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비밀 경주 고분을 찾아서<BR>① 신라 고분의 독특한 양식 `적석목곽분`
어떻게 보면 초록의 잔디에 뒤덮인 동산 같기도 하고, 신화적 상상력을 가지고 바라보면 크나큰 비밀을 간직한 거대한 짐승의 알처럼 보인다. 고분(古墳)은 경주를 다른 어떤 도시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풍경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신라시대 왕과 역사적 인물의 무덤은 갖가지 유물과 합쳐져 “발걸음을 옮기는 곳이 곧 박물관”이라는 명성을 경주에 가져다줬다. 영국의 저명한 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규정했다. 과거의 유물인 신라의 고분은 현재의 우리와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그 대화를 통해 현대인은 어떤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본지는 신라천년의 비밀을 풀어낼 주요한 열쇠의 하나인 `경주 고분`에 관한 기획기사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왕과 왕비 등 지배계급의 무덤
내부에 목곽 설치 후 봉분 조성해
구조적 특성 덕에 도굴에 안전
금관 등 부장품 보존 효과적
신라만의 특성을 보여주는 적석목곽분의 비밀은“저게 뭐예요?” 자녀들과 함께 경주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부모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질문이다. 작은 산처럼 보이는 거대한 무덤을 가리키는 아이의 손끝. 역사 전공자거나, 평소 관심을 갖고 역사관련 서적을 읽어온 사람이 아니라면 고분에 관해 친절하고 세세한 설명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분의 사전적 의미는 `과거와 현재의 무덤 중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분묘`다. 고고학계는 이를 좀 더 좁혀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일정한 형식을 갖춰 만들어진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경주에는 신라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陵)`과 김유신과 설총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의 무덤인 `묘(墓)`가 각지에 흩어져 있다.
신라시대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을 통칭하는 경주의 고분. 학계에선 이들 고분이 매장된 인물의 지위에 따라 그 위치와 형태, 규모와 시설, 함께 묻힌 부장품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말한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경주의 고분을 “과거에 존재했던 왕국의 각종 정보를 무언의 메시지로 알려주는 보고”라고 정의했다.
사실 고분이 경주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함안 도항리·말산리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창녕 교동 고분군, 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 서울 석촌동 고분군, 집안 통구 고분군 등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유적지다. 이들 무덤 역시 고대 역사를 복원하고, 문화적 특징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자 유산이다.
그렇다면, 경주의 고분 형태 중 학계의 관심을 끄는 건 무엇일까? 고고학자들은 타 지역의 고분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에 주목한다. 내부에 목곽을 설치해, 부장품을 넣은 후 외부에는 사람 머리 크기의 냇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적석목곽분은 신라가 국가의 기틀을 이루고 발전하던 시기인 4~6세기 경에 만들어졌다.
“고구려와 흉노, 중앙아시아 등에 유사한 형태의 무덤 양식이 있으나 서로 직접적 관련성은 없는 매우 독창적인 형태가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라는 게 이재현 실장의 설명이다. 여기서는 다량의 희귀한 부장품이 발견됐고, 이 부장품들의 연구를 통해 신라시대의 기술 수준과 교류했던 국가, 생활양식과 세간의 관습까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적석목곽분은 그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도굴범의 범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또한, 신라는 큰 살육전쟁을 겪지 않고 고려에 정권을 이양함으로써 왕들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비극을 막았다 이런 이유로 금관을 포함한 고분 속 화려한 부장품들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훼손 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
또 하나 신라의 고분에 대해 일반인이 가지는 의문은 “비석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에 누가 묻혔는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일 것이다. 고려 후기에서부터는 각 문중이나 가문에서 조상의 묘가 어느 곳에 위치했는지를 후대에게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러나, 그런 관행이 정비되지 않았거나, 망자의 신분, 행적, 이름 등을 기록한 비석이 없는 무덤의 경우엔 거기에 누가 묻혀있는지를 알아내는 일이 어렵다. 이에 관해 이재현 실장은 “역사적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책에는 신라의 왕들이 세상을 떠난 후 장례를 치른 기록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문헌을 통해 “이 곳이 OO왕의 무덤”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고분의 위치와 구조, 변화해온 분묘의 양식 등을 종합해 연구·분석하는 것도 역사학계가 `무덤의 주인`을 찾는 방법의 하나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이 100%의 신뢰성을 가지지는 못한다. 비석이 없고, 고분 내부에서 묘지명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엔 “이것이 누구의 무덤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 또한, 현재 전승되는 분묘의 주인공도 반드시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이는 역사연구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기도 하다.
통일 이전의 신라와 통일 이후의 신라는 무덤의 형태에서도 변화를 보인다.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 고분은 크기가 눈에 띄게 작아지고, 위치 역시 외곽의 구릉지역으로 옮겨간다. 내부구조 또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돌방무덤(판돌이나 ·깬돌을 이용해 지면 가까이 축조한 분묘)으로 바뀌었다. “외부에서 유입된 사상이 이런 변화를 일으켰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 실장의 말처럼 무덤의 형태를 통해 “당대의 사상과 문화, 국가의 변화과정 등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주 시내 상당수 고분은 이미 발굴과정을 거쳤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박물관에 전시됐고, 관련 유적의 보수와 정비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도시 외곽의 고분들은 여전히 도굴의 위험성과 경작과 도시 개발로 인한 훼손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입을 모아 경주 고분군의 적극적인 보호를 주장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미래를 설계하는 재료가 될 문화유산이 가진 본연의 가치를 보존하고, 이것이 가진 의미를 후세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도움말=신라문화유산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