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③ 1970년대 포항의 새마을운동과 새마을부녀회장
여성단체가 거의 없던 시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새마을부녀회는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적인 통로였다. 그 통로에 첫발을 딛고 열정적으로 걸어갔던 김경희. 세 번째 만남에서는 1970년대 포항에서 일어났던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포항의 변화와 여성들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70년대 어려운 시절, 새마을운동이 있었기에 포항이 자생력을 갖추었다고 봐. 24개 동에 새마을부녀회 홍보 등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열성적으로 활동했지”
“1985년 전국소년체전 날, 비 오는 종합운동장에 고인 물을 손바닥으로 퍼내고… 더러운 주변을 치우고 생활개선 활동까지… 부녀회원들은 단합·화합이 잘 됐지”
최 : 삶을 돌아볼 때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 : 새마을운동이 아닌가 싶다. 사실 1970년대 포항은 거의 모든 면에서 뒤떨어져 있었다. 생활도 그렇고 교육도 그랬다. 그 어려운 시절에 새마을운동이 있었기에 포항이 자생력을 갖추었다고 본다.
최 : 약력을 살펴보니 1973년부터 포항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았습니다.
김 : 돌아보면 그 자리를 맡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걸 맡았기에 마음껏 일해볼 수 있었다.
최 : 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김 : 포항시 24개 동에 새마을부녀회를 알리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다녔다. 허구한 날 바깥으로 나다녔으니 다른 집 같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남편이 이해해주지 않았으면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동네마다 가서 과수원이 있으면 함께 과일도 따고, 농사를 짓고 있으면 비료도 함께 날랐다. 새마을복 세 벌을 번갈아 입으며 포항 구석구석 안 다녀본 데가 없다.
최 : 새마을부녀회의 목표는 무엇이었는지요?
김 : 여성들의 의식을 계몽하고 식생활을 개선하는 게 주안점이었다. 당시에는 여성에게 배움의 기회가 적어 새마을부녀회원들 대부분이 국민학교 출신이었다. 학력과 상관없이 새마을 교육에 참여했던 회원들은 일주일간 교육을 받고 나오면 모두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는데 자부심이 대단했다. 초창기 회원들은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새마을운동은 물질적 풍요는 물론, 정신적 풍요를 동시에 누리는 마을 혹은 공동체를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새마을부녀회’는 1970년대 초 생활개선 구락부, 가족계획 어머니회, 부녀 교실, 저축 금고 새마을 어머니회로 활동하던 각각의 여성단체를 하나로 모아 1977년에 통합 조직하면서 탄생되었다.
최 : 지금처럼 교통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식당이 많은 것도 아닌데 어려운 점이 많았겠습니다.
김 : 요즘처럼 탈것도 먹을 것도 흔한 시절이 아니었다.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다녀야만 했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김보미 포항시 계장〔전 포항시 북구청장〕이다. 김보미와 당시 읍면동 회장이었던 김영자와 함께 장성동 어머니 친목회 행사에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그때는 장성동 주변이 다 산골짝이었다. 비포장도로를 한참 걸어가야 하는 외곽지였다. 그런 곳이니 당연히 먹을 것, 입을 것이 풍족할 수 없었다. 장성동 부녀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그 시절에는 서로 챙길 줄 알았다. 먹을 것이 없으니 집집마다 탁주를 받아와서 커다란 다라이에 바닷가에서 뜯어온 거뭇거뭇한 진저리 해초를 넣고 조선파를 썰어 넣어 간장에 버무렸다. 그걸 가운데 놓고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주민들과 탁주에 진저리 나물을 먹으며 점심을 해결했다. 지금이야 진저리가 거름통으로 들어가지만, 그때는 그걸로 한 끼를 때웠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탁주를 마시고, 흥이 나서 노래도 하고, 그러다 더욱 흥이 나서 또 마시다 보면 너도나도 취해서 시름이 다 사라졌다. 그날 나는 김영자에게 업혀 왔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고 일했다.
최 : 새마을부녀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요?
김 : 1980년 9월 창립해서 생활개선 사업, 가족계획 사업 등을 추진했다. 생활개선은 말 그대로 주변의 더러운 것들을 하나하나 치우고 정리하는 일이다. 부녀회원들이 동마다 구석구석 하수구 청소를 했고 부엌도 개조했다. 그리고 생활개선을 위해 요리 전문가를 초빙해 포항여고 기숙사에서 포항의 여성 대표들을 먼저 가르쳤다. 포항 여성들의 계몽 교육과 바른 먹거리 식생활 교육도 이루어졌다.
최 :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산아제한 교육도 새마을부녀회에서 맡았다. 주로 학교 강당 같은 데서 ‘하나만 낳아야지 둘셋 놓으면 거지 만든다’는 내용의 교육을 했다. 피임 교육도 동네별로 했는데, 교육을 하고 나면 동네 아이들이 콘돔을 풍선인 줄 알고 입에 물고 다니기도 했다. 여자들에게는 먹는 피임약을 줬는데, 시어머니가 며느리 혼자 좋은 약을 먹는 줄 알고 며느리가 집을 비울 때마다 두세 알씩 몰래 먹기도 했다. 지금은 아이를 낳지 않아 심각한 문제인데, 그때는 산아제한 때문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다.
가족계획 사업의 주요 내용은 피임약 보급, 피임 시술, 사회적 지원, 계몽 홍보 교육 등이었다. 1912년부터 광복 전까지 우리나라 출생률은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다. 그리고 급격한 인구 증가가 국가적인 문제였던 1960~1980년대에 정부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이 지속된 탓에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목표였던 인구 대체 수준 2.1명을 달성한 후에도 빠르게 감소했다. 그리고 1984년에는 1.76까지 떨어졌다.
최 : 새마을부녀회에서 했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보람된 일은 무엇인지요?
김 : 1985년 포항에서 전국소년체전이 개최되었다. 종합운동장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출전하는 선수들 밥을 해먹이겠다는 마음에 24개 동 새마을부녀회에서 모두 나와 운동장에 텐트를 쳤다. 그런데 당일 새벽부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앞이 깜깜해졌다. 부녀회 회원들 모두가 나와 팔을 걷어붙였다. 누가 시켰다면 그렇게 했을까. 종합운동장에 고인 물을 손바닥으로 퍼내고 걸레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정말 한마음으로 빗물을 닦았다. 며칠 후 미국에 있는 후배가 신문에서 나를 보았다며 전화를 했다. 우리가 운동장에 고인 빗물을 손으로 퍼나른 이야기가 미국에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최 :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네요.
김 : 그만큼 단결도 잘되고 화합도 잘되었다. 그래서 새마을부녀회를 잊을 수 없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준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무슨 일을 했을지 모르겠다. 새마을복 세 벌이 내 인생의 옷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마을부녀회는 공동기금 마련을 위해 구판장 운영, 절미 저축, 공동 경작 등의 사업을 했으며, 정부에서 추진하는 민간 계몽과 정부 시책 홍보 및 실천 조직으로서 전방위 역할을 했다. 농산물 직거래 활동, 강원도 감자 사주기 운동, 농촌 일손 돕기 자원봉사 등을 매년 실시했으며 새마을 알뜰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건전한 휴가 보내기, 호화 혼수 안 하기 등 근검절약 분위기 조성과 기초 질서 확립 캠페인, 나라 사랑 국기 달기 캠페인을 전개했고, 납세 의무자와 시민의 역할 교육과 우리 동네 개혁 운동을 위한 간담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96년 고철 모으기 캠페인에서는 경상북도 1위를 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최 : 어떤 단체보다 희생정신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김 : 현장에서 험한 일을 마다 않고 헤쳐 나갔다. 하수구에 있는 쓰레기도 건져내고 쥐도 잡고. 회원 모두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라 여기며 일했기에 가능했다. 사실 먹고 사는 게 어려웠던 시절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고아원에 가려 한다, 노인들 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십시일반으로 쌀이 모였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곡식 창고는 열쇠로 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여는 것이었단 생각이 절로 든다. 그것뿐이었던가. 여성도 남성만큼 할 수 있다는 패기를 보여주자며 해병대에 가서 1박 2일 훈련도 받았다. 총 쏘는 것도 배우고 험한 훈련도 했다. 다른 지역 부녀회에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을 포항에서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열성적으로 일한 공로로 포항시 새마을부녀회장 1대 김경희, 2대 정경숙, 3대 김숙자, 4대 서차분 그리고 5대 황복희를 비롯해 읍면동 회장으로 활동한 김영자, 박순조, 김미자, 권양자, 정수남 회장이 대통령 훈장을 수훈했다. 새마을부녀회가 있었기에 여성들의 단체가 조직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김경희
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
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