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br/>최인수 ③ 포철공고 축구부와 야구부 창단
1980년 5월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포철공고에 축구와 야구 중 교기 육성 종목 하나를 선정해 창단하라고 지시했다. 이 업무를 맡은 최인수 선생은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충분한 기초자료를 수집한 후에 우수 선수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종목을 선택한다.
박태준 회장님이 축구와 야구 중 하나를 정해 교기(校技)로 육성하라고 지시하셨어. 그렇게 1981년에 야구부를 창단, 1983년 포철중·1985년에 포철공고 축구부가 창단했지
야구부는 창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성과를 거뒀어. 창단 3년 차에 봉황대기·청룡기·전국체전·황금사자기서 준우승을 했고 무등기에서는 3위에 입상하며 돌풍을 일으켰지.
축구부도 엄청났지. 내가 학교에서 나올 때까지 대통령배, 문화체육부장관기·전국체전·KBS배·MBC배 등 전국대회서 우승과 준우승, 3위를 각 8회씩 했으니까.
김 : 포철공고로 가서 1981년에 야구부를 창단하게 됩니다.
최 : 포철공고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듬해에 박태준 회장님이 축구와 야구 중 하나를 정해 교기(校技)로 육성하라고 지시하셨어. 그래서 먼저 선수 확보를 위해 경북도내 중·고등학교 운동부를 대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지. 당시는 대구가 경상북도에서 분리되기 전이었어. 자료를 살펴보니 야구부는 공립 중·고등학교에서 주로 운영하고 축구는 사립학교에서 운영하더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축구를 하는 사립학교는 선수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다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거든. 그만큼 선수 확보가 어렵다는 거지. 반면에 야구는 연계된 상급학교가 따로 없어서 선수 확보가 쉬운 편이고. 그래서 야구를 선정하게 된 거야.
김 : 어느 학교가 야구부를 운영하고 있었습니까?
최 : 중학교는 포항중, 경주중, 경주 무산중, 대구중, 경상중, 경복중이 있었지. 고등학교는 경북고, 대구상고, 대구고에 야구부가 있었고.
김 : 그래도 신생 학교가 선수를 확보하려면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요.
최 : 오히려 그 반대였어. 포철공고의 장점이 뭐냐면 선수들의 학비와 운동회비를 면제하는 것은 물론, 장비 일체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야구 장비는 꽤 비싸서 선수와 학부모가 부담스러워했거든. 이런 조건을 걸고 선수 확보를 했더니 전국 상위권인 대구중학교 3학년 전원이 포철공고를 지원한 거야. 그랬더니 대구 지역 고등학교에서 난리가 났어. 경북고, 대구고, 대구상고가 합심해 경북교육위원회에 대구 지역 중학교 야구부의 포철공고 진학 포기 협조 요청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
김 : 선생님께서 참 난감하셨겠습니다.
최 : 그랬지. 교육감님이 포철공고 교장에게 전화해 조금만 양보하라고 설득하더군. 결국 경북교육위원회 중재로 포항중 야구부 전원은 포철공고로 입학하고 다른 중학교 선수들은 각 고등학교에서 돌아가며 한 명씩 지명하는 방법을 택하지. 전국 최초로 드래프트 제도를 시행한 거야. 포철공고의 양보로 성립된 중재안이었어, 대구 지역 고등학교가 ‘제2의 장효조’라 불리던 대구중 정성룡 선수를 포철공고에 양보함으로써 갈등이 해소되었지.
김 : 야구부가 창단된 다음해에 프로야구가 개막합니다. 시기가 참 절묘합니다.
최 : 그런 셈이지. 원래 고교야구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야구 붐이 일었어. 야구를 하는 학생들에게도 커다란 동기가 유발되었고 말이야.
김 : 야구부의 성적은 어땠습니까?
최 : 야구부는 창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성과를 거뒀어. 창단 3년 차에 봉황대기, 청룡기, 전국체육대회, 황금사자기에서 준우승을 했고 무등기에서는 3위에 입상하며 돌풍을 일으켰지. 우승도 곧 할 수 있을 것 같더군.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어. 오죽하면 내가 정년 퇴임사에서 “야구부가 준우승만 네 번 하고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는다”라고 했겠나.
김 : 그래도 훌륭한 선수를 많이 배출했지요?
최 : 정성룡, 김성범, 최해명, 오봉옥, 강민호, 권혁, 최준석, 김동현, 김정혁, 이민호, 신동주, 김희걸, 김인철 등이 기억에 남아. 강민호는 지금도 삼성 라이온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지.
김 : 강민호 선수는 고향이 제주도인데 어떻게 포철공고로 오게 되었습니까?
최 : 강민호는 제주 신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철중학교로 진학했어. 제주도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가 제일중학교밖에 없었지. 고등학교 야구부는 아예 없어 야구를 계속하려는 학생은 육지로 진학했고 대부분은 중학교 졸업 후에 그만두었어. 소년체전 때 강민호의 재능을 눈여겨본 포철중학교 감독이 스카웃했지. 강민호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권혁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은 포철공고의 보람이기도 했어.
김 : 야구부를 창단하고 4년 뒤 축구부도 창단됩니다.
최 : 그에 앞서 1983년에 포철중학교 축구부가 창단돼. 원래는 그 학생들의 고등학교 진학에 맞춰 1986년에 창단하려고 했는데 박태준 회장님의 지시로 한 해 앞당겨 창단한 거지.
김 : 축구는 대부분 연계된 상급학교가 있어 선수 확보가 어렵다고 하셨는데.
최 : 당연히 힘들었지. 게다가 1981년에 대구직할시와 경상북도의 행정구역이 분리되는 바람에 선수를 확보할 수 있는 학교가 더 줄었어.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학교가 안동중, 강구중, 풍기중, 울진중 정도였지. 포철중은 3학년이 없어서 불가능했고. 고등학교는 안동고, 경주고, 영덕종고, 동지상고 등이 있어서 이전에도 고등학교끼리 선수 확보 경쟁이 치열했어. 게다가 기존 학교 보호를 구실로 경북축구협회에서도 비협조적이더군. 당시 경북축구협회가 안동에 있었거든. 경북축구협회에 가서 포철공고에 축구부를 창단하려고 한다니까 부회장이 대뜸 창단할 수 없다고 하지 뭔가. 너무 어이가 없어 언쟁을 벌어졌는데 사무국 직원이 뜯어말리느라 혼났지.
김 : 그렇다고 축구부 창단을 포기할 수는 없었겠지요.
최 : 하는 수 없이 경북체육회에 가서 선수등록부를 보고 연락처로 일일이 전화했어. 그랬더니 소식을 들은 중학교 감독과 코치들이 자기들 모르게 선수를 빼간다고 난리가 났지.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한 후 협조를 구했어. 그렇게 해서 강구중 6명, 풍기중 2명, 울진중 2명을 확보했고, 서울 한양공고 2학년 재학생 4명을 전학시켜 인원을 채웠지. 안동중은 안동고가 있으니 끝까지 거절하더군. 골키퍼를 결국 못 구해 일반 재학생 중 소질 있는 한 명을 선수로 등록해 15명으로 1985년 3월 29일 창단했어.
김 : 포철공고 축구부는 성적이 정말 좋았지요.
최 : 엄청났지. 내가 학교에서 나올 때까지 대통령배, 문화체육부장관기, 전국체전, KBS배, MBC배 등 전국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 3위를 각 8회씩 했으니까. 특히 이동국 선수가 입학한 1995년부터 최고 전성기였어. 1997년 KBS배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해병대에서 지원해준 차를 타고 포항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했지. 일본 시즈오카에서 열린 한국, 일본, 캐나다 3개국 고교 축구대회에 포철공고가 한국 대표로 초청받아 참가하기도 했고. 이동국 외에 이창원, 이원재, 남의경, 박원재, 황진성, 오범석, 이수환, 이재동, 신광훈, 김강현, 신화용, 임경훈, 오주포, 김대한, 신수진, 김석근이 포철공고 출신의 최상급 선수들이야.
김 : 이동국 선수의 기량은 출중했지요.
최 : 이동국은 원래 포항동부초등학교에 다녔어. 동국이가 4학년 때 포항시 초등학교 육상대회에 나가서 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우승했지. 동부초등학교는 육상부도 없어서 출전하는 데 의의를 두었는데 동국이 덕분에 단체 3위를 했거든. 동국이를 눈여겨본 포항 스틸러스 유스팀 이영환 감독이 동국이에게 축구를 권한 거야. 그래서 포철동초등학교로 전학한 거지. 동국이는 축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차범근 축구상’을 받을 정도로 소질이 뛰어났고, 고등학교 때 전국 최고의 스타가 되었어.
김 : 포철공고 운동부가 다른 학교와 비교했을 때 특별하게 운영되었던 게 있습니까?
최 : 야구나 축구를 하는 학생 중 상급학교 진학이나 실업·프로팀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이를 대비해 전 선수들이 훈련 후에 기능사 자격 취득을 위한 교육을 이수하도록 했어. 또 선수들의 정신교육과 체력 단련을 위해 매년 해병대에 입소해 유격훈련을 실시했지. 특히 축구는 우수 선수를 선발해 포항 스틸러스에서 브라질 유학을 보내주었어.
최인수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
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