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br/>최인수 ④<br/>포항시 체육회 발전과 함께하다
1963년 제1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대구에서 열렸다. 대구와 경북의 행정구역이 분리되기 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정구 선수로 제1회 도민체육대회에 출전한 최인수 선생은 이후 44년간 선수, 혹은 임원으로 도민체육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김 : 포항시 체육회에도 오래 몸담으셨지요?
최 : 1975년에 포항으로 온 지 얼마 안 돼 체육회 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때는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되기 전이었고 체육회도 지금처럼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지. 변변한 사무실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거든. 체육을 전공한 사람이 흔치 않은 데다 내가 정구대회에도 출전하다 보니 여러 방면에 쓰임이 있어 보였던 모양이야. 그때 이사직을 수락해 맺은 인연이 2009년 부회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됐어.
1974년까지 남대구 대표로 출전하다가 1975년부터는 포항 대표로 나갔지. 포항 선수로 뛴 것만 해도 20년이 넘어. 선수를 그만두고는 대회 임원으로 참가했으니 거의 반세기 동안 도민체육대회에 나간 것이지.
1999년에 포항에서 경북체육대회가 열렸는데 내가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지휘를 맡았어. 대규모 행사에서 막중한 임무를 맡다 보니 부담이 꽤 컸는데 실수 없이 잘 치른 덕분에 보람이 컸지.
김 : 체육회는 주로 어떤 일을 합니까?
최 : 종목별로 활동하는 체육인들의 구심 역할을 할 조직이 필요해 체육회를 만들었지.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체육의 역할이 커지면서 체육회의 위상도 단순히 체육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서게 되었어. 지금 체육회는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진흥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의 건강과 체력 증진, 여가 선용과 복지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한편으로는 우수 선수를 양성해 경북도민체육대회나 전국체육대회 등에서 포항의 위상을 높이는 목적도 있겠고.
광복 직후 사회적 혼란 속에서 포항은 1946년 대구의대 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 경북도내 중학 축구 춘계 리그전에 포항중 등 8개 학교가 참가했다. 같은 시기에 포항중, 동지중, 포항여중 등에서 학교 운동부가 활동하기 시작해 포항 체육 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
포항시 체육회는 축구인들이 주축이 되어 1947년 4월 1일 창립되었다. 초대 회장 김병준은 체육회의 재정적 후원자로 체육회 사무실 또한 그의 사업체인 수산회사 내에 있었다. 체육회가 발족한 해에 광복 2주년을 맞아 영흥초등학교 건너편 염전에서 ‘제1회 남선 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포항에 본격적인 체육 활동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했으나 제자리도 잡기 전에 6·25전쟁이 발발해 활동이 정지되고 만다.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포항 체육계는 1965년에 ‘포항시체육회재건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명맥이 유지되었다. 1966년 어려운 재정 형편에도 경주시 황성공원에서 열린 제4회 경북도민체육대회에 450명의 선수단을 구성해 참여함으로써 체육회 결속을 꾀하였고 1973년에 열린 제11회 경북도민체육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종합 우승을 하는 등 중흥기를 맞았다. 1974년 제12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 처음으로 열렸고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발판 삼아 ‘학교체육 육성 10개년 계획’을 수립해 체육 저변 확대, 지도자 양성, 체육 시설 확충에 전력을 쏟는 등 포항 체육 진흥의 기틀을 잡았다.
1995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함에 따라 체육회도 통합 체육회로 재구성되었고, 2016년에는 포항체육회와 포항생활체육회가 통합되었다. 2020년부터는 시장이 당연직으로 체육회장에 취임하던 것에서 변경되어 선거를 통해 체육회장을 선출했다.
김 : 경북도민체육대회 이야기를 좀 해보죠. 선생님은 1회 때부터 선수로 출전하셨지요?
최 :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도민체육대회가 열렸지. 10개 정식종목과 5개 시범종목에 33개 시·군이 참가한 것으로 기억해. 대구는 구 단위로 출전했는데 나는 대구상고가 있는 남구 대표로 나갔어. 전국체육대회처럼 성화도 있었는데 경주 토함산에서 채화해 경기장까지 봉송했지.
김 : 그 후로는 어떻게 참가하셨습니까?
최 : 1974년까지 남대구 대표로 출전하다가 1975년부터는 포항 대표로 나갔지. 포항 선수로 뛴 것만 해도 20년이 넘어. 선수를 그만두고는 대회 임원으로 참가했으니 거의 반세기 동안 도민체육대회에 나간 것이지. 나도 그렇게 오랫동안 참가한 줄 몰랐는데 한 해 한 해 쌓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군.
김 : 그렇게 오랫동안 참가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 기억나는 일이 있으십니까?
최 : 남동생이 둘 있는데 테니스를 했어. 1996년 도민체육대회 때 삼 형제(인수, 인국, 인호)가 모두 포항 대표로 출전했지. 두 동생이 테니스 선수로 출전하다가 그해에는 정구로 바꿔서 출전했어. 1999년에 포항에서 경북체육대회가 열렸는데 내가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지휘를 맡았어. 대규모 행사에서 막중한 임무를 맡다 보니 부담이 꽤 컸는데 실수 없이 잘 치른 덕분에 보람이 컸지.
김 : 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도 여러 번 개최됐지요?
최 : 작년에 열린 대회까지 합하면 모두 여섯 번 개최했어.
포항에서 처음 개최한 제12회 도민체육대회는 1974년 5월 18, 19일 이틀간 열렸다. 이 대회는 포항이 치른 최초의 도 단위 체육 행사였다. 성공적인 대회 개최로 지역 체육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지역 체육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두 번째는 1987년 5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열린 제25회 대회였다. 대구시가 광역시로 분리된 직후여서 다른 시·군에서 개최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기에 포항과 경주에서 종목을 나누어 치른 대회였다. 그 후 1990년(제28회), 1999년(제37회), 2010년(제48회), 2022년(제60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 열렸다.
김 : 전국체육대회도 포항에서 한 번 열렸지요?
최 : 전국체육대회 이전에 1985년에 제14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지방 중소도시 최초로 포항에서 개최되었어. 제15회와 제16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때는 사격, 축구, 체조, 수영 등 일부 종목이 포항에서 진행되었고. 그 후 10년이 지나 제76회 전국체육대회가 1995년 10월 2일부터 7일간 포항에서 열렸지. 전국소년체육대회 때 조성된 체육관, 종합운동장(제1종 육상경기장), 수영장, 사격장 등 경기 시설과 대회를 개최하면서 축적된 운영 경험이 전국체육대회 유치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해. 도청 소재지가 아닌 중소도시에서 열린 최초의 전국체육대회이자 사실상 경상북도에 열린 최초의 전국체육대회였거든. 1995년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였고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 시대의 원년이기도 했어. 이렇게 뜻깊은 해에 포항에서 전국체육대회가 열려 포항은 잔치 분위기였지. 다행스럽게 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포항의 위상을 전국에 알렸고 나 자신도 포항 체육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어.
김 : 포항에서 열린 굵직한 체육대회에는 선생님의 노고가 더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대로 보람이 컸을 것 같은데 보상도 있었습니까?
최 :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고 자부심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지. 고맙게도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격려해주었어. 2001년에 포항시 최고체육상 공로상을 받은 게 각별히 기억에 남는군. 이 상은 학교장이나 가맹 경기단체의 장 또는 재정적 지원을 한 상공인이 받았는데 일선 교사는 내가 처음 수상하게 돼 무척 영광스러웠어.
김 : 그만큼 포항체육회에 기여한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체육회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요.
최 : 오랜 기간 체육회에 있으면서 무난하게 일 처리를 해서인지 2005년에 체육회 부회장에 임명되었어. 학교체육 위원회장을 겸하는 자리였지. 부회장을 맡는 동안 학교체육의 기본 방침과 진흥에 대해 자문 역할을 했고 학생스포츠클럽 활성화와 신인 발굴, 꿈나무 육성 등 학교 운동부 운영에 대한 사업 전반을 살폈지.
김 : 체육회 부회장은 언제까지 하신 겁니까?
최 : 2009년에 부회장직을 내려놓고 체육회를 떠났지. 그 두 해 전에 교직 생활을 마감했고. 시간이 지나니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군.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그동안 체육회에 몸담으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느꼈기에 아쉬운 마음 없이 떠날 수 있었어.
최인수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
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