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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읍 성동리에 황보 씨 집성촌이 있는 까닭은

등록일 2023-08-20 19:19 게재일 2023-08-21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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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br/>황 인 ② 여종 단량, 갑연, 순량의 이야기

선생은 황보 집성촌에 찾아가 황보인 가문의 충직한 여종 단량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뿐만 아니라 갑연, 순량 등 여종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碑)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포항이 예부터 충절과 보은의 고장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종 단량은 가문의 대를 이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황보인의 손자 황보단을 물동이에 넣고는 뒷문으로 도망쳤어. 구룡포읍 성동리에 옮겨 평생을 숨어 살면서 황보인의 손자 단을 키웠던 거지. 황보인 가문의 대가 안 끊기고 구룡포읍 성동리에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형성된 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야. 지금도 구룡포읍 성동리 광남서원(廣南書院)에 가면 단량을 기리는 비,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가 있어.

여 : 황보인이라면 조선시대 영의정을 말씀하시는지요?

황 : 그렇지. 내가 거길 가보니 진짜 황보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성촌이라.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알아보니 사연이 기가 막혀. 계유정난 때 황보인이 수양대군 손에 죽었다는 건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 그때 한양 황보인의 집에서 황보인의 둘째 아들 흠이 단량이라는 여종에게 황보인의 손자인 황보단(皇甫端)을 데리고 도망쳐 가문의 대를 이어달라고 부탁했다는 거야. 단량이 그 길로 황보단을 물동이에 넣고는 뒷문으로 도망쳤어. 단량이 황보단을 데리고 경북 봉화의 닥실마을까지 갔다는 거야.

 

여 : 그 먼 길을 어린애를 데리고 사람들 눈을 피해 다녀야 했으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황 : 그랬겠지. 어쨌거나 단량은 황보인의 딸이 시집가 있던 봉화에 갔어. 조카를 데리고 찾아온 단량을 본 황보인의 딸과 사위 윤당은 기가 찼겠지. 한편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카를 데리고 있다가는 다 같이 죽을 게 뻔했어. 그래서 단량에게 노잣돈을 주며 땅끝까지 도망가 숨으라고 일렀지. 그 길로 단량이 찾아간 데가 바로 지금의 호미곶면 구만리 짚신골이었어. 거기서 살다가 나중에는 구룡포읍 성동리에 옮겨 평생을 숨어 살면서 황보인의 손자 단을 키웠던 거지. 황보인 가문의 대가 안 끊기고 구룡포읍 성동리에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형성된 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야.

 

충비 단량지비.                                                                          새로 세운 충비 단량지비.
충비 단량지비. 새로 세운 충비 단량지비.

여 :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황보인 후손들로서는 단량에게 정말 큰 은혜를 입었군요.

황 : 그렇지. 그러니 계집종이었던 단량에게 비석까지 세워주며 기리는 거지. 지금도 구룡포읍 성동리 광남서원(廣南書院)에 가면 단량을 기리는 비,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가 있어. 처음엔 나도 그걸 보고 깜짝 놀랐지. 계집종의 비석이 있으니. 그 당시 노비의 비석을 세운다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었거든. 노비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어. 그러니 계집종의 비석을 세웠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야. 단량이 그만한 일을 하기도 했지만 말이지.

 

여 : 당시는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한 신분사회였으니 아무리 단량이라 해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황 : 얼마나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인지 몰라.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지. 아, 여기 우리 고장에 이런 대단한 이야기가 있구나.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단량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

 

여 : 단량 말고도 놀라운 이야기가 또 있다는 말씀인가요?

황 : 단량비 말고도 포항에는 여종을 기리는 비가 두 개 더 있어. 용흥동 연화재에 있던 충비갑연지비(忠婢甲連之碑)와 흥해 곡강 야산에 있는 충비순량순절지연(忠婢順良殉節之淵)이지. 사연을 들어보면 기가 막혀. 갑연(甲連)은 조선 순조 때 영일현에서 주막을 하던 송 씨 성을 가진 과부의 종이었어. 그런데 나쁜 패거리들이 홀몸인 송 씨를 해코지하려고 하니 송 씨가 더러운 꼴을 안 당하려고 형산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어. 그걸 본 여종 갑연이 주인을 따라 강에 뛰어들어 송 씨는 구해냈는데, 그만 힘이 다해 자기 목숨은 못 건진 거지. 이 이야기가 당시 암행 감찰을 하던 경상도 관찰사 박기수(朴岐壽)를 통해 조정에 알려져 비를 세우게 된 거야.

 

여 : 가슴 아프지만 당시로 보자면 목숨으로 주인을 섬긴 충절을 높이 살 만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순량(順良)은 어떤 인물인가요?

황 : 순량은 선조 때 흥해 이씨 집안 아씨의 몸종이었는데, 어느 날 한 한량이 빨래하는 아씨를 보고 희롱을 한 거야. 꼴에 선비라고 시를 써서 수작을 걸었는데, 이 아씨가 아주 대찬 답시를 썼지. “내 일찍이 중국 땅 형남(荊南)의 보배로운 옥덩이로 진나라의 열다섯 성(城)과도 못 바꿀 이였거늘, 어찌 계림의 한 썩은 선비와 같이하리.” 이 글을 본 한량이 화가 나서 친구인 흥해 군수에게 일러바치니 그 군수도 유유상종이라, 사령(使令)에게 이 씨를 추포해오라고 명을 내렸지. 하지만 사령은 양심이 있었던지라 아씨에게 도망가라고 말미를 주는데, 아씨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도망은 왜 가느냐며 유서를 써서 순량에게 주고 그 길로 곡강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거야. 이걸 본 노비 순량도 아씨 없이는 내가 어찌 사나, 그러면서 같이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지.

 

여 : 두 사연 모두 안타까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갑연이나 순량 모두 주인을 따르는 마음이 지극해 보입니다. 대단한 충절이 아니었나 싶군요.

황 : 순량의 이야기는 잊히고 말았지만 순량이 목숨을 끊은 지 30년 후에 흥해 군수가 알게 되었지. 그 군수가 순량이 투신한 절벽 맞은편 천연바위에 암각으로 비를 새겨 기려주었는데, 그 비가 바로 ‘충비순량순절지연’ 비야. 그런데 비 제막식 날에 흥해의 곡강이 붉게 변하고 새도 한 마리 안 날았다고 하지.

여 : 단량도 그렇고, 갑연, 순량 모두 애절하고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

황 : 내가 작년 애린문화상 수상식에서도 말했는데, 여종들을 위한 비를 세우는 것이 당시 신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해도 포항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묻혀 있는 조상들의 이야기를 좀 더 알아보자는 생각에 여기서 살아보자고 마음먹게 되었지.

 

구룡포에 있는 광남서원.
구룡포에 있는 광남서원.

여 : 선생님께서 포항과 포항 사람들에게 정을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세 여종의 충절 이야기였군요. 저는 세 가지 이야기 가운데 특히 단량의 이야기가 놀랍습니다. 한 가문을, 그것도 역적으로 몰려 대가 끊길 뻔한 가문을 살린 단량이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황 : 조금 아쉬웠던 점은 1978년에 황보인 집성촌에 가보니 비각을 지어 비석을 세웠는데, 황보인 후대가 새로 만든 비석은 오석(烏石)으로 아주 잘해서 비각 안에 넣어두었어. 그런데 옛날 비석은 그대로 볼품없이 담벼락 옆에 서 있더라고. 문중에서는 나름대로 낡은 옛 비석은 그대로 두고 새 비석을 만드는 정성을 보인 것인데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거지.

 

여 : 그러니까 원래 비석 대신에 새로 만든 비석을 비각 안에 보관했군요.

황 : 그렇지. 내가 문중의 사당 관리인에게 “비각 바깥에 있는 게 원래 단량 비석인데, 이 비가 안에 있어야 안 되겠나?” 했지. 그리고 “이 비석이 오래되었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니 문화재 신청을 하면 좋겠다”고 제안해서 문화재 신청을 하게 되었어.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와서 보니 정말로 원래 단량 비석은 비각 바깥에 방치된 채 있고 안에는 황보씨 문중에서 새로 세운 비석이 있는 거야. 세월이 흘러 2015년 3월에야 원래 단량 비석이 비각 안에 가도록 비석 위치를 바꿔놓았지. 끝내 문화재로 지정은 못 받았어. 나는 지금이라도 그 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 좋겠어.

 

여 : 그렇군요. 그처럼 의미 있는 유적이라면 이제라도 다시 문화재 신청을 해서 지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충성스러운 여종 단량의 충절과 희생으로 대가 끊기는 화를 피한 황보 가문은 4대째 숨어 살다가 숙종 때 역적 누명이 풀려 황보인과 두 아들인 황보석, 황보흠은 관적을 회복했다. 그 후 황보인의 손자 황보단을 살려서 키워준 단량의 고마움과 뜻을 기려서 비를 세웠고, 그 비는 현재 구룡포의 광남서원에 있다.

 

황 인

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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