠 수 있겠다 싶었거든. 그때 음악 과목은 서무실 여직원이 맡아 가르쳤는데 교사 자격을 가진 내가 한다니까 학교에서 반기더군. 그렇게 1학년 음악을 2년 정도 가르쳤어.
배 : 음악은 언제 배우셨어요?
김 : 혼자 익힌 거야. 그때는 건반을 제법 두드렸는데 나이가 들어 손이 굳으니 그전처럼 안 되더군. 악보 보는 눈과 손이 같이 가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손이 못 따라가.
배 : 당시 미술을 전공한 교사로 배원복 선생이 있었지요?
김 : 타지에서 온 교사는 간혹 있었지만 포항 출신으로 미술을 전공한 교사는 배원복 선생과 나뿐이었어. 배원복 선생은 내가 부임할 즈음 교감이 되었고, 뒷날 교장까지 했지. 유화를 전공했는데 한국화를 주로 그렸어.
배원복(1926~2015)은 포항 흥해 출생으로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주예술학교를 1회(1949)로 졸업했다. 경주와 포항에서 40여 년간 교직 생활을 했으며 포항미술협회 제5대 회장을 역임했다.
배 : 당시 대동중학교 미술반 수준이 상당했다고요?
김 : 미술반원이 꽤 많았고 다들 열심히 했어. 대회에 나가면 매년 단체 우승을 할 정도로 실력이 우수했지. 지금도 활동하는 제자들이 많아. 미술반을 운영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꼈어.
배 : 여러 학교 학생들이 선생님 화실로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김 : 학생들이 딱히 미술을 배울 곳이 없었으니까. 그때 개인 화실이 있었는데 방과 후에 학생들이 오면 지도해줬어. 그림 공부의 기본인 수채화와 소묘를 주로 가르쳤지. 그때 배운 학생 중 몇 명은 미술 교사가 되었어. 그 제자들도 이제 거의 정년퇴임을 했을 거야.
김두호의 화실에 다녔던 최복룡 전 포항미술협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미대 입시생 상당수가 김두호의 화실을 찾았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학생들은 대구나 부산, 서울의 미술학원에 다녔지만 대부분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다. 김두호는 미대 지망생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지금 포항 미술계가 두텁게 형성된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배 : 당시 그림을 그리던 고등학생들이 화란회(畵蘭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김 : 모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는 내가 교사 초기 시절이었으니까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였지. 1970년대 김건규, 백해룡, 이방웅 교사와 미술대회를 많이 만들었어. 아마 그때 대회나 전시에 열심히 참여한 학생들이었을 거야.
화란회는 김두호의 지도를 받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창립된 포항 지역 고등학교 미술 학도들의 모임이다. 몇 년 후 없어졌지만 1970년대 포항 미술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체다. 현재 포항에서 활동하는 중견 작가 가운데 이상락, 김왕주, 최복룡, 이경형, 김직구, 박계현 등이 화란회 출신이다.
배 : 선생님은 가난한 학생들을 무료로 가르쳤다고 제자들이 말하더군요. 수업료 대신 연탄을 드렸다는 제자도 있고, 미술실에서 밥을 해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김 : 배고픈 시절이었으니까 다들 어렵게 공부했지. 내가 맡아서 가르쳤다기보다 그림 그릴 공간조차 없으니까 돈 없는 학생들이 찾아오면 편하게 그림 그리라고 허락했을 뿐이야. 오며 가며 지도도 했고.
배 :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니 미술 환경이 좋을 수가 없었겠습니다.
김 : 먹고살기 어려우니까 부모들이 그림 그리는 걸 말렸지. 그림 그리면 배고파서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도 많이 들었어. 그림 그리면 굶어 죽는다고 할 정도로 사회 분위기는 미술에 우호적이지 않았거든. 안타까운 일도 있었어. 대동중학교 미술반에 그림을 워낙 좋아하고 소질도 뛰어난 한 학생이 있었는데 부모가 반대했어. 그런데 그 학생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자살해버린 거야.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되니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지. 그 학생의 부모가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면서 나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 왜 미술을 가르쳤냐는 거지. 미술반을 만들어 지도한 내 잘못이 아닌가 자책을 많이 했어.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배 : 미술반 활동을 반대하는 학부모가 많았겠군요.
김 : 수업시간에 그림을 좀 그린다 싶으면 미술반으로 불러서 지도했거든. 그런데 그 사건 후에 학부모들이 찾아와서 자기 아이는 지도하지 말라는 거야. 내가 뭐라고 말할 처지나 되나? 포항제철이 들어서고 지역의 살림살이가 전반적으로 나아지면서 그런 학부모들이 찾아오지는 않았어. 그림 그리면서 겪은 일 중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 제자의 자살이야. 오로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목숨을 바친 거잖아. 그 아이의 너무나 짧았던 생애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마음이 아파. 그림을 계속 그렸다면 좋은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 더 안타까워.
배 : 교직과 병행하면 작업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작품 활동을 꾸준하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김 : 교사 생활을 하게 되면 작업 시간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어. 그래서 그림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했지. 죽장에서 교직 생활할 때도 비록 그곳이 조용한 시골이지만 사람들이 모여 지내다 보니 개인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대동중학교로 옮겨 바로 화실을 구했지. 그림 그리려고 술도 끊었어. 대동중학교에 근무할 때 동료 교사 둘과 친분을 쌓았는데 저녁마다 술판을 벌이는 거야. 당시 포항국민학교 옆이 거의 술집이었어. 퇴근하면 늘 거기 가자고 하는 거야. 나는 퇴근 후에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술만 마시면 어떻게 되겠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고민 끝에 최동하 외과의원을 찾아갔지. 최동하 원장은 나중에 포항의료원장을 지냈는데, 그의 아들을 가르친 적이 있어. 최 원장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다시 술 먹으면 죽는다는 소견서를 적어달라고 부탁했어. 그걸 동료들에게 보여주고는 술을 딱 끊은 거야. 그 후로 수업을 마치면 바로 작업실로 갔지.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