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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상록수의 못다 이룬 꿈

등록일 2022-10-12 18:28 게재일 2022-10-13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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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문 ⑤<br/>한동대학교 선린병원, 그리고 의과대학 설립 추진
선린대 교정에 있는 김종원 원장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기쁨의 교회 김화문 원로장로, 김정치 원로장로, 한동식 장로(왼쪽부터).  /김훈 사진작가 제공
선린대 교정에 있는 김종원 원장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기쁨의 교회 김화문 원로장로, 김정치 원로장로, 한동식 장로(왼쪽부터). /김훈 사진작가 제공

지금 포항에서는 의과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20여 년 전에도 포항에서는 선린병원과 한동대학교의 합병과 더불어 의과대학 설립 및 의대 부속병원 건립의 꿈이 무르익었고, 그 중심에 김종원 원장이 있었다. 김종원 원장은 지인들에게 자신은 소망을 거의 다 이루었는데 두 가지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다. 하나는 북에 두고 온 세 아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포항에 의과대학과 의대 부속병원을 설립하지 못한 것이었다.

김 원장은 교육사업에도 굵은 발자취를 남겼다. 1983년 포항간호전문대를 인수해 선린대학을 세웠으며, 1997년에는 의과대학 설립을 위해 자산 규모 1천억 원이 넘는 경북 최대 종합병원인 선린병원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했다. 의과대학 신설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한동대학교가 회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95년 3월 한동대학교가 개교한 후에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지. 이듬해 김영길 한동대 총장이 김종원 원장님을 찾아왔어. 선린병원의 재정적 도움을 받기 위해 선린병원과 한동대학교를 합치자고 제안한 거야. 병원이 학교에 흡수되는 형태인데, 그렇게 되면 한동대학교 선린병원이 되는 거지.

그런데 의과대 신설은 지역할당제라는 정부 방침 때문에 사실상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야. 병원이 수익사업체가 되면서 수십억 원의 세금 폭탄을 맞게 되고, 그 바람에 잘나가던 선린병원의 경영에 어려움이 닥쳤지. 그래서 다시 학교와 병원을 분리할 수밖에 없었어.

이 : 지금 인터뷰 장소인 선린대학 본관은 고인의 호를 따서 ‘인산관’이라 부르고, 고인의 유품이 전시된 기념관도 있습니다. 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해 선린대학으로 바꾸셨는데 의료 인력 양성에 관심이 많으셨나 봅니다.

김 : 당시 선린병원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교육을 실현하는 것이었는데, 그 결실이 공립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함으로써 이루어졌지. 경북도립 포항간호기술학교는 1969년 개교 이래 교육정책의 변화에 따라 포항간호전문학교(1972년)와 포항간호전문대학(1979년)으로 개편되어 운영되다가, 1982년 말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모든 공립 간호전문대학을 사립화한다는 문교부의 발표가 있자 8개에 달하는 대구·경북 지역의 기관과 개인들이 학교를 인수하려고 뛰어들었어. 문교부의 방침이 나오자마자 선린학원 설립 이사회를 열고 김종원 원장이 초대 이사장을 맡아 본격적인 인수 절차를 밟았지. 대아그룹의 황대봉 회장도 인수를 추진하다가 평소 친분이 있던 김종원 원장님의 뜻을 알고는 흔쾌히 양보했어.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성공적으로 인수한 다음에는 내가 선린학원에 파견되어 부지 물색 등 행정 절차를 밟았지. 선린대학교는 이후 보건 계열의 명문 학교로 자리를 잡았어.

이 : 한동대학교 기증과 의과대학 설립 추진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나요?

김 : 1995년 3월 한동대학교가 개교한 후에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지. 어느 정도였냐면 상수도 요금을 못 냈어. 이듬해 김영길 한동대 총장이 김 원장님을 찾아왔어. 그때 원장님은 일선에서 물러나 협동원장으로 계셨지. 김영길 총장은 한동대학교의 학생 수가 470여 명밖에 안 돼 등록금 수입으로는 학교 운영이 어렵다고 했어. 그러면서 선린병원의 재정적 도움을 받기 위해 선린병원과 한동대학교를 합치자고 제안한 거야. 병원이 학교에 흡수되는 형태인데, 그렇게 되면 한동대학교 선린병원이 되는 거지.

선린병원 협동원장 시절의 김종원.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선린병원 협동원장 시절의 김종원.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이 : 그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재분리 절차를 밟게 되지 않습니까?

김 : 당시 원장님은 평생의 꿈인 의과대학 설립과 부속병원이 가능하다 싶어 김영길 총장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대도 컸었지. 한동대학교는 선린병원과 합치면서 금융기관으로부터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돼 학교 재정에 숨통이 트였어. 그런데 의과대학 신설은 지역 할당제라는 정부 방침 때문에 사실상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야. 의대를 세우고 부속병원이 되어야 비과세 혜택을 보는데 그게 아니다 보니 병원이 수익사업체가 되면서 수십억 원의 세금 폭탄을 맞게 되고, 그 바람에 잘나가던 선린병원의 경영에 큰 어려움이 닥쳤지. 그래서 다시 학교와 병원을 분리할 수밖에 없었어. 그 과정에서 학교와 병원이 소송전을 벌이며 불편한 관계가 되었지. 그렇게 분리해서 선린의료원이라는 의료법인을 만들었지만 건물 이전 등기 비용이 없을 정도로 경영이 어려워졌어. 김 원장님은 의과대학 설립의 꿈도 이루지 못하고 병원 경영도 어렵게 되는 걸 보시고 소천하셨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

이 : 한동대학교를 통한 의과대학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한동대학교에서는 원장님께 고마움이 크겠군요.

김 : 김영길 총장님이 원장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했는데 이런 내용이 있어. “한동대 개교 직후 초면인 저에게,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은 지역 사람들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국내외 오지와 북한에 의료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라며, 풍전등화의 재정 위기 상태인 학교에 평생을 바쳐 키워 오신 선린병원을 한동대에 기증하셨고 그 뜻이 학교엔 큰 버팀목이 되었다.”

이 : 사단법인 한국상록회는 국가와 민족에 헌신하고 봉사하며 올곧은 삶을 살아온 사회 원로를 ‘인간 상록수’로 추대하고 있는데, 김 원장님이 이 상을 받으신 것도 한동대에 선린병원을 기증하신 것 때문인가요?

김 : 그렇지. ‘인간 상록수’는 한국상록회 전국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상이지. 1999년에 “평생 일군 재산인 선린병원을 후학 양성을 위해 한동대학교에 기증해 무소유를 실천하셨다”며 김 원장님을 제14대 인간 상록수로 추대하셨어.

2007년 3월 26일,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인술을 베푼 김종원 원장은 한 줌의 재로 돌아가셨다. 김 원장은 1984년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을 비롯해 1984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로부터 사회봉사상을 받았고, 1985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제14회 월남상 수상에 이어 1991년에는 포항시민상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제14회 인간 상록수상 수상자로 추대되기도 했다. 고인의 장례는 선린병원, 한동대학교, 선린대학, 포항북부교회(현 기쁨의 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포항노회 등 5개 기관 연합장으로 치러졌으며, 3월 28일 본원 발인 예배에 이어 포항북부교회 발인 예배 후 1983년부터 교육사업을 펼쳤던 선린대학교 교정을 거쳐 봄볕 따사로운 경주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김화문 기쁨의 교회 원로장로와의 인터뷰는 네 차례에 걸쳐 기쁨의 교회와 선린대학교 인산관에서 진행되었다. 인터뷰에는 기쁨의 교회 김정치 원로장로와 한동식 장로가 함께 배석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주었다. 수고해주신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저는 거룩하게 사회사업을 위해 이 병원을 한동대학에 기증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잠시 맡겨주셨던 것을 이제 하나님께 돌려드린 것뿐입니다.”

- 《빛과 소금》 1998년 11월호.

“이제 본인은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하여 양질의 의료 인력을 양성토록 추진할 것이며 보건계열 학과를 증설하고, 나아가서는 의과대학까지 발전시켜 고급 인력을 길러 지역은 물론 국가 발전에 기여하겠습니다.”

- 1983년 1월 문교부 제출 선린학원 설립 허가 신청서 중에서.

<끝>

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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