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수 ③<br/>전쟁과 학도병 그리고 오천 미군부대와 하우스 보이
학창 시절에 해방과 6·25전쟁이라는 격변기를 통과했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선생은 아픈 허리 탓에 수시로 자세를 바꾸며 그 시절을 힘겹게 회상했다. 학도병 이야기를 할 때는 간간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참혹한 전쟁과 그 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박헌영이 남로당을 만들어서 좌익 교육이 많았지. 동학도 여기서 시작됐고… 중학교 4학년 때 6·25전쟁이 터지고 학생연맹이 주관이 되어 학도병이 됐지”
학도병 지원이 많았던 동지… 전쟁이 끝나고 9개월간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학생이 됐다
“오천은 해방 때 미군 주둔 지역으로 화려한 동네였어. 청림도 부자동네였지. 미군을 통해 자전거·껌·초콜릿·양담배 등을 사서 팔려는 장사꾼이 몰리기도”
오천 미군부대서 식모생활 한 ‘하우스 보이들’… 정지에 살면서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안 : 동지 다닐 때 운동부나 동아리 같은 활동도 하셨는지요?
이 : 포항 상업학교는 대구 상업학교를 형님으로 모셨어. 대구 상업학교 교사가 동지의 체육 교사로 와서 럭비를 가르쳤지. 경북에서 럭비 하는 데가 세 군데 있었는데 대구 상업학교, 대구 능인학교, 포항 동지야. 대구 아이들보다 포항 아이들이 덩치가 컸어. 연습 장소가 염밭 쪽인데 거기는 물이 빠지면 부드러우니까 연습하면서 깨지고 넘어져도 다치지 않았지. 대구는 전부 자갈밭이라, 거기에 시합 한 번 갔다 오면 얼굴을 다 버렸지. 포스코 다리를 건너면 그 일대가 전부 염밭이라. 일본이 들어와서 염밭을 일부 죽이긴 했는데, 대도, 해도 다 합쳐봐야 100세대가 안 됐을 걸. 대구 상업학교가 포항 아이들을 그렇게 키웠지.
안 : 학창 시절에 6·25가 터졌습니다. 학생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텐데.
이 : 남로당 박헌영이 해방될 때 영덕 창수에 와 있었어. 해방되자 박헌영이 포항으로 나오면서 남로당을 조직했지. 그 바람에 포항에서 남로당이 굉장히 강했어. 원래 동해안 이쪽이 그런 기질이 있지. 동학도 여기서 시작됐잖아. 동학혁명이 뭐냐면 쉽게 말해 왕권을 민권으로 바꾸자는 거지. 아무튼 박헌영이 남로당을 만들어서 교육하니 좌익이 많았지. 우리는 중학교 1학년 들어가면서부터 요즘 말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틈바구니에서 공부했어. 포항중학교는 우익인 학생연맹이 많았고, 동지에는 좌익인 학생동맹이 많았어. 6·25전쟁이 터지고 학생연맹이 주관이 되어 학도병이 됐는데, 학도병 지원은 동지가 가장 많았지. 내가 중학교 4학년 때 6·25가 났고 나도 군대를 갔어. 운이 좋아 험한 곳에 가도 손가락 하나 안 다쳤어. 몇 번 울기는 했지만.
안 : 중학교 4학년이면 요즘 학제로 고등학교 1학년인데.
이 : 4학년 마친 애들은 고등학교 졸업한 걸로 간주했어. 육사도 시험 치면 가고. 중학교 졸업이 고등학교 졸업이었으니까.
안 : 그럼 그것으로 학창 시절은 끝이었나요?
이 : 6·25전쟁이 끝나고 9개월간 군 생활을 마치고 나서 고2에 자동 편입됐어. 군대도 갔다 오고 나이가 많아서 규율부장을 맡았지. 6·25 전부터 힘이 좋았고 운동도 잘했어. 그런데 전주 이씨 집안이어서 씨름으로 소를 몇 마리 타도 집에는 한 마리도 못 가져왔어.
안 : 집에서는 힘쓰는 운동을 못 하게 했는지요?
이 : 씨름은 쌍놈이 한다고 해서 못 하게 했지.
안 : 규율부장은 힘이 좀 있었는지요?
이 : 내가 규율부장을 할 때 오천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 100명 이상이 출퇴근했어. 나이는 나와 비슷한데 동지 야간부를 다니니까 아무래도 수준이 좀 낮았지. 그 친구들은 미군부대에서 심부름하고 걸레질하고 빨래도 했어. 미군들이 하기 곤란한 걸 다 했지. 과거에 식모를 정지에 사는 간난이라고 해서 정지간나라고 했는데, 그런 셈이지. 그 친구들 형편이 얼마나 좋냐 하면, 일단 밥을 실컷 먹었어. 그리고 좋은 걸 먹어. 필요한 물건도 다 구할 수 있어. 자전거도 탔는데, 전부 일제 후지(Fuji)야. 미군들은 휴가를 일본으로 갔어. 그러면 하우스 보이들이 자전거 좀 사달라고 부탁을 해. 오천 부대에서 자전거 탄 아이들이 40∼50명씩 나와 봐라, 그 모습이 어떤지. 동지중학교 4, 5, 6회 아이들은 미군을 통해 나온 자전거를 탔어. 내가 규율부장이니까 등교 때 검사하면 주머니에 껌 아니면 초콜릿, 그리고 뭐가 나와도 나왔지. 라이타 돌도 나왔는데, 가져오면 팔아먹기 좋았어. 그렇게 당시에 미군부대를 통해 부속물이 많이 나왔어. 그걸 사려고 오천 부대에 장사꾼이 늘 서 있었지. 미군이 오면 뭐 팔 것 없냐고 물었어. 그러니 하우스 보이 주머니에는 늘 돈이 있었고, 말보르, 카멜 같은 양담배도 있었지. 하우스 보이들이 동지중학교에 많았는데 규율부장이라고 내 몫을 별도로 챙겨줬지.
안 : 오천 미군부대도 포항 역사에서 간단치 않은 의미가 있었겠습니다.
이 : 포항의 한 시절을 오천 미군부대가 먹여 살린 거지. 당시에 오천면은 큰 면은 아니었지만 화려한 동네였어. 순전히 미군 때문이지. 부대 하나가 주둔하면 동네가 살았어. 청림동도 부자 동네였지. 일단 밥을 안 굶어. 딴 데는 4, 5월이 되면 쌀이 없어 절절매. 해방될 때 여기는 미군 주둔 지역이야. 1950년대 해병대가 들어오고. 미군 주둔 지역이니까 양색시들도 와 있었어. 그 색시들도 알고 보면 하이 클래스야.
안 : 양색시가 하이 클래스라는 건 생소한 얘기입니다.
이 : 당시 양색시는 적어도 중학교는 나왔어. 기본적인 영어는 할 줄 알았지. 당시 여자들은 국민학교만 나와도 중상 클래스에 들어가. 내가 오천면 서기 할 때 양색시들과 대화하면서 왜 저렇게 됐을까 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 수준 있는 애들이 많았어.
안 : 청림동 일대에 그런 술집이 많았는지요?
이 : 그게 미군부대 입구에 있어야 미군들이 나오자마자 헌병 눈을 피해서 빨리 들어갈 수 있잖아. 헌병들도 웬만하면 모른 척했지.
안 : 포항수산대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했을 텐데 당시 수산대학교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이 : 포항수산대는 하태환 선생이 6·25전쟁 중에 설립했어. 재학 중에는 군대에 안 가도 되니까 학교에 서로 들어가려고 하는 바람에 오히려 포항 사람들은 못 들어갔지. 1, 2회 졸업생들은 서울 사람, 피란민, 대구의 유명한 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지만 실력 있는 사람들이었어. 포항 사람은 10%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외지 사람들이었지.
안 : 전쟁 중에 학교를 설립했다는 게 놀랍네요.
이 : 그렇지. 어쨌든 학교에 들어가면 2년 동안은 피해 있었지. 그만큼 학교 들어가는 게 힘들었고. 그런데 졸업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버렸거든. 그때는 동지초급대학교라고 했다가 나중에 포항수산초급대학이 됐어. 그런데 학생 수가 너무 적었어. 150명밖에 안 됐지. 어로과, 수산과, 증식과가 있는데 한 과에 50명이 정원이야. 이건 정규 학생이고 나머지는 청강생이라고 해서 한 과에 몇십 명씩 붙어 있어. 정규생은 150명인데 실제로는 300명 이상 됐지.
안 : 무슨 과에 다니셨는지요?
이 : 나는 고기 잡는 어로과였어. 입학할 때 군대에 갔다 왔고 가정적으로 안정돼 있어서 대학 다닐 때 운영위원회 회장을 했지. 학생회장인 셈이야. 그 덕분에 포항대학교 총동창회장을 20년째 하고 있고.
안 : 졸업하고 전공을 살렸는지요?
이 : 포항수산대가 2년제였으니까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해야 했는데 내가 바람이 좀 들었지. 일본에 가려다 못 가고, 여러 복잡한 일을 거쳤어. 그러다 군대 영장이 나왔어. 내가 그전에 9개월간 군 생활을 했으니 그걸 증명하는 게 귀향증이야. 부대에서 사진 같은 걸 붙인 거지. 당시 군대는 36개월 복무인데 국방부에 그 자료로 병적확인원을 내면 9개월간 면제를 받는단 말이야. 그런데 국방부에 병적 정리가 안 돼 있으니까 군번이 없다고 해서 인정을 못 받았어. 그 바람에 1956년에 재입대를 했지.
안 : 군대 갔다 온 대한민국 남자 상당수가 재입대 영장을 받고 다시 군대 가는 꿈을 꾼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재입대한 군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이 : 훈련소에 갔을 때 마침 연병장에서 씨름판이 벌어졌지. 내가 1등을 하니까 훈련병에서 대번 씨름선수가 되었어. 당시에 돈 안 들이고 운동하는 건 씨름밖에 없다 해서 육본에서 각 부대에 씨름부를 창설하라고 지시가 떨어진 거야. 명절 때는 지방 씨름대회도 나갔지. 내가 마지막으로 1958년 2군 사령부 씨름부에서 우승을 했어. 그때는 덩치도 컸고 씨름 실력이 대단했어. 그렇게 한 2년 군 생활을 하고 있는데 고향 동네에 큰 물난리가 났어. 당시에 여러 사유의 제대가 있었는데, 의가사제대 중에 수해가 나면 그 지역 군인들은 제대시켜줬어. 그래서 의가사제대 신청을 했더니 곧바로 제대라. 그렇게 25개월 정도 군 생활을 했지.
이석수
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