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② 포항여성문화회관 건립 과정
두 번째 만남 전에 점심 도시락 2인분을 준비했다. 나와 그의 도시락이 아니라 그와 남편의 도시락이었다. 동갑내기로 60년 이상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의 점심이 늘 걱정이라고 첫 인터뷰를 할 때 지나가는 말로 했다. 두 번째 인터뷰도 점심 전에 마쳐야 한다고 해서 도시락을 드리며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싶은 마음에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쾌하게 웃었고, 포항여성문화회관 건립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손정식 회장과 몇몇 사람들은 여성과 어린이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지. 시급한 재원은 독자적으로 마련키로 합의, 송도해수욕장에서 수익 사업을 했지”
“그렇게 어렵게 모은 건립 자금이 화제가 돼 각계각층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시 예산과 지역의 기업 등서 후원해주지 않았다면 여성회관 건립은 무산됐을 것”
최 : 포항여성문화회관은 시 사업소로 운영되고 있지만 당초 민간 차원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김 : 1970년대 초반 여성단체는 새마을어머니회가 가장 규모가 컸고, 한국부인회 등이 미약하게 활동했다. 여성단체 대부분이 친목과 봉사 위주로 활동할 때였다. 어느 날 포항여고 총동창회 손정식 회장이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여자청년단 총무 자격으로 자리에 함께했다. 다양한 얘기가 오갔는데 무엇보다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시급한 것은 재원이었다. 건물을 지을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성회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독자적으로 자금을 마련키로 합의했다. 모임 회비만으로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는 어려워서 추진위원회 결정으로 송도해수욕장에서 수익 사업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장사를 시작했다.
최 : 장사는 어떻게 했는지요?
김 : 아침에 포항극장(현 롯데시네마)에 가서 잔돈을 바꾸고 아이스케이크, 사이다, 빵, 담배 등을 리어카에 담아 송도해수욕장으로 갔다. 그곳에 낡은 텐트를 치고는 가지고 온 것들을 팔았다. 밤에는 팔다 남은 물건들을 모래에 파묻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송도에서 살다시피 했다. 해수욕장에서 맨발로 두 달을 버텼으니 새까맣게 탔다. 매일 교대로 나가며 장사해서 돈을 모았다.
최 : 많이 힘들었겠습니다.
김 : 손정식 선배가 나 아니면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내가 나선 것이다. 그때 막내가 네 살인가 다섯 살이었다. 매일같이 남편을 설득해 송도에 나갔다. 남편이 아이를 업고 나를 찾아 송도에 오기도 했다. 내가 남편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다. 남편은 나를 믿었고, 그래서 아직도 남편이 고맙다. 남편이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유명한 태풍, 사라호도 거기서 맞았다.
여성회관 건립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은 손정식이 맡았다. 어렵게 마련한 건립 기금으로 여성회관을 지었지만, 강사 섭외가 쉽지 않았다. 손정식이 수산전문대학(현 포항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강사를 초빙했고, 자신도 교양과목을 가르쳤다. 손정식은 여성회관 초대 명예 관장으로 여성회관을 운영하며 여성의 삶 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그 곁에 김경희가 있었다.
최 : 그렇게 자금을 확보해서 여성회관이 죽도동에 건립된 것인가요?
김 : 그 자금이 종잣돈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게 건립 자금이 모인 게 화제가 돼 각계각층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시 예산과 지역의 기업 등에서 후원해주지 않았다면 여성회관 건립은 무산되었을 것이다.
최 : 1974년 여성회관이 죽도동에 현판을 내걸었을 때 감회가 남달랐겠습니다.
김 : 나는 당시 새마을부녀회 회장으로 늘 새마을복을 입고 다녔고, 그날도 복장이 다르지 않았다. 여성회관 개관식에 정말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여성회관 옆에 죽도1동 동사무소가 있었는데 동장 나이가 우리 아버지보다 많아 보였다. 그런데 시장이 와서 갑자기 준비를 덜 했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동장에게 험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경상북도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와 있고 포항에서도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다 와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나에게 “아주머니, 아주머니!”라며 막 부르면서 함부로 대하질 않나. 정말 꾹꾹 참았다. 행사가 끝난 후 관장 사무실에 여성들이 모두 모여 차를 마셨다. 국회의원 부인, 포항시 부시장 부인도 함께 있었다. 내가 여권신장부터 하자고 말문을 열고는, 어떻게 시장이 이런 행사에서 막말을 할 수 있느냐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 일찍 시장에게 전화가 왔다. 아마 부시장 부인이 시장 부인에게 말했지 싶다. 시장은 다짜고짜 화를 내며 여자들 앞에서, 그것도 국회의원 부인도 있는데 자신의 험담을 해서 되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조목조목 시장의 언행을 짚어주고는, 시장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하고 전화를 탁 끊었다.
최 : 어떻게 그렇게 당찰 수 있었는지요?
김 : 바른말 하는데 뭐가 무섭나. 그 후로 시장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행사에 갔다가 만나게 됐다. 새마을어머니회에서 예비 훈련을 받아야 된다고 해서 수백 명이 자비로 군복을 입고 중앙국민학교에서 결성식을 했다. 단상에 올라가보니 시장과 나 단 둘만 있었다. 24개 동 새마을어머니회 여성 전부가 군복을 입고 시장에게 경례를 붙이자 시장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뿌듯하지 않았겠는가. 그 순간 시장이 낮은 목소리로 “회장님, 미안합니다. 그때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그래서 나도 미안하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손정식 관장이 나에게 “쪼매난 게 간도 크다”고 했다.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면 바로잡아야 하는 게 내 성격이다. 그래서 별명이 싸움꾼이 된 것이다.
그가 여성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말을 듣는 내내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 날의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최 : 여성회관은 1989년 시 사업소로 전환되었지요?
김 : 민간단체로 운영하다 보니 예산이 늘 문제가 되었다. 어떻게 해결해보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운영위원 회의에서 여성회관을 시 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시 사업소 직제인 포항시여성복지회관이 된 것이다.
여성회관이 민간기관에서 시 직제로 바뀐 후 교육시설은 물론 운영 사업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포항시여성복지회관은 전국 어느 사회교육기관 못지않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그렇게 10년을 운영하게 되자 교육 수요가 확장되고 공간 문제도 대두되었다. 매년 수강생을 1천800명씩 배출하니 더 넓은 공간과 현대식 시설을 갖춘 여성회관의 신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1998년 우현동에서 새 회관의 기공식을 갖고 2001년 입주하게 되었다. 현재 포항시여성문화관은 수영장을 겸한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지역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교양강좌를 운영하며 시니어 대상 강좌와 남성 교양강좌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최 : 1988년에 여성복지회관 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관장직을 그만두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김 : 손정식이 명예직 관장으로 있다가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때 그 자리는 공무원 5급 대우가 되었다. 두 달 동안 서울에서 관장 교육을 받고 석 달쯤 관장 업무를 해보니까 내 적성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내 사표를 냈다. 남들은 그 좋은 자리를 왜 그만두느냐고 난리였다. 하긴 그 당시에 여성 공무원이 5급까지 가기도 쉽지 않은데, 일반 여성이 공무원 5급 대우 자리를 스스로 내던진다는 게 이해가 되었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매일 현장을 살피며 일하던 사람이 종일 의자에 앉아 있으니 한 번도 아프지 않던 몸이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과감히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내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자 거짓말처럼 펄펄 날아다녔다. 그때 숙명처럼 알았다. 나, 김경희는 평생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걸.
김경희
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
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