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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에 상륙해서 만난 첫사랑

홍성식 기자
등록일 2022-09-19 19:57 게재일 2022-09-2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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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식 ③<br/>중공군의 인해전술과 원산 철수
9·28 서울 수복 제4주년에 재현한 중앙청 태극기 게양 장면.

6·25전쟁은 남북한 거의 전체를 포연에 휩싸이게 했다. 경북과 강원도 동해안은 물론, 서울 수복 이후 전투 지역이 된 북한 원산도 전쟁의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틋한 감정은 피어나는 법. 해병대 1기 이봉식 선생에게도 이 와중에 사랑이 싹텄다.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선생의 목소리가 열에 들떴다.

 

우리 부대가 인천을 출발해 김포를 거쳐 산개해서 서울로 밀고 올라가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어. 서울로 들어가니 이미 중앙청 등이 수복돼 있더군. 나는 중앙청에 태극기가 다시 걸리는 장면을 봤어. 서울이 우리 품으로 돌아온 게 1950년 9월 28일이야.

 

… 나도 배를 타야 하는데 며칠 전에 김치를 얻어온 집 처녀가 걱정되는 거야. 그래서 전령을 보내 “빨리 남쪽으로 가야 하니 아무것도 챙기지 말고 몸만 나오라”고 전했지. 지금 아내가 된 사람과 어머니, 남동생이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원산항으로 왔더라고.

홍 : 인천 상륙 때 인민군의 저항이 거세지는 않았습니까?

이 : 상륙 전에 오랜 시간 포를 쏘고 항공 폭격을 한 탓에 우리가 육지로 올라갈 때는 인민군이 기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어. 가끔 포 소리가 들리기는 했는데, 저항이 생각보다 격렬하지는 않았지.

홍 : 미군과 한국 해병대 중 누가 선두에 섰나요?

이 : 동시에 인천으로 들어갔어. 아까 얘기했듯이 상륙정이 해병대를 내려놓고 돌아가 다시 군인들을 싣고 가는 방식이었고, 미군과 우리 군대 모두가 그렇게 했지. 육지에 도착해서 엄폐물을 찾아 뛰어가 엎드리고……. 다행히 내 주변에서는 상륙하면서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었어. 그렇게 육지에 오른 후 참호를 파고는 저녁을 먹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어. 다음 날 새벽 5시에 기상해 시가전을 준비하고는 “각기 구역을 맡아 수색하며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홍 : 인천 시내는 어떻던가요?

이 : 시내로 들어서니 많은 사람이 죽어 있었고, 시체가 불에 탄 채 널브러져 있었어. 우리 부대도 오전 11시쯤 대원 하나를 잃었지. 내가 분대장이었으니 죽은 전우를 위생병에게 맡겨 옮기도록 했어. 진격하다 보면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이 있고, 중공기와 인공기를 흔드는 사람도 있었어. 우리가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던 거지. 중간에 인민군들이 손을 들고 나오기도 했는데 그들은 압송해서 포로수용소로 보냈지.

홍 : 인천을 지나 서울로 간 겁니까?

이 : 우리 부대가 인천을 출발해 김포를 거쳐 산개해서 서울로 밀고 올라가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어. 그동안 치열한 전투도 여러 번 겪었지. 인천이 막히니 낙동강에서 전투를 벌이던 인민군 4개 군단이 북으로 돌아가려 했어. 그때 포로가 된 인민군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냈지. 감당을 못할 정도로 포로가 많았어. 서울로 들어가니 이미 중앙청 등이 수복돼 있더군. 나는 중앙청에 태극기가 다시 걸리는 장면을 봤어. 서울이 우리 품으로 돌아온 게 1950년 9월 28일이야.

홍 : 그 후 어떤 전투에 참여했고, 어떤 전투가 기억에 남는지요?

이 :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에는 이를 축하하는 행사를 진행했지. 이후 해병 부대는 전부 인천으로 이동했어. 인천에 있는 한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해 다음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부상자를 치료하고 인력을 충원했어. 부대 재편성을 한 거지. 재편성은 7~8일밖에 안 걸렸어. 대대 병력이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재편성을 마치니 북으로 간다고 하는 거야. 다시 승선해서 전투함을 타고 동해 쪽으로 갔어. 2~3일쯤 지나니 금강산이 보이더군.

홍 : 거기가 어디였죠?

이 : 인천상륙작전 후에 후속 부대들이 우리가 서울을 점령하던 시기에 북한으로 가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갔어. 그걸 따라서 우리도 진격했지. 지난번처럼 인천에 이어 원산으로 상륙하나 보다 했지. 그런데 막상 배에서 내리니 작전 명령이 안 나왔어.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일단 먼저 원산에 상륙한 거지. 우리는 원산에서도 전투를 벌일 줄 알았어. 그런데 인민군은 이미 흥남 쪽으로 후퇴했더라고. 해병대는 원산에서 하선했고 백사장에 천막을 쳤어. 전쟁 중이었지만 경치가 정말 좋더군. 각 분대와 소대별로 잠자리를 마련하고, 3대대 본부에 배속된 일부는 근처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갔어.

홍 : 그즈음에 지금의 부인을 만난 건가요?

이 : 맞아. 학교에 진을 치고 있으니 전령이 분대장인 나한테 밥을 가져다주더군.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분대장님 반찬이 없어 저쪽 집에서 김치를 얻어왔는데 거기 예쁜 아가씨가 있더라고요. 한번 가보시죠”라고 하더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 그럼 한번 둘러볼까” 하며 갔는데, 조그만 처녀가 야무지게 생긴 거야. 할 말은 별로 없었어. 그냥 “물 한 잔 얻어 마시자”라고 했지. 그런 다음 고향을 물어보니 충청북도 괴산이라고 하더군. 나도 충청도 사람이니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지. 어떻게 괴산에서 여기까지 왔냐고 물으니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왔는데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나고 나는 다음 날 출격 명령을 받아 평양으로 가게 되었지.

홍 : 평양에서도 전투가 있었나요?

이 : 전선은 형성돼 있었는데, 평양 도심에 들어가도 인민군의 공격이 없었어. 적들은 전혀 안 보이고 시체만 가끔 눈에 띄더군. 우리 부대가 정찰을 꼼꼼히 하는데도 적이 없었어. 평양 인근 아주 험악한 산악 지역까지 살폈지. 그래도 100리 안팎에서는 인민군이 발견되지 않았어.

원산 상륙을 감행하는 해병대 용사(1950년 10월 27일).
원산 상륙을 감행하는 해병대 용사(1950년 10월 27일).

홍 : 그 작전은 해병대 단독 작전이었습니까?

이 : 맞아. 해병대가 단독으로 들어갔지. 인민군이 없으니 한국 해병대 3대대가 전투 준비만 하고 있었어. 그런데 곧 상급 부대에서 소식이 들려왔어. 중공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거야. “중공군 4개 군단이 밀려오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거였지. 우리는 마음을 다잡았어. ‘이번 전투는 힘겨울 것이 분명하지만, 전투 태세를 확실히 해서 명령 없이는 후퇴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중공군이 올 때만 기다렸어.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며칠 후에 후퇴 명령이 내려와서 좀 놀랐지.

홍 : 당시가 겨울이었지요?

이 : 12월인데 눈이 많이 왔어. 북한은 그때쯤이면 폭설이 내린다고 하더라고. ‘작전상 후퇴’ 명령이 떨어지면서 퇴각했는데, 몇몇 중공군이 발견되면 방어를 하면서 후퇴했지. 그게 한 40리쯤 되었을 거야. 밤을 새우면서 전투하며 이틀에 걸쳐 후방으로 내려왔어. 원산이 보이는 곳까지 왔는데 중공군이 원산 쪽으로 장거리포를 쏘는 거야. 우리 부대는 포격이 쏟아지는 중간 지점에 있었지. 다행히 큰 교전은 없었고, 적이라고 해도 패잔병들과 맞붙어 한국군의 희생은 적었어. 그렇게 12월 말에 원산에 도착했지. 원산 시내에서 20~30리쯤 떨어진 지역으로 오니 미군들이 군용트럭 수십 대를 대기시켜놨어. 우리를 군함까지 태울 트럭이었지.

홍 :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이군요.

이 : 그때 그곳에 우리 해병대 병력은 4개 중대 700명가량이었어. 나중엔 들은 이야긴데 중공군은 4개 군단, 즉 16개 사단이었어. 엄청난 병력이지. 그들이 인해전술을 쓰면서 내려온 거야. 우리가 아무리 해병 정신으로 맞서 싸운다고 해도 이기기가 힘들었겠지. 그러니 38선 이남으로 신속하게 작전상 후퇴한 거야. 원산에 오니 항구 앞이 난리였어. 민간인들도 앞다퉈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니까. 저 멀리서는 중공군이 쏘는 포 소리가 들리고….

홍: 흥남 철수처럼 원산도 혼란스러웠겠습니다.

이: 그렇지. 나도 배를 타야 하는데 며칠 전에 김치를 얻어온 집 처녀가 걱정되는 거야. 그래서 전령을 보내 “빨리 남쪽으로 가야 하니 아무것도 챙기지 말고 몸만 나오라”고 전했지. 지금 아내가 된 사람과 어머니, 남동생이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원산항으로 왔더라고. 그런데 민간인은 쉽게 배에 탈 수 없는 거야. 내가 나서서 겨우 승선시키고 나도 부산으로 갔어. 그때 원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가슴 아픈 역사지.

홍 : 부산에 도착해서 그분을 찾았겠습니다.

이 : 원산에서 출발해 이틀 만에 부산에 도착해 M1 소총을 메고 피난시킨 처녀가 있을 법한 피난민 수용소를 찾아다녔지. 그때 부산에 수용소가 서른 곳이 넘었는데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 몇 군데를 헤매다가 못 찾고 우리 부대는 진해로 가게 되었어. 거기 육군대학에서 부대 재편성을 했는데, 해병대 신병 5~6기생이 교육을 받았어.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우리 부대에 강원도 중동부 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지. 그 명령에 따라 영덕에서부터 청송을 넘어 대관령과 양구까지 밀고 올라갔어. 인민군 패잔병들과의 전투도 계속되었지.

대담·정리 : 홍성식 기자 / 사진 출처 : 해병대사령부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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