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문 ③<br/>전쟁고아와 어린이들에게 헌신한 삶
한 사람이 특정 분야에 오랫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마음먹는 것도 어렵지만 실제로 행동하기는 더 어렵다. 김종원 원장은 전쟁고아와 어린이들을 치료하고 보살피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하루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진료하고, 그것도 모자라 틈나는 대로 포항의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의료봉사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김 원장이 그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다. 김 원장이 전쟁고아와 어린이들에게 헌신했던 이유와 상황에 대해 들어보았다.
원장님은 어린이와 고아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있었어.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는데, 그 피조물이 이렇게 아프다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한테도 같은 맥락에서 차별 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틈나는 대로 선린애육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살폈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흥해애육원과 가톨릭애육원(성모자애원)까지 가서 아이들을 보살폈지.
이 : 김종원 원장님은 어린이와 고아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김 : 소아과 의사라는 점도 있지만 진심으로 어린이를 사랑하셨어. 그리고 세 아들을 북에 두고 온 것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겠지. 그 심정을 어느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보호자가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게 눈에 띄면 호통을 치는데, 세상에 어느 의사가 그렇게까지 하겠어.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행동이지. 그래서 아이들, 특히 고아들을 만나면 늘 따듯하게 보듬어주셨어.
이 : 어린이 환자들에게는 어떻게 대하셨나요?
김 : 원장님은 어린이와 고아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있었어.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는데, 그 피조물이 이렇게 아프다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한테도 같은 맥락에서 차별 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원장님의 인술은 깊은 철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어.
이 : 아픈 아이가 진료를 받으러 오면 무엇부터 하시던가요?
김 : 병원 진료실에 아이가 들어오면 안아서 등을 토닥이며 이름부터 불러주지. 그러고는 축복의 말씀을 해주고 나서 아이 엄마를 보고는 “아이를 어떻게 돌봤기에 이렇게 아프게 되었냐”며 한마디 하시지. 화장하고 오는 엄마들에게는 냄새와 알레르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아프다며 꾸짖는 바람에 병원 복도에서 화장을 지우는 엄마들도 많았어. 요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진풍경이지.
이 :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의 초대 소장을 맡으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를 치료했는지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김 : 내가 선린병원에 오기 9년 전의 일이지. 주변 사람들한테 들은 바로는, 소아진료소는 기증품으로 겨우 버텨 나갈 정도였는데 한 명이라도 더 돌보고 싶은 욕심에 전쟁고아를 무려 1천여 명이나 받았다고 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지. 그만큼 6·25전쟁 때 포항 전투가 치열했다는 얘기야. 길거리 곳곳에 고아와 남편을 잃은 산모들이 즐비했다고 하거든. 김 원장님은 어떻게든 한 아이라도 더 치료하고 보살펴주고 싶었던 거지. 포항뿐만 아니라 경주와 안강에서도 고아들이 몰려들었다고 들었어.
이 : 병원 진료 외에도 고아들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셨다면서요?
김 : 원장님은 휴일이면 선린애육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해. 당시 선린애육원은 120여 명의 전쟁고아를 돌보는 시설이었는데 잦은 병치레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어. 원장님은 틈나는 대로 선린애육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살폈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흥해애육원과 가톨릭애육원(성모자애원)까지 가서 아이들을 보살폈지.
이 : 소아진료소가 1956년 4월 미 해병의 철수로 존폐의 기로에 섰을 때는 어떻게 하셨나요?
김 : 원장님은 당장 약품을 구입해야 했기에 선린의원으로 이름을 바꿔 일반 환자들을 받기 시작했지. 하지만 여전히 고아가 최우선이어서 고아들에게는 무료 진료를 고수했어. 진료소는 1960년 6월 선린의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62년 8월 재단 이사회를 구성해 선린병원으로 새롭게 출발했지만 병원 경영이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재단법인 소유로 못박았지.
이 : 김 원장님은 무리하게 진료하다가 몸이 많이 상했다고 들었습니다.
김 : 의사이면서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는 분이었지. 요즘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 아닐까 싶어. 진료뿐만 아니라 온갖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지. 한번은 고아원의 겨울나기 준비를 하는데, 장작을 패다가 왼쪽 눈에 나뭇조각이 날아들어 동공을 다친 적도 있어.
“환자 두고 갈 수 없다”
넷째 걸수의 죽음
김종원 원장에게는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 그의 막내아들이 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그는 손에서 청진기를 놓지 않고 환자를 돌보았다. 유일하게 함께 월남한 막내아들 걸수가 서울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입시 공부를 하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다. 사고 소식을 접한 김 원장은 “내 아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나를 바라보는 환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면서 진료실을 지켰고, 끝내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다.
김화문 장로에 따르면 “지금 서울에서 아들이 죽어간다”고 하자, 김 원장은 “내가 거기 간들 살릴 수 있나? 살릴 수 있으면 달려가지. 그런데 살릴 수 없는 애 때문에 내가 가버리면 하루에 300명 넘게 오는 애들은 누가 진료하노”라고 했다.
김 원장의 부인인 송공현 여사가 급히 서울로 간 후 병원 직원과 북부교회 신도들은 김 원장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뒤늦게 서울로 올라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김 원장을 보고는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40대였던 김 원장의 머리가 며칠 사이에 허옇게 세어버린 것이다. 이 같은 아픔 탓인지 김 원장은 나이 어린 환자들을 보면 눈가에 촉촉하게 이슬이 맺히곤 했다. 걸수는 경주공원묘역 양지바른 곳에 묻혔고, 수십 년이 지난 2007년 봄날 김 원장은 먼저 떠난 자식의 곁에 묻혔다.
“폭격으로 군데군데 파인 포항 시내 웅덩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서너 명의 고아들을 보자 북에 두고 떠나온 세 아들 얼굴이 겹쳐지더군요. 그래서 영영 만나지도 못할 아들들 대신 고아들을 내 자식으로 생각하고 영원히 돌보기로 결심했었죠.”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헤매는 아이들을 보면서 북한에 두고 온 우리 아이들도 저러고 있겠구나…. 허름한 폐가라도 들어가 출산하려는 임산부들이 내 가족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월급이나 받아가지고 밥이나 먹고 살아서 되겠는가 싶어서…. 내 작은 기술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해보자는 마음으로….”
- 김종원 원장 생전 육성 고백 중에서
/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