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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인생의 마지막 꿈이라면 도와줄게”

등록일 2023-07-19 18:46 게재일 2023-07-2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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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권순남 ③ <br/>포항시 자원봉사센터장을 제안받다
울릉도 어린이 육지 견학(1977).
울릉도 어린이 육지 견학(1977).

영흥초등학교에서 자원봉사에 눈을 뜬 권순남 선생은 더 넓은 세계로 걸어 나온다. 포항JC 부인회 활동으로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은 권 선생은 포항시로부터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제안받는다.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수행하려면 자신의 삶을 센터에 오롯이 바쳐야 하는데 권 선생은 어떤 선택을 할까?

 

최미경(이하 최) : 부군께서 포항JC에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포항JC 활동과 관련해 각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권순남(이하 권) : 어느 날 남편과 이야기를 하다가 울릉도 아이들이 한 번도 기차를 타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어. 아이들의 소원이 기차를 타 보는 거라는 얘기를 듣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었지. 1977년이었어. 울릉도 아이들은 난생처음 기차를 타 보았고 서울 방송국 견학도 했지.

 

남편이 나를 믿어준만큼 나도 포항JC 활동하는 남편에게 힘을 보탰지. 포항JC 송년 파티를 준비하고, 1990년 8월 포항에서 JC 전국대회까지 유치해 전국 1천여명 회원들의 숙박·음식 준비 등 포항JC 부인들의 도움으로 성황리에 마쳤어. 그렇게 1981년 회원 부인도 함께 할 수 있는 포항JC 부인회가 결성됐지….

1996년 포항시 자원봉사센터장을 제안받았어. 교복사업 중에 봉사의 길을 선택하는게 고민스러웠는데 남편과 두 딸의 응원에 용기를 얻어 전국을 다니며 자원봉사에 관한 모든 것에 애썼어….

최 : 부군의 JC 활동에 내조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권 : 남편이 나를 믿어준 만큼 나도 힘을 보탰지. 1970년대 말 남편이 청년회의소 경북지구대회를 포항에서 유치하고 싶어 했어. 포항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재정적인 면에서 걱정이 앞섰지. 그래서 포항JC 임원 부인 7명을 모아 연말 송년회를 열자고 했어. 젊은 남성들이 지역사회를 위해 애쓰는데,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느냐며 마음을 모았어. 그런데 우리 여성들이 뭘 할 수 있겠어? 그때만 해도 사회활동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니 마땅한 대안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더군. 그러다 각자 잘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지. ‘살림살이의 기술’이 바로 그것이었어. 김밥 잘 싸는 사람. 감주 잘 만드는 사람. 동동주 만들어올 사람……. 이렇게 하나씩 맡아 송년회를 준비했지. 나는 과일을 대신할 과자 안주를 맡았는데 한 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어 고민이었어. 서울에 가서 외국 음식 요리책을 구입해서 보니 이쑤시개에 치즈, 체리, 메추리알 이런 것을 끼운 게 눈에 띄더군. 그런데 막상 해보니 모양새가 영 나질 않았어.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양배추에 쿠킹 포일을 씌워 이쑤시개에 끼운 과자 안주를 멋지게 만들어냈지. 테이블 세 개를 연결해서 그 위에 각자 준비해간 음식을 세팅해놓고 포항JC 회장에게 오라고 전화했어. 120여 명의 포항JC 회원 중 60여 명이 참석했는데 차려놓은 음식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지. 월례회에는 몇 명 정도 참석하느냐고 묻자 30~40명 정도라고 했어. 왜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일을 마치고 오면 주변 식당이 문을 닫아서 저녁도 못 먹고 회의한다고 하더군. 그러니 열정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곳에 오겠어? JC 회원들이 송년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 다음해에는 자기 아내도 끼워달라고 해서 회원 아내들을 모아 팀을 짰지. 혼자는 어렵지만 모두 함께하니 회비 30만 원으로 100만 원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어.

 

송년 파티를 통해 권순남 선생은 포항JC 경북지구대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남편을 도왔다. 포항JC는 경북지구대회뿐 아니라 1990년 8월 전국대회까지 유치했다.

 

최 : 전국대회는 경북대회와는 수준이나 규모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권 : 숙박이 가장 큰 문제였어. 전국에서 천여 명의 JC 회원이 오는데 포항에는 이들을 수용할 숙박 시설이 없었어. 포항공대로 찾아가서 총장님을 만났지. JC 전국대회를 통해 포항공대와 포스코를 홍보하면 어떻겠냐고 했어. 포항공대도 득이 되고 지역사회에도 득이 되니 포항공대 강당과 기숙사를 빌려주면 고맙겠다고 부탁했지. 다행스럽게 총장님이 부탁을 들어주셨어. 그렇게 포항공대 방학에 맞춰 JC 전국대회를 개최했어.

 

최 : 다른 문제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권 : 두 번째 문제는 음식이었어. 한 번에 천 개의 도시락을 만들어본 식당이 포항에는 없었거든. 흰밥, 고기, 전, 김치가 들어간 도시락 샘플을 만들어 승리식당에 찾아갔지. 샘플처럼 천 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어. 그런데 당일 1200명이 온 거야. 어떻게 했겠어? 한 시간 동안 포항JC 부인들이 도시락 200개를 만들었지. 그리고 포스코를 견학하고 돌아온 전국 JC 회원들에게 천 개의 아이스 수건을 내놓았어. 견학 후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새까매진 얼굴과 손을 씻을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지. 그래서 전국대회 며칠 전에 천 개의 수건을 구입해 포항JC 부인들을 모두 불러 수건을 하나하나 접어서 말았어. 그렇게 꺼낸 아이스 수건과 수제 도시락을 받아든 전국 JC 회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지.

국제청년회의소 세계대회 유치(1982.11.8, 잠실체육관) 오른쪽에서 세 번째 권순남.
국제청년회의소 세계대회 유치(1982.11.8, 잠실체육관) 오른쪽에서 세 번째 권순남.

포항에서 열린 JC 전국대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이후 여성들이 사회에 나와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깨닫고 포항JC 임원 부인뿐 아니라 회원 부인도 함께할 수 있는 포항JC 부인회를 1981년 결성하게 되었다. 포항JC 부인회는 복지시설을 대상으로 나눔 운동을 전개했고 장애인 재활 후원사업도 진행했다.

 

최 : 그 큰 행사를 포항에서 치렀다는 자긍심이 대단하셨겠어요?

권 : 예쁘게 보일 생각은 하나도 없었어. 회장 부인만 잘 차려입고 나오라고 하고, 30명 정도의 JC 부인은 새벽부터 나와서 머리를 질끈 묶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 모두가 사명감을 갖고 일했기에 신이 났어.

 

그 일을 계기로 1982년 국제청년회의소 세계대회를 서울에서 유치하게 되었다. 권순남 선생은 사람의 힘을 믿었다. 좋은 의도를 갖고 좋은 방향으로 함께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늘 믿었다. 그러한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하게 하는 연대를 만들었다.

 

권 : 1996년 4월 포항시 공무원이 나를 찾아왔어. 당시 시장이 박기환이었는데 포항JC 활동을 오래한 분이었지.

최 : 그러니까 박기환 시장님이 권순남 선생님의 활동을 알고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부탁한 거군요.

 

1995년 정부는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88올림픽이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둬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질서정연하고 자발적인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에 전 세계가 감동했고 올림픽 역사상 최고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5년 행정자치부 최형우 장관이 자원봉사에 관심을 갖고 자원봉사자 교육과 투입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 미국 등 5개국을 벤치마킹했다. 그 결과 자원봉사를 관리할 수 있는 센터가 필요하고, 그 센터는 정부가 지원하고 민간이 운영해야 한다고 보고되었다. 이를 통해 행정자치부에서 16개 시·도에 시범센터를 운영할 수 있도록 자원봉사센터를 설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권 : 포항시 차원에서 자원봉사센터를 만들어야 했고 이를 추진할 사람이 있어야 했지. 적임자를 물색하다가 내가 추천되었는데 나는 상근직은 부담스러웠어.

 

최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권 : 갑작스러운 제안에 답을 줄 수가 없었어. 당시 내가 하는 교복 사업이 잘되고 있었거든. 성업 중인 사업을 정리하고 봉사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웠지.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원봉사센터가 전무했기에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걱정이 앞섰어. 처음에는 4~5개월 정도 도와주겠다고 했지. 교복 사업의 비수기(7~10월)에는 도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거든. 그런데 시에서는 도와달라고 계속 연락해왔어. 고민 끝에 가족회의를 했어. 딸들에게 “엄마가 지금 고민하는 일은 무보수다. 그러니 너희가 재정적으로 후원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 남편에게는 “자원봉사센터가 시범 운영된다고 하니 나는 꼭 성공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정에 충실하기 어려울 텐데 이해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최 :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하군요.

권 : 두 딸은 이 일이 엄마 인생의 마지막 꿈이라면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말해주었어. 남편도 당신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누가 말려도 하는 사람이니까 편하게 일하라고 했고. 남편과 두 딸의 말에 큰 용기를 얻었지.

 

최 :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맡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요?

권 : 전국을 다녔어. 자원봉사센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대구, 부산, 서울로 다녔지. 그리고 좋은 자료를 찾기 위해 애썼어. 어떻게 하면 봉사를 체계적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사회복지에 관한 전공 서적을 구입했는데 전부 영어로 되어 있더군. 그렇게 자원봉사에 관한 것이라면 다 찾아다니고 뒤졌어. 그러던 중에 이강현 박사를 만났지.

 

이강현 박사는 우리나라 자원봉사 역사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주요 자원봉사 단체와 조직, 제도와 정책이 대부분 그의 아이디어와 기획을 거쳐 탄생했다. 19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자원봉사 전문기구인 ‘한국자원봉사연합회’를 만들었고, 1996년 자원봉사 관리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볼런티어21(현 한국자원봉사문화)’을 창립했다. 2008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자원봉사협의회(IAVE) 회장에 뽑혀 7년간 국제사회의 자원봉사 운동을 이끌었다.

 

최 : 정말 열정적이셨군요.

권 : 한 달에 한 번 서울에서 리더십 교육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 서강대에서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자원봉사 지도자 교육을 한다는 것을 알고 2년간 매주 서울에 갔지. 남을 가르치려면 내가 완벽해야 했으니까. 교육이란 교육은 다 듣고 다녔고 세미나, 포럼, 연구발표를 한다면 어디든지 찾아갔지.

 

 

권순남

 

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

 

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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