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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고분 뒤에 또 고분이… 숨바꼭질 하는 23개의 초록능선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 이후 31년 만에 경주 대릉원을 다시 찾은 건 겨울의 기운을 채 떨치지 못한 올 초봄이었다. 고분 위 잔디는 아직 물기와 푸른 기운을 머금기 전이었고, 쌀쌀한 날씨 탓에 관광객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소 황량한 풍경. 하지만, 이후 취재를 위해 봄기운이 완연했던 4~5월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대릉원을 포함한 경주 일대가 벚꽃과 유채꽃으로 환했고, 가족 단위의 관광객과 연인들로 인해 도시 전체가 젊은 에너지도 가득했다.대나무·소나무 우거진 역사의 보물창고엔미추왕릉·천마총 등 이십여 봉분이 옹기종기계절마다 다른 매력, 여행객 발길 이어져`감수성 가득한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소설가 강석경은 대릉원의 봄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미추왕릉에서 왕들의 계곡으로 걸음을 옮기니 고분 뒤편에 또 고분, 능선이 숨바꼭질하듯 변한다. 내 가슴은 희로애락으로 들끓건만 자연의 곡선은 저리도 평화로운가. 뱀 허리처럼 휘어진 오솔길로 들어서자 좌우 앞뒤로 거대한 고분에 에워싸이고, 봄날 풀이 막 돋기 시작하는 금빛 고분들 속에 서 있으니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싶다.”이처럼 아름다운 `봄날의 대릉원`을 두어 차례나 보았으니, 당연지사 `대릉원의 여름`도 궁금해졌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선 다시 2개월을 기다려야했다.그리고, 뜨거운 햇살이 드러난 팔다리를 까맣게 태우는 7월 중순. 대릉원을 다시 찾았다. 차를 세우고 입장권을 구입해 들어선 입구에서부터 기자의 기대는 찬탄으로 바뀌었다.시원스레 몸을 하늘로 뻗어 올린 대나무는 푸르른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쉴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고 , 고분 사이사이에 꽃을 피운 백일홍은 대릉원을 찾은 중년의 여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100일간 꽃을 피운다하여 `백일초`로도 불리는 백일홍은 그 강렬한 진분홍 빛깔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매력적인 꽃이다.경주의 여름은 인간만이 아닌 미물들까지 설레게 하는 힘이 있어서일까? 높디높은 미추왕릉 봉분 위에서 까치 몇 마리가 날개를 접고 종종걸음을 쳤다. 그 옛날 왕에게 예의를 표하는 듯도 보였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대릉원 한 구석에선 청설모가 겁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좌우도 돌아보지 않는다.선생님의 인솔 하에 친구들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왔다는 에밀리(18)는 산처럼 거대한 왕들의 무덤과 기묘하게 자라난 소나무들, 거기에 분홍색 꽃과 귀여운 청설모 사이에서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해보였다.“한국은 처음인가요? 여기 어때요”라는 질문에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에요. 정말 놀랐고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답하는 에밀리의 목소리는 한국의 또래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청명하고 귀여웠다.방학을 맞아 멀리 경기도 수원에서 경주를 찾은 대학생 커플 김OO씨와 강OO씨는 스물한 살 동갑내기. 어제 오후 경주에 도착해 옛 궁궐터와 국립박물관, 동궁과 월지, 첨성대 등을 둘러보고 하룻밤을 묵은 후 대릉원을 찾았다는 연인은 학구적이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금관총을 꼼꼼히 둘러보고는, 그걸 작은 공책에 메모하던 강씨는 “1천500년 전 사람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금관을 만들어냈고, 예술적 감각으로 빚은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는 게 신비롭게 느껴져요. 어렵게 생각됐던 역사가 책에서 볼 때와 달리 직접 현장에 와서 보니 흥미롭게 다가서네요”라며 백일홍처럼 빛나는 웃음을 지었다.대릉원 한편에는 경주에서 진행된 각종 토목공사 현장에서 찾아낸 신라시대의 석조물을 모아놓은 공간이 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그 석조물과 짙게 드리워진 나무그늘을 배경으로 점잖게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선뜻 다가가 말을 건네기가 어려울 만치 엄숙한 풍경이었다.기자는 상상했다. 저 노인은 사라지는 세상의 풍경과 때마다 돋아나는 새로운 생명, 화려했지만 동시에 덧없었던 왕들의 생애와 반복되지 않기에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인간의 삶을 기록한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그때쯤 다시 한 번 강석경의 결 고운 문장이 떠올랐다.“대릉원으로 들어서니 하늘로 뻗은 노송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화단에 심어진 나무 잎들이 바람에 물결친다... 경주엔 능이 많아 소나무가 많고 자연환경이 좋은 것 같다... 선조들의 꿈이 묻힌 능은 그 크기만큼 우리들에게 환상을 주니 경주를 경주답게 하는 주역은 능이다.”경주를 경주답게 해주는 능. 그 능 스물셋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대릉원은 `역사의 보물창고`에 다름없다. 소중한 것도 너무 가까이 있으면 소홀하게 대하기 쉽다. 혹, 경주의 역사와 빛나는 문화유산도 그런 취급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날 우리에게 대릉원은 무엇이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역사란 어떤 의미인가?화사한 인사로 사람들을 배웅하는 백일홍과 올곧은 기질이 군자를 닮은 대나무숲 사이를 빠져나오는 순간, 벌써부터 `대릉원의 가을`과 `대릉원의 겨울`이 궁금해졌다. 이 기다림 또한 달콤할 것이리라. 미추왕이 잠든 거대한 `신라의 정원`시내 한가운데서 산책하며 역사공부 즐기는 드문 체험총면적 41만4천545㎡(12만5천400평)의 `거대한 정원`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대릉원은 경주시 황남동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선 신라시대 왕과 왕비 그리고, 귀족의 유택으로 추정되는 23기의 고분과 만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신라왕조 최고 권력층의 사후 집단거주지`인 것이다.`대릉원`이란 명칭은 `삼국사기`에 서술된 “미추왕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는 문장에서 착안해 지었다고 한다. 미추왕은 신라 13대 왕으로 262년부터 22년간 재위했다.그는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군이었다. 농민 등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들의 형편을 살폈고, 노인을 존중했다.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사신을 각 지역으로 파견해 피해 정도를 보고받은 후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궁궐을 증축하자는 대신들의 건의도 “백성들에게 힘든 일을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며 거부했다. 이런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니, 백성들이 미추왕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른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신라만의 독특한 무덤군(群) 형태를 취하고 있는 대릉원은 사적 175호인 미추왕릉과 대량의 금관과 유물이 발굴된 천마총 등이 자리하고 있어 일 년 내내 여행객과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또한 대릉원은 경주 외 다른 지역과 달리 평지에 고분을 조성했기 때문에 `산 자`와 `사라진 자`의 흔적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한 `관광 포인트`로서도 그 의미가 크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시내 한 가운데서 확인하는 드문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1970년대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역사공부와 산책을 겸할 수 있도록 공원처럼 조성한 대릉원은 경주시민들에겐 자랑할 만한 휴식공간이 되고, 국내외 관광객들에겐 세계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풍경으로 다가온다.대릉원을 조성할 당시 발굴된 유물은 숫자도 숫자지만, 인류학적·고고학적 가치도 높은 것들이 상당수다. ◆서수형 토기 ◆수레형 토기 ◆상감목걸이 ◆천마도 ◆금관 및 각종 금장신구 등은 천년 세월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끝

2016-07-21

천년왕국 마지막 시대가 묻힌 `삼릉` 비운의 제왕들 넋이라도 있고, 없고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어떤 권력도 10년을 이어 영화 누리기가 힘들고, 제아무리 어여쁜 붉은 꽃이라 해도 그 온전한 색채는 열흘을 가지 못한다고 했다. 통일신라말 신덕·경명왕 통치 시절엔 기울어진 국운 속 천재지변까지 잦아8대 아달라왕릉 옆 父子가 나란히 묻혀신덕왕릉은 두번이나 도굴 당하기도경주시 배동에 위치한 삼릉(사적 219호)을 찾았던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대낮임에도 하늘은 캄캄했고, 때때로 벼락까지 치는 궂은 날씨. 능으로 오르는 소나무 숲길이 질척거렸다. 통상 `삼릉`으로 칭해지는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능 또한 여지없이 비에 젖고 있었다. 서남쪽 방향 지척에 위치한 55대 경애왕릉 역시 마찬가지. 아달라왕의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왕은 모두 신라가 기울어가던 시절의 통치자들이었다.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장기간 지속된 신라왕조. 992년 동안의 부침과 그 속에서 벌어졌던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떠올리니 진원지를 알기 힘든 우울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렇다, 사라지거나 떠나는 모든 것들은 눈물과 한숨 속에 자리한다. 그것이 한 개인의 죽음이건, 천년왕국의 소멸이건.흐리고 비가 오는 날임에도 경주가 한국만의 관광지가 아닌 `세계적 관광지`임을 증명하듯 일본인 단체관광객 십여 명이 삼릉을 찾아왔다. 일본인 특유의 조용함으로 가이드를 따르던 그들이 아달라왕릉 앞에 멈춰 섰다. 일본어 설명이 안내자로부터 이어졌다. 해석하면 아래와 같은 내용일 터였다.“한국의 유명한 역사책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록돼있지 않지만, 이곳은 신라의 8대 임금인 아달라왕의 무덤입니다. 지름이 20.4m이고, 높이가 5.2m나 되니 꽤 큰 고분이지요. 하지만, 경주 시내에 있는 거대한 왕릉들에 비하면 소박한 규모입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됩니다. 저기 보이는 혼유석(魂遊石·영혼이 쉴 수 있도록 무덤 전면에 놓아둔 돌)은 현대에 들어서 만든 것이고요.”아달라왕릉의 서쪽 바로 옆, 그러니까 세 개의 고분 중 가운데 자리한 것이 신덕왕릉이다. 이 역시 원형봉토분이고, 통일신라시대 고분의 양식인 횡혈식석실분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신덕왕릉은 두 차례에 걸쳐 도굴범들의 침입을 받았다. 한 번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1963년이었다. 두 번의 도굴은 이 능이 내부에 긴 연도(羨道·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를 두고 정방형의 평면에 할석(깬 돌)을 쌓은 석실분임을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었으니, 도굴이란 범죄가 역사적 실체를 확인시킨 웃기고도 슬픈 사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덕왕 통치 시절엔 천재지변이 많았다고 한다. 봄이 한창인 4월에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났으며, 잦은 해일과 떼로 몰려든 까치와 까마귀 탓에 백성들이 힘들어 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 이런 걸 감안하고 생각해보면 신덕왕은 살아있을 때는 고민이 끊이지 않았고, 죽어서도 자신의 유택을 도둑에게 내놓아야 했던 불행한 사람이었다.그렇다면 삼릉의 가장 서편에서 영원한 잠에 빠져든 경명왕의 삶은 어땠을까? 신덕왕의 아들인 그는 기울대로 기운 국운을 어렵사리 떠받치고 있던 왕이었다. 과거의 영화는 이미 사라졌고, 당시 신라는 경주 일대 작은 지역만을 다스리는 소방(小邦)으로 전락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궁예와 견훤은 지속적으로 신라를 압박했다.매사냥을 즐겼던 낭만주의자였으나, 망해가던 나라에서 경명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아버지 신덕왕 때와 유사한 흉측한 일도 곳곳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벽화 속의 개가 울부짖고,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한 달씩이나 거꾸로 섰으며, 메뚜기떼가 훑고 간 들녘은 폐허로 변했다. 비극의 정점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이런 상황이니 선대의 임금들처럼 화려하고 거대한 능을 조성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대해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통일신라시대 말기는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왕의 재위기간도 짧았다. 권력이 불안정하고,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상황이니 사후의 장례절차도 간소화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경명왕릉을 포함한 삼릉 전부가 전대 신라왕들의 고분과 비교해 단순하고 소박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경명왕릉의 봉분 높이는 4.5m, 지름은 15.9m다. 황남대총이 폭 120m, 봉분 높이가 23m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그 작은 규모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게다가 `삼국유사` 등에서는 “경명왕은 황복사 북쪽에서 장사 지내 화장한 후 그 뼈를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뿌렸다”고 적혀 있어 역사학계에서는 `경명왕릉에 묻힌 사람이 과연 경명왕이 맞는가`라는 논란이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박임관 원장은 아래와 같은 말로 `삼릉 속 매장자의 진위논쟁`을 부연했다. “문헌상으로 볼 때는 삼릉이 누구의 무덤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17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경주의 박씨와 김씨 가문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왕릉을 지정했고, 그것에 대한 정밀한 비판과 검증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냉정함과 논리를 갖춘 사학자들의 비판적 연구와 성찰이 필요하다.”이 같은 박 원장의 지적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한 해 경주를 찾는 관광객은 수학여행을 오는 학생을 포함해 대략 1천200만 명. 엄청난 숫자다. 이들에게 신라 역사와 고분에 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체험적 역사학습을 통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비껴갈 수 없는 책무이기 때문이다.삼릉에서 200m쯤 걷다보면 신라 55대 경애왕의 능과 만날 수 있다.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이었던 경애왕 또한 아버지와 형처럼 불행했던 삶을 살았다. 당시 한반도에서 새로운 권력자로 커가던 왕건에게 굴종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며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결국 후백제의 실력자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함께 있던 왕비와 후궁들은 후백제군에게 능욕까지 당했다고 전해진다.삼릉을 돌아보고 내리는 빗속을 걸어 계곡에 이르렀다. 조그만 새 몇 마리가 흐린 하늘로 날아올랐다. 신라왕조의 마지막 시대를 살다간 불행했던 왕들의 넋이 환생한 건 아니었을까? 詩가 떠오르는 삼릉계곡 솔숲비오거나 자욱히 안개 낀 몽환적 풍경사진작가들에 사랑 받는 보물같은 곳본격적인 더위와 장마가 몰려온다는 뉴스가 아침잠을 깨운 날. 경주 삼불사를 뒤로 하고 울창한 소나무숲에 이르렀다. 이른바 삼릉계곡.훌쩍 큰 키로 우아하게 늘어선 소나무들이 푸른 바람을 만나 천 년 전 목소리 그대로 아기처럼 울고 있었다. 여름날이 선물한 고적한 풍경. 그 짙고 푸른 정물화 속에서 신라와 신라 사람들을 각별히 흠모한 미당 서정주(1915~2000)의 `붉디붉은` 시 한 편을 떠올렸다.“속눈썹이 기이다란 계집애의 연령은/댕기 기이다란/은댕기 기이다란/瓦家千年(와가천년)의 은하 물굽이/푸르게만 푸르게만 두터워갔다/어느 바람 속에서도 부끄러운 열매처럼 부끄러운 계집애/靑蛇(청사), 뽕나무에 오디개 먹은 청사/천둥 먹음은/번갯불 먹음은/소나기 먹음은/검푸른 하늘가에 초롱불 달고/고요히 吐血(토혈)하며 소리 없이 죽어갔다는 淑(숙)은/유채 손톱이 아름다운 계집이었다 한다.”일상에 매몰돼 하루하루를 겨우 견디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중·고교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시 한 편쯤 낭송하게 만드는 힘이 삼릉 솔숲에는 존재한다.소리 없이 비가 오거나, 자욱한 안개가 부드러운 커튼처럼 숲을 감싸는 날이면 삼릉 일대 소나무는 잃어버린 꿈의 은유가 된다. 그 숲길을 걷는 늙은 사내들은 폐병에 걸려 하얀 손수건을 피로 적시던 `숙`이란 이름의 첫사랑을 아프게 떠올린다.사진작가들의 촬영지로도 명성이 자자한 삼릉계곡과 소나무숲은 경주가 자긍심 속에서 아끼는 보물 중 하나다. 전세계 음악팬에게 사랑받는 영국 가수 엘튼 존(69)은 삼릉 소나무를 찍은 한국 작가의 사진을 2천만 원에 구입하기도 했다. 그가 만약 경주를 찾는다면, 신라의 고분과 불국사 등의 고찰(古刹)을 소재로 노래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나무와 풀을 허투루 보지 않는 예민한 예술가들은 말한다. “수명이 다한 소나무들은 솔방울을 많이 매달고 있다. 왜냐고? 소나무는 자신이 죽을 때를 안다. 그 시기가 되면 종족보존의 본능이 발동하는 것이다.”삼릉 일대 소나무들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터. 그들이 지켜본 신라 천년의 역사가 무언의 목소리로 술렁이는 삼릉계속 솔숲은 여전히 비밀스럽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7-07

“신라시대서만 나타나는 적석목곽분을 주목하라”

▲ 경주의 고분과 유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한정호 교수.경주 각처에 산재한 신라의 고분 속에서는 미려한 금관과 화려하게 장식된 말안장을 포함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우리 선조의 축적된 정신적·문화적 기술로 빚어낸 이 유물들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을까? 또한, 고대 유물은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안고 불교미술을 전공한 고고학자 동국대 한정호(46) 교수를 만났다. 아래는 “유물과 유적의 발굴은 인류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행위”라고 말하는 한 교수와 나눈 이야기다. 거대한 적석목곽분은 도굴에 비교적 안전해 온전히 남아 있어비단벌레 형상화한 황남대총 출토 말안장 가리개 `옥충안교` 눈여겨 볼만`금제유물` 다량 출토는 북방 유목민과 밀접한 관계 추정 가능학계, 지나친 학문중심 사고 반성… 인력투자 등 정부지원 전환도 절실- 신라시대 고분에서는 적지 않은 유물이 발견됐다. 금관총에서만 1만1천500점 이상의 유물이 출토됐다. 이것들 중에서 당신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어떤 것이고, 주목의 이유는 무엇인가?“내 전공은 불교미술이다. 하지만, 고분에도 관심이 없을 수 없다. 가장 큰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본 것은 황남대총에서 나온 `옥충안교`(말안장 가리개)다. 장식기법이 대단히 특이하다. 금속으로 된 유물인데 비단벌레를 형상화했다. 가까운 일본의 유물 중에도 비단벌레가 그려진 것이 있다. 비단벌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고, 찾아보기 힘든 곤충이다. 옥충안교는 비단벌레 그림을 바탕에 깔고, 금동으로 장식된 유물이다. 이건 일반 공개가 어렵다. 무덤 안에서 나온 것이라 외부에 노출되면 산화된다. 그런 이유로 출토 당시 그대로 글리세린 용액에 담아 보관 중이다. 옥충안교는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짐작케 해주는 유물이기도 하다.-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 고분 속 유물이 동일한 시기에 존재했던 타 지역(고구려·백제·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구분되는 점은?“삼국시대의 신라와 통일신라시대는 유물의 구성요소가 다르다. 신라의 고분과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지역의 고분은 거의 없다. 왜냐면 대부분 도굴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연구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는 신라의 유물이 더 소중한 것이다. 사실 통일신라시대 이후은 고분은 상당수가 도굴됐다.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적석목곽분의 형태를 취한 고분이다. 적석목곽분은 도굴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워낙 규모가 크니까 몇 사람이 잠깐 동안 파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적석목곽분이 아닌 방의 형태로 만든 돌방무덤(石室墳)은 그 구조상 도굴이 용이했다. 적석목곽분은 신라 고분에서만 확인되는 독특한 양식이다. 그 형식이 금관과 금제 허리띠 등 주요 유물의 도굴을 방지할 수 있었다. - 경주에는 30기가 넘는 왕릉과 김유신 등 최고 귀족의 고분이 있다. 이 가운데 당신이 가장 눈여겨보는 고분은 무엇인지.“신라 고분의 경우 가장 큰 문제점은 거기 매장된 주인공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건 앞으로 밝혀가야 할 과제다. 고분 인근의 사찰을 알면 왕릉을 파악하기 쉬워진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후 능사(寺·왕릉 인근의 사찰)가 생겼다. 왕의 제사를 올리고, 능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문무왕릉 인근 감은사가 대표적 능사의 하나다. 내 경우엔 파손된 고분에 더 관심이 간다. 경주 낭산 근처엔 황복사터가 있다. 그곳 탑에서 사리를 담는 함이 나왔는데, 거기에 “신문왕의 명복을 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그것으로 추정할 때 주위에 있는 파손된 고분은 신문왕의 무덤으로 보인다.”-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불린다. 금으로 만든 출토유물이 다수라서 그렇다고 들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신라에 금제 유물이 많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사실 경주는 금이 흔한 지역이 아니다. 금광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는 신라의 금이 금광에서 캔 것이 아니라, 물 속 모래에서 채취한 사금이라고 주장한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금이 있었다고 해도 왜 그렇게 금으로 만든 유물이 많은지는 별개의 의문이다. 중국은 금보다는 옥(玉)을 선호했다. 반면 북방 유목민족은 금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출토 유물도 금으로 된 것이 많다. 문명교류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신라는 북방 유목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접촉해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 아직까지 발굴의 과정의 거치지 못한 경주의 고분들이 여럿 있다. 왜 그러한 것인가?“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기술은 계속 진화한다는 건 대명제다. 그러니 올해 발굴하는 것보다 내년에 발굴하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10년 후면 더 많은 정보를 빼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엔 유적 발굴을 하다가 쥐똥이 나오면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의 성분 분석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이 뭘 먹었고, 어떤 기생충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매장된 사람의 유전자 분석을 통해 성별은 물론 나이까지 알 수 있게 됐다. 지금도 유적 발굴기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기술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또 하나는 보존처리 기술이다. 이것 역시 후대로 갈수록 발전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이 모든 걸 떠나서 유물은 `현재 상태`가 가장 안전한 상태다. 온전하게 보존돼 있는 것을 인간의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파내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는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문제 아닌가?” - 고분을 `발굴-조사-연구-보존`할 경우 어떤 것에 가장 유의해야 할까?“유물을 그 자체로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하려는 노력이 기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발굴하는 사람의 능력이다. 사실 고고학계에서는 `발굴=파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건드리는 것이니까.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유적과 유물의 발굴 인력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좋은 연구자가 있어야 놓치는 것 없이 꼼꼼하게 유물을 검증하고 분석할 수 있다. 요즘 세상이 원체 `속도전` 위주라 제대로 된 고고학적 연구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황당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실생활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 과거의 유물을 조사하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조금은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유물과 유적에 대한 연구는 인류의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사람의 생명에는 한계가 있다. 백 년 이상을 사는 인간은 드물다.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짧은 시간이 축적돼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산다. 바로 그 시간의 총체가 유물이고 유적이다. 과거로부터 축적된 체험과 지혜는 우리의 존재기반이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를 사는 우리는 복어를 요리해 먹는다. 독을 가진 물고기인 복어를 먹을 수 있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독을 제거하고 이 생선을 요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다. 인류가 시간을 거치며 쌓아온 빼어난 지식의 집합체가 유물이다.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을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물과 유적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파편이 아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신라의 고분 속 유물 중에서 고고학계 가장 주목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또 그 주목의 이유는 무엇인지.“학자들의 관점과 전공분야에 따라 다르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금관이 가장 매력적인 유물일 것이다. 신라 금관은 독특한 디자인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재료가 귀한 순금이라는 것도 매혹적이다. 그런 이유로 경주시의 상징물도 금관을 이용해 제작한 것이 많다. 신라시대에도 금은 귀한 광물이었다. 지배층의 고분에서 금으로 제작된 관(冠)과 허리띠 등이 발굴되는 건 그것 때문이다. 금이 원체 귀하다보니 금동을 만들어냈다. 동에다가 금을 입히는 방식 말이다. 이것이 당시 금의 가치를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고대의 수수께끼를 간직한 것이 적석목곽분이다. 이런 형태의 무덤은 신라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것이다. 다른 지역 어디에도 적석목곽분의 형태를 보이는 무덤은 없다. 유사한 것이 몇 개 있지만 신라만한 독창성은 발견하기 어렵다.” - 경주의 고분과 고분이 품고 있는 유물을 제대로 발굴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지원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지나치게 학문중심으로 갔던 학계의 반성과 정부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유물의 발굴과 보존은 문화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다. 사실 문화 없이도 먹고사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먹고 살아가는 것에서 만족을 느낄 수 없는 존재다.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역사학계와 고고학계, 정부는 대중들이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문화를 찾아내고 알려야 할 책무가 있다. 내가 특히 경계하는 건 복원위주의 문화 정책이다. 사실 생명력이 다한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의 원형을 알 수 없는 우리가 복원에만 집착하는 건 코미디가 아닐까. 앞으로는 정부의 지원이 `사람에 대한 투자`로 방향전환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물과 유적에 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투자함으로써 보다 풍요로운 문화를 일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6-23

여왕은 풀꽃과 나비로 환생한 것일까?

초여름답지 않은 뜨거운 햇살이 푸른 눈동자의 외국인 관광객 하얀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주위는 고요했고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에 자리한 진덕여왕릉(사적 24호)으로 가는 길은 평화로웠다.미국 혹은, 유럽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기자를 앞질러 능에 이른 백인 여행자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진덕여왕릉 위에 피어난 보라색 풀꽃과 그 위를 소리 없이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를 본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선물처럼 아름다운 풍경.재위기간 7년, 짧은 통치로 끝난 진덕여왕김춘추·김유신 사이서 허수아비 삶 살아십이지신상 두른 무덤 만큼은 누구보다 화려생전 “도리천에 묻어달라” 지목한 선덕여왕인본주의 펼친 비범한 女王… 삶은 가시밭길산꼭대기 깎아 만든 무덤·돌출된 호석 독특선덕여왕의 능으로 가는 길이 짙푸른 소나무가 뿜어내는 향기로 가득했다면, 진덕여왕릉은 이름 모를 풀꽃이 풍겨내는 미묘한 향취가 호위병인양 무덤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어디선가 환청처럼 신라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죽음 이후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에 누웠지만, 살아생전 진덕여왕의 삶은 그다지 행복했다고 볼 수 없다. 그녀가 왕으로 있던 때는 7세기 중반.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고, 신라의 권력은 진덕여왕이 아닌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기울어 있었다.역사학자 김기흥 씨는 그의 책 `천년의 왕국 신라`에서 성골(聖骨)이었던 진덕여왕과 그 아래 골품인 진골(眞骨) 출신 김춘추의 당시 권력관계를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김유신은 김춘추의 처남이며 두 영웅은 의기투합하고 있었으므로, 김유신의 득세는 곧 김춘추의 득세였다. 김유신보다 상대적으로 좀 더 전통적인 진골귀족에 해당하며 왕실의 일원이기도 한 김춘추는 처남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서 실질적인 집권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어찌 보면 허울뿐인 왕. 진덕여왕의 재위 기간은 7년으로 비교적 짧았고, 그 시간 동안도 `제대로 된 통치권`을 행사하기 힘들었다. 선왕이었던 선덕여왕과 비교해 `성골 출신 공주`라는 프라이드도 가지기 힘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진덕여왕을 탁월한 지략을 지닌 대신(김춘추)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맹한 장수(김유신) 사이에서 허수아비의 삶을 살았다고 추정한다. 그녀가 지닐 수 있는 자긍심이라고는 “나는 신으로부터 성스러운 혈통을 부여받아 왕이 될 몸으로 태어났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그러한 생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삼국사기`에 “경주 남산 서쪽 사량부(沙梁部)에 있다”고 전하는 진덕여왕의 능은 아름다운 풍광에 둘러싸여있고, 14.2m 달하는 봉분의 직경이 일반인의 무덤을 압도한다. 거기에 탱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의 위용 또한 천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늠름하다. 죽음 이후의 집은 누구의 것보다 화려한 것이다.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부처의 풍모를 닮아 팔이 무릎까지 내려오고, 풍만한 몸에 자비로운 미소를 지녔다는 진덕여왕. 어쩌면 그녀는 권력지향의 정치가보다는 풀꽃과 나비를 사랑하는 낭만적 여인으로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진덕여왕의 유택은 그런 상상을 나래를 펼치게 한다. 진덕여왕의 앞서 신라 27대 왕을 지낸 선덕여왕은 탤런트 이요원(선덕여왕 역), 고현정(미실 역), 엄태웅(김유신 역) 등이 출연한 드라마로 대중들에게 보다 가까워졌다. 인기리에 방영된 이 드라마로 인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덕여왕을 포함한 신라의 역사와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경주의 주요관광지엔 선덕여왕 역으로 열연한 이요원의 사진이 걸려 관광객들을 반긴다.사적 182호인 선덕여왕릉은 경주시 보문동의 야트막한 산 정상에서 만나볼 수 있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산길을 산책하듯 10분쯤 오르면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고, 첨성대를 세운 1400여 년 전 왕과 알현하게 된다.능으로 오르는 길에는 청록색 계절의 기운을 받은 소나무가 저마다의 높이를 과시하며 울울창창 기세를 겨룬다. 만인의 위에 군림하면서도 인본주의를 잊지 않았던 선덕여왕. 늘어선 소나무들은 그녀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신라 사내의 부활처럼 느껴진다.산꼭대기 남쪽을 깎아 조성한 선덕여왕릉은 6.8m 높이로 우뚝하고, 봉분 둘레만도 73m가 넘는다. 능을 보호하기 쌓은 호석(護石)이 돌출돼 있는 독특한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입구와 봉분 주위가 잘 정비돼있어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둘러보는 명소로 자리했다.선덕여왕의 삶과 죽음은 드라마로 만들어질 만큼 부침이 컸다. 여성의 몸으로 최고 통치권자가 된 선덕여왕은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야했다. 642년 백제와 벌인 대야성 전투는 그 위기의 정점이었다. 상대는 백제의 의자왕이었고, 이 싸움에서 김춘추의 사위였던 품석이 죽는다. 마음이 급해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와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하지만, 당나라 왕의 반응은 냉담했다. `여자와는 중요한 정책을 논하거나, 군사적 교류를 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심지어 “백제가 신라를 업신여기는 것은 여왕이 통치하는 국가라서 그렇다. 그러니, 내 친척 중 한 명을 신라로 보내 왕으로 삼고 당나라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모욕까지 일삼았다. 약소국이 겪어야 할 아픔을 가녀린 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지난했던 삶과 마찬가지로 선덕여왕의 죽음 역시 비극적이었다. 신뢰했던 비담(毗曇)을 신라 최고의 벼슬인 상대등에 앉혔으나, 비담은 “정치를 형편없이 한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난리통에 선덕여왕은 목숨을 잃었다.여러 면에서 비범했던 그녀였지만, 가시밭길의 삶과 갑작스런 죽음은 피해갈 수 없었다. 선덕여왕은 살아있을 당시에 이미 자신이 죽으면 묻힐 곳을 신하들에게 일러줬다. 신라 왕릉을 연구했던 역사학자 이근직은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자신의 책에 썼다.“선덕여왕은 도리천을 사후 매장지로 지목했다. 신하들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리천은 하늘에 있는 산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왕은 낭산 산정이 도리천이라 알려줬다. 이후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선덕여왕릉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선덕여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으므로, 낭산 꼭대기가 바로 도리천이었다는 것을”.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꿈인 듯 현실인 듯 소나무숲을 떠다니는 두 마리의 노란 나비를 보았다. 그 미려함이 마치 부활한 여왕들 같았다.▲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삼국유사`속 선덕여왕의 지혜와 예지력관대한 성품에 어질고 총명하기까지…後代의 사가·당대 백성에 두루 사랑받아서기 632년부터 647년까지 신라를 통치한 선덕여왕. 그녀는 후대의 사가(史家·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와 당대의 백성들에게 두루 사랑받았던 보기 드문 왕으로 추정된다.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공히 선덕여왕의 지혜와 영험, 풍모와 인품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짤막하고도 강렬한 어법으로 여왕을 묘사한다. “선덕여왕은 성품이 관대하며 어질고 총명했다”. 개인에 관한 구체적인 칭송을 가능한 자제하는 역사학자들의 태도를 감안하면 이는 최상급의 찬사다.일연의 `삼국유사`는 보다 구체적인 기록으로 선덕여왕의 지혜와 예지를 칭송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덕만공주`로 불렸던 어린 시절, 당나라가 모란꽃 그림을 신라왕실에 선물했다.공주가 가진 지혜의 깊이를 알아보고 싶었던 왕이 묻는다. “이 그림을 보면 너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덕만공주는 망설임 없이 답한다. “아름답지만 향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림 속 모란 주위에 벌과 나비가 몰려들지 않았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이를 자연스레 향기와 연관시킨 어린 소녀의 지혜. 명민했던 선덕여왕은 일찍부터 인간세상의 본질과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듯하다.`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신비스런 예지력을 보여주는 일화도 등장한다. 그녀의 집권시기는 백제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던 때. 화창한 늦봄 어느 날. 왕궁 근처 사찰의 연못에 수천 마리의 개구리가 몰려와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측근 장수에게 명을 내린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여근곡(女根谷)으로 가보라.”갑작스런 출병 지시에 의구심이 일었지만 왕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그 곳으로 간 장군과 병사들은 깜짝 놀란다. 거기엔 백제 병사 수백 명이 몸을 숨긴 채 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덕여왕의 예지가 백제의 기습적인 침탈을 미리 막아낸 것이다. 궁으로 돌아온 알천(閼川) 장군이 묻는다. “왕이시여, 어떻게 개구리 울음소리만을 듣고 적군이 매복했다는 걸 아셨습니까?”웃음 띤 얼굴로 선덕여왕이 말했다. “개구리는 성난 모습의 병사 형상이고, 여근곡은 여성의 기운이 서린 곳이니 음(陰)이 아니냐. 음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 방향을 의미하기에 백제 병사가 거기 숨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물론, 옛이야기에는 다소간의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다. 선덕여왕과 관련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과장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책과 옛이야기 속 선덕여왕은 그 아름다움과 지혜가 현대의 `스타 여배우`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6-09

삼국통일 이룬 영웅호걸의 삶 곱씹어야 할 아픔도 함께 했으니…

경주 고분에 관한 취재를 시작하며 몇몇의 역사·고고학자와 관련 학문을 전공한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학계와 문화계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고분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그리고, 그 주목의 이유도 궁금합니다.”이에 대해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아래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제 경우는 황남대총, 원성왕릉과 함께 무열왕릉에 관한 보다 정밀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능 주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어 매장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고분이니까요.”최초 진골 출신 왕의 陵, 둘째아들 김인문이 직접 비석 글 남겨높이 8.7m·둘레 112m크기 봉분 언저리 호석·받침석 돌려 배치대다수 경주의 왕릉 인근에서는 비석을 찾아볼 수 없는 것과 달리 무열왕릉 바로 앞에는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여덟 글자를 전서체로 새긴 비석이 서 있다. 현재는 귀부(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와 이수(용 모양을 새긴 비석의 머리)만이 남아있고, 비신(碑身·비석의 바탕돌)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으로 전해진다.바로 이 무덤의 주인인 무열왕(김춘추·604~661)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경주 왕릉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가 강석경의 산문집 `능으로 가는 길`에는 무열왕의 풍모와 인품에 관한 짤막한 묘사가 등장한다. 다음과 같다.“사나이에 걸맞은 한 이름이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세상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는 사람. 풍채가 아름답고 빼어나 당나라 황제가 `신성한 사람`이라 칭한 이. 진덕여왕 사후에 정사를 돌볼 사람으로 추대된 알천(閼川)이 `덕망이 높고 두터운 것이 그만한 이가 없으니 백성을 구제할 영웅호걸`이라며 권좌를 양보한 인물...(후략)” 신라 29대 왕인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다. 모친은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고, 아내는 신라의 명장으로 삼국의 통일을 이끈 김유신의 동생 문희였다. 27대 선덕여왕 시절부터 지략과 용맹을 인정받아 외교사절로 고구려와 당나라 등을 오갔다.무열왕은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 백제를 절멸시켰는데, 그가 백제에 원한을 품었던 이유는 사위와 딸이 백제의 군대에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 무열왕에 대해서는 조금은 우스꽝스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 중 하나는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기록돼있다.“김춘추는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는데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 다소 과장된 듯 보이는 이 서술은 그가 `보통의 인간`은 아니었음을 부풀린 수사학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으로 추측된다.28대 진덕여왕 사후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51세. 당시의 의료수준과 평균연령을 감안하자면 노인에 가까웠다. 요즘 어법으로 이야기하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고, 갖은 풍파를 온몸으로 통과한 준비된 왕”이었던 셈이다. 즉위 이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백제를 치고 고구려까지 병합하려 동분서주했던 무열왕은 그의 아들인 문무왕, 처남인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을 불러온 삼두마차`로 평가받고 있다.이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김춘추. 비석에 새겨진 글씨 `태종무열대왕지비` 중 무열은 시호(諡號·왕이 죽은 후 공덕을 칭송해 붙인 이름)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으로 왕이 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661년. 김춘추는 왕좌에서 내려와 피와 살점이 튀는 전쟁이 없고, 아귀다툼 또한 벌일 필요가 없는 영원한 안식의 공간으로 떠났다. 갑년을 몇 해 앞두고서였다. 그의 유택이 바로 무열왕릉이다. `삼국유사`는 이 능의 위치를 “애공사(哀公寺) 동쪽”이라고 쓰고 있고, `삼국사기`에는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전한다.사적 20호로 지정된 무열왕릉의 위치를 현대식 주소 표기법으로 적으면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2번지`. 기사의 서두에 등장하는 태종무열왕릉비는 국보 25호다.무열왕릉을 찾아가던 날은 초여름 날씨답지 않게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묻어있는 솔숲의 향기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한 쌍의 연인이 능 주위에 세워진 비석의 한자를 읽으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그들은 오랜 시간 천천히 주위의 고분들까지 꼼꼼히 둘러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젊은이들이 역사에 무관심하다는 건 어쩌면 지독한 선입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기자의 머릿속을 스쳤다. 선도산 동쪽 능선의 끝머리. 무열왕릉과 마주했다. 거기서 서쪽을 바라보면 또 다른 거대한 고분 4기를 확인할 수 있다. 연인들이 한참을 돌아보던 서악동 고분군이다. 이근직의 저서 `신라왕릉 연구`는 무열왕릉의 외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봉분의 높이는 약 8.7m, 봉분 직경은 36.6m, 봉분의 둘레는 112.2m이며, 봉분 언저리에 약 1m의 괴석으로 된 호석과 이에 기댄 받침석을 돌렸다. 호석에 기댄 받침석은 봉분자락에 10개가 노출돼 있는데, 최소 간격으로 배치된 경우는 80cm 내외다.”이 책에는 태종무열왕릉비에 관한 설명도 간략하게 덧붙여져 있다. 이런 대목이다. “비석의 글은 당대의 명필이자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양각된 여덟 글자로 인해 무열왕릉은 신라 역대 능묘 중에 피장자(묻혀 있는 사람)가 명확한 능이 됐다. 무열왕릉의 귀부와 이수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 발현된 것이나, 조각의 정교함과 화려함에 있어서는 당나라의 것들을 능가하였다,”많은 이들은 상상한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왕으로 살았던 사람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목숨이 걸린 외교담판을 시시때때로 벌였고, 딸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참척(慘慽)의 슬픔까지 겪어야 했다. 왕위에 올라서도 자신의 백성을 위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던 것은 또 어떤가.`신분과 지위가 사람의 행복을 좌우할 수 있을까`라는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무열왕릉 주변을 한참 동안 서성였다. 그 고민의 공간으로 한 조각 바람이 불어왔고, 푸르게 돋아난 왕릉의 풀들은 무심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전설과 풍문 속에 존재하는 금척(尺) 신라 보물 탐낸 당나라 속이려 40여개의 봉분 더 만들어온전히 모습을 드러내 그 안과 밖을 모두 공개한 유적은 인간의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그러나, 그 옛날 우리가 알 수 없는 내밀한 사건이 일어나던 공간을 바라보며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여지는 빼앗아간다. 이것은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오래된 딜레마다.경주시 건천읍에서 경주 시내로 향하는 국도. 그 길을 달리다보면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진다. 도로 양편으로 40여 기의 거대한 고분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몇몇 고분은 그 규모가 일반인의 무덤 100배를 넘어서는 크기.인근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을 `금척리`라 불렀다. 고분 중 하나에 금척(황금으로 만든 자)이 묻혀있다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금척리 고분군(사적 43호)의 봉분은 신라 초기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간에 알려지기 전 이미 허물어져있던 2개의 고분은 1952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조사됐다. 그 결과 고분의 형식은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인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서는 세환식 금귀고리 1쌍, 곱은옥(반달 형태로 옥을 깎아 끈에 꿴 장식품), 철편과 토기 등이 출토됐다.이 지역 고분과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전설이 떠돈다.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신라시대. 평민이 우연한 경로를 통해 얻게 된 금척을 왕에게 진상한다. 금으로 만든 이 자에는 신비한 힘이 있어 어떤 병이라도 낫게 했고, 심지어 죽은 사람을 되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당연지사 금척은 신라의 국가적인 보물이 됐다.풍문으로 이 사실을 전해들은 당나라가 욕심을 부렸다. “사신을 보낼 터이니 금척을 내 놓으라”고 협박한 것이다.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함부로 묵살할 수도 없었던 왕은 궁여지책으로 고분을 급조해 금척을 거기에 숨긴다. 여기에 더해 어느 고분에 금척이 묻힌 것인지 알 수 없도록 주위에 40여 개의 봉분을 더 만들었다.금척리 고분군은 이러한 약소국의 슬픈 역사 속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지혜를 발휘해 보물을 뺏기지 않은 그 왕이 누구였는지, 금으로 된 자를 왕에게 올린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설과 풍문 속에 존재했던 신라 왕의 금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발굴이 완료돼 그 비밀을 속속들이 세상에 내보인 고분 이상의 매력을 가진 금척리 고분들. 마흔 개의 커다란 봉분은 오늘도 한가로운 국도에 변함없이 서서 지나는 이들의 관심과 애정을 기다리고 있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5-26

천마총 속살 열어 보던 날, 신라 지배층의 삶이 쏟아지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의 전설과 신화에는 말(馬)이 자주 등장한다. 현존하며 세간을 떠도는 옛이야기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애마 부케팔로스, `삼국지`의 명장 관우를 태우고 하루에 400km를 달렸다는 적토마, `서초패왕`으로 불리던 항우와 삶은 물론,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한 오추마 등은 역사와 전설 안에 존재하는 명마(名馬)다.천마도장니·금관 등 1만1천여점 `우르르`신분과시용 금장신구·말 관련 유물이 대다수20대 자비왕이나 22대 지증왕 유택 추정돌무지덧널무덤 구조 눈앞서 살펴볼 수 있어고대왕국 신라의 왕과 귀족들 역시 전쟁 수행과 신속한 이동에 도움을 주는 말을 소중하게 여겼다. 경주시 황남동에 자리한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는 이를 증명한다.1973년. 박정희 정부는 대릉원 인근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고분 발굴작업을 진행한다. 애초 계획은 황남대총에 대한 발굴조사를 거쳐 이를 국민들에게 공개하는 것. 하지만, 당시 한국의 유적 발굴기술로는 큰 규모의 고분을 조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155호 고분으로 불리던 천마총에 대한 발굴조사.발굴결과는 놀라웠다. 앞서 언급한 천마도장니와 금관을 필두로 1만1천 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중 말과 관련된 유물은 총 504점. 그중에서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은 것은 단연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장니(障泥)였다.말의 배를 가려 진흙이 튀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장식의 용도로도 사용된 천마총 출토 장니는 신라 고대미술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누벼 만든 1600여 년 전 화폭에 뿔 달린 말이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놓은 신라 사람들.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이에 대해 “한국에서 자생하지는 않았지만, 신라의 고위층들은 말을 기르고 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의 자동차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당시의 말”이라는 설명을 들려줬다.“비단 천마도장니만이 아닌 말의 뼈와 마갑(馬甲·말에게 입힌 갑옷), 각종 마구(馬具·말을 탈 때 사용하는 기구)가 함께 출토된 것을 볼 때 말은 신라 귀족들이 귀하게 생각했던 동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역시 박 원장의 견해.천마도장니는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207호로 지정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된 이 유물은 신라시대에 그려진 그림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품이기도 한 까닭에 역사학계는 물론, 미술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여 왔다.고고학자 조유전의 책 `발굴 이야기`에는 천마총 발굴에 얽힌 흥미로운 후일담이 등장한다. `경주에 가뭄이 지속되자, 왕릉을 파헤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아 민심이 흉흉했다. 금관이 출토된 날.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조사단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쏟아졌다. 이어 천둥과 번개도 몰려왔다. 겁을 먹은 조사단이 금관을 급히 수습해 상자에 옮겨놓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밝아지고 비가 그쳤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있던 신라 왕의 넋이 노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 천마총은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인의 손으로 금관을 발굴한 최초의 고분이기도 하다. 거기서 출토된 금관의 두께는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가장 두껍다. 금의 성분 또한 우수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천마총 출토 금관을 국보 188호로 지정했다.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금은 고대에도 귀한 광물로 대접받았다. 신라의 지배층들 역시 금으로 된 장신구를 신분 과시 등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과 함께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제 허리띠(국보 190호)와 순금 관모(국보 189호), 화려한 금귀고리 등은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그렇다면 천마총에는 누가 묻혀있었을까? 이는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엇갈린다. 22대 지증왕의 능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출토된 유물의 전체적인 성격이 국가의 비약을 드러내고 있으며, 칠기 화염문(火炎文·불꽃무늬) 등이 중국 북위의 영향을 받은 6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인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반면 천문학 지식을 동원해 해마다 달라지는 해돋이 방향을 근거로 “천마총은 20대 자비왕의 유택”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강석경의 책 `능으로 가는 길`에는 이와 관련된 좀 더 상세한 이야기가 나와 있으니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천마도가 그려진 장니를 얹은 말 위에 앉아 순금으로 만든 왕관이나 관모를 쓴 왕과 귀족, 커다란 금귀고리로 화려하고 예쁘게 꾸민 왕비 혹은, 후궁들이 신라의 월성을 유유자적 오가는 장면을 떠올리는 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끝 간 데 없이 자극한다.천마총은 이러한 사람들의 상상 속 궁금증을 일부나마 해소시켜주고자 발굴된 고분의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걱정거리도 없지 않다. 천년 이상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던 고분의 속살을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훼손의 위험성은 없을까? 기자의 이런 우려를 불식해준 사람은 박임관 원장이었다. “공개가 결정된 다음부터 훼손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고민했기에 큰 위험은 없다. 내부로 스며드는 습기를 막아야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이는 제습시설 확충 등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 다만 장마나 폭우를 대비한 침수 방지책은 보다 치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천마총에는 동쪽으로 머리를 향한 채 금관을 쓰고 조용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던 고분 주인의 유해도 재현돼 있다.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박 원장에게 물었다. “일반인들이 신라 고분의 내부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게 천마총이다. 재현과 복원이 잘 된 부분과 미흡한 부분으로 나눠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경주 고분의 고유한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를 바로 눈앞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과 출토 상태가 양호한 여러 가지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천마총의 매력이다.” 이에 덧붙여 박 원장은 “돌무지와 돌무지를 덮은 찰흙과 봉토의 두께 등을 실제 발굴 시 확인된 정보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천마총을 찾아간 날. 대릉원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그 봄볕을 받으며 서너 살 꼬마들이 병아리처럼 종종거렸다. 세월이 흐른 후, 그 아이들 또한 `천마와 황금의 나라`로 천년왕국 신라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우연한 발견, 그러나 빛나는 보물 `금관총`일제강점기 빼앗길 위기 처한 유물경주시민들 십시일반 모아 지켜내1921년 일제강점기. 그해 경주에서는 한국인의 근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반주택을 보수하다 우연하게 발견하게 된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을 조선총독부가 보관하려 하자, “그 방식은 옳지 않다”며 들고 일어선 경주시민들이 돈을 모아 유물전시관을 축조했고, 그것을 국운이 기울어가던 나라에 기꺼이 기증한 것.경주시 노서동의 금관총은 `한반도 식민지배의 정당성과 근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의 `고적 조사사업` 와중에 예기치 않게 찾게된 고분 중 하나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역사서 `일본 사기` 에 기록된 “경주는 일본에게 예를 바치며 항복한 나라”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심했다.1920년대 일본이 주도한 경주 고분의 발굴역사는 `발굴`이라기보다는 `도굴`과 `유물 빼돌리기`에 가까웠다. 이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제국주의국가가 식민지에서 행한 문화적 착취의 전형적인 형태였다.하지만, 일본의 의도와 달리 금관총의 발굴 조사작업은 경주 고분에 대한 당대 시민들의 인식을 바꿔놓았다.비록 일본이 주도한 것이었지만, 발굴과정에서 우리 역사상 최초로 출토된 미려한 금관은 “한국은 한때 이처럼 빛나는 문화유산을 만들어냈던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가져다줬고 이는 무장독립운동과는 또 다른 형태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경주학연구원에 따르면 인류사를 통틀어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금관이 발굴된 것은 겨우 10여 건에 불과하다.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레나드 울리(Leonard Woolley)가 찾아낸 수메르 왕릉의 금관, 아프가니스탄 테베 고분의 금관을 제외하면 나머지 금관은 모두 한반도에서 발굴됐다. 현재까지 출토된 신라시대 금관은 모두 7점. 이만하면 `황금의 나라 신라`라는 별호가 어색하지 않다.금관이 나왔다고 해서 얻게 된 이름이 금관총이지만 이 고분에선 금관 외에도 순금귀고리, 금제 팔찌와 반지, 모양을 달리하며 빛나는 구슬, 금제 신발, 칼과 갑옷, 화살촉, 말방울, 말띠 장식, 각종 토기와 칠기 등 수만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출토된 금의 양만도 7.5kg. 예술적 가치를 차치한 금 가격만으로도 3억6천만 원에 달한다.비록 입을 가지지 못한 무덤이지만, 금관총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는 듯하다. “수난 속에서도 지속되는 것이 역사다. 그러니, 역사의 엄정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사진제공 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5-12

삼국통일 주역이었던 君主 호국의지 품은 `문무대왕암`

얼굴을 간질이는 봄 햇살 쏟아지는 바닷가. 우려하던 적의 침입이 외형상으론 사라져서일까? 죽은 왕은 일렁이는 파도 속에서 침묵했다. 반면, 산 자들은 왕의 뼈가 묻혔다고 전해지는 바위를 바라보며 왁자지껄 저마다의 소원을 빌고 있었다. 고요한 바다와 시끌벅적한 해변. 대비되는 풍경이었다.경주 봉길리 해변서 200m 떨어진 수중릉왕릉 조성 대신 불교화장 유언은 선진적 결단죽어서도 나라 지키려는 호국대룡 기개 서려문무왕릉(사적 158호)을 찾아가던 날. 바다의 빛깔은 유난히 푸르렀다. 불 태워진 왕의 뼈가 안장된 곳으로 알려졌기에 `대왕암`이라고도 불리는 바위는 모래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외로이 자리하고 있었다.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수중릉(水中陵). 신라 고분 연구자였던 이근직은 저서 `신라왕릉연구`에서 문무왕릉에 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능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681년 7월 1일에 죽으면서,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돼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신문왕이 10일 뒤 천자 오문 가운데 하나인 고문의 바깥뜰에서 화장한 뒤, 그 다음해 5월에 유해를 동해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냈으므로 그 후 이 바위를 대왕암이라 부른다.”역사책 속에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군주`로 기록된 문무왕.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황산벌 전투의 지장(智將)으로 유명한 김유신의 외조카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명민한 머리로 두각을 드러낸 문무왕은 왕좌에 오르기 전부터 부친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고, 각종 국가적 업무를 주도해 처리했다.권좌에 올라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켜 이른바 `삼국시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전환시킨 왕으로 평가받는 문무왕. 이처럼 뚜렷한 역사적 족적을 남겼지만,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그는 `행복한 지배자`였을까?이런 의문을 담아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한정호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 거대한 봉분을 만들어 장례 지내라 하지 않고, 화장을 해 바다에 뼈를 묻으라는 유언을 했다는 게 생각 밖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돌아온 답은 아래와 같았다. “문무왕이 화장을 선택한 이유는 불교적 신념과 관계가 깊다. 삼국통일의 영주로 추앙됐지만 한 인간으로서 문무왕의 삶은 불행했다. 오랜 세월 이어진 전쟁으로 누이와 매형을 잃었고 평생을 전장에서 비인간적이고 비참한 현실을 자의와 상관없이 지켜봐야 했다. 장법(葬法)과 장지(葬地)의 선택은 그의 호국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추측된다.”여러 문헌의 기록과 역사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문무왕 이전 시대 신라에서 화장은 보편적인 장례법이 아니었다. 불교도인 승려들도 화장이 아닌 매장을 선택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화장한 내 뼈를 바다에 묻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은 1천300년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는 선진적인 결단으로도 읽힌다.“문무왕의 화장 이후 신라에서는 화장문화가 급속히 확산됐고, 34대 효성왕과 37대 선덕왕도 화장을 해 동해에 그 뼈를 뿌렸다”는 게 이와 관련한 한 교수의 부연이다.살아생전 문무왕은 가까이는 백제와 고구려, 멀리는 당나라의 강력한 군사력에 맞서야했다. 그런 이유로 신라를 지켜내려는 그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힘과 지혜로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어렵다고 생각될 때면 뇌물을 쓰고, 편법을 동원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군주`로 문무왕을 평가한다.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호국`의 마음가짐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한 교수에게 하나를 더 물었다.“문무왕은 죽은 후라도 용이 돼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신라시대에 동해를 통해 침입하는 외적들이 있었는가?” 이에 대한 상세한 대답이 돌아왔다.“동해구의 문무왕릉은 신라의 도읍 경주에서 동해에 이르는 최단거리에 위치했다. 임진왜란 때도 전투가 빈번했던 장소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은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과 결합한 왜(倭·일본 사람)였다. 실제로도 이들이 `백제부흥`을 외치며 금강 하구로 침략했던 기록이 있다. 문무왕은 이를 염두에 둔 듯하다. 대왕암 부근에 만들어진 감은사도 침입하는 왜병을 진압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역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사실 문무왕릉은 많은 수의 신라 왕릉들처럼 “세간에 알려진 피장자(무덤에 묻힌 사람)와 실제 피장자가 다르다”는 논쟁 속에 있다. `삼국유사`에도 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고 간단히 언급될 뿐이라 이 논란은 여전히 고고학계의 `뜨거운 감자` 중 하나다. 하지만, 이에 관한 한정호 교수의 견해는 칼로 자른 듯 명료하다.“문무왕릉에 묻힌 사람은 문무왕이다. 울산에 위치한 또 다른 대왕암을 문무왕릉이라 주장하는 일부 향토사학자들이 있지만, 이를 증명할 근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다만, 문무왕릉이 화장한 유해를 뿌린 산골처(散骨處)인지 그게 아니면 뼈를 묻은 장골처(藏骨處)인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다.”`진짜 피장자는 누구인가`를 둘러싼 현대 역사학자들의 갑론을박 속에서도 문무왕은 중앙부에 물을 가두고 동서로 긴 수로를 만든 `영원한 잠의 안식처`에서 한마디 말이 없다.그저 바다만큼 푸른 4월의 하늘 아래서 재위 때처럼 백성(국민)들을 자애롭고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을 뿐. 왕의 무덤을 호위하듯 줄지어 늘어선 12개의 바위는 세월과 파도에 깎여가고.문무왕릉에 관해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대왕암을 `댕바위`라고 불렀다. 이곳은 지금도 토속신앙과 용왕신앙을 받드는 이들이 모여드는 영험한 기도처로 각광받고 있다. 이들은 문무왕이 동해의 용왕으로 몸을 바꾸었다고 믿고 있다.혼곤한 햇살 아래 앉아 옛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다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왕은 외부의 침입보다 더 무서운 인간 내부의 온갖 욕망들을 해소해달라며 밀려드는 부탁에 바다빛깔처럼 푸른 몸살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왕의 뜻 받들어 신문왕이 축조한 `감은사`용이 된 王, 바다 오가며 쉬던 곳나란히 마주 선 석탑만이 남아…병들어 누운 왕의 곁에 몰려든 고관대작과 승려들이 걱정스레 물었다. “왕이시여, 진정 귀하신 몸이 짐승인 용으로 다시 태어나도 괜찮겠습니까?” 희미하게 웃음 띤 왕이 사람들의 우려를 떨치며 답했다. “일생 부귀와 영화를 원하며 살지 않았다. 짐승이면 어떠하냐? 내 나라, 내 백성을 위한 것인데.”20년간 권좌에 머무르며 실질적인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신라의 문무왕은 죽음을 앞두고 신하들과 위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전해진다. 사후에도 자신의 통치 아래 있던 신라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는 왕의 호국의지를 알려주는 역사 속 에피소드다. 큰아들인 신문왕 역시 이 장면을 목격했다. 그날 이후, 신문왕에게 감은사(感恩寺·선왕의 큰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지은 절)를 완성하는 것은 지상목표가 됐다.문무왕 말기에 축조를 시작한 감은사는 신문왕이 즉위한 이듬해(682년) 마침내 창건을 맞았다. 문무왕의 수중릉이 지척인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위치한 감은사. 지금은 터와 삼층석탑 2기 등의 유물이 남아 사적 제31호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해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포함 많은 수의 관광객들이 찾는 경주의 보물 중 하나가 됐다. 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발굴 조사에서는 감은사의 주춧돌이 놓였던 것으로 보이는 지하에 그 사용처를 추측하기 어려운 공간이 발견됐다. 몇몇 호사가들은 이곳을 두고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다를 오가며 쉬던 곳”이라며 놀라워했다. 아버지를 위한 신문왕의 효심이 만든 침실이라는 것. 실제로 이런 지하공간은 여타의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고고학계의 이어지는 설명이다.사천왕사(四天王寺), 황룡사(皇龍寺)와 더불어 신라의 호국의지를 드러내는 사찰로 이름 높았던 감은사가 언제 터만을 남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 사이에 폐사(廢寺)되었을 가능성만이 이야기되고 있을 뿐. 하지만, 감은사지에 남겨져 현대인들에게 그 자태를 드러낸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문무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와 사리함,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각종 기와와 토기 등은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했던 문화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유산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4-28

엊그제 새긴 듯 표정 하나하나가 生動(생동)

몇 해 전.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여행하며 슈테판성당의 웅장함에 놀랐던 적이 있다. 높이가 137m에 달하는 첨탑의 위용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불리는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겨우 9년 간격으로 열린 역사적 장소라는 드라마틱한 사실은 비엔나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그 도시에 매력에 빠지게 한다.왕비 장화부인과 합장무덤으로 추정되는 흥덕왕릉 돌사자와 무인·문인석까지 신라 조각기술 정수 만끽삼국통일 주역 김유신 장군묘도 여느 왕릉 못잖아슈테판성당의 내·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들 역시 사람들에게 인기다. 안톤 필그람 등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화려하고 매혹적인 부조(浮彫)는 동유럽 예술역사의 한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엔나는 해마다 수백 만 명의 여행자들을 끌어 모으는 관광의 도시다. 그 힘의 배후 중 하나가 바로 슈테판성당이고, 성당 안팎의 새겨진 빼어난 조각품들이다. 그렇다면 경주에는 이 정도의 매력을 가진 `관광 상품`이 없을까? 결론부터 말해보자. “있다.”흥덕왕은 신라의 42대 임금이다. 38대 원성왕의 손자로 태어난 그의 능은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한적한 소나무 숲 속에 위치해 있다. 용장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고 청해진 사수를 지시했던 흥덕왕은 중국에서 들여온 차(茶)를 우리 땅에 재배해 `차 문화`를 대중화시킨 문무를 동시에 갖춘 왕으로 평가받는다. 오래 이어진 가뭄과 흉작에 신라에 대기근이 찾아왔을 때는 국법으로 사치를 금한 어진 지도자이기도 했다.흥덕왕릉을 찾았던 초봄. 일대는 소나무재선충 방재활동이 한창이었다. 소설가 강석경은 산문집 `능으로 가는 길`을 통해 경주 외곽 인적 드문 곳에 자리잡은 흥덕왕릉 앞 소나무 숲을 이렇게 표현했다.“햇빛을 향한 경쟁 때문인지 용틀임하듯이 뻗어 올라 하늘을 가린 소나무 숲을 나서면 초록의 능원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묘사로 미루어볼 때 작가는 아마도 여름에 이 왕릉을 방문한 듯하다. 울울창창한 송림에 에워싸여 1천20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조용히 잠들어있는 왕. 하지만, `소리 없는 왕의 영면`과는 별개로 흥덕왕릉 일대는 살아 뛰는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각기 다른 기묘한 형상으로 수백 년 세월을 살아낸 소나무의 지칠 줄 모르는 푸른 에너지가 그렇고, 왕릉 주위를 호위하듯 서있는 무인석과 문인석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 그렇고, 왕의 무덤을 호위하듯 둘러싼 십이지신의 돋을새김이 또한 그렇다.1963년 사적 제30호로 지정된 흥덕왕릉은 현존하는 신라의 왕릉 중 형식면에서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갖춘 능이라는 역사학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과 합장한 무덤으로 추정되며 규모 역시 크다. 봉분 아래 판석(板石·널판같이 뜬 돌)을 세웠고, 능을 빙 둘러싼 호석(護石·능이나 묘의 둘레에 돌려 쌓은 돌)에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했다.봄 햇살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십이지신상은 바로 엊그제 만든 것처럼 표정 하나하나가 생동한다. 그 정밀함과 섬세함이 슈테판성당의 부조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천년 세월을 훌쩍 넘어 신라미술의 미려함을 현대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 `십이신왕`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십이지신은 불교 신자들을 보호하는 신장(神將)으로, 사람의 몸에 호랑이·토끼·용·뱀·말·소·원숭이·닭·돼지·개·쥐·양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신으로까지 숭배되던 십이지신. 바로 이 열 두 동물이 죽은 흥덕왕과 왕비를 지키고 선 것이다. 자그마치 1천200년 동안.십이지신상 외에도 흥덕왕릉 주변에는 돌사자와 무인석, 문인석, 그 위에 비석을 세웠던 커다란 거북 모양의 조형물이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살아있는 학자의 품격을 그대로 담아낸 문인석과 이국(異國)의 장수를 모델로 깎은 듯한 무인석은 왕릉이 조성됐던 당시 신라가 얼마만한 조각기술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활발했던 서방세계와의 교류 역사까지를 짐작케 해준다.유럽의 역사·문화유적은 학계의 철저한 고증과 범국가적 지원을 통한 보존정책으로 인해 오늘날 화려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경주도 문화유산의 고증과 보존에 지금까지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흥덕왕릉과 그 주변 조형물을 직접 본 사람들은 말한다. “신라의 십이지신 돋을새김이 비엔나 슈테판성당의 부조만 못할 게 무엇인가?” 신화와 전설을 제 몸 안에 고스란히 담은 매혹적인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고분은 흥덕왕릉만이 아니다.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라 쓰인 비석이 세워진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의 무덤(사적 제21호)을 호위하는 것도 십이지신이다. 삼국시대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 이름은 들어봤을 김유신(595~673)은 신라의 장수로 지금의 합참의장격인 대총관을 맡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인물. 삼국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 그의 무덤은 규모와 화려함 면에서 어느 왕릉 못지않다. 봉분의 지름이 30m에 육박하는 이 거대한 묘에도 세밀한 솜씨의 석공이 새겼으리라 짐작되는 십이지신이 꿈틀대고 있다.흥덕왕릉의 조각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은 열두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고, 몸은 평상복을 입고 칼과 창 등의 무기를 든 사람 형상이다. `삼국유사`는 이 묘에 관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높이 모시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경주 출신의 역사학자 이근직(1963~2011)은 그의 저서 `신라왕릉 연구`에서 김유신 묘에 관해 “왕릉과 같은 호석 구조를 하였으나, 석사자상과 석인상은 없다”고 썼다. 흥덕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주변에서 발견된 사자상과 문인·무인석 등이 없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그것은 아마도 김유신이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음에도 `감히 왕의 권위에는 미칠 수 없다`는 왕족들의 자존심이 석상 세우는 걸 거부해서가 아닐까?오스트리아 슈테판성당의 부조가 지닌 아름다움과 비견할 수 있는 흥덕왕릉과 김유신 묘의 십이지신상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문득 시인 김광규의 `묘비명`이란 시가 떠올랐다. 불멸하는 석조 돋을새김을 보며 유한한 인간의 삶을 노래한 문장이 눈앞에 어른거렸다.`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후략)`. 사진작가와 관광객 매료시킨 경주의 고분꽃과 소나무 속의 고분앵글에 담긴 경주의 봄`이색 풍경`으로 인기목련과 유채꽃, 개나리와 벚꽃이 만발하는 경주의 봄. 그 향기에 끌려 많은 사람들이 경주로 향하는 버스와 기차에 오른다.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간단한 도시락을 만들어 가족소풍을 나오는 3~4월의 경주 풍경은 정겹다.난분분하던 벚꽃이 아쉽게 떨어질 무렵인 4월의 두 번째 주말. 대릉원의 고분과 월성 유적 발굴현장, 월지(안압지) 등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진작가 구창웅(47) 씨를 만났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근 30년 만에 경주를 찾았다는 구 작가는 “죽은 왕들의 숨결이 봄꽃 속에서 살아나는 듯하다”는 말로 왕릉과 만난 감동을 전했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각종 유물에 관심을 보인 그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국립경주박물관에 들러 보다 많은 고대의 보물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며, “걸음을 옮기는 곳 모두가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 사는 분들이 부럽다”는 말로 `고분의 도시` 경주의 매력에 흠뻑 빠졌음을 고백했다.경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해 대릉원과 첨성대를 거쳐, 월성 유적과 월지, 동궁까지 꽤 먼 길을 걸었음에도 곳곳마다 거대한 능()이 솟은 독특하고 생소한 풍경에 피곤한 줄 모르겠다던 구 작가는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경주 왕릉의 비밀을 주제로 작업을 해 사진전을 열고 싶다”는 미래의 희망을 전하며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눌러 주위 풍경을 담아내는데 여념이 없었다.첨성대 인근을 노랗게 물들이며 만개한 유채꽃. 동화 속 풍경 같은 그 유채꽃밭에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 아내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대구시민 김남석(39) 씨를 만났다.“TV와 책 속에서만 보던 거대한 무덤을 본 아이들이 신기하고 놀라워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귀여웠다”는 김 씨는 신라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아이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지 “다음에 경주를 찾을 때는 미리 왕릉과 유적에 관한 공부를 좀 해와야겠다”며 웃었다.봄꽃과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경주의 고분들. 천년왕국 신라의 향수 어린 풍광은 비단 역사학자와 문화재 전문가들만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웃음과 꿈을 선물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이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4-14

4명의 왕과 1명 왕비의 무덤, 증명은 어려워

고대의 왕 혹은, 임금 또는, 황제로 불린 이들은 살아있는 동안은명예와 숭배를 원했다.자신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에게 스스로가귀한 존재임을 기어코 증명하려 했던 것.그 존재증명의 욕구는 죽음 이후까지이어졌다. 한 집단의 지배자로서 오랜 시간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었던 것일 테다.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는이러한 왕의 흔적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12세기 초반에 건설된 캄보디아의앙코르와트는 `살아서 누린` 왕의 영화를짐작케 하는 건축물이다.당시 크메르제국의 왕들은 신(神)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미려하고 웅장한 공간에 머물며사람들의 머리 위에 군림했다.당연지사 왕에 대한 숭배가 뒤따랐다.중국 산시성에 자리한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은 `죽음 이후` 황제의 욕망을 보여주는증거물이다. 거대한 무덤과 더불어사후에 자신을 호위할 병사와그들이 타는 말까지 흙으로 빚어 도열시킨 진시황의 집착은 권력자가 가진 욕망의한 단면을 현대인에게 알려주고 있다.신라시조 박혁거세와 알영 왕비남해왕·유리왕·파사왕 무덤 추정삼국유사 `뱀무덤` 설화도 전해져정확한 매장자 두고 논쟁 중신라는 자그마치 992년간 이어져온 왕조국가였다. 56명의 왕이 순차적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그들의 흔적은 당대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규모와 함께 매장된 유물로 볼 때 놀랍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왕릉 역시 대표적인 신라의 유적들 중 하나다.현재 학계에서 신라 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은 모두 38기. 이는 과거의 문헌을 오랜 기간 연구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등 지난한 과정을 통해 알아낸 것이다.그럼에도 신라 통치자들의 사망, 장례식, 매장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멀게는 2천 년, 가깝게 잡아도 1천 년 전에 발생한 일이라 증언을 해줄 사람이 전무하다. 그렇기에 경주의 능묘(墓)를 둘러싼 비밀은 오늘날까지도 지극히 일부만이 밝혀졌을 뿐이다. 사람들의 궁금증을 부르고, 호기심을 일으킬 만하다.신라의 첫 번째 임금이었던 박혁거세 거서간(居西干·신라 초기 왕의 호칭). 그가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시 탑동의 오릉(五陵) 역시 이런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고분이다. 3세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172호로 지정된 능들.기자가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는 오릉 인근 숭덕정과 알영왕비가 태어났다고 전해오는 알영정을 찾았을 땐 찾아온 봄기운에 기지개를 켠 목련이 새하얀 꽃잎을 아름답게 펼치고 있었다. 하늘로 뻗어 오르는 대나무도 푸른 기운으로 가득했다. 박혁거세와 함께 그의 부인인 알영,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무덤까지 5개의 고분이 지척에 위치한 오릉은 사릉(蛇陵)이라고도 불린다. 한자를 해석하면 `뱀무덤`이란 뜻인데, 어째서 왕이 묻힌 곳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이에 관해선 고려의 승려 일연의 편찬한 `삼국유사`에 관련 설화가 전해온다. 그 내용은 이렇다. `혁거세 왕은 61년간 나라를 다스린 후 하늘로 올라갔다. 7일 후에 왕의 육신이 땅으로 떨어지고 뒤따라 왕후도 숨졌다. 백성들이 둘을 합해 장례를 치르려했으나,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 이를 방해했다. 할 수 없이 땅에 떨어져 5조각으로 흩어진 왕의 신체를 각각 장사 지내 오릉을 만들었다. 또한 이 능이 구렁이와 연관됐기에 그 이름을 사릉이라고 했다. 위치는 담엄사 북쪽이다.`이 기록에 대한 신뢰성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이와 관련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박혁거세 왕에 관한 기록과 함께 등장하는 `삼국유사` 속 담엄사가 어디인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며 “혁거세 외에는 구체적으로 누구의 장례를 치른 것인지도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로 현재진행형인 `신라 왕릉을 둘러싼 비밀`의 일부분을 소개해주었다.역사학계에서는 앞서 언급한 왕들과 왕비가 오릉에 묻혀있다는 걸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는 이유로 ◆5개의 무덤 중 하나가 2개의 봉분이 표주박처럼 이어 붙어 있는 표형분(瓢形墳)이라 매장된 인물이 6명일 수도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왕의 몸이 하늘에서 떨어져 다섯 조각으로 흩어진 것을 묻었기에 5개 봉분 전체가 박혁거세의 무덤일 수도 있다 ◆4세기 이전 신라의 무덤은 토광묘 양식으로 만들어진 게 대부분인데, 오릉은 4~6세기경 양식인 적석목곽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 등을 이야기한다.사실 이런 논쟁 속에 있는 건 비단 오릉만은 아니다. “역사 연구의 특성상 경주에 존재하는 다른 왕릉들 또한 매장자가 정확하게 누구인지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오릉은 그러한 논란과 논쟁 속에 있는 왕릉 중 하나라고 보면 될 것”이라는 게 이에 관한 박임관 원장의 부연이다.신라 왕들의 무덤을 두고 거기에 묻힌 사람이 정확하게 기록된 것인지에 관한 논란은 이미 300여 년 전에도 있었다. 17세기 사학자였던 화계(花溪) 유의건은 그의 책 `화계집`을 통해 아래와 같은 요지의 문제제기를 했다.“조선 영조 6년(경술년·1730년) 이후 경주의 28기 무덤을 왕릉이라 하고 있다. 그중 17기는 이전에는 몰랐으나 근래 들어 새로 알게 된 것들이다. 1천년 이전의 일에 대한 자취를 살필 때는 문자의 기록에 의해야 한다. 왕릉 속 정확한 매장자는 신라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도 상세히 알기 어렵다. 하물며 그 무덤들이 왕릉인지 아닌지를 역사에 무지한 촌부들에게 물었다니, 그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저마다의 주장과 이에 따른 논쟁과는 별개로 봄을 맞이하는 오릉과 그 일대 소나무 숲, 그리고 숭덕전 정원은 아름다웠다. 신라는 도처에 산재한 고분을 통해 제아무리 명민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라 해도 쉽게 파헤칠 수 없는 `천년왕국의 비밀`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 비밀을 풀어낼 열쇠의 제작은 이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죽음 이후에도 자신이 통치한 왕국의 기억 속에 남고 싶었던 신라의 지배자들. 오릉 속에서 영원한 잠에 빠졌다고 추정되는 4명의 왕과 1명의 왕비는 `존재하기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던 것일까. 봉황대와 신라 멸망을 둘러싼 전설고려 왕건의 `스파이` 풍수학자경주 곳곳 봉분 조성 부추겨깊은 우물까지 파 `파멸의 길`로그 크기가 일반인의 무덤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를 넘어서는 신라의 고분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봉분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봉황대(鳳凰臺·사적 제512호)다. 경주시 노동동 고분군에 속하는 봉황대는 직경이 82m에 높이가 22m로 아이들의 눈에는 작은 산처럼 보일 수도 있을 듯하다. 여기에 누가 묻혀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봉황대가 미발굴 된 고분 중 하나인 까닭이다. 그러나 인근에 위치한 식리총, 금령총, 금관총 등의 발굴탐사 결과로 미루어볼 때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을 살았던 왕 또는, 신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측된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경주 사람들은 예부터 커다란 무덤을 `봉황대`라 불러왔다. 여기에는 흥미롭고도 비극적인 전설 하나가 떠돈다. 신라의 멸망과 관련된 이야기다.통일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무렵. 왕과 고위직 대신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자리다툼을 일삼으며 백성을 돌보는데 소홀했다. 인근 국가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궁예를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고려의 왕건은 당시 사람들이 풍수지리설을 신봉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비밀스럽게 풍수학자 한 명을 신라에 보낸다. 스파이 역할을 맡은 이 풍수학자는 신라의 왕을 찾아가 “신라 수도는 봉황의 보금자리처럼 생겼으므로, 왕조의 번성이 지속되려면 봉황이 떠날 수 없게 그 안에 알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 말에 혹한 왕은 백성을 동원해 둥글게 흙을 쌓아 수많은 알의 형상을 경주에 만들었다.그러나 풍수학자의 말은 거짓이었다. 실상 경주는 봉황의 보금자리가 아닌 배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만들어진 봉황알 모습의 거대한 흙더미는 파도에 휘청거리는 배에 과도한 짐을 싣는 꼴이 돼버렸다. 왕건이 보낸 풍수학자는 알의 형상이 가장 많이 만들어진 미추왕릉 곁 밤나무숲에 깊은 우물을 파고는 고려로 달아나버린다. 침몰하는 배에 구멍을 뚫어버린 것이다. 이후 신라는 급속히 파멸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이 전설의 요약된 핵심이다. 이때부터 경주 사람들은 거대한 봉분의 형상을 한 흙더미와 함께 왕과 귀족의 무덤을 봉황대라고 칭했다고 한다.비단 신라뿐일까. 동서양을 불문하고 유구한 세월은 다종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봉황대의 전설`을 포함해 천년의 역사가 빚어낸 수많은 설화들은 역사·관광도시 경주의 매력에 빛을 더하고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3-31

신라 통일 이전·이후 무덤의 형태 큰 변화

어떻게 보면 초록의 잔디에 뒤덮인 동산 같기도 하고, 신화적 상상력을 가지고 바라보면 크나큰 비밀을 간직한 거대한 짐승의 알처럼 보인다. 고분(古墳)은 경주를 다른 어떤 도시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풍경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신라시대 왕과 역사적 인물의 무덤은 갖가지 유물과 합쳐져 “발걸음을 옮기는 곳이 곧 박물관”이라는 명성을 경주에 가져다줬다. 영국의 저명한 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규정했다. 과거의 유물인 신라의 고분은 현재의 우리와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그 대화를 통해 현대인은 어떤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본지는 신라천년의 비밀을 풀어낼 주요한 열쇠의 하나인 `경주 고분`에 관한 기획기사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왕과 왕비 등 지배계급의 무덤내부에 목곽 설치 후 봉분 조성해구조적 특성 덕에 도굴에 안전금관 등 부장품 보존 효과적신라만의 특성을 보여주는 적석목곽분의 비밀은 “저게 뭐예요?” 자녀들과 함께 경주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부모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질문이다. 작은 산처럼 보이는 거대한 무덤을 가리키는 아이의 손끝. 역사 전공자거나, 평소 관심을 갖고 역사관련 서적을 읽어온 사람이 아니라면 고분에 관해 친절하고 세세한 설명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고분의 사전적 의미는 `과거와 현재의 무덤 중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분묘`다. 고고학계는 이를 좀 더 좁혀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일정한 형식을 갖춰 만들어진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경주에는 신라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陵)`과 김유신과 설총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의 무덤인 `묘(墓)`가 각지에 흩어져 있다.신라시대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을 통칭하는 경주의 고분. 학계에선 이들 고분이 매장된 인물의 지위에 따라 그 위치와 형태, 규모와 시설, 함께 묻힌 부장품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말한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경주의 고분을 “과거에 존재했던 왕국의 각종 정보를 무언의 메시지로 알려주는 보고”라고 정의했다.사실 고분이 경주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함안 도항리·말산리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창녕 교동 고분군, 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 서울 석촌동 고분군, 집안 통구 고분군 등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유적지다. 이들 무덤 역시 고대 역사를 복원하고, 문화적 특징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자 유산이다.그렇다면, 경주의 고분 형태 중 학계의 관심을 끄는 건 무엇일까? 고고학자들은 타 지역의 고분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에 주목한다. 내부에 목곽을 설치해, 부장품을 넣은 후 외부에는 사람 머리 크기의 냇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적석목곽분은 신라가 국가의 기틀을 이루고 발전하던 시기인 4~6세기 경에 만들어졌다.“고구려와 흉노, 중앙아시아 등에 유사한 형태의 무덤 양식이 있으나 서로 직접적 관련성은 없는 매우 독창적인 형태가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라는 게 이재현 실장의 설명이다. 여기서는 다량의 희귀한 부장품이 발견됐고, 이 부장품들의 연구를 통해 신라시대의 기술 수준과 교류했던 국가, 생활양식과 세간의 관습까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적석목곽분은 그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도굴범의 범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또한, 신라는 큰 살육전쟁을 겪지 않고 고려에 정권을 이양함으로써 왕들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비극을 막았다 이런 이유로 금관을 포함한 고분 속 화려한 부장품들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훼손 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무덤형태 통해 당대의 사상, 국가 변화과정 등 추측또 하나 신라의 고분에 대해 일반인이 가지는 의문은 “비석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에 누가 묻혔는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일 것이다. 고려 후기에서부터는 각 문중이나 가문에서 조상의 묘가 어느 곳에 위치했는지를 후대에게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러나, 그런 관행이 정비되지 않았거나, 망자의 신분, 행적, 이름 등을 기록한 비석이 없는 무덤의 경우엔 거기에 누가 묻혀있는지를 알아내는 일이 어렵다. 이에 관해 이재현 실장은 “역사적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책에는 신라의 왕들이 세상을 떠난 후 장례를 치른 기록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문헌을 통해 “이 곳이 OO왕의 무덤”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고분의 위치와 구조, 변화해온 분묘의 양식 등을 종합해 연구·분석하는 것도 역사학계가 `무덤의 주인`을 찾는 방법의 하나다.하지만, 이런 방법들이 100%의 신뢰성을 가지지는 못한다. 비석이 없고, 고분 내부에서 묘지명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엔 “이것이 누구의 무덤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 또한, 현재 전승되는 분묘의 주인공도 반드시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이는 역사연구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기도 하다.통일 이전의 신라와 통일 이후의 신라는 무덤의 형태에서도 변화를 보인다.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 고분은 크기가 눈에 띄게 작아지고, 위치 역시 외곽의 구릉지역으로 옮겨간다. 내부구조 또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돌방무덤(판돌이나 ·깬돌을 이용해 지면 가까이 축조한 분묘)으로 바뀌었다. “외부에서 유입된 사상이 이런 변화를 일으켰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 실장의 말처럼 무덤의 형태를 통해 “당대의 사상과 문화, 국가의 변화과정 등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경주 시내 상당수 고분은 이미 발굴과정을 거쳤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박물관에 전시됐고, 관련 유적의 보수와 정비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도시 외곽의 고분들은 여전히 도굴의 위험성과 경작과 도시 개발로 인한 훼손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입을 모아 경주 고분군의 적극적인 보호를 주장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미래를 설계하는 재료가 될 문화유산이 가진 본연의 가치를 보존하고, 이것이 가진 의미를 후세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다.역사학계와 문화계가 주목하는 고분은…경주 각지에 산재한 고분 중 역사학자와 문화계 인사들이 특별히 주목하는 건 어떤 것일까? 무열왕릉 ㅣ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져 있어 그곳에 매장된 인물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묻힌 사람의 신원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다른 고분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가진 것이다.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한 사적 제20호 무열왕릉 비석의 머릿돌 가운데 새겨진 글귀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김유신묘 ㅣ `땅을 지키는 열두 신장`인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지름이 30m에 이르는 묘의 주위를 호석(護石·무덤 외부를 보호하는 석조 시설물)과 난간이 둘러싸고 있는데, 호석에서 쥐, 소, 호랑이, 토끼 등이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12지신상을 만나볼 수 있다. 학계가 김유신묘를 주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훼손의 정도가 심하지 않아 신라시대 무덤구조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원성왕릉 ㅣ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원성왕릉 남측에는 독특한 석상이 서있다. 무인석(武人石)으로 불리는 이 석상은 신라인의 얼굴이 아닌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페르시아 무인의 모습”이라 주장한다.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평가받는 원성왕릉은 당나라 등 외국과의 교류가 능묘제도의 변화도 가져왔음을 짐작케 한다.황남대총 ㅣ 경주시 황남동의 황남대총에서는 금관과 허리띠 등의 장신구, 유리와 토제용기, 고리칼 등의 무기, 귀걸이, 옥 제품, 말갖춤 등이 출토됐다. 황남대총은 신라 고분 중 가장 많은 금제장신구가 출토된 것으로 유명하다.천마총 ㅣ 1973년 본격적 발굴이 시작되기 전에는 155호 고분으로 불렸다. 여기서는 장신구 8천766점, 무기 1천234점, 마구 504점 등 도합 1만1천여 점이 넘는 유물이 발견됐다. 이중 두꺼운 금판으로 제작된 금관과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는 그 미려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장니`란 말의 배를 가리는 가리개다.금관총 ㅣ 경주시 노서동에 위치해 있다. 고분의 명칭은 `금관이 출토됐다`는 의미에서 지어졌다. 1921년 집수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많은 부분이 훼손된 상태였으나 금관과 장신구, 그릇을 포함한 적지 않은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3만여 개의 구슬이 발견됐다는 것이 이채롭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도움말=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6-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