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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잊을 수 없는 상륙작전

홍성식 기자
등록일 2022-09-14 18:42 게재일 2022-09-15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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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식 ②<br/>통영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
통영상륙작전에 참가한 AKL-901호(부산정).

해병대 창설 초기였던 1949년과 6·25전쟁 시기에는 해병대를 포함한 한국 군인들에게 변변한 무기 하나 없었다. 젊은 열정과 청년의 애국심이 가장 큰 무기였다. 그럼에도 해병대 1기생과 2기생들은 누구보다 용감하게 전투에 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미국 해병대와 함께한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미군 못지않은 용맹스러움을 발휘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이봉식 선생은 함상에서 유엔군을 지휘하는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기도 했다고 한다.

 

해병대 1기로 입대한 뒤 3개월 보름 후 2기를 뽑았어. 1·2기생 750명은 5개 중대로 편성돼 1949년 12월 제주도로 갔어. 제주도 모슬포에서 상황을 살피고 전투를 했어. 1950년 여름 인민군이 쳐들어오고 전쟁이 터졌다는 거야. 내가 속한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어. 기존 해병과 제주서 뽑은 3·4기생 3천명과 참전했지. 그 와중에 북한군이 통영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해병대 1기생이 통영상륙작전에 투입됐는데 나도 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은 참 자랑스러운 일이야. 내 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지. 전 세계 전쟁사에서 인천상륙작전만큼 경이로운 작전이 없었다고 하잖아. 그만큼 어려운 작전이었어.

 

홍 : 후배인 해병대 2기는 언제 입대했는지요?

이 : 내가 입대한 뒤 3개월 보름 후 2기 450명을 뽑았어. 해군에 가입대(假入隊)한 인원 중에서 가려낸 것이지. 3개 중대 규모였어. 그러고 나니 해병대는 1기와 2기를 합쳐 750명 정도 되었지. 우리가 훈련과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을 할 때는 해군에서 군복을 제공했어. 해군 세라복과 모자를 썼지. 수료식 후에는 진해 시내로 나가 아주 잠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홍 : 해병대 1기생들의 훈련 이후는 어땠습니까?

이 : 훈련을 마친 후에는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곧 전투에 나가야 했어. 우리가 “교육을 마치자마자 전투에 나갑니까”라고 물으니 “빨치산 1개 중대가 지리산에서 밤마다 파출소와 형무소를 습격하니까 너희가 가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어. 그때부터 해병대의 전투가 시작된 거지. 1949년 9~10월 사이에 2개 중대가 진주로 이동해 지리산에서 빨치산과 싸웠어. 지리산이 얼마나 험한 산이야. 어느 파출소가 약탈당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바로 거기로 출동해 전투를 하는 거야. 그게 12월까지 이어졌는데 3명 정도 전사했지. 그 뒤에는 해병대 1기와 2기생이 5개 중대로 편성돼 750명이 되었는데, 여기에 분대장, 소대장, 조교, 사령부 요원을 더해 1천여 명이 1949년 12월에 상륙선을 타고 진해에서 제주도로 갔어.

홍 : 1기생과 2기생 사이에도 군기가 있었는지요?

이 : 당연히 있어. 지금도 겨우 4개월 후배지만 2기생이 1기생에게 꼭 예의를 갖춰 대하지.

홍 : 제주도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요?

이 : 사령부는 시내에 있었고 우리는 모슬포에 있었어. 낮에는 교육받고 수색할 곳이 있으면 한라산 큰 숲이 우거진 곳을 찾아 상황을 살피고 전투를 했어. 그때 제주도의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

홍 : 전쟁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겠습니다.

이 : 1950년 봄까지 제주도에 있었어. 그런데 여름 어느 날 전쟁이 터졌다는 거야. 사령부의 상관들이 “북한에서 인민군이 쳐들어왔다”고 하더니 며칠 후에는 “서울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우리는 현장에 있던 사병들이니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 그런데 “인민군이 수원까지 내려왔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정보는 들을 수 있었어. 국군과 인민군의 전투가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이후에 알게 됐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진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는 죽기 살기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다짐뿐이었지.

홍 : 또 어떤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이 : 중대장과 대대장 등은 “전투 지역이 낙동강까지 내려왔다”, “대구와 포항을 기점으로 낙동강 전선이 확대되었다”, “부산을 뺐기면 제주도밖에 남지 않으니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고 했어. 그때 인천상륙작전 얘기를 들었어.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한반도의 허리를 쳐서 남한으로 내려온 인민군을 막아야 한다고 했지. 안 그러면 북한에 진다는 거야. 내가 속한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어. 작전은 미국 해병대가 주력이 되지만, 한국 해병대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지.

홍 : 인천상륙작전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이 : 그렇지. 한국 군대에 군함이 있나, 제대로 된 무기가 있나. 아무것도 없었어. 지급받은 총도 낡은 M1과 카빈 소총이 전부였으니.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 기존의 해병에다가 제주에서 뽑은 청년들로 1개 연대를 편성했지. 그때 군사훈련 경험이 있는 해병대 1기와 2기생이 분대장으로 선발되었어. 1950년 여름에 제주도에서 3기생 2천 명과 4기생 1천 명을 뽑았지. 대부분 제주 사람들이었고, 50~60명가량은 포항 사람이었어. 1개 연대를 만들어야 미 해군과 합동 상륙작전을 할 수 있으니 짧은 기간에 많은 군인을 뽑은 거야. 사실 3기생 가운데는 무학력자도 많았어. 17~18세 학도병들을 선발하기도 했고. 그런 3, 4기생들을 우리가 맡아 교육했지. 상부에서는 그들에게 해병대 정신을 심어주라고, 강한 군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재촉했어. 사실 제주도 출신 해병들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에 한국 해병대가 참전하지 못했을 거야.

인천상륙작전 때 인천 만석동에 상륙하는 한국 해병대.
인천상륙작전 때 인천 만석동에 상륙하는 한국 해병대.

홍 :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에도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 :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부대 편성을 하는 와중에 북한 인민군이 통영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통영을 뺏기면 부산까지 위험했지. 그래서 해병대 1기생 100여 명이 통영상륙작전에 투입되었어. 나도 거기에 갔지. 해병 250명 정도가 통영으로 갔어. 그런 와중에 나는 3, 4기생 교육 임무를 맡아 제주로 돌아왔어. 지금도 기억나는군. 당시 나는 해병대 제1연대 3대대 10중대 1소대 1분대장이었어. 3기생과 4기생을 20일 동안 교육했지. 각 소대에 총이 겨우 1정씩만 보급되던 어려운 시절이었어. 미군들이 사용하던 것이라 옷도 크고, 신발도 크고. 그래도 어떡하겠나? 줄일 것은 줄여서 사용했지.

‘해병대 50년사’는 통영상륙작전을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한군 제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해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년 8월 17일 일곱 척의 해군 함정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해 이틀 만에 전술 요충지 통영을 탈환한 후,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방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 :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했어. 미군의 지원이 컸지. 미군은 1개 사단이고 한국은 1개 연대로 구성한 부대가 움직였어. 그렇게 합쳐서 인천 항구로 들어갔지. 보급품을 받았는데 처음 보는 음식이 많았어. 어떻게 먹는지를 몰라서 끙끙대던 생각이 나는군. 제주도에서 상륙함정을 타고 그해 9월 10일쯤 부산항 4부두에 내렸어. 그다음에야 우리가 인천으로 간다는 걸 알게 되었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해병들은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어. 장비를 싣고 부산항을 떠나 인천으로 가는 미군 배에 올랐지. 사나흘 걸려 인천에 도착해 미군과 합류했어.

홍 : 그때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말해주시죠.

이 : 인천상륙작전 3~4일 전부터 서해에서 인천을 향해 포를 쏘고 비행기가 폭격을 했어. 순양함과 수송함 등 군함 260척이 모였지. 어느 순간 그것들이 다 도착하고 나서는 더 이상 군함의 이동이 없었어. 우리가 인천에 도착하고 하루쯤 지났을까? 우리가 타고 있는 배에서 20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정박한 군함에 맥아더 장군이 승선해 있는 게 보였어. 대량의 함포를 쏘고 상륙 지점으로 폭격이 떨어지던 시점이었지. 한국 해병대 1~4기 대부분이 거기 모여 있었어. 어찌 보면 대단한 장관이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은 참 자랑스러운 일이야. 내 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지. 전 세계 전쟁사에서 인천상륙작전만큼 경이로운 작전이 없었다고 하잖아. 그만큼 어려운 작전이었어.

홍: 인천상륙작전 당일은 어땠나요?

이: 작전 당일 오후 5시에 상륙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왔어. 한국 해병대 제1진 3대대 1열과 미 해병대가 함께 육지로 올라갔어. 뒤이어 군인들을 실은 배가 부둣가에 부대를 내려놓고 다시 돌아가 군인들을 싣고 오는 방식의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어. 우리 부대는 인천 월미도 앞에서 분대가 산개해 방공호를 파고, 밤 9시쯤에 전투식량을 먹었던 기억이 나.

대담·정리 : 홍성식기자 / 사진 출처 : 해병대사령부‘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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