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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대의 포도농장 덕분에 포항은 덕을 많이 봤지”

등록일 2021-06-27 19:04 게재일 2021-06-28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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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수② 미츠와 포도농장 그리고 김용주, 하태환
1930년대 포항역. /사진 출처 : 이재원, ‘사진으로 읽는 포항도심’,

인터뷰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진행되었다. 마침 선생은 허리를 다쳐 병원에 다녀온 후라 인터뷰를 제대로 소화해낼지 걱정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동양 최대 규모였던 포항 포도농장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해방 전후 포항을 이끌어갔던 주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미츠와 포도농장이라고, 규모가 대단했지. 우리나라 농사 제도도 바꿔버린 거야.

나중에 농장을 밀고 비행장을 만들었지. 그 때문에 일본에 갈 징용을 덜 가게 됐고”

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와인 수입이 힘들어지자 포항에 동양 최대 규모 포도밭을 만들었다

 

“7월 10일 열차가 개통됐지. 그전에도 열차가 있었지만 폭 좁은 협궤 열차였어.

그 협궤 바깥 틀에 철로를 놓고 협궤를 뜯어냈지. 이게 지금의 국제 규격이야”

포항역은 1918년 협궤로 시작해 1945년 표준궤 개통, 지금은 사라진 구 역사를 신축 준공했다

안 : 포항 포도농장은 동양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는데, 가 본 적이 있는지요?

이 : 포도는 해풍을 맞아야 맛이 좋아져. 미츠와(三輪) 포도농장이라고, 규모가 대단했지. 어릴 때 소풍을 포도농장으로도 갔어. 너무 오래돼 기억이 흐릿한데 여하튼 끝도 없이 큰 포도농장이었지. 그 포도농장이 뭐가 특이하냐면 우리나라에서 농사짓던 제도를 바꿔버렸어. 집단 농사로 바꿔버린 거야. 우리는 옛날에 집단 농사가 아니거든. 그리고 우리는 농사를 지으면 품앗이를 해. 서로 품을 나누지. 그런데 일본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거야. 우리나라에 없던 현금 지급 제도가 생긴 거지. 나중에 포도농장을 밀어버리고 비행장을 만들었잖아. 그 비행장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이 살았어. 왜? 비행장 징용 때문이지. 일본으로 가야 할 징용을 전부 그 비행장으로 보낸 거야. 그래서 포항은 일본 강제징용이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지역보다는 덜한 편이었지. 아무튼 포도농장 덕분에 포항은 덕을 많이 봤어. 품앗이가 아니라 돈을 지급하는 식으로 농사 제도가 바뀌었고, 비행장을 만드는 바람에 징용을 덜 가게 됐고. 해방 후에는 미군이 들어와서 미군 덕을 봤지. 6·25 때 해병대가 없었으면 여긴 다 날아갔을 거야. 미군이 와 있었기 때문에 안 넘어갔지.

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와인 수입이 힘들어지자 포항에 와인용 포도밭을 만들어 와인을 대량생산했다. 지금 해병사단 안에 있는 일월지와 골프장 일대, 청림동 해병 숙소 일대와 동해, 도구에 걸쳐 약 200만㎡에 이르는 동양 최대였다고 한다. 1931년 6월 25일자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1930년 포도 수확 5만 관(20만㎏)에 포도주(미츠와 포도주-포도 농장주 이름이 미츠와 젠베에(三輪善兵衛)였다) 1천 석(18만ℓ)과 브랜디 100석(1만 8천ℓ)를 생산했다. 제품도 프랑스 고급 와인에 뒤지지 않고, 향도 비할 데 없이 좋을 정도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조선의 경북이란 지역에서 일본 최고의 국산품이 나온다면서 ‘포도는 야마나시(山梨)부터’라는 말이 예부터 전해지지만 오늘날에는 ‘조선의 경북’으로 고칠 필요가 있다고 기록했다. 미츠와 농장은 1939년까지 포도주 1천500석(27만 ℓ)을 생산했으며, 그 후 일부 지역에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한때 직원 15명, 한국인 인부가 연인원 3만 2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삼륜포도주공사’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까지 와인을 생산했지만, 그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선신문 1930년 12월 13일자 6면에 실린 미츠와 와인 광고. /이미지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신문 1930년 12월 13일자 6면에 실린 미츠와 와인 광고. /이미지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안 : 해방 무렵 인상 깊었던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이 : 그해 7월 10일 열차가 개통됐지. 그전에도 열차가 있긴 했는데 폭이 좁은 협궤 열차였어. 그 협궤 바깥으로 틀을 짜고 철로를 놓았어. 다 놓고 난 다음에 협궤를 뜯어냈지. 이게 지금도 사용되는 국제 규격이야. 그리고 아마 8월 15일 포항, 경주 간 철로가 개통됐을 거야.

협궤는 현재 국제 규격인 표준궤보다 폭이 좁은 철로를 말한다. 포항역은 1918년 11월 1일 협궤노선의 보통 역으로 영업을 시작해 1945년 7월 10일 표준궤를 개통하고, 지금은 사라진 구 역사(驛舍)를 신축 준공했다. 당시 철도 시설은 일본의 독점적인 사업이 돼 한국의 이익보다 일본의 독점적인 이익이 되었다. 한국인을 강제 동원하고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부설된 철도는 일제에 높은 수익을 안겼다. 1936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그해 봄, 포항, 영덕, 청송 등지의 500여 명이 만주 이민 열차로 포항역을 떠나는 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남루한 의복에 허술한 보따리에 바가지를 단 것을 지고 이고 어린 자녀들을 혹은 업고 손목을 이끌고 혹은 늙은 부모를 이끌고 창백한 얼굴에 눈물을 머금고 정든 고향과 친척들을 이별하는 비애에 싸여 프레트 홈은 일시에 눈물바다를 이루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한다.”

안 : 우리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에 유년 시절을 보내셨는데,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한 가지만 더 얘기해주시지요.

이 : 정치인 김무성의 부친인 김용주 선생과 나의 부친이 알고 지내던 사이인데, 김용주 선생이 포항에서 처음 열린 신식 결혼식에 주례를 섰지. 1938년인가 1939년쯤인데, 그 결혼식에 우리 집안도 초청을 받아서 할머니가 다녀왔어. 김용주 선생은 부산제이공립 상업학교를 나와서 스무 살 때 포항 식산은행에 들어갔지. 몇 년 근무해보니 돈은 고기 잡는 사람이 아니라 파는 사람이 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래서 식산은행을 나와서 운수사업을 했어. 나중에 청어로 생선 기름 만드는 비누공장을 차리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그 사업을 시작했지. 아무튼 돈을 벌어서 사립학교를 인수해 영흥국민학교를 만드는데, 교장으로 있을 때 그 학교 여교사 결혼식 주례를 섰지. 신랑은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회장이라. 할머니에게 신식 결혼식은 뭐가 다르냐고 하니까 색시 얼굴을 실컷 봐서 좋더라고 하는 거야. 그전 결혼식에는 색시 얼굴을 볼 수 없었지.

해촌(海村) 김용주는 동빈동에 정어리기름으로 비누 만드는 공장을 세웠다. 당시 영일만 일대에는 정어리와 청어가 많이 잡혔는데, 정어리가 너무 흔해 생선 취급도 받지 못했다. 지금의 송도 다리 건너 왼쪽에 일본인이 경영했던 정어리기름 공장이 있었는데, 이 정어리기름은 주로 식용으로 쓰였지만 비누 및 약품 제조에도 이용되었다. 해촌은 사재를 털어 구 제일교회 앞에 있었던 영흥학당을 정규 과정의 영흥보통학교로 만들었다. 포항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인 셈인데, 해방되면서 공립학교로 바뀌어 개교 100년을 훌쩍 넘겼다.

안 : 당시 중등학교 상황은 어떠했는지요?

이 : 일본이 들어와서 학교를 세우는데, 처음엔 서울, 평양, 대구 등 세 곳을 중심으로 했어. 대구가 포화 상태가 되자 다섯 개 도시의 책임자를 불러 학교를 세우라고 했지. 포항, 안동, 상주, 김천, 경주가 그곳으로 나름대로 학교의 기능이 필요한 지역이었지. 포항도 학교 하나를 가져가라고 하니까, 경주나 다른 곳도 그렇지만 전부 남자 중학교만 원했어. 안동은 나무가 많아 농림학교를 원하고, 상주는 누에고치를 하니 농잠 중학교, 김천은 당시에 사립학교가 있었고, 그런데 포항은 아무것도 없어. 포항은 여학교를 가져가라고 해서 남자 중학교가 못 오고 여학교가 먼저 왔어. 그래서 포항여중이 1939년에 먼저 생겼고, 포항중학교가 생긴 건 1943년이지.

안 : 그럼 포항중학교에 입학했는지요?

이 : 시험을 쳐서 포항중학교에 합격했지. 그런데 하태환 선생이 동지중학교를 세웠는데, 큰삼촌하고 연일국민학교 10회 동기였어. 삼촌은 읍사무소 총무계장인가 했고. 동지중학교는 1946년 3월 5일 개교했는데, 그때는 사립을 한 수 낮춰 봤어. 가난한 애들이 가는 데가 사립학교였던 거지. 포항중학교는 좀 괜찮게 사는 애들이 갔고. 그런데 포항중학교에 가려면 여기서 창포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오죽했겠나. 왕복 50~60리라. 그때 동지에서 자기네 학교에 오면 학비를 면제해준다고 삼촌을 통해 제안이 왔어. 그래서 포항중학교 간 지 사흘 만에 동지중학교로 갔지. 당시 동지중학교는 죽도시장 앞에 있는 아파트 부지에 있었어. 원래 그 자리는 일본이 군량미를 실었던 미곡 창고였고. 일본이 떠나고 나니까 학교를 그곳으로 옮겼지. 원래 동지중학교가 어디서 시작했냐면 지금 포스코 1고로 있는 데서 100m만 가면 해변이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야. 거기에 일본 80연대가 있었고, 해방 후에 이 빈터를 깔고 앉은 게 동지중학교지. 그런데 그 주변이 전부 군영 땅이라 동지중학교는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어 죽도시장 건너 미곡 창고로 갔어.

안 : 혹시 동지중학교를 설립한 분들 중에 아직 살아 있는 분도 있는지요?

이 : ‘6인회’라고 하는데, 그때 대학을 나온 여섯 명을 모아 하태환 선생이 상업학교를 세웠지. 창설 멤버가 6인이야. 다 돌아가시고 한 사람만 살아 있어. 강만철 씨라고 올해 아흔아홉이지. 이분이 스물세 살에 일본 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나중에 초대 도의원을 지냈어. 내 담임이었는데 지금도 가끔 나랑 대화하지. 나는 3월에 입학해 그해 9월에 학적 변경 때문에 2학년이 되었어. 9월 학기제가 3월로 바뀐 게 30년 정도밖에 안 돼.

안 : 당시 학창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이 : 힘들었지. 대구 상업학교는 형편이 좋아서 주산도 배우고 전표도 배웠는데, 우리는 실습 용구를 살 형편이 안 됐어. 남들 책을 얻어서 보고, 주판 살 형편이 안 돼 빌려서 썼지. 주판이 꽤 값이 나갔어. 당시에는 상업학교에 많이 진학했어. 상업학교라도 나와야 면서기를 한다고 말이지. 인문계는 관직으로 가고, 상업학교는 은행을 비롯해 경제 쪽으로 갔지. 하태환 선생이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상업학교를 빨리 세운 거야.

이석수 선생.
이석수 선생.

이석수

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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