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수 ⑤<br/>포항종합제철 건설, 그리고 사라진 마을들
종합제철소가 포항에 들어서면서 한 도시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극비리에 추진된 종합제철소 입지 선정 과정, 그리고 제철소 부지에 있던 원주민 마을에의 이주 과정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어본다.
안 : 당시 포항 부자들은 주로 어떤 사업을 했는지요?
이 : 거의 도정 공장을 했지. 한때는 대단했어. 내가 영일군 양정계에서 근무하던 1966년 3월까지는 굉장했지. 그런데 외국미가 떨어지고 나니 국내산만으로는 채산이 안 맞아서 공장이 문을 닫았어.
“제철 사업 조건에는 물이 풍부하고, 운송이 자유로워야 해. 포항은 영일만이 있지. 후보지에 오른 포항, 박 대통령이 ‘이거 됐네’ 한거야…. 모든 과정이 극비리에 됐지”
“이주 문제가 가장 힘들었어. 보상금 몇 푼이나 되겠어? 특별 상납금도 해줬지만 불도저 앞에 드러눕고, 지붕에 올라가기도…. 철거 때 이런저런 사연들이 많았지”
포항 동빈항은 1962년 6월 국제항으로 개항하면서 외국 선박과 외국 원조미를 조달하는 대형 선박이 입항하게 된다. 원조미의 60퍼센트는 포항에서 도정하고, 40퍼센트는 경주, 영천, 영덕 등에서 도정했다. 당시 지역에 변변한 산업 기반이 없었기에 도정업자들이 지역경제를 이끌었는데, 세금도 가장 많이 내고, 은행에서도 큰손 역할을 했다. 특히 현재 영남병원 앞에 자리했던 삼화압맥공장은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할 만큼 명성을 날렸다. 압맥은 기계로 누른 납작보리를 말하는데, 보리에 적당한 수분과 열을 가해 눌러줬기 때문에 통보리보다 밥을 지을 때 연료가 적게 들고 소화도 잘됐다. 연료가 부족했던 군대에 보급되던 압맥의 대부분은 삼화압맥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겨는 경주의 축산지로 보냈다. 원조미를 하역하려면 1톤에 보통 14장의 가마니가 필요했고, 원조미 2만 톤이 하역될 때마다 28만 장의 가마니와 엄청난 양의 새끼줄이 있어야 했다. 이를 전량 포항에서 조달했는데, 흥해에서만 일주일에 평균 5천여 장의 가마니를 생산했다.
안 : 포스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일군에서 근무할 때 포항종합제철 건설이 결정되었고, 관련 업무를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 1948년에 포항이 읍에서 시로 승격됐지만 사실 시(市) 행세를 못 했어. 거의 모든 업무는 사실상 영일군에서 했다고 봐야지. 어느 날 위에서 울산특별건설부 포항공사사무소를 설치하니 수도, 전기 사용이 가능한 100평 정도의 사무실을 내놓으라는 공문이 왔어. 포항에 그런 건물이라곤 소방서가 유일했지.
안 : 당시에도 소방서가 있었는가요?
이 : 일제 때부터 있었지. 경찰서 맞은편에. 경찰서는 나중에 생겼고. 소방서도 위에서 요구하는 100평이 안 됐어. 80평쯤 됐지. 펌프 같은 시설물을 포항국민학교 뒷마당에 갖다 놓고 텐트를 치고 근무했지. 그렇게 해서 소방서가 건설공사 사무실이 됐어. 그런데 그때는 포항종합제철이 들어오는지 아무도 몰랐어. 사무소 현판도 울산공업단지 포항공사사무소라고 했으니 누가 알았겠어. 나중에 정식으로 포항종합제철이라고 새겼어.
안 : 제철소 입지 선정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는 얘기인가요?
이 : 포항 사람들도 한참 동안 몰랐지. 그냥 큰 공장이 오는 줄 알았어. 1966년 말에 사무실을 구하고 이듬해 기공식을 했거든. 1965년에 한일협정으로 일본에서 지불한 대일청구권자금 일부가 포항제철 건설에 쓰였어. 아무튼 한 1년 동안 시민들은 전혀 몰랐어. 골탕 먹는 건 우리 실무자들이었지. 우리도 그렇게 큰일인 줄 몰랐어. 나는 조례를 만들고, 도에 가서 승인받는 일을 했지. 제철소 기반 조성에 필요한 토지 규모 등을 전부 조사하는데 4, 5개월밖에 안 걸렸을 거야. 포항이 제철소로 선정된 과정은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건설부의 류호문 계장의 역할이 컸다는 게 가장 유력해.
안 : 포항이 제철소 부지로 선정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 제철 사업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해. 첫째 물이 풍부해야 해. 포항은 형산강이 있지. 둘째 운송이 자유로워야 해. 그래서 바다를 끼고 있어야 하는데, 포항은 영일만이 있지. 원료도 철도 무거워서 이걸 운송하려면 바다를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거지. 한마디로 바다가 없으면 철을 못 만들어.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제철소 후보지를 건설부가 물색했어. 삼천포와 몇 군데를 후보지로 정하고 마지막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공무원과 기술 전문가들이 오천 비행장에 내려 보니 광활한 평야가 있고, 강이 보인단 말이지. 그전에는 포항이 희망을 안 했으니까 위에서는 몰랐는데 이렇게 좋은 데가 있나 싶었던 거지. 300만 평 규모가 되면 공장을 짓겠는데, 300만 평이 넘는단 말이야. 그래서 류 계장이 건설부가 지정한 여섯 군데 후보지에 포항을 추가로 넣었고,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이거 됐네’한 거야. 계획에도 없던 포항이 그렇게 제철소 부지로 지정되었지. 이 모든 과정이 극비리에 지정되는 바람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배수환 영일군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분이 나중에는 포항시장이 되었지.
안 : 비밀리에 그것도 단기간에 그렇게 큰일이 진행되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겠다. 가장 힘들었던 업무는 무엇이었습니까?
이 : 실무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이주 대책 문제였어. 굉장히 어려웠지. 전문가들이 와서 도면을 보고 ‘이걸 해야 한다’ 하면 우리는 그냥 ‘그래요’ 하고 따라갈 뿐이지 한마디 말도 못 했어. 당시에 나는 주사에 불과했어. 서울에서 오는 사람들은 전부 장관 바로 밑에 있는 사람들이라 군수도 말을 편하게 못 했지. 그런데 일개 주사와 이야기해보니 잘 통하고 일 처리도 척척 된단 말이야. 공무원 생활하기 전에 사업을 해본 게 큰 도움이 됐던 거지. 그러니 자꾸 나만 찾게 되고 내가 창구 역할을 다 했어. 그래서 나중에 건설부에서 날 데리고 갔지.
안 : 제철소 공사하던 중에 건설부로 옮겼나요?
이 : 제철소 착공하고 내 손으로 조례 만들고 일을 한참 하다가 1970년에 갔지. 여기서는 3년 6개월가량 일한 거지.
안 : 실무 중에 이주 문제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신다면.
이 : 말썽이 있었는데 당시는 군정시대야. 꼼짝 못 할 때였지만 반발이 심한 곳도 있었지. 내가 옆에서 봤을 때는 이주 보상을 받고 다른 데 가도 남을 정도는 된 거 같아. 그때는 집값이란 게 없어. 초가삼간이라는 게 9평이야. 그게 몇 푼이나 되겠어? 보상은 나름대로 했고, 부족한 사람은 특별 상납금 같은 걸 만들어서 해줬지. 그래도 반발이 심한 곳은 불도저 앞에 드러눕기도 하고, 안방에 앉아 끝까지 버티기도 했지. 자기 집을 철거하러 간 공무원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지붕에 올라가서 고함치는 일도 있었고. 이런저런 사연들이 왜 안 있었겠나.
안 : 건설 후보지에 마을은 얼마나 있었나요?
이 : 많았지. 동촌이라는 큰 동네가 있었어. 지금 포스코 본사 바로 맞은편이지. 그게 마을 가운데야. 굉장히 큰 동네였지. 양색시촌도 있었고. 동촌 맞은편에 인덕이 있었어. 현재 동촌 앞바다가 신항만이지. 길 건너는 청림이고. 청림은 살았고 동촌은 싹 사라졌지. 포스코 고로에서 100미터만 나가면 바다야. 거기는 송림이야. 송림 안쪽은 동네 이름이 송내야. 거기는 부뜸질하는 데라. 불에 뜸질을 한다고 해서 부뜸질이라 해. 요즘 말로 하면 일광욕하는 거지. 여름에 꼭 해야 할 것이 해수욕장에서 부뜸질인데, 그래야 피부병도 없어지고 건강에 좋다고 했지. 우리 어릴 적에는 피부병이 많았어. 멘소래담 이런 거 외엔 약이 없으니까 시꺼멓게 태우는 거라. 해수욕하는 것을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부뜸질하러 간다 그랬어. 거기가 포항 시내보다 좋은 부뜸질 장소였어. 바닷가는 송정이고 안에는 송내고. 그래서 송정, 송내 두 마을이 있었지.
안 : 이주 문제 외에 다른 문제는 없었나요?
이 : 동촌에서 기공식을 하기로 했는데, 마을 뒤 당산목을 베어야 했어. 그런데 그걸 누가 하려고 하겠나. 아무도 안 나서지. 기공식에는 대통령이 오기로 돼 있었지. 내가 공무원 생활하기 전에 목재상도 잠시 했기에 나무하는 사람들을 좀 알아. 대구에 50채 정도의 집을 지을 때 나무를 팔았지. 아무튼 평창에 있는 최수용인가 하는 사람한테 갔어. 나무는 둘이서 톱으로 베야 한다면서 돈을 많이 달라고 하는 거야. 돈은 달라는 대로 준다 하고 데려왔는데 막상 현장을 보더니 여기 사람들이 피하는 이유를 알겠다는 거야. 제단(祭壇)이기 때문에 잡신이 많이 붙는다면서 안 하겠다고 해. 그래서 나무를 베고 난 다음에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다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후에 굿을 이틀하고 나무를 벴지. 그리고 나서야 기공식을 했어. 그런 일도 일종의 풍속이어서 큰일을 하려면 받아들여야 했지.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공사하다가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되겠어. 큰일을 할 때는 제사도 지내고 밥도 먹여야 해. 기공식을 할 때 박 대통령은 못 오고 장기영 부총리가 왔는데, 대전쯤 올 때 파면 조치가 됐지. 그래도 기공식에 와서 오늘 내가 부총리를 그만둔다고 말하더군. 그 사람이 한국일보 사장을 했지. 그때는 한국일보가 대단했어.
이석수
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