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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태양신화의 '삼족오 문양' 포항 브랜드로"

3. 태양신화의 동점과 농경제의1) 태양신화의 동점연오랑과 세오녀가 이즈모(出雲)를 중심으로 한 산음(山陰)지역 변읍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고 추정되는 것은《일본서기》와《고사기》등 일본 사서의「스사노오노미코도의 출운천강설화(出雲天降說話)」와 아메노히보코(天日槍)의 도일설화 속에 나타나는 내용과 기본 구조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병도는「천일창의 전설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연오랑세오녀의 설화를 연상케 하거니와 단 후자는 전자와 반대로 남편 연오가 먼저 일본에 건너가 왕노릇을 하고 다음에 아내 세오가 도해하였다고 한다. 연오 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에는 신라의 일월이 빛을 잃었다는 설화와 천일창이란 이름과의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이것도 생각할 문제이다......천일창 등의 사화는 무엇보다 고대 변진인들이 동해의 일본을 별천지로 알아 여기에 빈삭(頻數)한 왕래, 활발한 무역과 이주식민을 행하면서 일대세력을 잡고 있었던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주고 남음이 있다.」라고 하였다.장덕순은 연오랑세오녀가 바다를 건너간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 문헌에는 없으나 다행히도 일본 문헌에는 자세히 전하고 있는데, 신라의 일월신인 연오랑세오녀가 오끼(隱岐)섬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은기는 본래 영일지역의 초기 명칭인 근오지(斤烏支)가 일본의 오끼(오기)지명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고찰을 종합할 때 한국 일월신화의 근원인 한민족(고조선)문명권의 삼족오태양숭배사상이 민족 이동과 함께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한국 양곡(暘谷)의 고장 영일지역에 귀착하였으며, 아울러 이 일월신화가 일본으로 이동하여 일본 소국의 개국신화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2) 농경제의(農耕祭儀) 특별한 환경의 영일지역에 귀착한 고대 한민족 문명권의 삼족오 태양신화에서 비롯된 연오랑세오녀의 일월신제는 광명을 발하여 천지를 밝게 하고 만물을 생육하게 하는 해와 재생과 풍요를 상징하는 달을 숭배하여 한해의 풍년과 집단의 안녕을 기원하는 농경제의를 구조적 기저로 하여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흔히들 신화시대를 제정일치사회라고 칭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이 신화의 구조를 종합할 때 연오랑세오녀가 근오지국의 유력한 인사 특히 일월신제와 농경제의를 주재했던 제사장으로 생각된다. 아달라왕대의 시대적·역사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수서(隋書)》와《당서(唐書)》에서「매양 정월 초하룻날 일월신에 절한다」라 하여, 정월 원단에 일월신에게 절(제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라의 고유한 일월제는 정월 초하루에 거행되지 않았나 추정되며, 그 제의 장소는 연오랑세오녀 설화가 유전되는 도기야인 듯하다.포항지역이 신라시대부터 중요한 제의 장소로 등장된 것은 근기국의 일월신제의의 본거지였고, 동해안의 긴 해안지역의 어로채취 뿐만 아니라 특히 농경지가 넓게 분포되어 농산(農産)이 많고, 신라 왕경 경주로 침입하는 동해구로서 ‘해구침입의 요해처(海寇侵入之要害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오랑세오녀 신화는 처음에는 삼족오태양숭배의 일월신제에서 출발했으나 선사시대부터 국토방위를 위한 성격이 첨가되고 후대로 오면서 점차 농경제의와 습합되어 제일(祭日)도 매년 원단(元旦)과 파종·수확기인 봄·가을 2~3회로 지내왔던 것으로 본다.Ⅳ. 포항문화 브랜드의 미래화 포항 영일만은 한국 삼족오 태양(일월)신화의 귀착지로서 2번의 신화를 창출한 한반도의 정기와 국운상승의 기운이 서린 곳이다. 포항문화 정체성의 원형질이며 포항정신의 근원인 삼족오 일월사상의 문화브랜화는 지역문화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발현시키는 동시에 빛의 광명사상을 문화화·생활화하여 포항과 지역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미래 포항발전의 원천적인 에너지로 승화하자는데 큰 뜻을 두고 있다.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을 브랜드화하여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몇가지 제시한다. (1) 학술적이고 과학적인 문화재 발굴, 문화유산의 보존과 발전에 대한 계기적 연구가 뒤따라야 하며, 이 분야의 전문인력을 길러낼 수 있는 지역 대학의 인문·예술 관련 학과의 개설을 추진해야 한다. (2) 포항문화 브랜드화의 핵심적인 과제 중의 하나인 박물관(가칭, ‘일월박물관’)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 (3) 포항정신의 DNA로서 아름답고 힘찬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와 한민족 태양숭배신앙의 ‘삼족오태양’를 표상하는 ‘삼족오’ 문양을 포항(문화)의 브랜드로 채택할 것을 제의한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국가 브랜드인 삼족오의 세발이 삼신(환인, 환웅, 단군)을 상징한 것이라면, 현대 포항 삼족오의 세발은 선진 첨단과학문화관광도시로의 도약을 상징하는 세발, 즉 3S(Sun, Steel, Science, 또는 Sightseeing)가 될 것이다.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의 고장(과거), 영일만 신화의 철강도시(현재), 꿈과 신화의 첨단과학문화관광도시(미래)를 상징하고 있다. 맺음말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포항지역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배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써 연오랑세오녀 신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여러 추정을 ‘실존 인물 연오랑세오녀의 행적’이 신화화 된 것으로 구명할 수 있었다. 포항문화 정체성의 고향이며 포항정신의 뿌리인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은 온누리를 밝히는 광명정대 사상으로서 홍익인간의 이념을 표방한다. 즉, 포항인의 신앙이며, 사상이며, 꿈과 희망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광명정대 사상(일월사상)은 구체적으로 희망, 충절, 개척, 화합, 근면, 부부사랑을 함축하는 일월정신(포항정신)의 요람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포항의 역사와 문화 저력이 되었던 일월정신(포항정신)은 포항이 역사의 시련과 위기 때마다 시대적 과제를 달성해 온 포항의 생존과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를 낳은 ‘일월지향(日月之鄕), 포항’이란 말은 시민들에게 자긍심과 함께 무한한 꿈과 희망의 가능성을 심어주고 있다. 포항은 ‘삼족오태양의 도시’ ‘일월신화의 도시’다. 포항은 고대국가 형성기에 연오랑세오녀가 신천지를 개척하고 신라의 빛을 회복하여 제1의 영일만 신화를 창조하였고, 근래 1968년 이후 포스코의 설립으로 제철보국의 한국 근대화를 이룩하여 제2의 영일만 신화를 재창출하였고, 바야흐로 지금부터 꿈과 희망의 도시 첨단과학문화관광도시, 글로벌 포항을 향해 제3의 영일만 신화에 도전, 점화할 때이다. 아울러 앞으로 한국과 일본 태양신화의 요람인 포항이 삼족오 일월신화를 브랜드화하고 일본 신화의 도시와 자매결연·민관교류 등을 모색한다면 양국 선린교류의 한 물꼬로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에 의해 전통과 미래가 함께하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하는 ‘활기찬 경제’ , ‘쾌적한 환경’, ‘따뜻한 복지’, ‘꽃피는 문화’의 도시 글로벌 포항은 성큼 다가오는 것이며, 이 길은 포항시민들의 행복한 삶과 자손만대의 무궁한 번영을 위한 영일만 신화의 세 번째 목표인 것이다. 포항(문화) 브랜드의 이론적 배경은 새로 발견된 자료에 의해 연오랑세오녀가 실존 인물로 밝혀짐에 따라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이번 ‘제7회 일월문화제’의 ‘제1회포항정신문화 심포지엄’을 통해 포항이 이 ‘일월신화의 도시’로 브랜드화 하여 포항 정체성의 이미지를 세계화하는 횃불로서 역사적인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끝

2007-11-16

연오랑 · 세오녀는 日 개국신화의 모태

Ⅲ. 역사적 배경1. 근기국 형성과 신라로의 편입1) 근기국의 형성근기국의 읍기는 고현리(古縣里)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포항시 남구 오천읍 원리(院里:院洞)지역이다. 고현은 오늘날 포항 남부지역의 젓줄인 형산강과 냉천 사이의 중심지역으로, 양쪽 하구 부근에 어미들, 제내들, 송내들 등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포항시 남구 인덕동, 동북쪽으로는 일월동과 청림동을 접하여 영일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연해지역과 내륙을 있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선사시대부터 주거생활의 중심지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일찍이 근기국을 신라시대의 근오지현(斤烏支縣) 지역이었던 경북의 영일지역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음운상으로도 근기(勤耆)-근오기-근오지(斤烏支)로 변함이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근기국은 고현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포항시 남구의 오천읍, 연일읍, 동해면, 대송면 등의 지역을 지배한 소국을 형성하면서부터 이 고장의 역사는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2) 신라로의 편입과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탄생근기국은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세기초 경 소국을 형성하였다가 신라 건국 이후 2세기경 고대국가에 편입되었다. 신라 고대국가의 형성기인 제5대 파사왕(80~112)때에 전쟁을 수행하여 안강·흥해·기계를 복속하여 울산까지 동해안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 후 신라 고대국가 형성의 큰 정치사적 사건인 근기국 복속이 제8대 아달라왕(154~183)대에 이루어진다. 연오랑세오녀 신화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아달라왕대 고대국가의 영역 확장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신화가 탄생된 왕 즉위 4년(157)이 주목되며, 「2월에 감물·마산의 두 현을 처음으로 두었고, 3월에 왕은 장령진으로 순행하여 군사를 위로하고 모든 정병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3월에 지난 해(왕 3년)의 계림령에 이어 죽령(竹嶺)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계획과 실천은 아달라왕대에 이르러 영일만 일대를 실질적인 지배영역으로 복속하여 흥해에서 울산만에 이르는 동해안의 지역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신라 2대 남해왕 3년에 시조묘를 세운 후 7대까지 한 차례씩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으나 8대 아달라왕대에 와서 두 번이나 시조묘 제사를 올리며, 시조묘를 중수했다는 사실은 건국의 시조신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통합하여 신라 고대국가의 확립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오랑과 세오녀를 중심으로 한 근기국의 삼족오일월숭배 집단(사제자·귀족·직조·제철기술자 등)은 전통적인 천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사로국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자 신라의 복속에 불응하고 도기야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양곡의 땅 신천지 일본지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영일만의 근기국세력이 일본 변읍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신라의 정치적 상황과 연계된 것으로 이 후 전개되는 모국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한다.2. 선진문화 전파와 일본과의 교류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대 한국인의 일본이주와 문화이식이 일본고대사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음은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관계로 선사시대부터 관계를 맺어 고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문화가 대량으로 일본에 유입 전수되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일본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B.C 4세기~A.D 3세기)문화는 토기·청동기와 묘제·주거양식 등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진한과 신라는 철과 철기를 생산하여 당시 동북 아시아에 널리 공급하던 철국이었으며, 그 흔적으로 영일 호동(虎洞:현 포항시 남구) 폐고분군(廢古墳群)에서 B.C.2세기~A.D.2세기경의 초기 철기시대의 철부(鐵斧)·철모(鐵?)·철도자(鐵刀子)·철촉(鐵鏃) 등의 철제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근기국의 치소 인근에서 활발했던 철생산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 실체는 고고학적 성과를 더 기다려 확인되어야 할 것 같다. 일찍이 이홍직(李弘稙)은「신라 지방과 이즈모지방과의 긴밀한 척식(拓殖)관계를 전하는 일본측 고전으로서는 ‘이즈모풍토기(出雲風土記)’가 있다.」,「진한(辰韓) 지방에서 동해를 건너서 일본의 일부 지방의 지배자가 된 신화는 우리나라 고전에도 남아 있다... 이것이야 말로 태고시대에 정말 있을 수 있는 역사를 반영한 전설로 볼 곳이며, ‘연오랑(延烏郞)’이야 말로 일본 전설의 ‘스사노오노미코도(素잔嗚尊)’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라 하여 양국의 교통과 문화교류 등 이 방면 연구에 큰 시사를 주었다.연오랑세오녀 세력들이 배를 타고 떠난 곳은 영일만 출입의 요해처인 임곡진으로 비정되며, 그들이 도해하여 개척한 곳은 영일만 지역과 가장 가까운 일본 지역으로 거의 같은 위도인 36。에 있는 오키(隱岐)섬과 이즈모(出雲)·마쓰에(松江)지역을 들 수 있다. 영일과 출운 지역은 가까운 거리, 항만, 조류와 풍향 등의 자연의 지리와 환경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일본의 천일창(天日槍) 설화는 연오랑세오녀 신화가 동점하여 이루어진 태양신화의 이동으로 보는 연구와 함께「도기야(都祈野)는 근오지(斤烏支)의 ‘오지’(烏支)와도 음이 일치하며, 일본의 지명 오키(隱岐)와도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연오랑세오녀가 건너가 옛땅 오기(迎日)의 이름을 신왕국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보는 연구는 태양신화 동점의 민속학적 접근과 지명의 언어학적 접근으로 눈길을 끈다. 계속

2007-11-09

포항은 한국 일월신화의 대표적 聖地

Ⅱ. 신화의 지리적 배경과 지명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의 명증(明證)은 앞의 문헌자료 외에도 포항 지역의 특성을 밝혀주는 연(영)오·세오의 인명과 근기국, 근오지(斤烏支), 오천, 일월·영일·도기야·일광·세계·夫山(부산 또는 扶桑)·광명 등 해와 달, 해맞이, 빛을 상징하는 밀집 분포된 지명을 통해 밝힐 수 있다. 연오랑세오녀 신화가 없었더라면 일월·빛과 관련된 수많은 인명·지명의 역사적 배경을 온전히 구명할 수 없고, 반면에 이러한 명칭들이 남겨지지 않았다면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지리적 배경을 구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一 즉 二’ ‘二즉 一’로서 서로의 정체성을 보완하고 밝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1. 영일현과 도기야《삼국유사》에서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한 것에 대해 필자는 넓게는 영일현(당시의 근기국과 근오지현의 영역), 좁게는 도기야를 지칭한 것으로 보았다.선사시대부터 사용되었을 두 명칭 중 영일은 근기국 수립시의 치소 명칭과 신라 편입후 고을명인 근오지·오천·오량우·임정 등의 명칭으로 변하였으나, 도기야는 초기와 같은 ‘해돋는(크게 비는)’ 신성한 들(野)의 이름, 제장명(祭場名)으로 오랫동안 불리워지다가 점차 마을이 형성되어가면서 마을명으로 변천했다고 본다. 2. 일월지, 천제당, 연오랑세오녀의 거주지 ‘당평’(塘坪)마을 현재 일월지는 오천 해병부대 내에 소재하고 있으나, 본래는 도기야 지역에 속해 있었다. 주위보다 높은 언덕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저수지로서 주변의 여러 작고 큰 들을 끼고 있어서 비록 바닷가 지역이지만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데 큰 도움을 준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일월지의 못 위’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일월지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해석을 좀더 폭넓게 하여, 일월지 못둑 위 가까운 지점에서만 제천지나 제당을 찾지 않고, 좀 떨어진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연오랑세오녀가 살았던 세계동의 당평 마을이 제천지와 일월사당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고자 하였다. 세계동은 ‘당평(안마실, 안마을)’, ‘중흥’, ‘등위(신흥)’, ‘원세계’, ‘장터’ 등의 자연부락을 합쳐 이루어졌다. 이 동네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천제당(天祭堂)’이 있어서 매년 정월 초 정일(丁日)에 연오랑·세오녀 일월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당집 내부 앞 벽면에는 부부처럼 보이는 남녀가 서로 마중하는 시늉을 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과거 천제당 자리였으므로 아마도 연오랑세오녀 부부를 상징한 그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천제당이 있었던 당평마을에서 동해바다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길목 언덕에 ‘당옆’이란 자연부락이 있다. ‘당옆’마을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 바로 이 당옆마을에 연오랑세오녀가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마을 이름의 유래도 연오랑세오녀의 집인 ‘당(堂)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3. 연(영)오·세오와 삼족오 포항지역의 일월과 관련된 명칭 중에 ‘오(烏)’자가 든 지명인 斤烏支·烏良友·烏川·斤烏兄은 삼족오태양(일월)을 상징하는 양곡(暘谷:해가 가장 먼저 돋는 곳)의 고을명이다. 延烏와 細烏 역시 삼족오태양(일월)을 상징하는 인명이다. 해 속의 세발 까마귀 삼족오(日中三足烏)는 달 속의 두꺼비(月中蟾?)와 함께 쌍을 이루고 있다. 삼족오는 음양론에 따라 해의 상징으로 양의 뜻이고, 두꺼비는 달의 상징으로 음의 뜻이다. 이러한 인명과 지명들은 영일만 양곡이 고대 한민족 문명권의 삼족오태양신화가 이동 전승된 귀착지로서 한국의 대표적 일월신화의 성지임을 밝혀주고 있다. 천손의 나라 한민족의 태양숭배사상과 조류숭배사상의 연합토템으로서의 우주관, 일월의 음양조화사상 및 천제적 제의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이 상징화되고 체계화된 것이 삼족오라 할 수 있으며, ‘하느님숭배’·‘태양숭배’·‘삼신(三神:환인·환웅·단군)숭배사상의’ 상징적 표현양식의 하나임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월지정(日月之精)이라는 의미와 함께 일월신화의 이동 경로에 나타난 삼족오의 ‘烏’자가 든 인명이 주목된다. 연오랑세오녀는 일월지정의 양오(暘烏)이며, 천강지자(天子) 왕(태양)의 안내자임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오이(烏伊), 백제의 시조도 오간(烏干) 등의 보필로 나라를 세웠다. 그러므로 연오랑과 세오녀도 근기국과 신라의 왕을 보필하는 지배세력의 유력한 인사(사제자,왕족, 귀족, 고급기술자 등)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왕을 대신하여 태양의 빛을 온 나라와 백성에게 안내하고 밝히던 높은 직분의 인사였을 것이다.삼족오 문양은 고구려의 벽화 뿐만 아니라 1986년 익산(益山) 입점리(笠店里) 백제고분의 금동관에서도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지난 1985년 출토된 순흥읍내리 고분벽화에서도 양광(陽光) 즉, 양수지조(陽燧之鳥)와 흡사한 삼족오의 전신(前身)을 상징하는 일상(日象)이 발견되었다. 신라지역인 경북 동북부의 영풍·안동·봉화·청송·울진·영덕·영일·영일지역에서도 고구려 지명이 나타난 점으로 보아 상당한 기간 고구려의 세력이 이들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삼족오태양 관련 유물 연구와 지금까지 살펴 본 지명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지리적·역사적 특성 구명을 종합해 볼 때 우리 나라 일월신화와 삼족오태양신앙의 종착지인 포항 영일만 지역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될 것임을 기대한다. 계속

2007-11-02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배용일(포항1대학 초빙교수)이 글은 배용일 초빙교수(포항1대학)께서 지난 10월 8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된 제7회 일월문화제 기념 ‘제1회 포항정신문화 학술심포지엄’(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일월사상)에서 발표한 주제 논문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포항 정체성 탐구와 포항문화브랜드화를 중심으로- ”를 요약한 것이다.(각주는 지면 관계로 생략) /편집자 註 머리말 포항지역의 연오랑 세오녀(延烏郞細烏女) 일월신화(日月神話)는 단군신화를 수록하여 유명한《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어 일찍부터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최남선이 단군신화는 한국문화 일체의 종자라고 했듯이 연오랑 세오녀 신화는 포항문화 일체의 종자이며 원형질이다. 지금까지 ‘연오랑 세오녀 설화’라고 일컬어 온 것을 2007년 포항의 문화제 명칭을 영일만축제에서 이번 제7회 ‘일월문화제(日月文化祭)’로 개칭한 것을 기념하는 ‘제1회 포항정신문화 학술심포지엄’ 개최를 계기로 ‘연오랑 세오녀 신화’로 명명하였다. 그 이론적 근거는 본고의 지리적 배경, 역사적 배경 및 신화적 구조를 통해 구명하였다. 이번 연구에서 연오랑세오녀가 실존 인물임을 밝히는 귀중한 사료를 발견하여 포항 정체성 탐구에 큰 전기를 맞으며, 일월신화 1850년의 신비로운 베일을 한 겹 벗길 수 있게 되었다.이 논문의 궁극적 목표는 연구 결과 얻은 포항문화의 정체성을 브랜드로 상징화하여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의 창조적 가치를 재창출하는데 큰 뜻을 두었다. Ⅰ.연오랑 세오녀 사료연오랑 세오녀 신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는 《삼국유사》의 ‘연오랑(延烏郞)세오녀(細烏女)’와《영일읍지》의 ‘세계동(世界洞)’의 내용을 소개한다. 1.《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제 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미역 종류〕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바위 -혹은 한 고기라고도 한다-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이는 비상한 사람이다.」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 제기(帝紀)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이 왕 된 이가 없으니, 이것은 변읍(邊邑)의 소왕이고, 진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 오지 않음을 괴이히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의 벗어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또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세오〕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일관(日官)이 말했다.「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왕은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연오는 말했다.「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거요.」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그런 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三國遺事》권1, 紀異, 원문생략) 2.《영일읍지》의 ‘세계동’예로부터 세곡이라 부르다가 후에는 누을(또는 혜곡)이라고 불렀다. 세 구역(원신흥·중흥·세계)을 합하여 세계동이라고 했다. 신라 아달라왕 때 영오랑·세오녀가 세계동의 못둑 위의 들에 집을 지어 살았던 곳이나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 남쪽에는 춘덕보가 있어 일월지로 통하고, 동쪽에는 순제가 있어 앞들에 물을 대고, 북쪽에는 옥령이 있고, 서쪽에는 도덕곡이 있다.(金鎔濟,《迎日邑誌》권1 ‘世界洞’ 원문생략) 《삼국유사》에서는 연오랑(延烏郞)이라 했으나《영일읍지》는 연(延)자를 영(迎영)자로 써서 영오랑(迎烏郞)이라 다르게 표기했다. 그러나 ‘연(延)’과 ‘영(迎)’은 음과 훈이 흡사하여 조선시대에는 영일현(迎日縣)과 연일현(延日縣)을 혼용해 온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같은 명칭이다. 《영일읍지》‘세계동’에서는 영오랑 세오녀가 집을 짓고 살았던 세계동 마을과 주위의 못·재·골짜기 등 구체적인 지형적 환경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일월지와 제천지(祭天地) 및 연오랑세오녀 거처를 비정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하여 당시 부부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세계동〉의 마을명과 주변의 못·재·골짜기의 명칭이 지금까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동국여지승람》의「일월지 못 위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은 일월신화의 발생지역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 신화는「동해 바닷가에 사는 해와 달의 정(精)인 연오랑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일본에 건너가 그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도일(渡日) 건국 사실이 자연환경의 지역성과 고대 신라왕국 성립기의 역사성을 토대로 상징화된 것이다. 즉, 당시 전개되었던 근기국(勤耆國)의 신라로의 편입, 선진문화의 일본전파 및 신라와 일본과의 문물교류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화한 것으로 추단된다. 특히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탄생지를 에워싼 여러 지명들과 이 지역의 가장 빠른 연중 일출시각 등은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포항지역만이 일월신화의 정체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계속

2007-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