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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송이 수출 사업 위해 1967년 귀향”

홍성식 기자
등록일 2021-08-08 19:54 게재일 2021-08-09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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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공  ③<br/>4·19혁명과 5·16군사정변 그리고 귀향
박정희(가운데) 전 대통령과 박태준(왼쪽) 전 포스코회장이 포항제철소 착공식에서 공사 시작을 알리는 버튼을 누르고 있다. /포스코제공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이대공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겪는다. 눈앞에서 진압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역사적 혼란의 시기에 무엇을 고민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들어보았다.

 

“4월 19일 강의를 듣고 있는데, 선배가 전단지를 뿌렸다. “나가자, 시위하러 가자”고. 학생 수가 경찰보다 많았다… 뜨거운 열정이 불의를 참지 못했기에 나선 것이었지”

“1967년 10월 1일 장기영 당시 부총리가 내려와 포항제철이 들어설 지역을 알렸다. 그날 이후로 포항의 역사가 바뀌고 천지가 개벽했다. 새로운 포항의 시작이었지.

홍 : 20대 초반에 겪은 4·19는 어땠습니까?

이 : 1960년 4월 5일 서울대 법대 입학식을 했다. 이후 18일 고려대에서 시위가 있었다. 19일 철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 1년 선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전단지를 뿌렸다. “나가자, 시위하러 가자”고 하니 교수님이 “공부를 구태여 하겠다는 사람은 강의실에 있고, 그게 아니면 나가라”고 했다. 아마 거리로 나서서 시위에 참여하라는 뜻이었지 싶다.

홍 : 그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요?

이 : 우리가 앞장섰다. 그때 내 친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동아일보’ 1면 에 실렸다. 동대문경찰서 인근에서 경찰과 맞섰다. 그때 서울 거리에는 돌이 거의 없었는데, 마침 동대문경찰서 근처 공사장에 쌓아놓은 벽돌 더미가 있었다. 경찰이 곤봉으로 시위대를 구타하자 학생들이 공사장의 벽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시위대 대부분은 서울대 법대, 문리대, 미술대 학생들이었다. 학생 수가 진압에 나선 경찰 수보다 많았다. 다른 대학 학생들도 길거리 곳곳으로 나왔다.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향했고, 이화여대 학생들도 모였다. 뜨거운 열정이 사회의 불의를 참고 보지 못했기에 나선 것이었다.

홍 : 시위할 때 위험한 장면도 있었겠습니다.

이 : 학생들이 선봉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통인동 파출소에서 저지당했다. 바로 앞이 경무대였다. 거기까지 행진한 것이다. 그때 기마경찰이 총을 쐈다. 순간적으로 사격을 해대니 놀란 사람들이 높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자기도 모르는 괴력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총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서울대 법대 동기 하나가 죽었는데,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포항에서도 경찰서가 점거되는 등 시위가 격렬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홍 : 1961년 5·16군사정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 가난하고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강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군사 쿠데타는 안 된다는 친구도 있었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壽<9641>寺) 근처에서 함께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동창과 이에 대한 찬반을 놓고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박정희와 박태준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여러 측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경제 대국도 되었으니 다양한 차원에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홍 :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있었지요.

이 : 그때는 사법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어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동독과 서독이 분단돼 있을 때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러 갔다. 그때 서독 총리에게 “우리도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서독 총리는 “일본에 전쟁 배상금을 빨리 받아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한일 관계도 재정립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 돈(대일 청구권 자금)이 포항제철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포항제철 건설을 결심한 게 박정희고, 이를 건의한 게 박태준이다. 그것이 지금의 포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 : 1960년대 포항의 경제 상황은 어땠습니까?

이 : 포항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영일만의 정치망 어장에서 나오는 게 포항의 수입 거의 전부였다. 사람을 채용해줄 회사와 단체가 거의 없었다.

홍 : 20대에 영향을 받은 인물은 누굽니까?

이 :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이다. 스물아홉 살에 그를 만났다. 20대 중반에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다녔는데 재미가 없었다. 그즈음 사업을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주도 드라이브 정책을 펼칠 때는 나도 수출을 했고, 개발 주도 드라이브를 걸 때는 구획정리 사업을 했다. 그러던 중에 박 회장을 만났다.

홍 :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사업을 하셨다니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이 : 일본으로 석유곤로를 만들어 수출했다. 일본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바탕으로 인천에서 만들어 팔았는데, 다른 곤로는 잘 팔리는데 내가 만든 건 판매가 부진했다. 곤로 수출 사업은 실패였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의 조언으로 망개(청미래덩굴) 이파리를 지리산에서 채집해 일본에 팔았다. 망개 이파리는 방부제 역할을 한다. 망개떡이 상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냉장 유통이 없던 시대니까 장사가 잘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아이디어 사업이었다.

홍 : 그 후에 다른 사업도 하셨는지요?

이 : 당시 한국에서는 야구가 인기를 얻기 전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인기가 대단했다. 그걸 감안해 야구 배트를 만들어 수출했다. 그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나중에 포항에서 구획정리 사업을 할 수 있는 밑천이 거기서 나왔다. 사법시험 공부하듯 하면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문을 통해 세상과 경제의 흐름을 파악했다. 요즘도 신문을 열 가지 이상 읽고 있다. 신문 읽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와 감각을 준다.

박태준 전 포스코회장이 직원들을 상대로 자주관리에 대해 특강을 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박태준 전 포스코회장이 직원들을 상대로 자주관리에 대해 특강을 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홍 : 사업하던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들려주시죠.

이 : 야구 배트는 물푸레나무로 만든다. 수령이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여야 하고, 색깔도 하얀 게 좋다. 가지가 벌어진 나무로 만들면 배트가 부러지기 쉽다. 잘 다듬어진 방망이를 2개월 동안 온돌에서 말리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만든 야구 배트를 일본 회사로 수출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납품된 것의 반 이상을 불합격시키는 것이었다. 아마도 불합격품까지 가져가 일본에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팔지 않았을까 싶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두 트럭 분량의 야구 배트를 영등포에서 만들어 인천의 보관창고로 보냈다. 그런데 그날 예고되지 않은 비가 왔다. 비는 배트에 치명상을 입힌다. 저녁을 먹던 내가 인부들과 달려가 포장막으로 야구 배트를 덮었다. 뒤늦게 보관창고에 도착한 다마자와 사장이 20대 청년이던 내게 열 번 넘게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거래가 끝난 상품까지 책임지려는 마음가짐을 좋게 본 것이다. 그날 “앞으로 당신 제품은 검사를 하지 않고 통과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홍 : 포항으로 돌아온 건 언제지요?

이 : 1967년 양송이를 재배해 수출하려고 포항으로 왔다. 그 사업을 위한 공장을 만들기 위해 땅을 샀다. 800평을 샀는데 평당 200원쯤 준 것으로 기억한다. 나와 아내가 직접 흙벽돌을 찍어 양송이 가공업체를 지었다. 1967년 10월 1일엔 장기영 당시 부총리가 포항에 내려와 포항제철이 들어설 지역을 알렸다. 라디오를 통해 그걸 들었다. 흥미로운 건 바로 그날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됐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포항의 역사가 확 바뀌고 천지가 개벽했다. 아마 새로운 포항 역사의 시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 5만 명이던 인구가 지금 50만 명이 됐으니.

홍 : 포항제철 건설 당시의 분위기를 들려주시죠.

이 : 공장 부지로 땅이 수용되는 것을 사람들이 반대했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땅이니 낮은 가격에 수용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땅과 관련 없는 이들은 포항제철 건설을 환영했다. 보통 사람들은 제철 공장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시절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양송이 수출업을 하려고 땅을 샀다. 평당 50원에서 500원쯤 하던 시절이다. 지금의 상도, 대도, 해도, 죽도는 모두 섬이었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갈대밭은 평당 50원에 불과했다. 땅을 사려는 사람이 있으면 땅 주인들은 불안한 마음에 대부분 땅을 팔았다. 그런 땅을 내가 양송이 재배와 가공장 설립을 하려고 샀다.

 

이대공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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