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br/>최인수 ① 6·25전쟁과 대구 시절
포항 역사에서 체육은 중요한 맥을 이룬다. 1945년 조선무술회를 결성한 동암(東庵) 문달식의 인생을 되짚어보면 포항이 김정행, 정성숙, 김재범 같은 한국 유도계의 거물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국가대표로 한국 여자농구를 이끌었던 이귀복, 이춘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동지중·고등학교 영어 교사 남인우가 포항에 농구를 들여온 1951년을 만나게 된다. 포항수산고(현 한국해양마이스터고) 3학년 천인태는 1981년 한 해 동안 7개의 한국 신기록을 수립해 ‘포항 물개’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정규 풀(pool)이 없어 영일만을 훈련장으로 삼았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보다 푸르고 맑았을 40년 전의 영일만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또 한 명……. 선수, 교육자, 체육 행정가로 포항 체육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기고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최인수(崔仁秀)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생 때 덴마크에서 유학하신 농업 선생님이 배드민턴을 학교에 보급하며 대회를 개최했지. 내가 그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보면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
대구 중앙통 한일은행에 정구 코트가 있었는데 대구중, 계성중 정구 동아리 학생들이 운동을 했지. 대구중학교 선수가 갑자기 몸이 아픈 바람에 내가 대신 출전했는데 첫 대회에서 3위를 했지 뭔가.
그때 대구상고 정구부 감독 눈에 들었어.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하면 학비가 전혀 안 든다는 것이 정구 선수가 된 결정적인 이유였지.
김도일(이하 김) : 체격에 비해 손이 두껍고 힘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최인수(이하 최) : 그런가? 정구를 오래 해서 그런 것 같아.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 코트에 나가거든. 골프장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가고.
김 : 태어나고 자란 곳은 어디입니까?
최 : 서울 종로에서 광복 이듬해에 태어났어. 다섯 살 때 6·25전쟁이 발발했는데 그때 대구로 피난 왔지. 피난 중에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 삼덕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전쟁이 끝나서도 서울로 가지 않고 대구에 정착했지. 그 후 초등학교 세 개(동인, 중앙, 삼덕)가 통합돼 동덕초등학교가 설립되었는데 1959년에 2회로 졸업했어.
김 : 전쟁에 대한 기억은 있습니까?
최 : 너무 어려서 또렷한 기억은 없어. 집을 나와서 가족들과 산속에 숨어 있는데 멀리서 들리던 총소리는 생각나. 당시 선친이 종로에서 양행점(洋行店, 서양식 잡화점)을 운영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어. 집이 단독주택이었고 말이야. 전쟁이 터지자 지하실에 경찰 고위 간부를 숨겨주었는데 그분이 피난 때 트럭을 제공해주어 편하게 대구까지 온 기억이 나.
김 : 대구 생활은 어땠습니까?
최 : 선친이 대구에서도 양행점을 열어 크게 성공했지. 당시 대구에 2대 양행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대구백화점 창업주가 운영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선친이 운영하는 것이었어. 장사가 잘된 만큼 부모님은 자식들을 돌볼 겨를도 없이 바빴어. 그러다가 내 바로 밑에 남동생이 있었는데 삶은 달걀과 건빵을 먹은 다음 날 새벽에 장이 막혀 급사했지 뭔가. 선친을 많이 닮아 유독 귀여움을 받던 동생이었지. 그 일을 계기로 선친은 사업을 팽개치고 술에 의지해 살았고, 그러는 사이 연이어 사기를 당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어. 누님의 고등학교 입학금을 못 낼 정도였지. 그때 누님과 내 학비를 벌려고 다방과 술집을 돌아다니며 담배와 껌을 팔았어. 텃새 때문에 맞기도 하고 돈과 물건을 빼앗기기도 하고……. 그러다가 체육 교사였던 박근수 선생님께 들켰지. 당시에는 겁이 나서 도망갔는데 다음 날 선생님 앞에 서니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만 나오더군. 나중에 선생님이 사정을 알고 극빈자로 등록해주셔서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지. 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장사도 계속할 수 있게 되어 누님이 고등학교 들어갈 때 학비를 낼 수 있었고. 내가 평생을 체육계에 몸담을 수 있었던 것도 박근수 선생님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
김 : 정구 선수로 활동하셨지요.
최 : 1962년에 대구상고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지. 중학생 때 농업 선생님이 덴마크에서 유학하신 분이었어. 그분이 유학 시절에 배운 배드민턴을 학교에 보급하며 대회를 개최했지. 내가 그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보면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 대구 중앙통 한일은행에 정구 코트가 있었는데 대구중, 계성중 정구 동아리 학생들이 그곳에서 운동을 했지. 가끔 그 학생들과 어울려 정구를 같이했어. 대회에 나가기로 한 대구중학교 선수 하나가 갑자기 몸이 아픈 바람에 내가 대신 출전했는데 처음 나간 대회에서 3위를 했지 뭔가. 그때 대구상고 정구부 감독 눈에 들었어.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하면 학비가 전혀 안 든다는 것이 정구 선수가 된 결정적인 이유였지.
김 : 본격적으로 운동선수의 길로 들어선 것이군요. 어땠습니까?
최 : 예상보다 훨씬 혹독했지. 운동도 힘들었지만 선배들한테 기합과 구타를 당하는 게 더 견디기 어려웠어. 거의 매일 3학년이 2학년을, 2학년이 1학년을 집합시켜 가혹행위를 했어. 한번은 맞다가 허리를 다쳐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선수 생명이 끝나는 줄 알았지. 퇴원 후 때린 선배를 찾아가 복수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오히려 선배와 선배의 친구들에게 두들겨 맞고 운동부를 나와버렸어. 나중에 3학년 선배의 중재로 때린 선배와 화해하고 허리도 괜찮아져 운동부에 복귀했지만 지금도 그때의 영향으로 허리가 안 좋아.
김 :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삼호방직에 들어가셨지요?
최 : 당시 전매청과 더불어 대구에 실업팀을 운영하는 두 곳 중 하나였지. 선수도 직원이어서 안전관리과에 소속되었어. 아침에 출근해 오전 내내 잡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에 연습 좀 하고 퇴근하는 게 일과였지. 그러다가 대회가 있으면 출전하고. 평생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작은 기술 하나라도 배워야겠다 싶어 무엇이라도 배울 수 있는 직책을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어. 회사 사정도 이해되는 것이 선수들은 대회나 연습 때문에 근무 시간이 들쑥날쑥해서 오히려 방해만 되었겠지. 계속 이런 생활을 하다가는 미래가 없을 것 같아 2년 만에 퇴사한 거야.
김 : 퇴사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 :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에 경북대학교에서 정구부를 만든다며 입학 제의가 들어왔어. 그런데 입학 조건이 체육특기생이 아니라 일반 학생 자격이었어. 국립대 특성상 제한이 있었던 것 같아. 여전히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쉽게 응하지 못하다가 중학교 은사인 박근수 선생님을 보며 입학을 결심했지. 당시 선생님께서는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계속해 대구한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거든. 박근수 선생님을 롤 모델로 삼은 거지. 예상했지만 학비를 벌면서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어. 코트 관리를 하며 정구장 회원들한테 얼마간의 관리비를 받고 쌍화차를 끓여 새벽에 운동하는 회원들에게 팔기도 했지. 나중에는 회원들이 내 사정을 알고 많은 도움을 주었어.
김 : 실업 선수로 있다가 대학 선수가 되신 거네요?
최 : 그런 셈이지. 2년간 실업팀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덕분에 크고 작은 대회에서 입상할 수 있었어. 그러다가 3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돼 일본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출전했지. 그 덕분에 이름이 알려지자 도움을 주는 분도 많아졌어. 당시 정구 대신 테니스붐이 일어났는데 이영길 대구정구협회장의 도움으로 대구 아카데미극장 옆에 작은 테니스용품 가게를 열었지. 일본에 갔을 때 스포츠용품 영업사원들이 와서 자사 제품들을 홍보하더군. 그때 알게 된 용품 회사 직원인 고바야시라는 사람에게 정가보다 30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물품을 받아 판매했는데 꽤 잘되었어.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야 해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동생에게 용품점 운영을 맡겼지.
김 : 졸업하고 바로 교직에 들어간 겁니까?
최 : 1974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의 추천으로 테니스부가 창단된 대구 효성여고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어. 가톨릭 계열의 보수적인 효성여고에 총각 선생님이 부임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지. 그만큼 테니스부에 거는 기대가 컸던 모양이야. 대구에는 이미 경북여고와 남산여고에 테니스부가 있어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선수들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했어. 당시 경주여중 테니스부에 좋은 선수가 많았는데 신생 학교인 효성보다는 경북이나 남산을 선호했지. 테니스부에 애정이 많았던 교장은 선수 확보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본인이 생각한 만큼 선수 확보가 안 되자 나를 심하게 질책했어. 또 힘들었던 것은 내가 학교의 유일한 남자 미혼 교사여서 학생들이 수업에는 관심 없고 자꾸 장난을 치려고 하는 거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여학생들의 짓궂은 장난에 얼굴을 붉힌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에는 심각한 문제여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해야 하나 고민도 했어.
최인수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
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