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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온기 불어넣는 한 잔, 밤의 낭만을 즐기다

환한 대낮의 역동성과 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는 밤이 가진 안온함과 고요한 평화를 기다린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취향과 성정의 차이다.기자의 경우엔 밤의 매력에 이끌리는 사람. 그래서다. 오래전 아래와 같은 시를 읽었을 때 잠시잠깐 가슴이 술렁였다.시인 나희덕(57)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의 미지(未知)를 아래와 같이 노래한 적이 있다.“…(전략) 우리는 어둠의 온도와 속도도 느낄 수 없지알 수 없기에 두렵고 달콤한 어둠아, 얼마나 다행인가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은.” ‘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겨져 있는’ 시간을 요절한 시인 기형도(1960~1989)는 “진짜 밤은 검지 않고 푸르다”라고 썼다. 비단 기형도와 나희덕만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의외로 낮보다 밤을 사랑하는 인간도 많다.2개월 전 늦은 휴가로 떠난 후쿠오카. 낮에는 유명한 신사(神社)와 현대적으로 만들어져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타워, 중세에 축조된 고풍스런 성(城),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휴양을 즐기는 해변을 찾아다녔다. 나쁘지 않았다.후쿠오카는 낮 이상으로 밤 또한 좋았다. 세상사와 인간사를 말없이 지켜보며 수천 년을 조용히 흘러온 강을 등지고 앉아, 이러저런 요리를 안주 삼아 한잔 술을 즐길 수 있는 서민적 공간이 있다는 것이 ‘밤의 후쿠오카’가 지닌 매력 중 하나.기자는 후쿠오카를 찾은 관광객들이 ‘나카스 야타이 거리(中洲屋台街)’라고 부르는 곳을 4박5일 머무는 동안 매일 밤 찾아갔다. 이지앤북스의 ‘일본 후쿠오카 여행’은 그곳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밤이 찾아오면 긴 밤을 지키는 불빛들이 하나씩 밝혀져 도시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어묵, 꼬치, 라면, 만두는 물론 다국적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후쿠오카 포장마차 거리가 있다. 일본 내 가장 많은 점포를 운영 중인 후쿠오카는 ‘야타이’가 대규모로 정착된 유일무이한 도시다. 야타이는 후쿠오카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음식과 즐기는 밤의 낭만일본이란 국가에 대한 호오(好惡) 평가와는 별개로 일본 요리가 깔끔하고 보기 좋게 장식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서너 군데 일본 도시를 여행한 경험에 의하면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후쿠오카의 번화가라 할 수 있는 하카타역 인근엔 일본인과 외국인 여행자를 대상으로 영업하는 식당이 수백 개다. 거기서 맛본 음식은 입보다 먼저 눈을 즐겁게 해줬다.떼어 낸 새우의 머리와 나뭇잎 따위가 그처럼 화려한 요리 장식 재료로 사용되는 걸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보지 못했으니까.하지만, ‘나카스 야타이’라 불리는 술집들은 노상에 늘어선 포장마차. 화려함이나 정갈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야타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부터 알아볼까? 앞서 언급한 ‘일본 후쿠오카 여행’으로 돌아가 보자.“(야타이는) 에도 시대에 도쿄에서 생겨난 일본식 포장마차로 1940~1950년 사이 경제 발전과 함께 전국적으로 붐이 일었다가 1964년 도쿄 올림픽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나 후쿠오카에서는 야타이 문화를 보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현재는 후쿠오카시로부터 법적 허가를 받은 야타이만 운영된다. 야타이 문화는 후쿠오카에서 꽃을 피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최대 야타이 도시답게 후쿠오카에는 크게 나카스와 텐진 두 곳의 대표적 야타이 거리가 있다.” 일본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몇 해 전 ‘코로나19 사태’를 혹독하게 겪었다. 그 영향 탓인지 한창땐 100개 넘게 운영됐다는 야타이 중 현재는 20~30개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그럼에도 ‘포장마차’만이 줄 수 있는 낭만은 사그라들지 않아 보였다.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오렌지색 전등을 밝히고 소박한 요리를 안주 삼아 옆 자리에 앉은 처음 보는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포장마차, 즉 야타이 아닌가. 한국이 그렇듯 일본도 그랬다.그래서다. 하카타역 주변 근사한 식당에서 비싼 식기에 담긴 고급 요리를 먹는 것 이상으로 나카스 야타이의 요리가 마음에 들었다.싸구려 플라스틱 접시에 담아낸 한국 돈 8~9천 원짜리 명란 구이와 닭 꼬치도 맛있다는 이야기다. 제법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수차례 다녀오는 것도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한국에서라면 마주 보거나 나란히 앉아 이야기 할 기회가 거의 없었을 대학생, 20~30대 젊은 친구들과 격의 없이 이러저런 잡담을 나누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해본 건 더 즐겁고 행복했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 그들 내면을 들여다보다후쿠오카에 도착한 날. 피곤함을 잊고 가볍게 저녁을 먹은 후 강변으로 갔다. 숙소에서 가까우니 산책이나 해보자고 나선 길이었다. 그날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나카스 야타이’와 만났다.명란 구이에 청주 한 잔을 주문하고 홀로 앉아 있는 기자의 바로 옆에 오사카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학생 넷이 왔다.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런 합석이었다.한국말을 못하는 일본 젊은이들과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한국의 중년. 그러니, 소통은 양측 모두 서툰 영어로 이어졌다.그럼에도 ‘후쿠오카만이 아니라 오사카에도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 번화가를 걷다보면 일본말보다 한국말이 더 많이 들린다’ ‘나도 한국에 두 번 가봤다. 삼계탕이 맛있더라’ ‘한국 걸그룹 멤버 중엔 일본인이 적지 않다’라는 것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여행이 가진 매력은 ‘나이와 국적을 넘어선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게 아닐지. 그날 밤, 새삼 그걸 깨달았다. 겨우 생맥주 한 잔씩 사준 것뿐인데도, 깍듯하게 고마움을 전하는 예의 바른 일본 청년들이었다.후쿠오카 여행 둘째 날과 셋째 날엔 서울과 여수, 대전과 청주에서 왔다는 한국의 젊은 여행자들과 대화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선물 받았다. 역시 나카스 야타이에서였다.30대 초반인 남성들은 대기업과 독립 프로덕션에서 일한다고 했고,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스물네 살 여성들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새내기 회사원이었다.그들이 뿜어내는 밝고 환한 에너지가 부러웠다. 기자 역시 그런 시절을 지나왔음에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역동적인 활기와 거침없는 웃음.2023년을 사는 30대 한국 남성이 생각하는 결혼과 출산은 기자가 청년일 때 느꼈던 것과는 크게 달랐고, 같은 회사를 다니면서도 50대 이상의 부장·이사와 함께 점심을 먹거나, 술 마시는 걸 꺼려하는 솔직한 이유도 들을 수 있었다.20대 여성들이 바라보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에 대한 견해와 여행하는 인간으로서의 즐거움에 관해 들어본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전화기를 가리키며 “내 엄마와 똑같은 핸드폰을 쓰시네요”라고 하길래, 모친의 나이를 물었다가 기자보다 두 살이 적다는 답을 듣고는 잠시 서글퍼졌던 기억까지 웃음과 함께 남았다.3주에 걸쳐 지극히 개인적인 ‘후쿠오카 여행기’를 쓰다 보니 또 한 번 조그만 배낭을 꾸려 낯선 도시로 떠나고 싶어진다.다가올 다음 여행에선 어떤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맛보고, 어떤 낯선 사람들과 국적과 인종, 나이와 종교를 뛰어넘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만으로도 벌써 설레니 “여행자는 몸은 집에 있어도 마음만은 언제나 길 위를 떠돈다”는 이야기가 생겨난 게 아닐지./사진 제공: 홍성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끝

2023-11-21

수능 앞둔 부모들이 팔공산 오르듯 일본서는 신사 찾아 합격소원 빌어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는 성향, 거기에 더해 독신이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처지 때문인지 주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곳을 여행한 편에 속한다.30대 초반부터 시작해 20년 넘게 적지 않은 나라를 여행했다. 그런 과정과 경험 속에서 몇 가지 깨달은 게 있는데, ‘사람 사는 모습이란 게 어디나 비슷하구나’란 것도 그중 하나다.지난 9월 중순. 뒤늦은 휴가를 일본 후쿠오카로 갔다. 거기서 가장 인상적인 여행지가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満宮)였다. 어떤 곳이냐고? 이 물음엔 ‘위키백과’를 인용해 답한다.“일본의 유명한 학자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학문의 신으로 모신 곳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매년 합격이나 학업 성취를 기원하는 참배객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다양한 꽃이 피는데 특히 매화인 ‘도비우메’는 다른 매화보다 먼저 피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이곳 명물로 ‘우메가에 모치’라는 떡이 있는데 이 떡을 먹으면 병마를 물리치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버스나 전철을 타고 짧은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이 신사(神社)엔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과 중국인, 서양 관광객들이 1년 내내 몰린다고 한다. 풍광이 좋고, 이른바 ‘SNS에 잘 알려진 맛집’이 흔해서다.기자가 다자이후 텐만구를 찾았던 날도 수백 명의 여행자들로 신사 안과 거리, 식당이 붐볐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린 곳은 커다란 황소의 동상 앞이었다.“신사 입구에 만들어진 황소 동상을 쓰다듬으면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풍문이 전한다고 했다.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수험생과 그들 부모가 손바닥으로 정성 들여 쓸어댔는지 단단한 금속으로 제작된 황소의 등이 닳아서 반질반질했다.자신의 자식이 열심히 공부해 세칭 명문 대학에 가서 입신출세하길 바라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있을까? 드물거나 아예 없을 듯하다. 그곳이 일본이건, 한국이건. 앞서 말했듯 ‘사람 사는 모습이란 어디서나 비슷’하니까. ▲“자식이 잘 되길”… 일본, 한국, 베트남 부모들 모두가 같은 마음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6일 치러질 예정이다. 코앞으로 닥친 입시. 수험생도 긴장하고 마음을 졸이겠지만, 그런 심정이 더한 건 학생의 부모들일 터.지난 주말은 갑작스레 닥친 한파로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선 두꺼운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맨 어머니 수백 명이 석불(石佛·관봉석조여래좌상)을 향해 절을 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왜였을까? ‘한국 지명유래집’이 이렇게 알려준다.“멀리 서있는 부처에게 기도를 하면 한 번의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기복신앙지로 자리 잡은 갓바위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다. 특히 대학수능일을 전후해 전국에서 몰려드는 기도객으로 인해 정상부의 약 100여 평은 발 디딜 공간조차 마련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렇다. 일본의 부모들이 신사에 가서 자녀들의 행복과 학업 성취를 기원한다면, 한국 영남 일대에 거주하는 부모들은 자식이 시험에서 원하는 성적을 받도록 해달라고 팔공산 석불에게 치성을 드리는 것.이것들과 유사한 모습을 올봄엔 베트남 하노이에서도 봤다. 베트남 북부는 이른바 ‘한자문화권’이고, 하노이엔 공자의 사당(文廟)이 크게 자리해 있다.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다양한 관광객들이 거길 찾는다.베트남 왕조시대 과거(科擧) 합격자의 이름과 공적이 적힌 표지석이 여러 개 있는 하노이 문묘엔 붓글씨를 잘 쓰는 노인들이 소액의 사례금을 받고 아이들에게 글씨를 써주는 공간이 있다.아들과 딸을 데리고 문묘에 온 부모들은 “재능과 인품을 두루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주세요” 혹은, “이번 입학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게 해주세요”라는 의미가 담긴 문구를 부탁하고, 노인은 근사한 필체로 그걸 써주는 광경이 기자가 지켜본 30여 분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국적과 인종에 무관하다.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의 미래가 밝기를, 제 아이가 선량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한국이건, 일본이건, 베트남이건 다른 어떤 나라건.다자이후 텐만구를 다녀온 날. 후쿠오카 시내에서 홀로 저녁을 먹으며 건물 사이로 붉게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봤다.그때, ‘부모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쏟은 정성과 눈물을 안다면 세상엔 악인(惡人)이 없을 텐데’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게 덧없는 망상일지라도. ▲후쿠오카, 돈코츠라면은 짜고 민물장어덮밥은 맛있다지나치게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여행에선 ‘사색하고 고뇌하는 시간’도 있지만, 몸과 마음의 감각을 즐겁게 해주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게 기자의 믿음이다.그래서다. 지금부턴 가볍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후쿠오카는 다른 어떤 음식보다 ‘돈코츠라면’이 유명하다. MZ세대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몇몇 돈코츠라면 가게는 1시간 가까이 줄을 서야 입장이 가능할 정도였다. 대체 돈코츠라면이 무엇이기에.돈코츠는 ‘돼지의 뼈’를 의미하는 일본어. 그러니, 돼지 뼈로 육수를 만들고 갖가지 부수적 재료를 면발 위에 얹어 먹는 게 돈코츠라면이다.세상 모든 사람의 입맛이 똑같을 수는 없다. 제아무리 100인 중 99인이 엄지를 치켜세우는 ‘맛있는 돈코츠라면’이라 해도, 한두 사람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수 있는 게 당연한 법.기자가 그랬다. 제법 긴 시간을 기다려 유명세를 떨치는 가게에서 돈코츠라면을 먹었을 때 깜짝 놀랐다. 맛있어서는 아니었다. 이런 혼잣말을 했으니.“왜 이렇게 짠 거야? 만들다가 소금통을 쏟았나?”절반도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놓았다. 그럼에도 같은 메뉴를 주문한 옆 테이블의 젊은 커플은 면발은 물론, 국물까지 깔끔하게 비워내고 있었다.돌아와 일본 여행을 수십 차례 다녀온 후배에게 물어보니 “원래 후쿠오카 음식 간이 한국보다 강해요”라는 답을 들려줬다. 그래서였을까? 조리사가 실수한 게 아니고?기대 이하의 음식이 있다면, 당연지사 기대 이상의 음식도 있기 마련.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4박5일의 후쿠오카 여행에서 가장 만족스런 식사를 즐긴 건 민물장어덮밥을 주문했을 때였다. 일본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1926~ 2006)의 작품 중에 ‘우나기’란 것이 있다. 우나기는 ‘뱀장어’란 뜻의 일본어.20대 때 본 그 영화에 깊은 밤 장어 낚시를 하는 외로운 사내가 등장한다. 그가 홀로 먹던 장어덮밥이 참 맛있어 보이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이번 후쿠오카에서 먹었던 장어덮밥은 ‘나 홀로 여행자’의 외로움을 달래줄 정도로 일품이었다. 향기롭게 장어에 배어든 양념과 혀 위에서 그대로 녹아버릴 정도의 부드러움, 함께 주문한 연어알의 풍미까지 좋았으니까.만약 다시 후쿠오카에 가게 된다면 첫날 저녁 식사는 무조건 잊을 수 없는 ‘미각적 즐거움’을 선사한 조그만 민물장어덮밥 가게에서 하기로 마음먹었을 정도다. 이제 먹는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고.후쿠오카 여행의 백미로 손꼽히는 게 ‘나카스 강변 포장마차의 밤’이다. 다음 회에선 바로 그 포장마차 거리에서 만난 한국과 일본의 20~30대 청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싶다. (계속)/사진 제공: 홍성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1-14

대구서 40여 분 남짓… 한국인이 3번째로 많이 찾는 관광지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지칭해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는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봤을 터.여기서 ‘멀다’는 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해 점령했던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1910~1945)의 쓰리고 아픈 기억 탓이 크다. 그렇다면 ‘가깝다’는 무슨 의미일까?실제 우리나라와 예전엔 ‘왜(倭)’라고 낮춰 불렀던 일본의 물리적 거리는 매우 가깝다. 왜냐? 비행기는 물론, 선박에 장착해 속도를 높여주는 기계식 엔진이 없던 시절에도 한국과 일본의 왕래는 빈번했다. 이는 역사 문헌에도 드물지 않게 드러나는 사실.임진왜란이 끝난 후 우리는 일본으로 대규모 사신단(使臣團)을 파견하곤 했다. 이른바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다. 대부분이 알고 있겠으나, 한 번 더 부연한다. 아래는 ‘나무위키’의 설명이다.“조선 후기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을 말한다. 당시 어휘 ‘통신’은 ‘국왕의 뜻을 전함’이라는 의미였다. 보통은 1607년 이후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단만 가리키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조선 전기에 일본측에 파견된 사절도 포함시키기도 하며, 실제로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대(代)부터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후쿠오카 타워. 재삼 말하지만, 조선 후기인 17~18세기엔 시속 800km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없었고, 고성능 엔진을 달고 바람 같은 속도로 현해탄을 오가는 쾌속 페리도 존재하지 않았다.그럼에도 두 나라는 아주 오래 전부터 때로는 갈등하고 반목하며, 어떤 때는 화해와 화평을 논의하며 교류를 지속해왔다.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국가들이었던 것. 사실 조선시대보다 1천 년 전인 신라시대 때도 일본인과 한국인은 서로의 나라를 드나들었다. 좋은 뜻을 가졌건, 노략질을 하기 위해서건.까마득한 옛날인 그때는 일본에서 한국,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려면 바람에 운을 맡긴 돛단배가 교통수단의 전부였을 게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지금으로부터 1천342년 전인 681년 사망한 신라 문무왕은 유언이 “죽더라도 내가 용이 되어 동해에 출몰하는 왜적들을 막을 테니, 나를 바다에 장사 지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문무왕은 유택(幽宅)은 경주 봉길리 바닷가 지척의 ‘대왕암’이다.▲대구 출발, 칵테일 한 잔도 마시기 전 “후쿠오카입니다”서설이 과하게 길었다. 본론으로 간다. 뒤늦게 다녀온 휴가에서 기자는 몸으로 실감했다. 일본과 한국이 지척이라는 사실을.일본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섬나라다. 몇 해 전 2번의 일본 여행은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로 갔다. 두 곳 모두 인천공항과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3시간 안팎을 날아가야 닿을 수 있었다.헌데, 이번에 여행지로 결정한 곳은 일본 후쿠오카. 거길 가겠다고 하니 먼저 후쿠오카를 다녀온 선후배들이 웃으며 말했다.“비행기 뜨면 화장실 갈 사이도 없이 내리게 될 걸.”실제로 그랬다. 대구공항을 이륙한 티웨이항공 비행기의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고, 스튜어디스들이 기념품과 음료를 판매하기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저가항공’은 항공기 내의 각종 서비스를 과감하게 없애고 항공료를 낮춘 시스템으로 운영된다.그래서, 공짜로 술을 청해 마시거나, 무료로 먹을 수 있는 식사가 없다. 대신 티켓 가격이 저렴하다는 메리트가 있다.기자가 발권한 대구-후쿠오카 왕복항공권 가격도 포항-제주도 성수기 항공권 가격보다 겨우 3~4만원이 비싼 21만 원 정도였다.어쨌건, 비행기에 올랐으니 여행자의 들뜬 기분을 억제하기 못해 ‘잭 앤 코크’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려고 테네시 위스키 잭 다니엘스(Jack Daniel’s) 미니병과 콜라 한 캔을 주문했다. 콜라와 저가 위스키를 섞는 아주 심플한 칵테일이 ‘잭 앤 코크’다. 그런데 이게 뭐지? 술병과 콜라 캔을 따고 그걸 적당량 믹스해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한 모금 마시려고 할 때 기장의 기내 방송이 시작됐다.“우리 비행기는 지금 일본 후쿠오카 상공에 와있습니다. 지금 후쿠오카의 현지 기온은….”대구공항에서 예매한 항공권을 실물 항공권으로 교환하고, 수화물을 맡긴 후 검색대를 통과하고, 면세구역에서 담배와 초콜릿을 사는데 걸린 시간보다 대구 상공에서 후쿠오카 상공까지 도착하는 시간이 더 짧았다.그러니까, 겨우 40여 분 남짓. 선후배들의 말은 실없는 ‘농담’이 아닌 ‘팩트’였던 것이다. 어쨌건 칵테일 한 잔도 다 마시지 못하고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럼 후쿠오카는 어떤 도시일까? 그 궁금증에 ‘나무위키’가 간략하게 답한다. “후쿠오카현(福岡県)은 일본 규슈 북부에 위치한 현이다. 면적은 약 4천980㎢, 인구는 약 511만 명이다. 규슈 최대 현이자 중심지. 규슈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후쿠오카시와 두 번째로 많은 기타큐슈시가 모두 후쿠오카현에 있다. 혼슈와 간몬해협의 해저터널과 교량으로 연결돼 교통의 중심이다. 명실상부한 규슈의 수도와 같은 지역이다. (최근 오염수 방류로 주목받은) 후쿠시마와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는 사람도 있으나, 복(福)자가 들어가는 걸 빼면 딱히 관계는 없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오사카, 도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찾는 일본 유수의 관광지이기도 하다.”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 물가, 그리고 맛있는 음식들…여행자가 가장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시간은 낯선 도시에 도착해 예약해놓은 숙소를 찾기까지가 아닐까? 기자 역시 그렇다.하지만, 후쿠오카에서라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공항이 시내에서 가까워 지하철이나 셔틀버스로 30분이면 가닿을 수 있었다.게다가 버스정류장과 지하철 환승역 곳곳에 한글 표기가 돼있어 일본어를 읽고 쓸 줄 모른다 해도 호텔을 찾아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코로나19 사태’ 이전 일본을 찾은 관광객들은 “물가가 한국보다 비싸서 근사한 식당에서 요리를 먹거나, 백화점에서 선물을 사는 게 부담스럽다”는 고충을 말하곤 했다.헌데, 지금은 부정할 수 없는 ‘엔저’(국제 환시세에서 일본 화폐인 엔의 값이 다른 나라 화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진 현상)의 시기.기자가 후쿠오카를 여행했을 땐 일본 돈 100엔이 한국 돈 900원이었는데, 기사를 쓰고 있는 2023년 11월 6일 오후 현재는 868원으로 더 떨어졌다.그래서였을까? 후쿠오카 지하철 요금은 서울 지하철 요금보다 크게 높아 보이지 않았고, 보통의 일본 사람들이 드나드는 대중적인 고깃집과 초밥집의 메뉴도 그다지 비싸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체감 물가’가 그랬다는 이야기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한국도 어느 도시건 화장실과 거리, 숙박시설과 공공건물이 깔끔하게 관리돼 있다. 유럽에서 한국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놀랄 정도다. 프랑스 파리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후쿠오카 역시 그랬다. 깨끗하게 정돈된 길거리와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낭만적인 모모치 해변,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지저분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어쨌건 후쿠오카에서의 4박5일은 기대보다 즐거웠다.‘후쿠오카의 랜드마크’로 불리는 타워와 넓은 호숫가를 산책하기 좋은 오호리공원, 다소 투박하지만 많은 역사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후쿠오카 성터, ‘내 자식이 공부 열심히 해서 입신출세(立身出世)하게 해주세요’라고 기원하는 공간으로 유명한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満宮) 등을 돌아봤고, 후쿠오카의 ‘일미(一味)’로 불리는 것들을 두루 맛보았다.조그만 개인 테이블에서 화로에 구워 먹는 일본 소고기와 ‘후쿠오카 명물’ 돈코츠라면, 그리고, 너무 예쁘게 장식돼 먹기가 아까웠던 초밥까지.여행 중 후쿠오카에서 겪었던 흥미로운 사건과 기억 속에 남은 사람들 이야기는 다음 회에 들려주려 한다. (계속)/사진 제공: 홍성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