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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 이진우의 권유로 경기고, 서울대 법대 진학”

홍성식 기자
등록일 2021-08-03 18:37 게재일 2021-08-0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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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공 ②<br/>1950년대 초·중학교 현실과 경기고 시절
학산 아래로 포항여자고등학교(왼쪽)와 포항중학교가 보인다(1972년). /이재원의 ‘사진으로 읽는 포항도심’, 나루.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중반 대부분의 포항 사람들은 가난했다. 그럼에도 ‘배워야 살고, 공부만이 빈곤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에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당시 학생들은 어떤 꿈을 꾸며 미래를 그려갔을까?

 

“전쟁 참화 속 ‘교육만이 살길’이라는 어른들로 인해 가마니 깔고 노천 수업을 했지.

미국에 의존했던 시절, 한글은 물론 영어공부도 하라고…. 교사들 열정이 대단했어”

“고등학교 땐 참고서가 없어 교과서를 모두 외우다시피 했지. 선행 학습이 된거지.

경기고 학생 대부분 ‘금수저’였고, 재학생 60%가 서울대에 갔고 나도 법대를 갔지”

1952년 3월 5일 포항시 대신동 16번지에 개원한 선린애육원.
1952년 3월 5일 포항시 대신동 16번지에 개원한 선린애육원.

홍 : 10대 중반 시절의 추억을 말씀해주신다면.

이 : 전쟁의 참화 속에서 먹고살 방법이 거의 없었다. 농사도 힘들었다. 우리도 논밭이 없었다. 미군 구호품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시기다. 밀가루와 버터 등 미국이 보내주는 여러 가지 생활물품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 포항에 고아들이 많아 선린애육원이 만들어졌다. 포항제일교회가 주도했고 아버지가 앞장섰으며 미군들이 도왔다.

홍 : 전쟁 직후엔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

이 : 열세 살 국민학교 졸업반 때는 폭격을 피한 공장에서 가마니를 깔고 노천 수업을 했다. 죽음의 공포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교육열은 저마다 특별했다. 대한제국 멸망 후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어른들이 많았다. 교사들은 일제강점기 36년과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했다. 죽어도 공부는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포항국민학교를 다녔다. 한 반이 40~50명이었고 6개 반이었다. 한 학년이 250명쯤 됐다. 전교생은 1천명이 넘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학업에 열정을 가졌다. 이후 포항중학교에 입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지중학교가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

홍: 1950년대 포항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어떤 환경에서 공부했는지요?

이: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교사들은 조회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다. “배워야 산다”고. 한글을 제대로 습득해 우리말을 쓰고 읽고 익혀야 한다고 그랬다. 독서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앞으로는 미국과 관계를 맺어야 하니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당시 교사들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지금 한국은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지만 그때는 대부분 빈곤에 시달렸다. 광복 후의 혼란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교사들은 애국자였고 제대로 교육하겠다는 의욕이 높았다. 학생들을 단호하게 지도한 것도 그런 열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홍 : 그런 상황에서도 즐거운 추억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 당시의 내 또래 학생들은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싸워서 남에게 지면 안 된다는 의식이 있었다. 포항중학교 근처 희망고개에서 적지 않은 싸움이 있었다. 지금처럼 지저분한 싸움은 아니었다. 마주 선 상대 중 한 명의 코피가 터지면 끝나는 깔끔한 싸움이었다. 왕따 같은 건 없었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맞붙곤 했다. 고등학교 때 서울에 가서는 그 싸움 실력을 써먹었다. 1년에 한 번쯤 다툼이 있었는데 내가 다 이겼다. 공부도 코피가 터질 정도로 했다. 참고서가 없어서 교과서 한 권을 다 베끼기도 했다. 국어, 수학, 영어 교과서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선행 학습이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2~3학년 교과서를 다 베꼈다. 총기(聰氣)가 있을 때라 내용이 외워졌다.

홍 : 당시 교사들은 어떤 태도로 학생들을 가르쳤는지요.

이 : 교사들은 학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학생들이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더해졌다. 영어 선생님은 특히 인기가 좋았다. 웅변대회에 나갔던 경험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는 교사와 학생들 간에 신의가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숙제라도 성실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하루에 물구나무 10번 서기’라는 숙제를 내준다면 지금 학생들은 그걸 하겠나.

홍 : 고등학교 시절은 서울에서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이 : 1957년 포항을 떠나 서울 경기고등학교로 갔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형님이 영어의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에 대해 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니 다른 영어 문제를 또 질문했다. 그것도 답했다. 그랬더니 형님이 나를 서울로 데려갈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서울대 사범대에 다니고 있던 누나는 서울대 사대부고에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형님이 서울대 주요 학과를 보면 경기고등학교 출신이 많으니 거길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재원의  ‘사진으로 읽는 포항도심’,  나루.
이재원의 ‘사진으로 읽는 포항도심’, 나루.

홍 : 경기고 입시와 서울대 입학 당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이 : 당시 포항엔 입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서울에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가니 선택과목이 상업이었다. 그걸 한 달 반 동안 공부해서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합격했다. 경기고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였다. 내가 입학할 당시 경기중학교 학생 대다수가 경기고등학교에 왔고, 다른 학교 출신은 전체의 10%인 60명 정도였다. 경기고 교사들은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학생들도 대부분 ‘금수저’였다. 서울대 입시에 가보면 경기고 교복을 입은 수험생들이 넘쳐났다. 조선일보에 난 기사 ‘한국의 파워엘리트’에 따르면 당시 경기고 학생 중 60%가 서울대에 갔다. 내가 입시를 본 해에도 전교생 중 360여 명이 서울대에 들어갔다.

홍 : 서울대 법대 진학은 어떻게 결정하셨는지요?

이 : 공부를 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원래 법대보다는 천문기상학이나 지질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형님이 말렸다. “너, 그 학문을 공부하면 외국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하는데 힘들다”며. 사실 그때 제대로 된 일기예보가 있었겠나, 지질학과를 나와서 취직이 됐겠나. 그래서 법대로 갔는데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법대 진학은 내 결정이 아니라 형님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었다.

홍 : 고등학교 시절에 친한 친구는 누가 있는지요?

이 :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이 고등학교 동기다. 그 친구 집을 가보니 건물부터 내부까지 전부 으리으리했다. 나는 대본소집 가난한 아들인데, 친구는 선대부터 큰 부자였다. 요샛말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인데 공부까지 잘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는 가업을 이어받아 회사를 경영했다. 세계적 로펌 김앤장의 창업자 김영무와 전남 목포의 큰 주류업체 사장 아들도 고등학교 동기다. 김영무의 어머니는 고종(高宗)의 영어 통역사였다. 권력과 돈을 가진 집안 아이들이 경기고에 적지 않았다. 김영무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그 당시 집 안에 에어컨과 냉장고가 있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홍 : 사법시험은 보셨나요?

이 : 1960년대 초중반엔 사법시험 합격자가 겨우 20여 명이었다. 나도 모든 걸 걸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결국 합격하지 못했다. 김영무는 시험을 보다가 구토를 했는데, 약도 먹지 않고 시험을 마쳤다. 약을 먹으면 정신이 흐려져 공부한 걸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판단에서였다. 서울대 법대 시절엔 나와 동기들 모두가 목숨을 내놓고 공부를 했다.

홍 : 1960년대엔 서울과 포항을 오가며 생활하셨지요?

이 : 대한민국이 격변하는 시기였다. 대학 때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서울대 도서관이 동숭동에 있었는데 걸어서 10분 거리에서 하숙했다. 법대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놓고 밤낮없이 사법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1967년에 포항제철 입지가 결정됐다. 10월 1일이었다. 포항은 그전까진 별다른 생산시설이 없었다. 나는 방학 때도 포항에 가지 않고 서울에서 공부에 전념했다.

홍 : 포항의 친구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요?

이 : 포항은 조용한 어촌이었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객지로 나갔다. 포항에서는 큰 꿈을 펼치기가 힘들었다.

 

이대공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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