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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면 9급 때 만든 식량증산계획 보고서가 전국 2등 차지”

등록일 2021-07-04 18:47 게재일 2021-07-0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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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수④ <br/>1950년대 포항의 문화 여건과 1960년대 농촌 현실
영일군청. 1916년 신축했으며 6·25전쟁 때 소실되고 1953년에 다시 지어졌다. 육거리에서 포항세무서 방향으로 난 길에 있었다. /사진 출처 : 이재원, ‘사진으로 읽는 포항도심’, 나루
영일군청. 1916년 신축했으며 6·25전쟁 때 소실되고 1953년에 다시 지어졌다. 육거리에서 포항세무서 방향으로 난 길에 있었다. /사진 출처 : 이재원, ‘사진으로 읽는 포항도심’, 나루

6·25전쟁 이후 포항에 다방은 몇 개나 있었을까? 또 극장은 있었을까? 그리고 농촌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을까? 포항에서 청춘을 보내고, 5·16 직후에 공무원이 된 이석수 선생의 육성을 들어본다.

“ 5·16 후 민선 지방공무원 연일 선출 1호야. 영일군 공무원 시험을 내가 처음 쳤지. 지방농업기원보로 발령 났어. 업무를 해보니 가장 중요한 농지 정리가 안 돼 있었지”

“1955년까지 다방이 다섯 개도 안 됐어. 극장은 하나 있었는데 6·25 때 없어졌지. 막걸리는 일꾼. 좀 노는 사람은 소주. 정종·청주 같은 고급술은 특별한 날에 마셨어.”

안 : 군 제대 후 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이 : 더 이상 공부하기는 곤란한 상황이어서 동서의 추천으로 서울에 있는 대명제약에 상임이사로 갔지. 가게 된 동기가 좀 웃겨. 대명제약이 불량배나 상이군인들 때문에 장사를 못 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자꾸 와서 뭐 해달라 요구하고 괴롭히니까 말이지. 그래서 회사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상이군인들도 나한테는 못 덤비니까.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전쟁 상태였지. 질서도 없었고. 경찰도 제대군인이나 상이군인들한테는 힘을 못 썼어. 작대기를 들고 마구 대드니까 경찰도 감당이 안 됐던 거야.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의 무법천지였지. 그렇다고 아주 악랄하거나 못된 행패를 부리진 않았어.

안 : 1950년대 중후반 포항의 청춘 문화는 어땠나요.

이 : 겨우 간다면 다방 정도지. 커피 마시는 게 최고였어. 술 중에 막걸리는 일꾼들이 먹었고. 좀 노는 사람들은 어쩌다 소주를 먹고. 소주를 맑은 술이라 했지. 정종이나 청주 같은 고급술도 맑은 술인데, 제사 때 같은 특별한 날에나 마시지 보통 때는 못 마셨어.

안 : 당시에 극장 같은 문화시설은 없었습니까.

이 : 1955년까지 다방이 다섯 개도 안 됐어. 그때 포항 인구가 5만 명이나 됐을까. 극장은 창고 같은 곳이 하나 있었는데 6·25 때 없어졌지.

안 :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지역도 다녔을 텐데, 전쟁 후에 다른 도시와 포항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이 : 대구, 밀양, 울산, 경주, 부산은 그나마 괜찮았지. 6·25 때 피해 지역이 아니니까. 나머지는 다 잿더미였지. 포항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유강 쪽도 인민군들이 야전병원을 차렸다고 아군 함포가 다 부숴버렸어.

안 : 포항에서 전쟁의 상흔이 사라진 게 언제쯤이었나요.

이 : 1960년대 접어들어서였지. 5·16 이후에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고 질서도 잡혀나갔어.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사람들도 움직였지. 그전까지는 전쟁 때문에 논둑도 엉망이었고 농기구도 별로 없었는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정리되었지. 그전에는 모심는 것도 두세 달 걸렸어. 수리개량사업이 안 돼 있어 물 대는 사람은 대고 못 대는 사람은 못 대고 그랬지.

안 : 공무원 생활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이 : 5·16 후 민선 지방공무원 연일 선출 1호야. 군(郡)에서 필요한 인원을 모집하는데, 영일군 지방공무원임용채용시험을 내가 처음 쳤지. 1963년 2월쯤이었고, 3월 15일 발령 났지.

안 : 주로 어떤 일을 했나요.

이 : 세 명이 성적순으로 발령 났는데 내가 1호였어. 오천면이 첫 발령지인데 행정직 자리가 없어서 9급 지방농업기원보로 발령 났지. 농업직으로 업무를 해보니 가장 중요한 농지 정리가 안 돼 있었어. 그때 농업증산계획을 수립하는 게 중요한데, 수리조합관계, 수리시설관계 등 농지 정리가 돼 있어야 했지. 논둑 정리 같은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 업무고, 동시에 식량 증산을 위해 각종 작물을 재배하는데 그전까지는 주먹구구였지. 그래서 농촌 지도소라는 전문기관이 생긴 거야. 식량 증산을 하려면 땅을 일궈야 하고 비료도 배급해야 하는데, 각 시군에 농산물 증산 운동을 하면서 농작물 재배계획서를 내라고 했지. 각종 작물에 대해 각 읍면에 계획서를 내줘야 하는데 식량 증산 5개년 계획이라고 해. 영일군은 12개 읍면인데, 오천면이 1등 했어. 내가 1등을 한 거지. 비결이 뭐냐 하면, 오천면은 영일군 전체의 농지구획사업 시범지구로 두고 농지구획사업을 하는 거야. 각 작물이 어느 동네에서 얼마만큼 생산되는지 나와야 해. 마을별로 작물 이름이 나오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보고를 못 하는 거야. 벼가 얼마, 옥수수가 얼마, 보리가 얼마인지 나와야 하는데 잘 안 돼. 작물 숫자가 보통 열다섯에서 스무 가지 정도 되지. 그런데 이 숫자가 잘 안 맞는 거야. 내가 주산 4급이야. 글씨도 잘 썼고 보고서도 반듯했지. 그때가 서른한 살이었어. 나이도 많고, 대학도 나왔고, 직장 생활도 했으니까 세상 보는 눈이 있어 공무원 생활에도 적응을 잘한 셈이지.

안 : 그때는 식량 증산이 국가적으로 얼마만큼 중요한 일이 였습니까.

이 : 식량 증산 계획이 나와야 비료 수급 계획도 나올 수 있고, 이런 계획이 우리나라 농업 정책의 밑바탕이 되었지. 1963년이 시발점이야. 내가 만든 보고서가 영일군에서 경상북도로 가고 농림부까지 간 거야. 전국에서 계획서가 다 올라가는 거지. 그때 내 보고서가 전국에서 2등을 해서, 청와대에 보고해야 했어. 작성자와 담당자 호출이 와서 나하고 농촌국장이 청와대로 갔지. 내가 면서기라 하니까 청와대에서 깜짝 놀랐어. 바로 서울로 오지 않겠냐고 하더군. 그때 서울 갈 형편이 안 됐어. 얼마 후에 영일군에서 날 데려갔지. 처음에는 농업직이니 농산계에서 식량 증산 계획 업무를 했는데 얼마 후에 양정(糧政)계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쪽으로 가라 그래.

1963년 청포도다방 앞에 모인 지역의 예술인들. 중앙상가 우체국 옆에 있던 청포도다방은 지역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1963년 청포도다방 앞에 모인 지역의 예술인들. 중앙상가 우체국 옆에 있던 청포도다방은 지역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안 : 양정계 사고는 무슨 얘기입니까.

이 : 암행감사가 오는데 외국미가 들어오는 입항지로 와. 포항이 입항지니까 포항으로 감사가 온 거지. 외국미는 벼로 가져오니까 도정을 전부 포항에서 해야 하고, 도정을 하려면 가마니가 필요해. 우리나라에서 가마니 생산으로 손꼽는 데가 흥해(興海)야. 많이 나올 때는 하룻밤에 1천 장씩 나와. 말이 쉬워 1천 장이지 전부 손으로 짜는데 엄청난 거지. 새끼는 혼자서 꼬지만 가마니는 혼자서 못 짜고 둘이 해야 해. 집집마다 밤새도록 가마니를 짜면 2, 3개 정도 만들어. 원래 농사 때문에 흥해에서 새끼와 가마니를 많이 생산했지만, 연안 고기를 잡는 어장(漁帳)을 만드는 데 필요해서도 많이 만들었지. 그물을 가라앉히려면 추를 달아 내리는데 가마니에 모래를 넣고 가라앉혀. 위에는 나무로 띄우고 밑에는 가마니에 모래나 흙을 넣고 가라앉혀야 해. 그래서 이 동네는 가마니가 무지하게 많이 들어가는 거야. 내가 양정계에서 근무할 때 가마니 짜는 게 기계화되기 시작했어. 그런데 1964년 2월쯤 사고가 났지. 감사원에서 부둣가에 재어 놓은 가마니를 검사하는데 가마니가 없는 거라. 돌리면 꼬부라진 나무가 들어가는 기계가 있어. 가마니 재어 놓은 데를 푹 찔러서 돌리면 안에 있는 게 조금씩 나와. 그러면 쌀 나오는구나, 보리 나오는구나 하는데, 이게 겉돌아요. 감사가 창고 문 쪽에 있는 가마니를 푹 찔렀는데 이게 겉도는 거야. 입구에만 가마니를 재어 놓고 뒤에는 전부 헛것이었어. 앞쪽의 가마니를 밀쳐보니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야. 무려 2, 3천 장이 없었지. 당장 3, 4월에 벼가 들어오면 큰일 아닌가.

안 :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 군수가 대책을 세워보라는데 방법이 있나. 그래서 군수한테 비는 수밖에 없다고 했지. 담당관을 조사해보니 어장에 가마니를 다 팔았다는 거야. 겨울어장을 설치했다가 2월이 되면 봄 고기가 들어오니까 어장을 바꿔야 해. 그러니 새로 그물을 가라앉히려면 가마니가 필요했던 거지. 보통 다음 달이면 이왕 채우니까 팔아먹은 건데 채우기 전에 감사가 온 거지. 그래서 사정을 설명하고 일주일 뒤 포항에 오면 완벽하게 채워놓을 테니까 용서해달라고 사정을 하니까 양해가 됐어. 그사이 일주일 만에 가마니 3천 장을 밀어 넣은 거야. 감사관들이 보고 깜짝 놀랐지. 도대체 이 많은 가마니를 어디서 가져왔냐는 거야. 그래서 공장 한 번 보여주고, 불법이지만 이 지역 특성상 어장에 가마니를 줬는데 언제든지 미곡이 들어오면 대응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니까 용서해주더군.

안 : 민간에서 만든 가마니를 군에서 사서 보관하는데, 그걸 어장 설치하는 사람들이 급하니까 먼저 빼돌려 쓴 것이네요?

이 : 그렇지. 농수산부에 가면 조작계라고 있어. 태평양 쪽에서 오는 배가 목포로 가느냐 동래로 가느냐, 아니면 포항에 가느냐 무전 치는 걸 조작이라고 하는데, 배가 오는 게 조작 담당관 마음대로야. 쌀을 필요에 따라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에 따라 운송비가 차이 나. 그래서 포항에 많이 들어왔어. 포항이 우리나라에서 도정하는 데 최고였으니까.

안 : 당시 공무원 월급이 어느 정도였는지. 아마 공무원 초년 시절에는 화폐개혁 전이라 환(圜으로 받았을 것 같은데.

이 : 그때는 환으로 받았지. 당시에도 공무원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었는데 정규직은 월급과 함께 밀가루를 받았어. 내가 공무원이 되기 전까지 공무원은 정규직이 얼마 안 되고 촉탁이 많았어. 당시에는 월급으로 현금을 별로 안 주고, 밀가루 같은 걸로 줬지. 국가재건에 재정이 많이 들어가니까. 1970년대 초까지도 월급보다는 물건이 많이 나왔어. 내가 1969년에 서울 갔는데 서울에서는 밀가루를 안 주더군.

선생은 월급명세서를 아직 모아놓고 있었다. 슬쩍 본 1970년대의 어느 명세서에 봉급 15만 500원, 수당 2만 원, 일반 공제액 6만 6천477원으로 차인지급액 10만 4023원이라고 적힌 빛바랜 잉크가 그 시절을 말하고 있었다.

이석수 선생.
이석수 선생.

이석수

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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