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6·25전쟁 때 피난민 도와주던 연일 주민들 고마워”

홍성식 기자
등록일 2021-08-01 18:33 게재일 2021-08-02 13면
스크랩버튼
이대공 ①<br/>8·15광복에서 6·25전쟁까지
이대공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이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던 포항제철소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이대공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이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던 포항제철소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한 사람의 생애는 어떤 방식으로건 그가 살아온 지역과 연관을 맺게 된다.

올해 산수(傘壽)에 이른 이대공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사업을 한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 10년 정도를 제외하면 인생의 대부분을 포항에서 보냈다.

8·15광복 직후와 6·25전쟁, 포항제철의 설립과 발전 과정, 포항공대 설립에 얽힌 이야기 등을 다섯 차례의 대담을 통해 들었다.

 

“1940년, 해방 이전에는 회람판이 돌았는데 거기엔 일제가 뉴스와 회보를 실었지. 일본은 우리를 철저히 통제했고, 좌파·우파 대결 등 데모로 사회가 혼란스러웠어”

“1950년 7월 말에 북한군이 포항까지 내려와 함락됐지. 그땐 피난 떠나기엔 늦었지. 가족들은 연일 쪽으로 갔었는데 자신들의 음식을 나눠주고 돕던 연일 주민들… 수도산에 올라간 학도병들이 목숨 걸고 돌진해 포항을 비롯 우리나라를 지켰지”

홍성식(이하 홍) : 1941년생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격동의 시기를 맞이한 것 같습니다.

이대공(이하 이) : 다섯 살 때 광복을 맞았고 열 살 때 전쟁을 겪었으니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 가정사도 그랬다. 해방되던 해에 두 살 된 동생이 콜레라로 죽었다. 콜레라에 걸리면 대부분 사망하던 시절이다. 백신도 없었고, 치료제도 없었다. 죽은 동생을 사과 궤짝에 넣고 아버지가 기도하며 입에 엿을 넣어주던 기억이 난다.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이니까. 그리고는 공동묘지에 묻었다. 아버지(재생 이명석)는 꿈을 펼치기 위해 열한 살에 영덕에서 대구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부친은 일본에서 공부했고, 책을 많이 읽은 분이다. 그 책으로 대본점을 했고,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극빈자는 면할 수 있었다.

홍 : 1940년대 포항 아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요?

이 : 해방 이전에는 동네에서 회람판이 돌았다. 일제가 거기에다 뉴스와 회보를 실었다. 일본은 철저히 우리를 통제했다. 우리 집이 그걸 읽고 나면 옆집에 가져다줬다. 좌익과 우익의 대결이 심각한 시절이었다. 큰형님(이진우)이 고등학생이었는데, 우파는 모자를 거꾸로 쓰고 좌파는 바로 썼다. 형님이 해방 이후 시내에 나가서 시위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위험하다고 말렸다. 그러면 형님은 맨발로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 데모를 하곤 했다. 사회가 혼란했다.

 

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정치세력들 사이에 형성됐던 ‘애국 대 매국(친일)’이라는 대립 구도는 신탁통치 실시 문제를 계기로 ‘좌익 대 우익’의 구도로 전환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 구도에서 역사적 정당성이나 과거의 친일 경력은 문제되지 않았다. 오직 상대방을 정국(政局) 무대에서 제거하고, 자신들이 의도한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이런 구도를 중심으로 양 진영은 각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격렬하게 대립한다. 한국 전체에서 벌어진 이런 상황은 포항에서도 예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 : 어쨌든 학생의 본분은 공부 아닙니까?

이 :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식은 모든 아이들이 가졌다. 가난한 시절이지만 교육열이 높았다. 당시 교사들은 지금과 달랐다. 억눌렸다가 해방된 경험을 한 교사들이니 남다른 의욕과 애국심이 있었다. 사도(師道)가 확립되어 있었다. 학부모들도 교사를 존경했다. 회초리도 많이 맞았지만, 교사의 매를 나쁘게 보지 않았던 시절이다.

홍 : 유년의 기억 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이 : 어릴 때라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으면 발이 페달에 안 닿으니 옆으로 올라타서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가 체인이 벗겨져 톱니바퀴에 다리를 다쳤다. 핏줄이 끊어졌다. 이후로 축구나 달리기 같은 운동을 하면 발이 불편했다. 그게 50대까지 이어졌다. 포항제철에서 은퇴하고 난 후에 미국에 가서야 혈관을 잇는 수술을 했다. 큰 수술이었다. 당시엔 요즘 아이들처럼 혼자서 온라인게임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공동체 놀이를 했다. 달리기를 가장 많이 했고, 낡은 공을 구해 축구도 열심히 했다.

홍 : 1940년대엔 가족들 간의 유대감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이 :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다. 지금 내 손자들도 똑같다. 새벽 4시면 일어나 다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아버지가 성경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 세대는 ‘군사부일체’의 이념이 몸에 밴 사회에서 자랐다. 당시 교감 선생님이 매질을 많이 했다.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때렸다. 게으름을 피우는 학생이 있으면 사람 만들겠다고 그랬던 것 같다. 사명감과 의욕이 없다면 체벌도 할 필요가 없다.

홍 : 학교에서 체벌이 허용되던 시대였군요.

이 : 약속을 안 지키거나 숙제를 하지 않거나 하면 주판으로 머리를 문지르기도 했는데, 교사들이 사적인 감정으로 한 체벌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낙오자로 만들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치던 시대였고, 아버지의 권위와 선생님의 권위가 인정되던 시절이었다.

홍 : 6·25전쟁 때 기억이 있는지요?

이 : 너무나 뚜렷하게 기억난다. 1950년 7월 말에 포항이 함락되었다. 그 전쟁은 명백한 남침이다. 1개월 만에 북한군이 포항까지 내려온 건 준비된 전쟁이었다는 이야기다. 당시에 아버지가 트럭을 빌려 짐을 싣고 피난을 가려 했다. 아버지가 사과 궤짝에 넣어둔 원고와 어머니의 재봉틀을 가지고 간 기억이 또렷하다.

홍 : 전쟁 때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

이 : 형산강 섬안 인근 다리에서 미군 병사가 피난민들을 제지했다. 피난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했다. 북한군이 들어와 있기에 피난민 중에 스파이가 섞였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고등학생인 형이 영어를 알아들었다. 포항이 함락되었던 때다. 콩과 밀을 볶은 비상식량을 둘러메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 지금의 영일대해수욕장쯤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짐이 많아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의 포항제철 근방에 참외밭이 있었다. 참외가 노랗게 익어 있었으나 아무도 따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쟁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탓이었을 것이다.

6·25 전쟁 당시 학산방파제(현 포항여객선터미널)에서 이루어진 미군의 포항 상륙(‘The New York Times’).  /이재원의 ‘사진으로 읽는 포항도심’,  나루.
6·25 전쟁 당시 학산방파제(현 포항여객선터미널)에서 이루어진 미군의 포항 상륙(‘The New York Times’). /이재원의 ‘사진으로 읽는 포항도심’, 나루.

홍 : 전투 장면을 보기도 했습니까?

이 :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미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당시 포항 인구는 5만 명이 안 되었다. 수도산은 거의 헐벗은 상태인데, 거기로 학도병들이 목숨을 걸고 돌진했다. 풀도 나무도 없어 전부 노출된 상태인데 “돌격~”이라 외치며 뛰어올라갔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교복을 입고서 총을 들고 돌진하는 그들이 안타까웠다. 거기로 북한군이 기관총을 쏘았다. 바라보던 어른들이 “저런, 저런” 하며 발을 굴렀다. 그 학생들은 전국에서 모여든 학도병들이었다. 부당한 일에 대항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걸 보니 숭고함이 느껴졌다. 학생들이 오죽하면 군복도 입지 않고 저러겠나 싶었다. 그들이 포항을 비롯해 우리나라를 지켰다.

홍 : 전쟁에 관한 또 다른 기억이 있는지요?

이 : 미군 비행기의 공습도 기억난다. 그때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는 걸 알았다. 비행기가 내려올 때 기총소사를 하는데, 총소리는 비행기가 올라가고 나서야 났다. 소리가 빛보다 느린 것이었다. 영일만에 미군 미주리호(Missouri號)가 들어왔다. 배에서 함포사격을 하는데, 그게 판세를 결정지었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인민군이 숨을 수 있었으나, 함포사격은 금방 포탄이 떨어지니 숨을 겨를이 없었다. 사격을 하던 미주리호가 환하게 불을 밝힌 장면이 떠오른다. 포항 시내로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 시내에 떨어져 터지는 폭음까지 생생하게 들었다. 어린 나이에 전투 장면을 실제로 목격한 것이다.

홍 : 가족들은 어디로 피난을 갔는지 궁금합니다.

이 : 포항이 함락된 후 미군이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연일 쪽으로 갔다. 식량이 모자라서 피난도 오랜 기간 버틸 수가 없었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임에도 피난민을 돕던 연일 주민들이 생각난다. 자신들의 음식을 나눠주던 고마운 이들이었다. 너나없이 힘들었고 정말 피폐한 때였다.

홍 :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가 컸을 것 같습니다.

이 : 포항 시내로 돌아오다가 형산강 다리에서 시체 한 구를 봤다.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포항은 피해가 심각했고 거리마다 고아들이 가득했다. 북한군들은 퇴각하며 불을 지르고, 미군은 소이탄을 쏴 도시를 불태웠다. “찌익~찌익~” 하는 소리가 두려웠다. 당시 포항은 대부분 목조건물이었으니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때 미군 부대와 함께 목사들도 왔다. 포항제일교회(현 소망교회)는 폭격을 맞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미국 ‘타임’지에 실렸다. 미군이 교회 십자가를 보고 폭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이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대공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발전협의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