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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감사 열풍

▲ 김살로메 소설가 4월23일은 책의 날이다. 유네스코가 세계인의 독서 증진을 위해 정한 이 날의 공식 명칭은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다. 스페인의 한 지방에서 책을 읽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던 축제를 기념하고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가 동시에 사망한 날을 기린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 날을 맞아 우리 지역에서도 2012 원북(One Book) 원포항 선포 및 독서릴레이 행사가 있었다. 포항시에서 마련한 책 잔치 덕에 실개천 상가 주변은 때 아닌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올해의 포항시 원북으로 선정된 `종이책 읽기를 권함`도서와 감사 기록장이 시민들에게 배포되었다. 행사의 꽃인 독서 릴레이란 책을 받은 사람이 일번 주자가 되어 책을 다 읽은 후 다음 독서자에게 그 책을 배턴 터치하는 것을 말한다.릴레이 책인 원북도 소중하지만 나는 함께 받은 감사 나눔 기록장에 눈길이 더 갔다. 파란색 바탕에 노란 스마일 마크가 새겨진 노트를 보는 순간 `행복 나눔 1·2·5`라는 감사 운동이 생각났다. 이 메모장은 올해 처음 원북 행사에 등장했다. 이는 포항시도 요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감사 나눔` 캠페인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이 운동을 처음 접한 것은 남편 회사 행사에서였다. `감사`란 주제 아래 `행복 나눔 1·2·5`라는 슬로건이 내걸렸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사에 임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간단명료한 메시지를 회사 및 가정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행복 나눔 1·2·5`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착한 일 하기(1주 1선), 한 달에 두 권 이상은 좋은 책 읽기(1월 2독), 하루 다섯 가지 이상 감사한 일을 찾아 적어 보기(1일 5감) 등을 의미한다.일주일에 착한 일 한 번쯤 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1주 1선이 그나마 가장 쉬운 실천 요강이다. 한 달에 두 권 책 읽는 것도 나로선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하루 다섯 가지 이상 감사한 일을 찾아 적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사할 일이야 하루 다섯 가지도 넘겠지만 그걸 매일 글로 남긴다는 건 여간 성실하지 않고서는 실천하기 힘들다. 회사에서 나누어준 행복 나눔 기록장을 매일매일 채운다는 건 나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한데 많은 분들이 선행을 하고 감사 기록장을 써내려갔다. 내겐 그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동료에게 감사 인사 카드 남기기, 가족에게 백 가지 감사 편지 쓰기, 감사 나눔 실천 동영상 제작 발표 등 여러 사례는 감사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큰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잘 모른다. 남보다 더 가지고 남보다 더 잘났기 때문에 느끼는 행복감은 긴 인생에서 잠깐일 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쟁취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행복이 도처에 깔려 있어도 그걸 발견하는 눈을 가지지 못하면 끝내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행복을 발견하는 눈이란 곧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남편 회사의 감사 운동을 계기로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다사로운 햇빛, 풀 죽지 않고 자라주는 화분, 잘 마른 빨래, 앉은뱅이 등받이 의자, 끼적일 수 있는 노트북, 건강한 가족 등 감사함의 대상들을 꼼꼼히 적어 내리다 보면 진실로 행복이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감사는 기본적으로 긍정의 물살을 타기 마련이다. 그 물결 따라 감사 운동은 이제 지역 여러 회사를 거쳐 포항시까지 접수하게 되었다. 원북 행사에서도 감사 운동이 병행될 만큼 그 의미가 확산되고 있다. 착하게 살기, 책 읽기, 고마움 표현하기 이 세 가지 연결 고리가 만드는 감사 열풍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2012-04-25

수몰지

▲ 김살로메 소설가 여념 집 마당엔 홍매화 피고 야산마다 노란 생강꽃 물들었다. 눈으로 보는 봄은 저만치 와 있는데 내 몸은 아직 봄 채비에서 한참 멀다. 워낙 추위 타는 체질이라 외출할 때면 여전히 내복을 챙겨 입는다. 그래도 손발은 차고 무릎과 등짝은 시려온다. 하지만 몸이 겨울이라고 마음마저 겨울로 머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럴수록 봄맞이를 적극적으로 해야지.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렵게 꽃구경을 가기로 약속을 해 놓고도 내 쪽에서 일정이 맞지 않아 미뤄야만 했다. 정녕 내게 봄은 멀기만 한가, 하고 있을 때 마침 지인이 미나리 파티에 초대했다. 막 시작한 봄인데 미나리 농사는 벌써 끝물이란다. 제대로 된 미나리 철은 이월 말에서 사월 초까지란다. 서둘러야 미나리의 그 오묘한 맛의 세계를 접할 수 있단다. 아니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다나.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어렵게 몇 사람이 모였다. 그리하여 올해의 내 봄맞이는 꽃구경이 아니라 미나리 맛 기행으로 시작하게 되었다.지하청정수로 재배한 봄 미나리는 생으로 먹을 때 그 독특한 향을 살릴 수 있지만 삼겹살과 곁들일 땐 익혀도 제 격이었다. 혀를 즐겁게 하는 것 이상으로 내 눈을 오래 머물게 한 건 비닐하우스 속 그 푸른 행렬이었다. 맺힌 데 없이 싱싱하게 푸르른 미나리를 보고 있자면 봄은 미나리꽝에서 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나리 재배지는 실은 수몰지라 했다. 만수위(滿水位)만 되지 않으면 드넓은 땅은 경작지로 손색이 없을 것이었다.임시방편이긴 하지만 노는 땅을 이용해 미나리를 재배하고, 그 이익금이 마을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고향이 수몰지역인 나로서는 이런 사실이 부러웠다. 고향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타지로 떠났기 때문이다. 다음날 내 맘을 알 리 없는 남편을 졸라 내 고향으로 향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무람없이 가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번 나들이는 아련한 수몰지에 대한 기억을 깨쳐준 저 미나리꽝 덕분이 틀림없다.호우기가 아니라 멱찬 물이 되지 않아서 드넓은 들은 그대로 제 몸을 드러냈다. 옛 집터 자리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십 년 전 어린 눈에 비치던 마을의 위용과 풍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버려진 그 땅엔 올 때마다 다른 식물군이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자연적인 것도 있었고 인위적인 것도 있었다. 경작하지 않고 노는 땅일 때에는 내 생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상야릇한 야생꽃들이 수몰지를 뒤덮었다. 어느 해 늦봄 그곳에서 그 꽃을 보았다. 나는 고향 떠난 누군가의 혼백이 뿌려 놓고 간 향수일 것이라고 믿었다.어느 해는 양배추 농원으로 개간되어 있었다. 어차피 노는 땅이니 어떤 객지의 농사꾼이 자신의 호기 팽배함만 믿고 씨를 뿌렸을 것이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양배추 밭을 보면서 그래도 누군가 그 땅을 활용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달 쯤 뒤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엔 만수위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버려진 땅을 활용한다는 건 무모함을 시험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때를 알 수 없이 강수량에 의존하는 게 수몰지의 운명이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저만치 집터 근처로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아직은 매서운 꽃샘바람이었다. 사람 잃은 무참함을 그저 견뎌야했던 땅덩이로서의 회한이 저 돌풍에 휘감기고 있었다. 그 아릿한 땅의 말씀을 놓치고 싶지 않아 애꿎은 셔터만 눌렀다. 원시의 건강함이나 의연한 땅심을 갖추지 못한 수몰지는 내게 가없는 안타까움이었다.너무 적요하고 고즈넉한 그 풍경 속을 앓다 보면 어느새 현실감을 놓쳐버린다. 애틋한 사향심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그곳을 쉬 지우지 못하는 건 여전한 의문이다. 이 봄, 미나리꽝으로도 남지 못하는 모든 마음의 폐허와 허무를 위로하고 위로 받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12-04-04

버섯 거울

▲ 김살로메 소설가 아침마다 돈나무 화분을 들여다본다. 나무 이름처럼 부자 되라고 지인들이 집들이 선물로 준 것인데 부자 되는 것보다 더 나은 눈요기가 생겼다. 하루 같이 내 눈을 그쪽으로 돌리게 하는 건 바로 버섯 때문이다. 어느 날 선잠을 깨 화분에 물을 주려는데 신기한 것이 눈에 띄었다. 흙더미를 뚫고 버섯 한 송이가 우뚝 솟아 있는 게 아닌가. 푸른 이끼를 뚫고 나온 앙증맞은 버섯은 제 집이라 텃세하는 돈나무의 위세에 전혀 기죽지 않고 고매하게 목울대를 치켜 올리고 있었다. 분명 간밤에는 뵈지 않던 것이었다. 아침엔 종 모양으로 스스로만 감싸던 녀석이 점심때가 되자 치마폭을 펼쳐 세상 근심을 다 품어 안을 호기를 부리는 것이었다.그 기개가 너무 놀랍고 의심스러워 독버섯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별을 위협하는 바오밥나무의 어린 순을 뽑아야 하는 어린왕자처럼 그 버섯을 퇴치해버릴까 하는 고민을 잠깐 했다. 하지만 `돈나무와 더불어 사는 독버섯` 콘셉트도 괜찮아보였다. 까짓것 둘 다 키워보지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나무로 대변되는 소박한 꿈과 독버섯으로 은유되는 지나친 욕심의 경계. 그 속에서 생활의 균형 감각을 얻어야지, 이런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한데, 볼일을 보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그 버섯은 사라져버렸다. 돈나무 화분 속을 한참이나 두리번거렸다. 잡초라고 생각하고 남편이 뽑아버렸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줄기가 말라비틀어진 녀석은 바람에 밀렸는지 구석에서 죽어있었다. 며칠을 두고 관찰한 끝에 그 버섯의 생애에 관해 알게 되었다.녀석의 비밀은 이러했다. 밤새 조금씩 피어나 아침에 팽팽하게 부풀어 한낮이면 활짝 피었다가 저녁이면 저 먼 우주로 고꾸라지는 하루살이 버섯이었다. 오늘 피어난 버섯이 죽고 나면 그 옆에 새로운 놈이 내일 돋아나는 식이었다. 내 맘대로 `하루살이 버섯`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런 버섯에 관한 정보가 있나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맙소사! 똑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 버섯의 한살이를 사진과 함께 올려놓았다. 버섯의 학명도 성질도 모르지만 그 버섯의 한살이를 신기해하는 것은 모두 같았다.돈나무에 기생하는 하루살이 버섯. 아무 의미 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버섯이든, 이로운 것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념들로 생활 속 균형을 잃을 때 스스로 돌아보라는 의미로 그 버섯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생기는 욕심, 때때로 얽히는 오해, 일생의 짐 같은 게으름을 들여다보는 거울로서 녀석은 내게 온 게 틀림없다.강조하지 않아도 우리 삶의 기본 가치는 누구나 잘 안다. 성실할 것, 최선을 다할 것, 배려할 것, 입 조심할 것, 감사할 것 등등. 따지고 보면 일상이 근심으로 얼룩지는 건 이런 선(善)의 기준에서 자신을 놓아버렸을 때이다.오늘 하루도 나는 너무 많은 잠으로 시간을 낭비했고, 저녁 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을 무너뜨렸으며, 가벼운 입방정으로 스스로에게 실망을 안겼고, 지인들의 도움에 제대로 된 감사함을 표현하지 못했다. 이런 후회와 번민은 큰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사소한 데서 생긴다. 불쑥불쑥 솟는 이러한 근심을 하루에 한 개씩 내려놓기. 그리하여 하루살이 버섯처럼 날마다 죽어서 거듭나기.매일 아침 버섯 거울을 내 맘 속에 세 들인다. 욕심 하나 비운 자리에 다른 근심거리가 대체되더라도 새로워지고 거듭나기 위해 버섯 거울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볼 일이다.내일이면 죽은 자리에 새로운 희망의 버섯이 돋아날 것을 믿으며.

2012-03-21

책 사랑은 어려워

▲ 김살로메 소설가모 기관 직원들을 상대로 독서토론을 한다. 시간 내기가 여의치 않은 직장인들이라 대부분 마음만 앞선다고 했다. 해서 주당 한 권은 무리이고 두 주에 걸쳐 한 권씩 토론하기로 했다. 그들 부담도 덜어주고 책을 사랑하는 게 우선이다 싶어 선 토론 후 독서가 되어도 좋겠다고 말했다. 말인즉, 내가 책 다이제스트와 토론 주제를 짚어 주면, 그들이 다음 시간까지 읽어와 토론하는 방식이다.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열망이 강했으므로 나는 최대한 그들의 조력자가 되어 보기로 한다. 부디 그들이 업무에 시달리지 않고 책 읽기 도전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랄 뿐. 도서 구입 담당 직원히 족히 몇 백 권은 되어 보이는 도서목록을 작성해왔다. 토론 도서 선정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고 정성스레 준비해온 리스트였다. 인문 · 역사 · 문학 쪽보다 자기개발 · 건강 · 에세이 분야가 더 많아 보인다.자기 개발서는 개인적으로 그리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인문, 역사 쪽을 읽다 보면 그 분야는 절로 따라오는 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고, 그쪽 분야는 독서의 다양한 기능 가운데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한 방편만 강조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인다. 유독 직장인들에게 강요되는 자기 개발서는 경쟁만을 부추기는 것 같아 불편하다. 변변한 직장을 다녀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쪽이 절실하지 않으니 별 흥미가 없다.어쨌거나 그 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 그 중에서 독서 토론 방향에도 맞고 내 취향과도 멀지 않은 책을 선정했다. 가장 먼저 손이 간 것이`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이다. 장정일 작가가 쓴 독서일기였다. 독서광인 그가 쓴 독서 리뷰라면 충분히 사서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계획표를 짜면서 느긋하니 4월 말에 이 책을 넣었다. 작가가 권하는 책 중 소위 필이 꽂히는 게 있으면 내가 먼저 읽고 회원들께 그 책도 소개할 요량으로.독서광답게 작가는 소설가일 때보다 서평가일 때 더 신뢰가 간다. 읽지 않고 책을 평하는 사람 이야기가 이 책에도 나오는데, 나도 그의 소설에 대해선 읽지 않으면서도 한 마디 한 격이 되어 버렸다. 왠지 그의 작품은 소설보다는 초기 시와 꾸준히 발표하는 독서 일기에 손이 가는 편이다. (미안도 하여라. 하지만 작가로서 신뢰하고 있으니 서운해 하지 마시길, 작가여.)이번 독서일기도 흥미진진하다. 여담이긴 하지만, 방금 읽으면서 안 사실인데 난 그가 애독가이긴 하되 책 수집가는 아닌 줄 알았다. 왜냐면 나는 결코 책 수집가는 될 수 없고(될 마음도 없고) 애독가이기를 바라는데, 장정일 작가도 그런 줄 알았다. 한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책 수집가이기도 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단 그는 확실히 애서광이다. 그럼 애서광이면 수집가이기도 한 것일까? 작가가 대답하진 않았지만 수집가는 아닐 것이라 확신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수집가가 책을 읽게 되면 모으는 열정이 반감되고 말테니까.책 수집가는 독서의 기능인 읽기로서 모으는 게 아니라 운명의 무대를 만난 것처럼 책 자체에 의미 부여를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것의 실용성에는 관심이 덜하다. 이를 테면 비싼 도자기에 밥 퍼먹고, 술 따라 마시려고 도자기 수집가들이 그것들을 소유하려는 게 아닌 것처럼 책수집가들 역시 밑줄 긋고, 접어 가며 제 머리 속에 지혜를 담으려 책을 수집하지는 않는다. 수집 자체가 고도의 예술적 허영 쯤으로 허용된다면 말이 될까?책수집가 되기는 어렵다. 경제력, 심미안, 예술적 허영 등이 갖춰져야지만 가능하다. 그에 비해 애서가는 책을 읽고자 하는 열망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허락해야 하니 쉽지 않다. 어려운 책사랑의 길에 동참한 회원들이 책 맛을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 본다.각설하고 당신이 얼마나 책을 사랑하는지 그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다면 장정일 작가의`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사보라.

2012-02-15

타자기를 추억함

▲ 김살로메 소설가내 노트북 자판은 상처투성이다. 자주 눌린 글쇠판은 보호막이 사라져 뜯겨나간 벽지처럼 속살이 훤하다. 벗겨진 정도에 따라 어떤 글자판이 혹사를 당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각각 왼손 검지와 중지가 주재하는 `ㄹ`과 `ㅇ`의 위쪽 모서리는 허옇게 까졌고, 오른손 중지가 관장하는 `ㅏ` 글쇠는 영어 자판 `K` 안내 표식이 사라지고 없을 지경이다. 모음이 몰려 있는 오른쪽 자판 보다는 자음으로 이뤄진 왼쪽 자판에 흠집이 더 많은데, 특별히 자판을 칠 때 왼쪽 손가락에 힘을 더 실어서가 아니다. 한글 자음이 초성과 종성에 다 쓰이니 왼쪽에 몰려 있는 자음 글자판이 더 빨리 닳아서 그렇다. 각설하고, 사용한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노트북 글자판이 이렇게 흠집 난 것은 오래된 습관 때문이다. 나는 자판을 누를 때 손바닥을 노트북 바닥에 대지 않은 채 손가락을 곧추 세워 내리 찍는 편이다. 가파른 손가락 각도 때문에 타이핑하는 소리도 시끄럽고 손톱에 힘이 실려 글쇠판이 쉽게 긁힌다. 이런 방식은 수동식 두벌 타자기를 칠 때 유용하다. 내 이십대는 수동식 타자기의 나날이었고, 노트북에 생긴 상처는 그 시절이 남긴 유물 같은 것이다.대학시절 나는 한글 운동 모임 활동을 했다. 순우리말을 아끼고 퍼뜨리는 일이 주된 목적이었다. 한자어가 70퍼센트 이상 차지하는 게 우리 실정인데 순우리말을 사용한다는 건 거의 코미디에 가까웠다. 그래도 이십대의 열정과 우정으로 그것을 즐겼다. 한글 운동의 행동 강령 중 하나에 `글자 생활을 기계화하자`라는 것이 있었다.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문자인가를 기계화로 실천해 널리 알리자는 취지였다.개인용 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전인 80년대 초중반이었으므로 그때의 기계화란 타자기를 활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창하고도 멋진 슬로건이었지만 주변에 글자 생활을 기계화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당시 학생들 주머니 사정이 타자기를 구입할 만큼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토가 내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타자기로 글을 쓰고 싶었다. 탁탁, 경쾌한 리듬이 안내하는 대로 손가락을 맡기면 글 너울이 몸 안으로 퍼져, 저 발끝부터 쓸 거리가 되어 되번져 나올 것만 같았다.타자기 마련은 멀기만 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학교 정보센터의 타자 교실에 등록을 했다. 강의가 없는 빈 시간마다 들러 자판을 익혔다. 개별자였던 자모음이 손가락 끝에서 유의미한 문장이 되어 꼬리를 잇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타자기를 갖고 싶은 소망은 큰오빠가 들어주었다. `열심히 써봐라.` 크로바 두벌식 중고 타자기를 구해주면서 큰오빠가 한 말이었다. 그렇게 타자기는 내 보물 1호가 됐다. 종이를 롤러에 끼우고 자판을 두드리면 글자 쇠막대가 잉크 묻은 리본 위를 덮쳤다. 새겨진 글자는 써야하는 자의 운명을 예고하는 낙인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그 크로바 타자기로 나는 리포트를 작성하고, 단상을 끼적이고, 시를 갈무리하고, 소설을 썼다. 타자기 덕분인지 졸업할 때까지 크고 작은 문학상을 손에 쥘 수 있었다.타자를 치려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손가락 각도를 가파르게 하고 손끝에다 힘을 주어야 한다. 계단식 글쇠판이라 글자를 누르는 동안 손바닥은 항시 허공에 떠있어야 했다. 이런 오래된 습관이 타자기 시대를 접은 지금도 남아 있어 생채기를 내는 것이다.버리기 좋아하는 나는 이사를 핑계로 많은 물건들을 버렸다. 크로바 타자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버린 것에 대해 좀처럼 후회하지 않는 편이지만 부쩍 그 타자기가 그리운 나날이다.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타자기는 버렸지만 그 자리엔 고귀한 유물처럼 자판을 내리친 흔적이 남아 있다.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 그 시절을 불러 모아 나는 지금도 탁탁탁, 상처투성이를 내리찍는 중이다.

2012-02-08

눈동자

김살로메 소설가오늘은 아침부터 그 주제와 맞닥뜨렸다. 평소대로 나갈 준비를 했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내 오전 스케줄은 주로 열시에 시작한다. 일이든 취미든 대개 그래왔는데 주부들이 짬을 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오전 시간이 그 때일 것이다. 한데 오늘은 열시 반에 약속이 잡힌 날이다. 시간을 쪼개가며 바지런 떠는 형과는 거리가 한참 멀지만, 준비된 상태의 비는 시간이 아까웠다. 마침 화장실에 남편이 보던 책이 있길래 집어들었다. 지겨운 자기 개발서라니! 하면서 아무 데나 펼쳤다. 맘에 쏙 드는 구절이 나온다. 메라비언의 법칙이란다. `메라비언은 한 사람이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미지는 시각이 55%, 청각이 38%, 언어가 7%라는 사실을 발견한 심리학자다.(중략) `마음으로 리드하라 “- 류지성, 삼성경제연구소(127쪽)모임 장소에 도착해서 열심히 수다를 떤다. 이름하여 건전한 책 수다. 눈빛이 형형한 한 멤버 차례가 되었다. 그미는 눈동자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단다. (그 때 우리는 이태석 신부님의`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토론하고 있었다.) 그미는 사람을 볼 때 눈동자를 눈여겨본다고 했다. 자신이 밑줄 그어 온 부분을 성심껏 읽어 주었다. 가난과 전쟁 때문에 신뢰를 잃은 아이의 탁해진 눈빛을 묘사한 장면이었다. 환경에 따라 순한 사람의 눈망울이 얼마든지 살기 서린 눈빛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안타까운 장면이 계기가 되어 그미는 사람의 눈동자에 대해 떠올린 모양이었다. 상대의 눈동자를 보면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단다. 백퍼센트 확신할 순 없지만 통밥(?)으로 알 수 있다나. 맞는 말이다. 아침에 읽은 메라비언의 법칙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심리학자들은 메라비언과 같은 결론을 숱하게 내렸다. 사람은 혀가 아니라 몸으로 말한다고.내가 좋아하는 모 작가는 눈빛이 참 불편하다. 직접 뵌 적은 한 번도 없는데 화면 속에 비치는 그의 눈빛을 볼 때 안타깝기만 하다. 카메라와 인터뷰이가 불편한 작가는 눈길을 어디다 둬야 될지 몰라 시종 눈치를 보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작가의 그런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작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집중하기가 힘들다. 자고로 사람은 몸으로 말하고, 그 중 눈빛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을텐데 삐딱한 시선으로 훔쳐보는 듯한 모양새는 신뢰감을 떨어뜨린다. 아무리 좋게 봐줘서 카메라 앞의 쑥스러움 때문이라 하더라도.상대와 자연스레 눈길을 맞추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어렸을 때 숫기 없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가정 방문 오신 선생님을, 놀러 온 오빠 친구를 당당하게 쳐다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사람을 키우는지 지금은 그런 울렁증이 많이 없어졌다. 몸 언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혀 언어 매너가 좋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배울 게 많다. 동의를 구하는 상대에게 리액션으로 장단 맞춰주기, 아이디어나 조언 요청에 적절한 필터링해주기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람은 상대적이라 몸 언어를 항상 좋은 쪽으로 발동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어쨌거나 말보다 몸이 더 많은 말을 한다니 말 조심 뿐 아니라 몸 조심도 해야겠다. 좋은 언어 습관도 연습이 필요하듯 몸으로 하는 말도 갈고 닦아야 한다. 우선 부정의 몸 언어부터 버릴 일이다. 혀에 든 욕보다 눈에 든 욕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리액션 없는 무표정, 타인의 약점을 못견뎌하는 냉소의 눈빛부터 덜어낼 일이다. 오늘도 나는 내 탁한 눈빛과 이지러진 표정을 맑고 밝게 해줄 멘토를 찾아 길을 나선다. 그것이 책이든, 사람이든 도처에 있을 것을 기약하면서.

2012-01-25

너무 길다

따뜻한 물 한 잔으로 기침을 누그러뜨리며 독서모임 아이들을 기다린다. 책 좋아하던 실학자 이덕무는 `기침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버린다`고 했는데 소리 내어 읽지 못할 정도로 목이 뻑뻑하니 그 말도 위로가 되지는 못한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기침은 내 아버기가 그랬던 것처럼 평생 따라다닐 성가신 친구가 되어 버렸다. 며칠 새 컨디션은 더 나빠져 입술마저 부르텄다. 그래도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를 읽기로 했으니 기운을 내야지. 머리며 어깨에 내려앉은 겨울비를 털어내며 아이들이 자리에 앉는다. 시에 대한 책 토론답게 워밍업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나 책에 대해서 먼저 물어보기로 한다. 맏언니 같은 세온이는 론다 번의 시크릿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단다. `좋은 생각은 모두 강력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약하다고 우주에 선언하라`는 말이 맘에 들어 메모장에 옮겨 놓았다나. 시작부터 오늘 토론의 중심부에 가 닿은 느낌이니 조짐이 좋다. 정민 선생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패랭이꽃`을 지은 정습명과 `시골집의 눈 오는 밤`을 노래한 최해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단다. 패랭이처럼 작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리라는 긍정의 삶을 노래한 정습명은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평탄한 삶을,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의 우울한 자화상을 읊은 최해는 불우한 생을 살았다나. 긍정은 명랑을 낳고, 부정은 비애를 낳느니라. 작가의 의도대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적절한 선현의 예가 되려나?귀여운 상연이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을 들먹인다. 두꺼운 책이지만 맘 내키는 대로 아무 쪽이나 펼쳐도 건질만한 게 나온다나. 중학생의 감수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나는 그런가 하고 일단 고개를 끄덕여준다. 나로서는 작가의 기발함, 창의력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으므로 실망도 큰 책 중에 하나였다.식성도 까다롭고 말이 없는 기훈이는 의외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시도했단다.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말해주지 않는 그 철학 입문서를 중학생이 읽기엔 조금 벅차지 않을까 싶어 되물었더니 그래서 일단 유보라나. 중도 포기가 아니라 다행이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산 것 만큼 독자들이 많이 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일단 제목처럼 명쾌한 답이 나오는 책은 아니므로.마지막으로 수현이의 얘기가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긴 책을 이야기할 때 수현이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저는 초등학교 이학년 때 선생님께 들은 시 한 편이 너무 강렬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감명 깊은 시길래? 모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데 대답이 걸작이다. 프랑스 작가라고 들었는데 제목은 뱀이고 내용은 `뱀은 길다`라는 아주 짧은 시라나? 순간 나는 당황했다. 오늘 소주제 중에 정민 선생이 말한 “시는 직접 말하지 않고 돌려서 말해야 하고, 다 말하면 안 되고 숨겨야 하며, 설명하는 대신 깨닫게 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수현이가 말한 `뱀은 길다` 라는 시구는 너무 직접적이지 않은가? 시를 아는 문인이라면 저렇게 직접적인 문장으로 한 줄 시를 썼을 리가 없지. 의문을 가진 채 검색을 해본다.내 예상이 맞다. `홍당무`의 작가 쥘 르나르가 쓴`뱀`이란 시인데, 정확은 시문은`뱀은 길다`가 아니라 `너무 길다`였다. 그럼 그렇지. `뱀은 길다` 와 `너무 길다`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정민 선생 식이라면 `뱀은 길다`는 시가 안 되지만 `너무 길다`는 차고도 넘치는 시적 은유가 아니던가. 돌려서 말하고, 숨겨야 하며, 깨닫게 해야 하는 시인에게 `너무 길다`란 이 한 마디야말로 촌철살인의 시어가 아니겠는가?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2012-01-18

가장 먼 길

참 오랜 만이다. 오롯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내 경우 `혼자만의 시간`이란 모니터 앞에서 `쓴다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단 한 줄의 글이라도 건지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독자와의 약속이라니 무조건 시작해야 한다. 한데 자발적 욕구가 아니라 밀린 숙제를 하는 심정이니 맘이 편치 않다. 담당 기자의 청탁 전화에 시달리는 것도 귀찮고, 저러는 심정도 오죽할까 싶어 새해부터 시간 나면 한 꼭지씩 써주겠다고 선심 쓰는 척한 게 화근이었다. 이리저리 통화를 미루는 사이, 벌써 새 집필진 관련 사고(社告)는 나갔단다. 발을 뺄 수 없게 만들었으니 담당 기자가 고단수임에 틀림없다. 코너 제목, 글 쓰는 방향, 소재거리 등 모든 걸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당장 시작이라니!게으름을 물리치고 발딱 일어나긴 했다. 하지만 책상 앞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기만 하다. 그간 글 좀 쓰고 싶다는 욕구는 빈둥거리는 내 안의 악마 앞에서 거의 백전백패였다. 쓰고 싶다는 열망과 쓰는 행위의 간극은 히말라야 설원의 크레바스처럼 깊고 아득하기만 하다. 어느 작가가 말했단다. 침대에서 일어나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으로 가는 길이 가장 먼 길이라고.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쓴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힘겨운지를 잘 말해주고 있어 절로 공감한다.평생의 과업처럼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치면서도 정작 진득하니 엉덩이 붙이고 쓰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게으름 탓이다. 그 어떤 면죄부도 바랄 수 없는 명백한 자기 발전의 적 게으름. 그걸 잘 알면서도 쉽게 넘어서지 못하고 핑계거리만 찾았다. 생활인으로서 품위유지비도 벌어야 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주어진 책임감도 완수해야 하고, 주부로서 집안일도 건사해야 하고. 나열할 가치조차 없는 이런 핑계들은 내 박약한 의지의 이음동의어에 지나지 않는다. `백수 과로사한다`는 시쳇말처럼 실속 없이 바쁜 척해가며 자기 위안을 삼았지만, 그건 글 못 쓴 것에 대한 변명은 결코 될 수 없다.어떤 일이든 습관이 성패의 반을 좌우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 쓰는 습관에 제대로 길들여지지 않았다. 삶이 구차하고 굴욕적이고 쓰라렸던 한 때, 단 하루도 쓰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 시절도 있었다. 내면의 절실한 요청에서 쓴 글은 그대로 위안이 되고 카타르시스가 되고 삶 그 자체가 되었다. 일상이 힘겨웠지만 쓸 수 있다는 희망 덕분에 견딜만할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쓰지 않고도 평온이 보장되는 타협 이후에는 쓰는 것 자체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써야 하는 절박함의 자리를 꿰찬 애매한 평화의 시간들은 겉으로는 안온해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늘어나는 엉덩이 비곗살과 미련해진 감각 뿐.스스로를 향한 채찍처럼 시작한 글쓰기가 내 안에선 숨은 별, 나가서는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연재를 시작한다. 절절한 욕구는 순정한 목표를 낳고, 그 목표는 좋은 습관을 낳고, 그 습관은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억지 위안을 삼으면서. 크게 쓰거나 많은 걸 보여주려는 욕심은 애초에 없다. 다만 생활 속에서 길어 올리는 짧은 생각 한 두레박으로도 만족할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코너는 요즘 유행하는 관용구인 `생활의 발견`이란 이름을 빌려와도 좋겠다.새해, 새 결심처럼 내 안의 허영덩어리 하나 해처럼 솟구친다. 실은 새로울 것도 없는 그 덩어리가 내 몸이, 내 맘이 원하는 절절한 쓰기의 실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침대에서 글 쓰러 가는 책상까지의 거리가 아주 먼 길이 아니라 조금은 가까운 길이 되기를 바란다.

201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