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황 인 ④ 덕 높은 고승과의 만남
황인 선생은 포항이 고인돌, 선돌 같은 선사시대 유물 외에도 명망 높은 고승을 낳은 곳임을 발견하고 널리 알려왔다. 특히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배천희(裵千熙)와 조선시대 남파(南坡) 대사에 대한 재조명은 선생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여국현=여) : 선생님은 고려시대 배천희 국사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인=황) : 배천희 국사는 1307년 흥해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해 19세에 승과에 합격했지. 그 후 10여 개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가 1367년(공민왕 16년)에 국사가 되었고 1382년 76세로 입적하셨어. 당시 국사(國師)는 국가 최고의 정신적 지주를 일컫는 말이니 배천희 국사는 대단한 인물이었지. 이 사실도 우연히 알게 되었어. 어느 날 우리 학교 출신 제자를 만났는데, 그 제자의 남편이 자기 조상 중에 유명한 스님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서 지금도 자기들이 그 스님 무덤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하더군.
고려시대 배천희 국사는 흥해에서 태어났어. 스님이 입적했을 때는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비의 비명을 당대의 문장가 목은 이색에게 쓰라고 했어. 꾸준한 재조명으로 2009년에는 포항시의 인물로 지정해 선양사업도 했어.
남파 대사는 조선중기 선(禪)·교(敎) 양 종단을 이끌고 승병의 최고 책임자인 수호도총섭을 지낸 분이지. 포항 장기면 묘봉산 자락에 있는 석남사지에 그분의 비석이 있어. 문살이 훼손되고 방치될 것 같아 보존이 필요하다고 수 차례 주장했고 2005년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지.
여 : 스님은 무덤이 아니라 사리탑 같은 걸로 모시지 않는지요?
황 : 나도 그게 이상해 스님이 무슨 무덤이냐고 했지. 사리탑이나 부도가 있어야지 했더니 틀림없이 무덤이 있다고 하는 거야. 제사도 지내고. 그러니 더 궁금했지. 알아보니 천곡사 입구에 사당도 있고, 포항 공원묘원 안에 ‘국사배선생유허비(國師裵先生遺墟碑)’까지 있는 대단한 분이더군. 이분이 흥해에서 태어났다고 왕이 흥해를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더군. 나중에 스님이 입적했을 때는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라 명했는데, 그 탑비의 비명(碑銘)을 당대의 문장가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쓰라고 했어. 그것만 봐도 배천희 국사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알 수 있지.
여 : 배천희 국사가 고려 말 원나라 간섭기를 벗어난 개혁 시대의 주체적 한국 불교를 이끈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황 : 맞아. 그러니 우리 지역에서 이런 인물이 나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 스님의 무덤은 크기도 하지만 왕이나 큰 스님의 무덤 앞에 세우는 당간지주 모양의 석물이 양쪽에 떡하니 서 있는 게 한눈에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어. 게다가 제자 남편의 말이 수원에 가면 스님을 기리는 비석도 있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가만있을 수 있나. 그 탑을 보고 탁본을 뜨려고 수원까지 갔지.
여 : 그 먼 데까지 탑을 보러 가신 것도 놀랍지만 탁본 뜨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황 : 그랬지. 겨울방학 때 찾아갔는데, 엄청 추운 1월 초였어. 물어물어 수원성에 갔더니 허름한 비각에 탑이 있는 거야.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成寺眞覺國寺大覺圓照塔碑)’라는 그 탑은 보물 14호인데 온전치는 않더라고. 우여곡절 끝에 수원시청 문화공보실을 찾아가 배천희 국사에 대한 자료를 주면서 탁본하러 왔다고 했지. 담당자가 일언지하에 거절하길래 그날은 그냥 그렇게 앉아 있다 나왔어.
여 : 그럼, 그 먼 길을 가셔서 탁본도 하지 못하고 그냥 오셨나요?
황 : 아니지. 그냥 올 수는 없었어.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다시 수원시청에 출근했지. 문화공보실에 가서 그냥 앉아 있다가 문화공보실 직원들에게 커피도 사주고 신문도 보고 이야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냈어. 다음 날에 또 가서 얼굴도장을 찍었지. 그렇게 며칠 출근하다시피 하니 공보실장인가 하는 사람이 진심을 알았는지 탁본을 딱 한 장만 하라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하더군. 그래서 탁본하러 갔는데 수원시청 담당자가 탁본을 보관할 수 있게 두어 장 더 할 수 있느냐 해서 내가 탁본을 더 해줬지. 그렇게 그 비의 탁본이 지금 남아 있게 된 거야.
여 : 문화 유적이나 유물, 그 기록을 남기고 보존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실감합니다. 배천희 국사에 대한 보존 사업은 잘되고 있는지요?
황 : 이분이 대단한 분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고 포항시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했지. 2009년에는 국사를 포항시의 인물로 지정해서 선양사업도 했어. 국사의 형인 배전(裵詮)의 후손들도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국사를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고. 유허비와 천곡사 앞에 있던 사당이 허물어져 가는 걸 문중에서 새로 건립했으니 정말 다행이었지.
여 : 선생님께서 노력하신 덕분에 포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배천희 국사가 새롭게 조명되고 관련된 유물과 유적들이 보존되었군요. 선생님은 남파 대사의 유적지 보존도 주장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황 : 남파 대사는 조선 중기에 선(禪), 교(敎) 양 종단을 이끌고 승병의 최고 책임자인 수호도총섭(守護都總攝)을 지낸 분이지. 포항 장기면 묘봉산 자락에 있는 석남사지(石南寺址)에 그분의 비석이 있어. 문살이 훼손되고 대나무 숲 가운데 방치될 것 같아 내가 보존이 필요하다고 수차례 주장했지.
여 : 저도 선생님을 뵙기 전에는 남파 대사가 어떤 분인지 잘 몰랐습니다.
황 : 남파 대사는 1740년 장기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화묵(華默)이야. 열두 살 때 삭발하고 승려의 계를 받았는데, 승과에 합격한 후 대사(大師)까지 올랐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밀양에 있는 표충사의 수호도총섭을 지낸 분인데, 조선시대 선, 교의 맥을 이은 화엄경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질 정도의 고승이었지. 내가 남파 대사가 주지로 있던 석남사지를 발굴해 문화자원으로 조성하자고 했고, 방치되었던 남파 대사의 비도 보존하자고 주장했어. 그래서 포항시에서 2005년 11월에 비각을 세워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지. 남파 대사 비의 비문은 조선 최고의 명필 가운데 한 명인 계오(戒悟) 스님이 쓰셨으니 서체 연구로도 가치가 있지. 그러니 문화재 지정을 해서 보존 대책을 세우는 게 무엇보다 시급해. 그건 누구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포항 사람들 모두의 책임이지.
여 : 포항에는 불교문화의 유적이 많은 듯합니다. 보경사, 천곡사, 오어사 같은 사찰의 문화적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황 : 그렇고말고. 신라시대에 창건된 세 사찰은 그 자체로 귀중한 문화유산이지. 보물 제252호인 원진국사비가 있는 보경사는 602년 진평왕 때 창건된 천년 고찰이고,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천곡사에는 선덕여왕의 전설이 있지.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선덕여왕이 세상 좋다는 약은 모두 써봐도 효력이 없다가 한 신하의 권유를 듣고는 동해안 천곡령(泉谷嶺) 아래에 있는 석천(石泉) 약수로 며칠간 목욕한 뒤 완쾌되었다는 거야. 그러자 약수의 효력에 감복한 선덕여왕이 서라벌로 돌아와 자장율사에게 절을 짓게 하고, 그 이름을 천곡사로 했다는 전설이 있어. 그곳엔 고란초(皐蘭草)가 유난히 많이 자라지.
여 : 오어사에 관해서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던데요.
황 :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천년 사찰이지. 처음 지었을 때는 항사사(恒沙寺)라 했는데 오어사란 이름을 갖게 된 일화가 재미나. 어느 날 원효대사와 혜공 스님이 계곡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변을 봤는데 물고기 두 마리가 튀어나와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가고,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갔다는 거야. 두 스님이 그 물고기를 보고는 물을 거슬러 가는 고기가 서로 자기 고기라고 우겼다는 이야기에서 오어(吾魚), 즉 ‘저 고기가 내 고기’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하지.
여 : 속세의 장난꾸러기 청년 같은 스님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해학이 느껴지는 일화 같기도 합니다. 오어사에는 특별한 유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황 : 우리나라에 몇 안 남은 동종(銅鐘)과 목비(木碑) 등 불교와 관련된 희귀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어. 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불교 역사의 귀중한 사료의 보고로도 그 역사적 가치가 대단하지.
황 인
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