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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캄보디아에서 배운 지혜

이슬동지여고 3저는 10일 동안 스레이니읏이라는 캄보디아 친구와 함께 생활하고 봉사 하였습니다. 스레이니읏은 저랑 동갑입니다.항상 해맑고 사진 찍는 걸 무척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 10일 동안 지내면서, 한국과 캄보디아가 다를 게 없다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던 저와 스레이니읏이랑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답답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변의 도움을 통해 10일동안 스레이니읏이랑 가깝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우린 다른게 없는 친구였습니다. 저는 10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캄보디아에 봉사활동을 간 것이었지만 이미 현지에는 오랜 기간 봉사를 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수월하게 봉사활동을 하였고, 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수 있었습니다. 항상 저희의 불평불만을 들어주시면서 짜증 한번 안내시고 웃음으로 받아주신 분들… 봉사활동을 하는 기간 내내 좋은 얘기를 듣고 많은 도움을 받았던 덕분에 정말 힘들지 않게 현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출발할 때는 너무나 길 것만 같았던 10일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너무나 짧은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헤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매번 누군가와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뒤로 하고 헤어져야만 할 때 가슴 한 켠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번 캄보디아 우동지역에서 저희와 함께 힘든 일을 함께 해내고, 때론 즐거워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로 서로 친구가 되었음에 든든했던 마을 식구와 헤어질 때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힘든 헤어짐의 순간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우동지역 어르신들, 그리고 현지 친구들은 우리가 떠나는 날이 되자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시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정은 정말이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되는 세계인의 감정이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땅,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온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은 모두 같은 것 같습니다. 이번 해외봉사에서 저와 10일 동안 함께 고생했던 선생님 2분과 언니 오빠, 그리고 친구들을 비롯한 사랑하는 현지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었고, 이 좋은 사람을 많이 얻은 것만으로도 저는 이번 10일을 후회 없이 보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세상을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하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배운 세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앞으로의 나의 봉사활동에 즐겁게 임하겠습니다. 끝

2009-10-07

캄보디아에서 배운 현명한 지혜

이슬 동지여고 3나와는 전혀 다른 그들을 만났던 날을 내가 기억하는 이유는, 우리보다 가난하고 냄새 나며 현저히 낮은 생활을 하고 있던 그들의 문화에 받은 문화적 충격 때문이 아닌, 가난 속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으로 최선을 다 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10월, 11월에 걸쳐 10일간 캄보디아로 해외봉사를 다녀왔습니다. 다들 `힘들었지?`라며 안부를 물었지만 `음… 아니?`하며 갸우뚱거리는 것이 제 대답이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해외 봉사였지만 정말 즐겁게 생활하고 봉사하다 오는 것이 전부인 느낌입니다. 물론 24시간 내내 즐겁고 행복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날들을 회상해 볼 때는 늘 `아… 참 너무 행복하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여기에 더 있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저는 무엇을 하러 비행기로 6시간이나 날아가야 하는 캄보디아까지 간 것이었을까요. 아니, 무엇을 얻으러 캄보디아까지 가야했던 것일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는 그곳에 베풀어주고 온 것보다 얻어온 것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캄보디아 공항에 도착했을 때 바닥에서 올라오는 그 습습한 열기, 엄청난 습도에 한번 숨을 고른 뒤에야 캄보디아 고유의 분위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호텔로 향하는 버스에서 동남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사람들의 모습과 야자수와 같은 잎이 넓은 나무, 높은 건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도 프놈펜의 모습에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 어색하게 느꼈습니다. 드디어 내가 다른 세상에서 떨어져 와있구나 하는 생각에 한껏 마음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지낸 10일 동안 저는 도마뱀이 천장을 기어 다니는 방에서 지냈습니다. 우리나라 만큼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다거나, 정수기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해 하루의 뉴스를 확인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10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0일, 저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으로 바쁘게 살아가던 그 어떤 때보다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습니다. 출발하면서 생활환경의 불편함에 대해 불만 섞인 걱정을 늘어놓았던 제가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다음날 드디어 봉사활동을 하게 될 우동지역으로 향했습니다. 버스로 약 4시간 정도를 달렸는데 캄보디아의 풍경은 마치 그림 한 폭을 보는 듯 했습니다. 티끌하나 없는 파란 하늘에 넓은 초원에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집, 그리고 마른 소들과 그 소를 모는 현지인도 영원히 잊지 못 할 풍경이었습니다. 제가 봉사하였던 곳은 우동지역에 있는 청소년센터입니다. 우리나라에 문화원과 같은 곳으로 여러 학생들이 와서 많은 문화를 배우는 곳입니다. 정좌와 센터 본 건물이 있는 그 곳 처음 봤을 때는 많이 허술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10일 동안 오전에는 정원 정리와 페인트 작업으로 센터를 보수하고, 오후에는 현지 친구들과 서로의 언어 가르쳐주기, 서로 문화놀이 가르쳐주기 등으로 여가 활동을 하였습니다.계속

2009-09-30

내가 만난 소중한 사람들 (2)

포항시 자원봉사센터 봉사수기 청소년부문 최우수상한 림오천고 2꽃동네에서 봉사활동을 체험하고 난 후 2월에는 포항 성모병원의 `마리아의집`이라는 여성자애원에서 주관하는 `함께 가자 이 길을`이라는 1년 동안 하는 봉사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집에서 하는 봉사활동은 1년 동안 격주로 둘째, 넷째 토요일 마다 마리아의 집에 가서 몸이 불편하시거나 정신지체를 가지신 이모님들과 함께 가족이 되어 도자기를 굽거나 함께 정원을 가꾸고 요리활동 등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라면 꽃동네 친구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친구들이 아니었더라면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선호와 꽃동네에서 만난 친구들이 다 남자들이여서 마리아 봉사를 하기 전 신경이 몹시 쓰였다. 예비 모임 때 학생 8명과 장애인 이모님 4분이 함께 하는 `동행`이라는 조에서 조장을 맡게 되었다. 영숙 이모님과 파트너가 되었는데 영숙 이모님께서는 몹시 꼼꼼하시고 요리도 무척 잘하셨다. 처음 만난 날 우리는 김밥과 떡볶이를 만드는 요리활동을 가졌다. 처음에는 내가 혼자서 일을 다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만 하고 있자 이모님께서는 순서를 가르쳐 주시며, 김밥에 들어갈 재료의 간을 맞춰 주셨다. 나중에는 김밥을 말기까지 하셨다. 4월 둘째 주 일요일. 흥해에 있는 생명의 숲에서 나무를 심고 산책도 하며 점심을 먹기로 했다. 관광버스를 빌려 휠체어와 필수품을 싣고 즐겁게 출발 했다. 나는 영숙이 이모님의 휠체어를 끌고 산책로를 올라가는데 걸어서 올라가기도 힘든 곳을 휠체어를 밀고 올라가니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봉사선생님께서 ``너희는 잠깐 힘드는 것이지만 이모님들은 계속 이렇게 생활해야 하는데 누가 더 힘들까?``라고 물으셨다. 선생님의 질문을 받고 고작 몇 시간을 못 참고 힘들어한 내가 부끄러웠다. 우리는 언제나 장애인이 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나 역시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친구 선호와 꽃동네, 그리고 영숙이 이모님을 보면서 장애인은 결코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좀 더 늦게 하고,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보다 많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헬렌 켈러가 말했던 것처럼 `장애는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뿐이다. 우리는 장애라는 것을 불행한 것으로 생각해 장애우들에게 아픔을 준다. 앞으로 장애를 불행하다고 말하지 말고 불편한 생활을 좀 더 편안하고 편견 없이 장애우들을 바라보며 장애우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해외봉사를 나가서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도 좋지만, 주변에 있는 장애우들에게 먼저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을 나누려고 한다. 마리아 집 봉사 프로그램이 끝나더라도 주변에 나의 작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이나 시설에 찾아가고, 더 나아가 호스피스에 계시는 환자분들에게 작은 기쁨과 희망을 드리고 싶다. 또 학업에도 더욱더 매진하여 PD가 될 것이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과 장애우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나의 꿈이다. 그렇게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도우며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는 우리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끝

2009-09-23

내가 만난 소중한 사람들 (1)

포항시 자원봉사센터 봉사수기 청소년부문 최우수상한 림오천고 2나에게는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교시절을 함께 보낸 잊지 못할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얼굴도 잘 생겼고 키도 큰 친구이며 음악적인 감각도 뛰어나 클라리넷과 장구를 잘 쳤다. 또한 국기나 상표도 잘 그렸다. 단지 그는 자신만의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자폐증을 가진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났다. 선호와의 첫 느낌은 솔직히 `얘는 뭔가?, 왜 혼잣말을 할까?` 하는 우리와 `다르다`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호의 어머니께서 선호와 사이좋게 지내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와주라며 나에게 빵을 사주셨다. 그 다음날 나는 왠지 모를 의무감을 느껴서 알림장을 써주며 화장실과 음악실 등을 함께 다니며 학교생활을 보냈다. 선호와의 첫 만남이 나에게는 봉사의 시작이자 장애우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였다. 초등학교을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선호와 나는 같은 반이 되었다. 나와 선호는 같은 아파트에 살기에 아침 등교 때마다 선호의 집으로 찾아가 함께 등교를 했고, 내가 시간이 늦어지면 선호는 우리 집에 찾아와 `한림아 학교 가자` 하며 지내던 중, 1학년을 거의 마칠 무렵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선호와 2학년을 같이 생활해보라는 제안을 하셨을 때 솔직히 그 순간 많은 고민이 되었다. `선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망설임 끝에 2학년 생활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3학년 때 역시 선호와 같은 반을 지내며 중학교 생활을 마쳤다. 물론 중학교생활에서 선호와 생활하면서 힘든 점도 많았다. 늘 같이 다니다보니 나도 선호처럼 장애인으로 보는 친구들도 있었고 다른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선호를 혹 괴롭히는 친구들이 있을까? 늘 긴장을 하였다. 또한 선호는 나만 찾았다. 지금은 일반계 고등학교 특수학급에 다니는 선호로 인해 중학교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면 아마 선호와 함께 등·하교 길을 함께 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RCY라는 단체에 가입했다. RCY에서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에게 밑반찬을 나눠 주며,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 시설도 방문하며 소외된 어르신께 말동무도 되어 드리고. 목욕보조, 레크리에이션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올 1월에는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를 방문하여 봉사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 2박 3일 동안 중증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어르신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벨을 누르고 들어간 순간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철조망으로 된 다중 문이었다. 그 뒤엔 사람의 정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이 호기심 반 경계심 반의 눈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잠깐이었지만 정말로 무서웠다. 머리에는 수술자국이 있고 팔과 다리는 앙상했으며, 혼잣말을 하며 돌아다니는 그 모습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순간 `이건 정말 아니다`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레 겁을 집어 먹고 있는 나에게 담당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며, 먼저 친구들과 어르신에게 악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라고 하셨다. 그 순간 조금은 망설였다. 그런데 막상 그들의 손을 먼저 잡으니, 그 친구들도 나에게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차츰 두려움이 사라졌고 얼마 후에는 자연스럽게 접촉하며 운동도 함께 하였다. 그 곳에서 생활하는 친구들 중 한 명은 나에게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새삼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고 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선택받은 일이라고 느껴져 감사했었다. 계속

2009-09-16

안동 시온재단을 다녀와서

오 수 지영일고 23박 4일간의 길고도 짧은 안동 시온 봉사 캠프. 처음 시온 캠프에 대해 들었을 때 당연히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기간이 너무 긴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앞으로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기에 참가하게 됐다. 물론 내가 봉사부서인 인터렉트 부장이라는 책임감이 더 컸던 것 같기도 하다. 7월15일, 여름방학과 동시에 안동 시온 캠프를 시작하였다. 일찍이 시온재단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알아봤지만, 실제로 겪게 된 시온재단은 더 크고, 편리해서 오히려 봉사보다는 휴양을 온 느낌이었다. 2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오면서 단잠을 자고 있어서 그런지 모두가 짜증이 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반갑게 맞아주시는 선생님들 때문인지 바로 웃으며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2층 희망교회로 이동하여 원장님의 인사말을 듣고 나서 짐을 풀었다. 둘째 날 아침, 5시부터 일어나 씻고 어제 받은 종이에 적힌 대로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 식구 분들의 아침식사 도우미 및 말벗이 되어드려야 했다. 나와 온이 언니, 1학년인 은지와 배정받은 방은 단비원의 할머니들이 계신 방이었는데, 특히나 우리가 맡은 방의 할머니 세분께서는 밝고, 우리를 손녀처럼 대해 주셨다. 외할머니 댁이 안동이라서 안동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설명해주시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돌아다니니 색달랐다. 여러 문화재를 보고 난 후에는 예인이라는 시온재단과 관련된 공장에 가서 직업체험을 하기도 했다. 셋째 날 아침, 역시 5시 쯤 일어나 세면을 하고 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그래도 당연한듯이 할머니들을 찾아 뵈었다. 웃으며 서로를 반가워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단 이틀 만에 진짜 할머니와 손녀가 된 기분이었다. 이 날은 아침을 거르고 그냥 계속 산책을 나가고 싶어 하시는 할머니를 휠체어에 앉혀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놀아드렸다. 11시쯤, 다시 특별교육을 어제 예인에서 만났던 김춘식 원장님이 해주셨는데 이때의 주제는 `행복`이었다. 교육을 받으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제는 우리가 외출을 했기 때문에 오늘은 식구 분들을 도와드리고 청소도 하고, 일손도 돕는 날 이었다. 아쉬운 마지막 날, 이제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할머니들 방을 찾았다. 마지막인 만큼 조금이라도 더 잘해드리고 더 있고 싶어서 `할머니 저희 이제 가요, 보고 싶을 꺼예요. 다음에 또 올께요.`하고 약속도 했다. 그리고 시온에서 론볼이라는 운동을 처음으로 배우게 되었는데, 무게 중심이 다른 공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공을 맞추는 그런 운동이었다. 여기 시온에는 론볼 장애인 국가대표이신 분도 계셨다. 재미있게 론볼 교육과 대결을 마친 후 단체사진을 찍고 짐을 챙겨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기 전 집이 오천이신 식구 분과 얘기를 하는데 우리가 가는게 아쉬우신지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셨다. 겨우겨우 꼭 다시 온다는 약속을 하고 아쉬운 인사를 나눴다. 안동시온캠프를 다녀온 지금도 생각만 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가 처음이라 선생님들도 어색하고 우리도 어색했지만, 나중에라도 다시 가게 된다면 진짜 한 가족처럼 이해해주고, 장난도 치고, 혼도 내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평소 학교에서 가는 당일 봉사활동도 좋지만 이처럼 2박3일, 3박4일 일정기간동안 장애인분들,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이제 곧 3학년이라 봉사를 자주 다니는 것이 힘들어질지도 모르지만 기회가 된다면 참여하고 싶고, 앞으로의 학교 후배들이나 우리 인터랙트 후배들에게 한 번쯤은 가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2009-09-09

순수한 사람들을 만나다

한 달에 한번 봉사활동을 가는 토요일, 나와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오랜만에 지각을 했다. 운동장 옆 공간에서 교장선생님께서 훈화를 하시고 계셔서 들어가 줄은 서지 못했지만 잠시나마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꿈을 가져라. 봉사활동을 통해 마음을 넓혀라.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티쉼터는 가까웠다. 두 번째 가는 거라 대충 어떻게,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았다. 선생님께서 이곳 장애인들에 대해 이야기 해 주시는데 새로웠고 궁금했다. `대체 어떻길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만나보고 싶었다. 청소분담을 하는데 전에 이곳에 온 친구들이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2층만은 가지마라. 힘들다. 무섭다.” 하지만 난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대체 어떻길래 저렇게들 피할까. 한 친구는 심지어는 “좀비가 막 몰려온다” 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궁금 반 호기심 반으로 2층 청소를 지원했고, 올라갔다.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막 괴성을 지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너무 두려웠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런데 올라가자마자 한 장애인 언니가 손을 잡아 날 어디론가 이끌었다. 너무 무서웠지만 피하지 말라는 말이 생각나서 가만히 있었는데 괜찮았다! 그 장애인언니가 날 좋아하는것 같았다. 내 신발을 보고 자기신발이랑 똑같다고 좋아하고. 그러면서 장애인들에 대한 나의 인식이 바뀌었다. `아! 이 사람들. 순수하구나.` 햇볕에 빨래 말리기, 남자숙소, 여자숙소와 강당에 선풍기 달기가 우리가 할 일이었다. 청소도 하지 않았고, 장애인 언니 오빠들과 같이 놀아주지도 못했다. 쉬운 일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인사를 하고,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예티쉼터를 나왔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장애인들을 보면 피하고 멀리하고 했었는데 오늘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 같이 있어보니 이 사람들이 그 누구보다 더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혹시 다음에 예티쉼터를 가게 되면, 아니, 다른 어떤 장애인 기관에 가더라도 제일먼저 손을 들고 같이 놀아주는 봉사를 자원 할 것이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오늘 한층 더 성장한 나를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참 좋았다.

2009-09-02

국립 영천호국원을 다녀와서

구름이 잔뜩 끼고 간간히 비가 내리는 토요일 아침,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들을 참배하고 봉사활동을 한다는 사실에 기대감을 가지고 국립 영천 호국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곳 영천호국원은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국가 유공자, 6·25 참전군인, 월남 참전군인, 6·25 참전경찰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공적을 기리고, 호국정신 고취를 위한 추모와 안보의식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여 후손에게 호국정신의 귀감으로 승화시키고자 2001년 조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현충탑에 올라 호국영령들을 참배 한 후 조를 나누어서 정성껏 성역 가꾸기 봉사활동을 하였다. 봉사활동을 마친 후 안보 전시관과 영화를 관람하였다. 이번 영천 호국원 방문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들의 자취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 졌다. 수많은 분들의 희생과 호국정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자유민주주의가 확립되고 경제적·사회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한 사회 속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지낼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묘비들을 보면서 너무나 많은 분들이 저곳에 묻혀 계시다는 생각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이분들이야 말로 말만 앞 새우며 정작 행동으론 실천할 줄 몰랐던 위선자들이 아닌, 진정한 우리나라의 애국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학생으로서 이 땅의 한 젊은이로서 내가 우리 조국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슴 속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분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느꼈으며,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성역 가꾸기 봉사활동 중 그분들의 후손들이 방문하여 참배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찡했고 너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분들도 많아 더욱 마음이 아팠다. 또 서해교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영상을 보며 그분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우리가 길이 빛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봉사활동을 통하여 연일에서 멀지 않은 영천에 순국선열들이 잠드신 호국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체험하게 되었으며 매스컴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을 기리며 이 나라가 더욱 발전 할 수 있도록 이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서 그들의 은혜에 보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끝으로 순국선열들을 위하여 매일같이 영천 호국원을 관리해주시며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자세히 설명해주시고 보여 주신 영천 호국원 관계자 여러분들의 노고에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2009-08-26

양동 민속마을을 다녀와서

어느덧 봄이 가고 여름을 알리는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살을 시원스레 적셔주는 단비였다. 커다란 두 개의 산이 앞뒤로 지켜주는 양동마을은 현대문명의 손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우리의 멋을 한껏 살린 마을이다. 양동마을은 초가집과 기와집의 단조로움이 어우러져 마을을 아늑하게 느껴지게 했다. 아름다운 이 마을이 오늘 우리가 봉사하게 될 장소이다. 사무장님께서 양동마을에 대한 깊은 역사를 말씀해 주셨다. 내가 고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무장님의 말씀은 나의 관심을 끌었다. 내가 양동마을의 매력 속으로 깊게 스며들어갈 때 쯤 어느덧 비는 그쳤다. 우리는 각 조마다 쓰레기 봉지를 들고 마을의 정화를 위해 양동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께서 이 마을에 처음 오시는 거라서 길을 많이 잃기도 했지만 덕분에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 까지 청소 할 수 있었다. 청소를 하면서 마을 곳곳에 남아있는 조상들의 자취와 전통이 깃들어진 우리고유의 문화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었다. 봉사를 하면서 바라본 양동 민속마을은 옛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려는 고유미가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줄줄이 늘어선 초가집과 기와집, 그리고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는 논과 밭이 마을의 정겨움을 연출해 냈다. 봉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곳은 마을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한 손 씨 집안의 종가집이다. 양동민속마을의 꽃이라고 할 만큼 대표적인 건물이기 때문이다. 종가집의 수백 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전통적 운율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건물구조는 복잡했고 구경거리도 많이 있었다. 특히나 부엌이 인상 깊었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공간이 따로 있었고 너무 폐쇄적인 구조였던 것 같았다. 음식저장 공간도 마치 감옥 같았다. 매일 교과서에서만 보던 내용을 실제로 볼 수 있어서 많이 신기했다. 곳곳마다 사진을 찍고 구경을 했다. 또한 쓰레기를 줍는 환경미화활동도 잊지 않고 열심히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다행히도 쓰레기가 많이 없어서 봉사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잘 보존 되어있는 마을 덕분에 봉사를 하면서 많은 역사를 탐험 할 수 있어서 봉사하는 마음 뿐만 아니라 역사지식도 많이 얻은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의 보수적인 면에서 많이 놀라기도 했지만 조상들의 지혜에 감동받았다. 조상의 얼에 한껏 빠지기도 했고,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에 적셔 들기도 했다. 두 번째로 오는 양동마을, 아침부터 촉촉한 단비가 내려 봉사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양동마을에서 느껴지는 고묘한 한국미에 심취 한 것 같다.

2009-08-19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을 다녀와서

박 지 은영일고 1영일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첫 봉사활동에 체험학습을 가게 되어 아쉬웠다. 체험학습을 갔지만 마냥 다른 곳으로 봉사활동을 갔던 다른 반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드디어 4월, 내가 기대하고 바랬던 봉사활동에 가게 되어 매우 기뻤다. 봉사활동을 가기 전 운동장에 1학년 전교생이 모였고,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있으셨다. 봉사활동 가기 전 마냥 들떴던 나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다시 한 번 내가 왜 봉사활동을 가는지에 대한 목적을 알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 중에서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는 말씀이 가장 가슴이 와 닿았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전승기념관에 도착하였을 때, 사뭇 나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생각해보았다. 전승기념관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왠지 평범한 기념관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전승기념관에 들어선 후 2층 강당에 모두 모였다.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강당을 휙 둘러보았다. 무대 위 조명 쪽에는 플랭카드가 붙여져 있었고, 영일고를 맞이하는 글이 있었다. 그리고 밑에 조그만한 글씨로 ` 경주보훈지청 ` 이라는 문구를 보고 ` 아, 뭔가 문화재와 관련이 있거나 과거 역사랑 관련이 있는 곳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나이가 지긋하신 선생님의 강의를 1시간 듣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제자리에 앉아 40분짜리 영상물을 보았다. 그 영상물을 보면서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느끼게 되었다. 영상은 남북전쟁을 주제로 만들어졌는데, 같은 혈족을 지닌 한민족끼리 서로 피를 보면서 치열하게 전투하는 모습에 그만 울컥 하고 말았다. 반 친구들도 아마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군인들의 시체위에 또 죽어서 쌓여가는 수많은 시체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수많은 감정들을 지금도 다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영상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영상물을 보면서 가장 인상에 깊고 가슴이 찡했던 장면은 갓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태아가 조그마한 바구니 안 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피난길을 올라가던 아주머니와 그 아주머니의 자식이 손을 꼭 잡고 바구니 안을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장면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된다. 바구니 안의 아이는 얼마나 무섭고 외롭고 힘들까? 내가 저 갓난 아이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전쟁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 같다. 대다수의 국민이 원치 않은 전쟁이였고, 한민족끼리 누가 이겼다 누가 패하였다를 가린다는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그 전쟁통 속에서 희생되는 건 죄 없는 국민들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서로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걸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전승기념탑들을 보기위해 수백개의 계단들을 올랐다. 한 계단 두 계단 겨우겨우 오르고 나서 드디어 계단의 끝에 다다랐을 때, 굉장히 높은 탑을 보고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지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일동 묵념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와 또 하나의 탑을 거쳐 드디어 전승기념관 청소를 하게 되었다. 난 처음부터 내가 청소할 구역을 못 찾아 헤매었지만 이내 내 구역에서 청소를 하였다. 아주 긴 빗자루로 쓱쓱 떨어진 많은 잔잔한 꽃들을 쓸고 또 쓸었다. 떨어진 꽃들이 한자리에 뭉텅이로 쌓이자 나는 그때 엄청나게 뿌듯했었다. 하지만 몇 분도 체 안돼서 부는 바람에 나무에서 또 꽃들이 떨어지고 난 그것을 또 쓸고 쓸었다. 그래도 난 너무 뿌듯하고 즐거운 마음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빗자루질을 열심히 했다. 전승기념관을 다녀온 후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사실 난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우리나라 과거사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렇게 과거 우리나라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많은 백성들과 남한군들의 희생 정신때문이 아닐까? 옛 조상들의 희생과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조차 감사히 여기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한심스럽다. 이번 계기로 인해 정말 많은 반성과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2009-08-12

치매 걸린 할머니의 안타까움

벌써 세 번째 봉사활동이다. 이번 봉사활동 장소는 석병교회 안에 있는 하늘마음이었다. 하늘마음요양원은 정애원과 비슷한 곳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정애원에 가서 여러 번 봉사를 했는데 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정애원에 찾아가지 못해서 마음이 씁쓸했는데 이렇게 하늘마음요양원에 갈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나, 새름이, 효정이, 유라, 별이, 시은이는 2층에 배정받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니 제일 먼저 문 밖으로 반쯤 몸을 빼고 누워계신 할머니를 발견했다. 제일 먼저 뵌 할머니라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는데 나를 본척 만척 하고 소리만 꽥꽥 지르셨다. 무안해진 나는 얼른 걸레를 빨러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화장실 시설이 굉장히 좋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쓰시는 곳이니 따뜻한 물도 콸콸 나오고 화장실 한칸 한칸 마다 공간이 넓었다. 하지만 걸레로 바닥을 닦는데 물기가 있는 곳을 걸으니 정말 쉽게 미끄러져서 위험했다. 밀대로 복도를 밀고 있는데 아까 그 할머니께서 “거기 아까 닦았다! 닦지 마라!” 라고 또 소리를 꽥꽥 지르셨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끔 우리 보고 욕도 하시고 뭐라고 소리는 지르시는데 알아듣지는 못해 정말 쩔쩔맸다. 우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 그곳 아주머니께서 “이 방 할머니는 치매니까 신경쓰지마” 라고 하셨다. 그 할머니가 무섭긴 했지만 치매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안타까웠다. 멀쩡할 때는 그 할머니도 자식을 위해 힘쓰는 멋진 `엄마`였을 텐데 노년에 이렇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 할머니 뿐만이 아니라 다른 할머니 한분도 `친구, 친구, 물, 물` 하시며 침대를 흔들고 계셨는데 많이 안쓰러웠다. 복도를 다 밀고, 방마다 이불을 다 털어드렸다. 이불을 다 털어드린 후 각 방 화장실에 두명씩 들어가 청소를 했다. 나는 새름이랑 화장실 청소를 했다. 나는 집에서 화장실 청소를 내가 하기 때문에 화장실 청소에 익숙했다. 변기는 새름이가 맡고 세면대, 거울, 세숫대야, 바닥은 내가 맡았다. 청소를 다 하고 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서 서성거리고 있으니 아주머니께서 쉬라고 하셔서 베란다에 나왔다. 밖을 보고 있는데 건물 밖으로 소와 송아지가 있는 것이 보여서 새름이랑 밖으로 나갔다. 소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길을 찾으러 운동장 쪽으로 나왔는데 소 쪽으로 가는 길은 없고 봉봉이 있었다. 아무도 없어서 `놀아도 되나...` 하고 망설이다가 민정이를 뒤따라 들어가서 잠시 놀았다. 5분정도 있다가 민경이가 들어가야 될 것 같다며 들어가는 바람에 다같이 들어갔다. 1층에서 유아용 동화책을 보다가 2층으로 잠깐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니 친구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있었다. 노래도 다같이 부르고 몇몇 애들이 나와서 춤도 추니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즐거워 하셨다. 그 중 보라색 옷을 입은 할머니 한분께서 제 딸이 숙명여대 성악과 교수라고 하셨다. 그러자 옆에 계신 할머니께서 “숙대 교수면 최고인줄 아나. 지랄하고 있네” 라고 하시며 “가! 가!” 하고 그 할머니를 내쫓으셨다. 그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시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보기도 전에 이제 가야된다는 교생선생님의 말씀에 할머니, 할아버지들게 인사를 드리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 할머니 두분이서 얼른 화해를 하시고 편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잘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때처럼 노인분들게 살갑게 대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2층에 치매 할머니를 보고 겁이 나서 근처에 가려 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특히 죄송스러웠다. 우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어떤 언니가 와서 치매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차근차근 타이르는 모습을 보고 반성을 하긴 했는데 그 언니처럼 친근하게 대해 드리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이번 봉사활동 과정에는 이불털기 같은 먼지 나는 작업이 꽤나 있었고 쓰레기통 비울 때도 바나나 껍질이나 요플레 같은 음식물이 많아 냄새가 났는데 다음부터는 마스크를 준비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봉사를 가서 해드린 일이 하늘마음 식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기를 바란다.

2009-08-05

햇빛마을

배지은영일고 2봉사활동을 가는 날이면 나는 들뜬 마음에 항상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오늘 만큼은 교복 아닌 편한 자유복을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괜찮은 날씨였다. 나와 은총이와 예솔이는 같이 햇빛마을로 향했다. 도착하니 담임선생님과 교생선생님 두 분 그리고 친구들이 거의 다 와있었다. 아이들과 한창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직원 봉사자께서 들어와서 구역 배치를 하시고 간단한 설명을 하셨다. 나는 햇빛마을이 네 번째 봉사활동이라 어르신을 부르는 법, 어르신을 대하는 태도, 식사를 도와주는 법 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직원 봉사자께서 설명을 하실 때 더 이해가 잘되었다. 우리는 정해진 구역인 2층 마리아동으로 갔다. 가자마자 할머니들께서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셨다. 우리는 할머니들께 반갑게 인사했다. 텔레비전이 있는 넓은 거실에는 휠체어에 앉은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 계셨는데 이렇게 닫혀있는 공간에서 매일 똑같은 일과를 보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실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 가슴 한구석이 찡해왔다. 그런 할머니들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얼마 전에 하늘나라로 가신 우리 외할머니 생각이 나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 보고 계실 외할머니 생각을 하면서 나는 더 열심히 봉사를 해야지 라는 다짐을 했다. 2층 마리아동에서도 다시 역할을 나누었는데 내가 맡은 일은 걸레로 침대와 창틀 등을 구석구석 깨끗이 닦는 것이었다. 나는 먼지가 소복이 앉은 침대의 손잡이부분을 닦으면서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이 참 안되어 보이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했다. 나는 손이 잘 닿지 않는 바퀴 부분까지 꼼꼼히 닦았다. 깨끗해진 방을 보니 내 기분도 좋아졌다. 무엇보다 어르신들께서 이 방에서 지내실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열심히 청소하다보니 어디서 맛있는 밥 냄새가 났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봉사자 분들께서는 우리를 불러 모으시더니 식사 보조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봉사자 분들께서 정해주신 할머니들 앞에 앉아 식사 보조를 했다. 그 전부터 배가 조금씩 고팠지만 어르신께 밥을 떠 먹여 드리니 내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식사 보조가 다 끝나고 우리는 모든 봉사활동을 마쳤다. 열심히 해서 인지 3시간이 무척 빨리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고 좋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 곳에 더 머물렀을 텐데…. 그렇지만 다음엔 학교단체가 아니더라도 개인으로 다시 찾아 더 보람된 시간을 보내리라 마음먹고 발걸음을 돌려 나왔다. 어떤 봉사활동이라도 끝나고 나서 매번 느끼는 것은 이 봉사활동으로 인해 좀 더 성숙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작은 힘이 그 분들께는 큰 힘이 되고, 의지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 우리 영일고등학교가 자랑스럽다.

2009-07-29

할아버지 할머니 기쁘게 해드리기

햇빛은 파도 냄새가 한껏 풍기는 구룡포 바다를 덮었다. 클래식을 듣는 듯 잔잔한 파도소리가 동해의 정경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하늘마음 이라는 곳은 구룡포 바다를 배경으로 한 노인들의 안락한 쉼터이다. 그곳에는 나의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노인 분들이 생활하고 계신다. 고1 여름방학, 음성 꽃동네에 다녀온 이후로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봉사하러 가는 것은 즐거운 일 중 하나가 되었다. 하루 동안 단 몇 시간만이라도 할아버지 할머니께 친 손녀가 되어드리는 것이 봉사라기보다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마음에 들어서자마자 조를 만들어 청소를 했다. 아직 사람들의 손이 닫지 못한 곳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시커먼 먼지들이 쌓여 있는 곳이 많았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쓰시는 이불은 매일 먼지를 털어줘야 한다고 했다. 친구와 함께 한 할머니의 이불을 털어 드렸는데 할머니께서 품속에 챙겨놓으신 하얀 박하사탕을 하나씩 주셨다. 그 박하사탕의 맛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참된 봉사에서 비롯된 따뜻한 정처럼 달고 정겨웠기 때문이다. 내가 많이 기다렸던 시간은 할머니 할아버지께 춤을 추고 노래하는 재롱잔치 시간이었다. 이 특별한 시간은 그들과 오고가는 정을 맛보기에 가장 적합했다. 나는 자신있게 먼저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께서 박수를 치시며 즐겁게 봐 주셨다. 담임선생님과 사무장님도 우리와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한 노래를 부르셨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준비를 많이 못해서 서툴렀지만 할머니께서는 친 손녀처럼 두 손을 꼭 잡으시며 내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셨다. 그 할머니와 마주잡은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그렇게 따뜻하게 내리 쬐는 햇볕 속 고요히 요동치는 파도 옆에서 화목한 기운이 돋아나는 듯 했다. 시간이 다 되어 아쉬운 마음에 단체 사진을 한 장 찍고 긴 작별인사를 했다. 짧은 시간동안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 지지 않았지만 다음에 꼭 친구들과 함께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하늘마음을 나왔다. 내 주위에 따뜻한 정이 넘치는 곳이 있었는지 미처 몰라 아쉽긴 했지만 지금 그들을 만난 것은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 된다.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고 계시는 소외 계층의 사람들을 연민의 눈으로만 볼게 아니라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되어주는게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들과 함께 있다 보면 화목함 속에서 피어나는 웃음에 한 번 더 묻히고 싶어 질 테니까.

2009-07-22

하늘마음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벌써 2개월이 지났다. 봉사활동도 3번이나 갔다 왔다. 처음 봉사활동은 봉사활동이 아닌 체험학습이었고, 두 번째 봉사활동도 사실 청소만 하다왔지 제대로 봉사를 한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로원에 간다고 하니, 왠지 제대로 봉사활동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때 까지 양로원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사실 약간 두려운 마음도 있었고 기대되는 마음도 있었다. 나는 어른들께 싹싹하고 어리광피우는 편이 아니라서 사실 할머니들과 말을 하게 되면 어색할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늘마음은 구룡포에 위치해 있었는데,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니 외딴 마을에 하늘마음이 있었다. 십자가도 있고 약간 교회같은 분위기가 들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있었다. 일단 우리는 아이들을 나눠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나와 시은이, 유라, 효정이, 새름이, 수진이는 2층을 청소하기로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올라갔다. 아마도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몸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2층에 올라가는 데도 엘리베이터를 타야 된다고 생각했다. 안내해 주시는 직원분을 따라 우리는 우선 각자 청소기, 걸레를 들고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였는데 내가 청소기를 밀면 몇몇 아이들은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그런데 유난히 지금도 생각이 남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복도에 머리를 내밀고 누워계셨다. 그 할머니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참 편안하다고 느꼈었다. 정말 편하게 누워계셨다. 그런데 우릴 보더니 소리를 지르셨다. 처음엔 서로 무슨 말 인지 몰라 당황을 했지만 잘 들어보니 방문을 닫아달라는 얘기였다. 몸이 불편하셔서 창문을 못 닫으실 것을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고 한다. 치매에 걸리면 아이로 돌아 간다는 게 정말 인 것 같았다. 자꾸 우리를 보시고 소리를 지르셨다. 겁이 나서 일부러 피하기도 해서 죄송하기도 했다. 그렇게 청소를 마치고 우리는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되었는데, 나와 유라가 같이 청소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화장실이 깨끗하다고 얘기를 하다가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절대로 이런 시설에 보내지 않을 거라고 얘기를 했다. 사실, 그 곳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정말 한가롭다 못해 적적해 보이셨다.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는 할머니들도 계셨지만, 대부분의 노인분들은 누워있거나, 가만히 앉아 계시는 게 전부 였다. 우리가 처음 할머니를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을 때 그 분들은 아무런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정말 일상이 지루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측은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여러 얘기를 하면서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각자 덥고 계시던 이불을 걷어 들여 털어드렸다. 이불이 정말 무거웠지만 상쾌한 바람과 뜨거운 햇빛에 이불을 터니 기분이 정말 상쾌했었다. 우리는 이불을 털고 약간의 휴식시간을 얻었다. 더운 줄 알았던 날씨가 바람도 상쾌하고 정말 시원했었다. 그리고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다음 할 일은 방에 있는 개인 물병을 씻고 물을 새로 받는 것이었는데 통마다 이름과 호실이 적혀서 있어서 인상 깊었다. 함께 따라오신 두 명의 교생 선생님들과 함께 물병들을 가지고 1층에 내려갔다. 물통을 씻은 다음 소독기에 넣고 소독을 시켰다. 물통에 물을 채운 다음 2층으로 다시 올라가 제자리로 놓은 뒤, 우리는 1층에 앉아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갔다. 아이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몇몇 아이들이 나가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니 정말 즐거우신 듯 하였다. 손뼉도 같이 쳐 주시고 웃는 모습을 보니 괜시리 기분이 좋았었다. 그렇게 3시간이 지나 12시 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왔다. 떠나올 때 정말 몇 달 뒤에 올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었다. 저 분들이 그 때 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고, 다음에 하늘마을에 봉사활동을 올 때에는 치매 걸리신 2층의 할머니에게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말도 걸어드리고 얘기도 해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정말 힘든 일은 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로 보람찬 하루였다.

2009-07-15

석병양로원을 다녀와서

박 지 은영일고 1석병양로원은 내가 영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세 번째 봉사활동을 하게 될 장소이다. 처음엔 양로원에서 봉사한다는 소릴 듣고 되게 힘들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버스에 올라탔다. 도구와 구룡포를 지나 바다건너 산 건너 경치 좋은 곳에 다다랐다. 폐교가 되어버린 학교건물에 도착하였고 인상 좋으신 남자 선생님 한분이 우리 모두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몇몇이서 모둠을 짜서 활동하였다. 나와 내 친구들은 마른걸레와 젖은걸레를 들고 양로원의 모든 유리와 창문을 찾아 닦으러 다녔다. 우리가 온걸 알고 편찮으신데도 나와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일일이 인사를 하였다. 인사를 할 때마다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기도 하셨다. 그럴 때 마다 “영일고등학교에서 왔어요.”하면서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한 할아버지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였는데 할아버지가 대답도 안해주시고 다른곳을 쳐다보고 계시길래 몇 번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인사하기도 하였다. 몇 번을 하고나서야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 때 빨리 깨닫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할아버지도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걸레로 유리와 창을 닦아나갈 때 마다 내가 느끼는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갔다. 유리에 낀 먼지 하나하나가 말끔히 사라질 때 마다 봉사활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갔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다 끝마치고 잠시 쉬려고 복도에 앉아있었다. 옆 창 안으로 할머니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구 두 명을 데리고 할머니들의 방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부터 하였다. 그리고 친구들과 각자 할머니 한 분에게 붙어 안마를 하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처음 나와 얘기를 나눴던 할머니가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할머니께 “할머니 제가 안마해드릴게요.” 하자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나에게 눈을 마주치시며 힘들게 몸을 일으키시곤 안 펴지는 무릎을 억지로 펴시는 모습이 아직 내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내 마음 한 구석에 뭔가 모를 찡 한게 올라왔다. 할머니 무릎을 나도 같이 펴드렸고 할머니가 바지를 걷어 올리시자 무릎에는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 할머니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 라고 수 십 번은 넘게 말 한것 같았다.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영덕에 계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우리 할머니도 지금 무릎이 많이 편찮으신데 하고 생각났다. 봉사활동 다녀와서 꼭 안부전화를 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여태 해드린것도 없고 불효 한 거 같아서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 때 만큼은 내가 할머니의 손녀처럼 정성껏 안마해드렸다. 할머니에게 안마해드리면서 할머니와 몇 마디 짧은 대화를 하였다. 할머니와 했던 대화 중 에서 “영일고등학교 학생들이 참 자주 오네~ ” 하는 소리에 나는 너무 흐뭇했다. 그 때 너무 우리 고등학교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할머니들께서 지루해 하실까봐 노래를 불렀다. 야영을 갔다 온 후라서 목이 많이 아프고 따가웠는데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열심히 힘껏 불렀다. 처음엔 뭘 부를까 망설이다가 노래 하다가 춤까지 추면서 열심히 웃기게 해드렸다. 그러자 할머니들께서 박수를 치며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 미소를 본 나는 더 힘에 입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나서 반 아이들과 모두 모여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곳을 찾아가 순회공연을 하였다. 반 친구들과 다 같이 트로트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때 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마치 손녀를 보듯이 대해주셨다. 몇 분이 흐른 후 다른 건물로 모두 이동하여 큰 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앉아계신 곳 앞에 모두 모여 앉아서 장기자랑을 하였다. 그 때 만큼은 같은 반 친구지만 얼마나 이뻐보이고 착해보이던지 모르겠다.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석병 양로원에 오기 전 까지만 해도 양로원이라는 생각 하나로 `많이 힘들고 고된 하루가 될 것 같다` 고 생각한 내가 참 부끄럽다. 한 달에 한 번 반 친구들도 단체로 오는 것 이외에도 가족들과 함께 양로원을 찾아 일손을 돕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도와주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뿌듯한 하루였고, 부모님에게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2009-07-08

정애원 봉사활동을 마치고

조 은 지 영일고 225일 토요일 아침, 두 번째 봉사활동을 가는 2학년 반들이 모두 입지관 앞에 모여 앉았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자랑스러운 영일고등학교의 이름이 새겨진 봉사 유니폼을 입고 씩씩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한 소대의 정예부대를 보는 것 같아 왠지 웃기면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에 우리 반은 정애원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이번이 정애원에 세 번째로 가는 것이라서 그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드디어 정애원이 위치한 산 아래 논길로 접어들었다. 늘 그랬듯이 논길이 너무 좁아서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버스가 논으로 빠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 앞 쪽의 길목에 차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논일을 하다 점심을 드시며 쉬고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셨다. 버스가 지나가기 위해선 점심상을 치우고 모두가 비켜서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할아버지 한 분께서 버스 쪽을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내셨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당황하시며 얼른 차에서 내리셨고, 할아버지께선 마치 담임선생님을 한 대 칠 기세로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담임선생님께서 진땀을 흘리며 할아버지께 연신 사과를 드리고 할머니께서도 할아버지를 말리셨지만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버스기사 아저씨께서도 차에서 내리셨다. 그렇게 한참동안 실랑이하다 결국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길을 비켜주셨다. 버스기사 아저씨 말씀이 근처 논 주인들은 논 근처에 정애원이 세워지고, 가뜩이나 좁은 길에 봉사다 뭐다 해서 차가 많이 다니는 것을 못마땅해 하신단다. 그래서 정애원 봉사 초반에 근처 논 주인들이 아예 고의적으로 길을 막기도 했을 정도로 말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정애원에 도착했다. 맑은 공기에 가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날씨도 쨍쨍하여 봉사하기에 기분 좋은 날씨였다. 우리는 건물 앞에 쭉 줄을 서서 정애원 봉사자 분께 인사를 드리고 각자 봉사구역을 배치 받았다. 나는 2층에 배치되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많은 할머니 분들께서 계셨다. 먼저 인사를 드리고 네 사람씩 방 하나를 맡았다. 우선 깨끗이 청소를 하기 위해 걸레를 빨고 방을 닦으려는데 매일 청소를 해서 그런지 먼지도 별로 없고 내 방보다 훨씬 깨끗했다. 그래도 일단은 꼼꼼히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고 있는데 할머니들께서 우리들을 보고 미안해하시며 그냥 대충해라고 말씀하셨다. 또 우리들에게 밥은 먹었냐며 힘들진 않느냐며 계속 걱정을 해주셨다. 가슴이 정말 따뜻해졌다. 봉사를 하러 온 것이지만 내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에 힘을 얻고 더욱더 열심히 봉사를 하기 위해 애썼다. 방바닥을 다 닦고 다시 걸레를 빨아 넌 후, 이번에는 이불을 털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온 방의 이불을 다 밖으로 가지고 나와 온 힘을 다해 이불을 털었다. 이불에서 날리는 먼지들이 햇빛에 비쳐보였다. 정말 안 털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먼지가 많았다. 빨랫줄이 있다면 햇볕에 뽀송뽀송하게 말리고도 싶었지만 그냥 잠시 동안이나마 햇볕을 쬐여주는 데에 만족해야만했다. 드디어 다 턴 이불을 들고 다시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어느 방에 어느 이불이 있었는지가 잘 생각이 안 났다. 들고 나갈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간 탓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정확히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자원 봉사자 선생님께 여쭤보아 겨우 이불을 원래 자리에 개어놓을 수 있었다. 봉사란 이런 사소한 일에도 섬세함과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고 내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할머니들께서는 식사를 하러 가시고 우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러 밖으로 나갔다. 시원해 보이는 정자에는 등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그 옆으로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있었다. 어젯밤 내린 비를 머금은 것 같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정말 예쁜 풍경이었다. 여름에 클럽활동 부서에서 정애원에 캠프를 온다고 하던데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2009-07-01

국립 영천호국원을 다녀와서

장재영 영일고 2오늘은 영천호국원을 다녀왔다. 호국원은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신명을 바친 국가유공자와 참전유공자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공적을 기리는 곳이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수천, 수만 개의 비석들이었다. 그 비석 모두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위패를 새긴 것이었다. 정말 장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광경에 잠시 말을 잊을 정도였다. 이런 곳이 몇 곳 더 있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분이 전쟁으로 돌아가셨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반은 먼저 관리인 아저씨를 따라 현충탑에서 참배를 했다. 높이 솟은 하얀 현충탑 앞에서 장엄하면서도 조용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리는 묵념을 하면서 국가를 위해 스러져간 분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일단 우리는 수만 개의 비석들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기로 했다. 물론 모두 청소한 것은 아니지만 잠드신 애국자 분들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쓰레기를 치웠다. 각각의 비석을 살펴보니 이름과 돌아가신 곳, 날짜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많은 비석을 일일이 새긴 정성은 매우 놀라웠다. 거의 6줄 정도를 끝내자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전쟁 당시 사용된 진짜(모형도 있지만) 전쟁무기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십 킬로미터를 날아가 적진을 부순다는 나이키 미사일이었다. 그러나 이 무기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 거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병기들을 관람한 우리 반은 거대한 영천대첩비를 지나 현충관으로 갔다. 이곳에서 2002년 월드컵 열기에 파묻혀 제대로 보도되지도 않은 제2차 연평대전을 짧은 영화로 보게 되었다. 서해바다를 지키는 참수리 호 해군들은 가족들과 많은 꿈을 가진 순수한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기습해 온 북한전함에게 포격당하여 전원이 사망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도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말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선제공격은 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NLL을 침범한 북한전함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신 분들은 딸의 100일 잔치가 얼마 지나지 않은 분, 즐거운 신혼을 보내던 분, 제대하고 나선 반드시 효도하겠다는 분등 정말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순수한 분들이었다. 참수리 호의 조타수 분은 마지막까지도 온몸으로 키를 붙잡아 조류가 심한 그 바다에서 우리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지켜내었다. 우리는 그 분들의 희생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영원히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호국원에 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매우 기대했었는데 기대만큼 즐거운 봉사가 되어서 정말 기뻤다. 또 평상시 잠잠하던 애국심이 솟는 것만 같아 은근히 기분도 좋았다. 이번 봉사활동은 우리의 애국심을 반성하면서 우리의 나라를 좀 더 소중히 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 활동이었다. 앞으로도 이 같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봉사활동을 해야겠다.

2009-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