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이석수 <br/>① 일제강점기 포항의 교육 여건과 1950∼60년대 씨름판
구순을 바라보는 원로와 장시간의 인터뷰가 가능할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자마자 염려는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골격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고, 목소리는 또렷한 중저음이었다. 그는 유강에 사무실을 마련해놓고 지인들과 교류하거나 지역 현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그의 삶을 압축해놓은 듯했다. 넓은 책상과 응접탁자 위에 수십 권의 책과 서류, 메모지로 가득한 것이 노학자의 서재를 보는 듯했다. 그가 악수를 청했는데 악력이 그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그렇게 이석수 선생과 만났다.
“포항은 씨름이 센 곳이라 대회가 자주 열렸어. 포항고 박두진이 씨름협회장도 했지.
동지상고 교사 김종태는 고향이 영천 금오인데, 힘이 장사라 금오장군이라 불렀지”
김종태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 北은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대학’으로 개칭 예우했다
“1940년에 국민학교에 갔는데 우리 때부터 입학시험을 쳤어. 구술시험이었지.
이때부터 한글을 전혀 쓸 수 없었어. 학교에서 우리말을 하면 벌금을 내야 했지”
일제는 1941년 교육령 일부를 개정, 소학교 명칭을 ‘국민학교’로 바꾸고 조선어 말살을 시도했다
안준우(이하 안) : 젊었을 때 힘깨나 썼을 것 같습니다.
이석수(이하 이) : 젊은 날에 씨름을 좀 했는데, 처갓집에 소 여러 마리 갖다 줬지.
안 : 그 정도면 거의 선수였겠습니다.
이 : 선수 생활도 좀 했다. 당시엔 씨름대회가 많았지. 단오, 칠석, 명절 때는 전국 곳곳에서 대회가 열렸어.
안 : 포항에서도 씨름대회가 자주 열렸는지요?
이 : 포항은 씨름이 센 곳이라서 크고 작은 대회가 자주 열렸어. 기억에 남는 큰 대회는 포항경찰서 건립 기공식 때 열린 대회야. 1953년인가 이듬해인가, 그즈음에 기공식 기념으로 전국씨름대회를 했고 내가 3등을 했지.
안 : 전국대회 3등이면 대단했겠습니다. 씨름으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또 있었나요?
이 : 포항고 6회 졸업생 박두진이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나중에는 씨름협회 회장도 했지. 동지중학교는 경북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어. 동지상고 교사로 씨름을 가르친 김종태라는 사람도 있어. 고향이 영천 금오인데, 힘이 장사라 금오장군이라 불렀지. 동전을 손가락으로 구부릴 정도로 힘이 셌어. 그런데 이북에 몇 번 갔다 온 걸로 알려졌고, 구속되어 결국 사형을 당했지. 다행히 제자나 아는 사람은 포섭하지 않았어. 이북에 그이 이름을 딴 김종태 도로가 있다고 하지.
1968년 1월 한반도에 긴장감이 고조된다. 1월 21일 북한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고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 터졌고, 이틀 후에는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에서 북한에 나포됐다.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대규모 공안 사건인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한다. 김종태는 이 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된 인물로 1969년 그의 조카 김질락 등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북한은 1961년 9월 1일 개교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의 사형 집행 직후인 1969년 7월 12일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칭했고, 1990년 10월 ‘김종태대학’으로 개칭했다. 또한 ‘평양전기기관차공장’을 김종태의 이름을 따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로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김종태를 얼마나 예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 :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 1940년에 국민학교에 갔는데 우리 때부터 입학시험을 쳤어. 구술시험이지. 이때부터 한글을 쓸 수 없었어. 1939년까지는 한글이 있었는데, 조선어라고 해서 초등학교에서 일본 말을 가르쳤어. 우리가 입학하던 해부터 한글은 전혀 못 썼어. 학교에서 우리말을 하면 벌금을 내야 했지.
안 : 태어난 곳은 유강인데 국민학교는 어딜 다녔는지요?
이 : 연일국민학교를 다녔지. 공부를 가장 잘하는 데가 연일국민학교였어. 여기 떨어지면 포항국민학교에 가야 해. 그때는 포항국민학교가 아니라 영일국민학교라 했지. 어떤 지역에 학교가 필요하면 일본 사람이 학교명을 그 지역명으로 세웠지. 포항국민학교, 구룡포국민학교, 그게 전부 일본 사람 거라. 우리가 세운 학교는 그때 포항에 아마 두 개 있었을 거야. 창주국민학교라고 있었는데 그게 우리 거야. 안강국민학교는 일본이 만든 것이고, 안강제일국민학교는 우리가 세운 거지. 우리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 남부국민학교가 생겼어. 그때는 포항 제2영일국민학교라 했지.
안 : 구술시험은 어떤 식이었는지요?
이 : 일본 말로 물었지. 국민학생이니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었지. 차렷은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는 일본 말로 무엇이냐, 이런 걸 물었지. 남부국민학교가 생기기 전에는 연일국민학교 시험 쳐서 떨어지면 영일국민학교, 영일국민학교 떨어지면 양동국민학교로 가야 했어. 참 멀었지. 나중에 포항국민학교가 커졌어. 용흥동 포항의료원 근처에 교회가 있잖아. 그게 우리 어렸을 때 형산면사무소야. 우리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국민학교가 아니고 보통학교라 했지. 중학교는 고등보통학교. 1940년부터 학제가 바뀌는 바람에 많이 달라졌지.
안 : 연일국민학교까지는 꽤 멀었겠습니다.
이 : 우리 집에서 3.5㎞쯤 됐을 거야. 효자에서 넘어가는 다리는 없었고 잠수교가 있었지. 잠수교가 없어진 지 얼마 안 돼. 포스코가 들어오고 난 뒤에 없어졌지. 잠수교는 비가 오면 물이 이만큼 차서 못 건너가. 비 오는 날이면 학교 가려고 새벽 일찍 밥을 먹어도 큰 다리로 돌아서 갔어. 그 다리를 섬안 다리라 했는데, 현재의 섬안 다리는 아니야. 해도를 그때는 섬안이라 했지. 섬의 안이란 뜻인데, 해도, 상도, 죽도를 섬안이라 했어.
안 : 그때는 그 지역이 섬이었는지요?
이 : 그렇지. 삼각주 식으로.
안 : 과거 포항 지도를 보면 다섯 개 도(島)가 섬 안에 있더군요.
이 : 지금 형산(兄山) 맞은편에 제산(弟山)이 있지. 굴 있는 쪽이 제산이고, 건너 형님 산이라고 해서 형산이라. 제산은 동생 산인 셈이지. 형산강 강물이 위에서 내려오면 형산 제산 협곡에 와서 제 맘대로 가지. 제방이 완료된 게 1930년쯤일 거야. 신작로를 만들면서 제방을 하잖아. 제방을 하기 전에는 물이 내려와서 한 시절은 북쪽으로 흐르고, 한 시절은 남쪽으로 흘렀지. 그러니 나중에는 섬이 생기는 거라. 삼각주지. 아무튼 비가 많이 오면 잠수교로 못 가. 비가 조금만 와도 잠겨. 3학년, 4학년 되면 학교 안 가는 아이들도 있지만 부지런한 아이들은 일찍이 가. 섬안 다리를 건너 대송국민학교를 거쳐 연일국민학교로 가지. 학교는 연일국민학교가 주였고, 부수적으로 4년제 학교가 오천, 동해, 대송국민학교야. 4년 마치고 5학년 되면 연일국민학교로 가야 했어. 오천 쪽에 연일국민학교 출신이 많지. 오천에서 연일까지 20리가 넘어. 수업하다가 비가 와서 강물이 넘친다 싶으면 강북 아이들은 빨리 집에 가라 그랬지.
안 : 교사들은 어느 쪽 사람이었는지요?
이 : 우리 쪽 일본 쪽 반반이었는데. 교장, 교감은 다 일본 사람들이지.
안 : 어떤 과목을 배웠는지요?
이 : 국어, 산수 같은 걸 배웠지. 그리고 수신(修身)이라고 굉장히 중요한 과목이 있었지.
안 : 처음 들어보는 과목입니다.
이 : 윤리, 도덕이지. 그 과목이 아주 중요했어. 아침에 학교 가면, 요즘으로 치면 일본 시를 외우는 식이었지. 그때 일본 사람들은 정신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어. 그래서 월요일 첫 수업은 어느 학교 할 것 없이 수신 시간이었지.
일제는 1941년 3월 교육령 일부를 개정해 ‘초등학교 규정’을 공포하고 종래 소학교라는 명칭을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의미하는 것은 “동아 및 세계에서의 일본의 역사적 사명을 감안해 국민의 기초를 완수할 수 있는 교육체제를 확립”한다는 것으로, 바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국민을 양성해내는 교육이 목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개편에서 종래 선택과목으로나마 존속하고 있었던 조선어 과목을 완전히 폐지해 조선어의 말살을 시도했다. 시행령을 살펴보면 1조 1항에서 국민학교의 교과는 국민과, 이수과, 체련과, 예능 및 작업과로 나누었으며, 2항에서 국민과는 수신, 국어, 국사 및 지리 과목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안 : 일제강점기에는 국민학생들에게도 노역을 시켰습니다. 혹시 기억이 있는지요?
이 : 4학년부터 상급반인데 근로소년단이란 것을 만들어 일을 시켰어. 연일국민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데리고 밭농사를 많이 했지. 여름에는 풀을 해서 퇴비를 많이 만들라는 거지. 학교 별로 시합도 붙였지. 운동장도 반 이상 갈아서 작물을 했어. 그래서 우리는 학교 갈 때마다 풀을 베어 말려서 가져갔지. 겨울에는 보리를 밟았어. 4학년부터는 완전히 일꾼 취급을 했어. 소나무를 치고 나면 진이 나오잖아. 그걸 꼬아서 기름을 만드는데, 포항에는 성모병원 올라가는 데 꼬는 곳이 있었어. 일본 말로 ‘소카이’ 기름공장이 거기야. 4학년부터는 소카이 따러 가고, 그다음에는 풀 베러 가고, 겨울에는 심지어 소똥 말린 걸 가져갔지.
안 : 어린 학생들에게 그 정도 노역을 시켰다면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었겠습니다.
이 : 집집마다 일주일에 며칠간 일하러 나오라, 부역하러 나오라 명령이 떨어졌지. 우리 집에는 한 달에 열 품이 떨어졌어. 열흘 나와서 일하라고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 집은 소하고 구루마(수레)하고 일꾼들하고 가서 사흘만 하면 됐지. 소도 한 대가리, 구루마도 한 대가리, 사람도 한 대가리. 그런 게 없는 사람들이 열흘 일할 때 우리 집은 사흘만 하면 됐어.
안 :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는지요?
이 : 우리 동네에는 서른 가구 남짓 살고 있었는데, 구루마 있는 집이 세 집 정도 됐어. 구루마 있는 집은 보통 일꾼이 두 명이야. 새끼 일꾼이라고 하지. 우리 집은 논이 많아서 일제 때 공출이 200가마쯤 됐어.
안 : 강제징용 피해자는 어느 정도였는지요?
이 : 포항은 징용 피해자가 다른 곳보다 적었어. 그 유명한 포도농장 덕분이지. <계속>
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이석수
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조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