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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내조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존재할 수 없어”

등록일 2022-09-07 18:41 게재일 2022-09-0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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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웅 ⑥<br/>한흑구와 방정분 부부
방정분 여사의 정년 퇴임식에서 부부가 함께(1978년).

한동웅 선생은 대담 중간에 “나는 아버지를 닮아서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장남의 눈에 비친 아버지 한흑구, 그리고 어머니 방정분 여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 : 한흑구 선생님은 1979년 11월 7일 작고하셨습니다. 그때 상황을 말씀해주신다면.

한 : 몸이 불편해진 아버지는 포항의료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서 죽도동 집에 계셨어. 그 무렵 남빈동에서 죽도2동 85-17로 이사를 했지. 그런데 어느 날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하시는 거야. 평양 사람이니까 냉면을 얼마나 좋아했겠어. 그 순간 느낌이 이상하더군. 육거리에 있는 로타리냉면의 냉면을 포장해서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더니 맛있게 드셨지.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장롱에 부딪히면서 넘어지셨어. 당시 빈남수 박사가 아버지와 자주 만나며 가정의(家庭醫) 역할을 하셨지. 빈 박사가 집에 와서 아버지를 살펴보더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사흘 후에 돌아가셨어.

 

빈남수(1927∼2003)는 경남 사천 출신으로 의사이자 수필가다.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한국문협 포항지부장 등을 맡으며 포항의 문화예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수필집으로 ‘괄호 밖의 인생’(범우사, 1975), ‘망각의 이방지대’(시인사, 1983)가 있다.

 

아버지는 1979년 11월에 돌아가셨지. 돌아가시기 사흘전에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하시는거야. 평양사람이니까 냉면을 얼마나 좋아했겠어. 아버지는 서울·부산지역 등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베푸셨어. 그 덕에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영일만이 한눈에 보이는 죽천에 묻히셨지….

어머니는 황해도 부잣집 아홉번째 딸이었어. 내동생이 일곱살 때 뇌막염으로 유명을 달리한 후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직장생활을 하셨지.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시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진 분이셨어….

 

김 : 죽천에 한흑구 선생님 묘소가 있습니다. 한흑구 선생님이 죽천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 : 아버지를 경주 아화에 있는 공원묘원에 모시려고 계약을 마치고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았지. 그런데 앞서 얘기했지만 광복 직후 서울에 있을 때 나에게 없던 삼촌이 생겼잖아. 그 삼촌이 우리 가족을 따라 포항까지 왔어. 오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다가 경찰 시험에 합격해 경찰관이 되었지. 빈소에 온 삼촌이 장지를 묻길래 경주라고 했더니 잠깐 기다려 보라는 거야. 삼촌의 처가가 있는 죽천에 가서 다른 장지를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다시 나타나서는 괜찮은 장지를 찾았으니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해. 상중에 상주가 빈소를 떠나서는 곤란하잖아. 하지만 삼촌의 성의를 생각해서 따라나섰지. 현장에 도착해보니 바로 여기구나 싶은 거야. 아버지가 영일만을 얼마나 좋아하셨나. 삼촌이 찾아놓은 장지는 영일만이 한눈에 들어왔어. 그래서 단박에 그곳으로 결정했지.

 

김 : 한흑구 선생님이 품어준 사람 덕분에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영일만이 보이는 곳에 묻히게 되었군요.

한 : 그런 셈이지. 아버지 묘소 뒤편에 개나리를 심었어. 갈 수 없는 고향 평남 강서군 연곡리 옛집에 피었던 개나리가 생각나서.

 

김 : 그러고 보면 한흑구 선생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베푸는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한 : 광복 직후 서울 시절과 부산 피난 시절에 문인들에게 술도 사고 밥도 사고 많이 베푸셨지. 이북에 있을 때 서울에서 찾아온 최상수라는 민속학자가 있었다고 했잖아. 그분에게는 신당동에 집 한 채를 장만해주셨어. 포항 미군 부대에 근무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포항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지. 6·25전쟁 때 불타버린 포항여고 교사(校舍) 복구라든가 미해병 기념 소아진료소 지원에도 아버지 손길이 닿았어. 그때는 그런 일이 미군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거든. 아버지가 미군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한흑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체류할 때 평양 친구인 안익태에게 큰 도움을 준다. 안익태가 한흑구를 찾아왔을 때 안익태는 돌아갈 차비조차 없을 정도로 힘든 처지였다. 한흑구는 안익태와 한방에 살면서 눈물겨운 뒷바라지를 했다. 안익태는 그 덕분에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유럽에 진출한다. 이 사연은 한흑구의 두 번째 수필집 ‘인생산문’(1974, 일지사) ‘예술가 안익태’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이 책 ‘책머리에’의 다음과 같은 글은 한흑구와 안익태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안익태 씨와의 젊은 날의 교유록(交遊錄)은 나의 온 기억력을 짜내서 기록하였지만, 우리의 우정에 얽매였던 사연의 백분의 일도 그려내지 못하였다.

 

김 : 장남으로서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 아버지는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의 수필에서 “High thinking, plain living(고상한 이상, 평범한 생활)”이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어. 뜻이 높으면서도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분이었지. 보성전문학교 상과에서 공부하고 미국 생활을 해서인지 현실적인 문제에도 밝았어. 식구들에게는 늘 자상하셨지. 자식들한테 매 한 번 들어본 적이 없고 상급학교 진학도 자식들의 결정을 존중해주셨어. 술에 취해 늦게 귀가했는데 담배가 떨어지면 내 담배를 얻어서 피우기도 하셨지. 그리고 부뚜막에 허리를 굽히고 조리하는 어머니를 편하게 해주려고 지금의 싱크대 같은 것을 직접 만드셨어. 부엌에 남자는 얼씬도 하지 않던 시절에 요리도 자주 하셨지. 김장김치 담그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고 만두를 아주 잘 빚었어. 남빈동 집 마당에 닭 230여 마리를 키우기도 했지. 아버지는 국수를 즐겨 만드셨는데, 그때 닭고기를 넣었어. 그 맛이 그립군.

 

김 : 혹시 한흑구 선생님은 교회에 나가셨습니까?

한 : 아버지는 교회에 안 나갔어. 자식들에게 종교는 가지되 광신도는 되지 말라고 하셨지. 나도 은퇴 장로지만 아버지 견해에 동의해.

 

한승곤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였다. 그런데 그의 외아들인 한흑구 선생이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편 한흑구 선생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한흑구 선생이 기독교의 신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흑구 선생이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는 한흑구 연구에서 중요한 사안이라 하겠다.

한흑구 선생의 장례식. 아동문학가 손춘익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1979년).
한흑구 선생의 장례식. 아동문학가 손춘익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1979년).

김 : 한흑구 선생님이 포항에 오신 직접적인 이유는 폐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폐디스토마라는 설과 폐결핵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한 : 내가 어릴 때의 일이어서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어. 분명한 것은 영남병원 이상원 원장이 폐결핵으로 진단했다는 거야. 아버지가 새벽에 오천 미군부대로 출근하면서 각혈할 때가 있었어. 이 병의 유일한 치료약은 스트랩토마이신(Streptomycin)이야. 아버지 술친구 중에 평안도 출신인 봉 중사라고 있었는데, 오천 미군부대에서 의료 분야의 일을 했지. 이분이 아버지의 각혈이 멈출 때까지 스트랩토마이신을 구해주었어.

 

김 : 방정분 여사님 얘기를 듣고 싶군요.

한 : 황해도 안악(安岳)군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이화여전 성악과를 졸업했어. 이화여전 성악과 동기인 덕희 고모의 소개로 아버지와 결혼했지. 홍난파에게 배우고 음악 활동도 함께했다고 들었어. 어머니가 결혼하고 난 후 한 신문에 평양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아까운 재원을 잃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촉망받는 분이다고 해. 황해도 부잣집의 아홉 번째 딸로 태어났는데 집안에 사연이 있어. 아홉 명의 자식이 모두 딸이었어. 그 바람에 어머니의 생모가 집에서 나가게 되었어. 새어머니가 들어와서 아이를 낳았는데 또 딸이 태어난 거야. 그래서 그분도 집에서 나가게 되었지. 세 번째 어머니가 들어와서 아이를 낳았는데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어. 열한 번째 만에 아들이 태어난 거지. 전쟁 때 이북에서 피난민이 포항으로 내려오면 중앙국민학교에 모였거든. 어머니는 혹시 그 남동생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중앙국민학교에 자주 가셨어.

 

김 : 방정분 여사님은 포항여고에서 교편을 잡으셨지요?

한 : 동생 동현이가 일곱 살 때 뇌막염으로 유명을 달리했어. 어머니는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바깥일을 선택했지. 남빈동 집에서 포항여고까지 약 20리(7.85킬로미터) 길인데, 어머니 표현으로는 다리에 꿀물이 나도록 걸어 다녔어.

 

김 : 방정분 여사님은 한흑구 선생님에게 어떤 분이었습니까?

한 : 어머니의 헌신적인 내조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존재하기 힘들었어. 어머니는 첫째 딸을 먼저 보내고 사 남매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는 힘든 여건에서도 아버지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셨지. 어머니의 일기를 읽어보면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느껴져.

 

김 : 방정분 여사님이 포항에서 자주 교류했던 분이 있다면.

한 : 황해도 출신의 여의사 두 분이 포항에 있었어. 한 분은 변석화라고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당찬 분이고, 또 한 분은 홍씨 성을 가진 분인데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 어머니는 두 분과 가깝게 지냈지.

 

김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한 : 사실 나는 아버지를 잘 몰라. 문학을 모르니 문학을 하신 아버지를 어떻게 알겠어? 아버지의 문학관 건립에 관한 소식은 듣고 있지. 고맙기도 하고 기대도 되지만 걱정되는 측면도 있어. 무엇보다 아버지를 깊이 이해해주었으면 싶어. 문학관 건립이 추진되어 문을 열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 그 장면을 보려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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