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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장량·두호동 일대 10만 인구 후광 업고 한 때 전성기 누렸죠”

‘축복받은 시장’, ‘혜택 받은 상권’. 포항시 북구 장량동 장량성도시장 주변을 답사하며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이었다. 아파트에 ‘포위’된 상권, 10만 이상 유동 인구, 독점 상권에 영일대해수욕장까지 끼고 있는 곳. 외관상 장량성도시장은 천혜의 상권과 최적 상업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한 때는 공실률 제로에 점포마다 몇천만원 씩 프리미엄이 붙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뛰어난 상권에 비해 현실에서 영업 실적은 저조해 점포들의 수익성이 높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코로나 사태의 ‘그늘’ 탓 이었다. 팬데믹 이후 인터넷, 온라인 마케팅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오프라인 시장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이곳 뿐만은 아니고 대부분 전통시장에서 함께 느끼고 공유하는 고민들이다. 도심 아파트촌의 한복판에서 침체한 재래시장 상권을 회복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장량성도시장을 돌아보았다.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상업, 해운도시 기능 우선 시장의 배경이 되는 두호동, 장량동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두호동 일대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동해안의 왜군 방어 진지로 기능했다. 각종 사료에 1386년 고려 우왕 때부터 동해안 왜구 방어의 최전방 기지로 기능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두호동의 중심이 되는 창포리는 1731년 영조 때 포항창(浦項倉)을 설치했던 곳이다. 두호동은 전통시대 ‘두무치마을’로 불렸다. 마을 중심엔 마을의 제당인 천황당이 있었는데 1980년대 물의공원 고갯길 우측에 있던 선황당(仙皇堂)과 합사해, 매년 같은 날 제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두호동 북쪽 이진리(利津里)에는 ‘이진당’(利津堂)이라는 전당(殿堂)이 있는데, 조선시대 외국 상인들이 귀국길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가야만 뱃길이 편안하고 무사하다 하여 배를 정박시켜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장량성도시장 상권의 가장 큰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장량동은 원래 장성동과 양덕동이 합쳐진 곳이다. 이 일대는 본래 산간지역으로 사량골, 불미골, 기낭골, 북시골, 무당골 등 자연 부락으로 이뤄져 있었다. 개발 붐이 일던 1990년 지역 주민들이 지역 주택 조합을 결정해 기남골, 갈밭리 일대 34만 평 규모에 아파트, 택지, 상가 단지를 조성했다. 장량동 현재 인구는 7만2000명으로 웬만한 기초자치단체 보다 규모가 크다. ◆두 곳 복합상가 건물 통합해 전통시장으로 장량성도시장은 시장 탄생 배경에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다. 1990년대 장량동, 두호동 일대에 대단지 아파트촌이 건립되면서 두개 동(洞) 경계에 복합 상가들이 들어섰다. 이 중 하나가 ‘장량종합상가’이고 또 하나는 ‘성도종합상가’였다. 대로변에 나란히 들어섰던 두 상가는 상가 형태로는 영업에 한계를 느끼고 ‘전통시장’으로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두 상가의 점포주와 상인들은 개축, 설계, 리모델링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고 그 결과로 오늘의 장량성도시장이 탄생했다. 남북으로 나란히 들어섰던 두 상가는 상인들의 협의를 거쳐 끝 쪽벽을 서로 허물고 사방으로 통로를 만드는 대공사를 벌이게 된다. 건물주들이 대폭 양보를 했고, 경북도와 포항시가 설계비와 공사비를 지원했다. 상가건물이 전통시장으로 개축되는 과정은 여러 건축주 이해, 행정절차, 상권, 권리관계 등 이익들이 복잡하게 얽힌 일이었지만 여러 관계인들과 자체단체들이 나서 잘 마무리 지으면서 대변신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두 상가 벽이 뚫리면서 유동인구 급증 25년 동안 막혀 있던 두 상가의 벽이 뚫리면서 시장에는 활기가 돌았다. 당시 공사는 상가의 벽만 뚫은 게 아니고 막혀 있던 상권과 물자의 이동도 뚫었던 것이다. 복합상가 시절 주민들은 막히고, 단절되고, 구획된 상가에서 불편하게 제한적으로 쇼핑을 해왔지만, 두 상가가 한 통로로 연결되면서 주민들은 하나의 동선(動線)에서 논스톱으로 쇼핑을 할 수 있게 됐다. 점포 아이템이 중복되거나 또는 일관성이 없이 얽혀 있어서 두 건물을 드나들며 번거롭게 장을 봐야 했던 시민들의 불편이 해결된 것이다. 쇼핑공간이 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시장의 사방에 진입로가 뚫리면서 시장의 유동인구가 급증했다. 이원식 상인회장은 “상가 두 곳이 합쳐지면 계산 상으로는 ‘1+1’이 됐지만, 그 시너지 효과는 매우 컸다”며 “시장 전체에 활기가 들면서 매출이 최소 30~40%에서 목이 좋은 곳은 두 배씩 뛰었다”고 말했다. 시장 전체 영업이 활성화 되고 점포 가치가 올라가면서 가게 프리미엄이 붙기 시작했다. 더불어 도로변에 노점도 활기를 띠었다. 건너편 아파트 입구부터 시장 내리막길 100m 구간엔 노점 10여 곳이 진을 쳐 보행을 방해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코로나 사태 이후 전통시장 상권 급속히 위축 시장엔 손님들이 줄을 서고, 노점이 도로변에 진을 치고 점포에 웃돈이 붙어 거래되던 반짝 경기는 2~3년 ‘특수’로 그치고 말았다. 바로 코로나19 사태가 찾아온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 문명사에 미친 영향은 ‘세기적 사건’으로 분류되지만, 이곳 장량성도시장에서도 그 충격은 큰 파장으로 다가왔다. 모든 점포의 매출이 반토막 아니 그 이상으로 급감했다. 어제까지 줄이 섰던 점포에 발길이 멈추었고, 시장 통로에도 인적이 끊겼다. 두 상가 통합-전통시장 변신 이후 번창을 누리던 중이어서 상인들의 박탈감은 더 컸다. 상인들은 우울감 속에서 이 ‘대역병’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드디어 기다리던 팬데믹의 종료가 공식화되면서 상인들은 다시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잠시 시장을 떠났던 시민들의 발걸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비대면, 마케팅, 온라인, 홈쇼핑에 길들여진 주민들이 그 소비 패턴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도의 편리성이 강조된 새로운 쇼핑, 구매 방식에 적응된 소비자들에게 시장은 불편한 공간이었을 뿐이었다. 이원식 상인회장은 시장 상권의 부활을 위한 선결과제로 공영주차장 확보를 꼽았다. 쇼핑 편의성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의 성향 충족을 위해서는 주차장 건설이 시급하다는 것. 문제는 주변에 마땅한 유휴 공간이 없다는 점. 이 회장은 경북도나 포항시 등 관계기관의 정책적 접근을 통한 실효적 해결을 기대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 문화의 확산과 전통시장 위기 앞서 언급한 대로 장량동, 두호동 일대는 고려 말 군사기지, 조선시대 조창(漕倉), 일제강점기 소 수출기지까지 각종 관청이 들어서며 상업, 해운 등 산업이 활발하게 펼쳐지던 공간이었다. 이 상업적 전통을 이어받은 장량동, 두호동 일대는 아파트 단지 20여 곳 학교 11곳, 공공 기관 11곳을 거느리며 포항시 북구의 상업, 행정, 도시로 성장해왔다. 이런 전통과 한때 번영이 있었기에 현재 장량성도시장의 급속한 위축은 안타깝기만 하다. 온라인 시장에 길들여진 시민들을 어떻게 재래시장으로 불러낼 것인가, 대형마트 편리성에 익숙해진 주민들 어떻게 전통시장으로 향하게 할 것인가. 전통시장 상인들과 오프라인 소상공인들이 풀어야 할 시대적 화두가 아닌가 한다. /글·사진 =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5-01-16

50여 점포에 반찬가게·분식점이 절반 ‘상도동의 부엌’ 별칭

보통 전통시장의 상권 형성과 특징은 주변 환경, 입지적 특성에 따라 결정된다. 도축장 주변 시장에 돼지국밥집이 성행하고, 큰 공장이 있는 곳에 식당, 주점이 번창하는 원리다. 보통 도심에 시장이 들어섰다면 대부분 주변 주택가 주민들의 외식 장소나 생필품 공급처로 기능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통념에서 크게 벗어난 곳이 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할 남부종합시장이다. 상도동 일대에 들어선 남부시장은 점포 50여 곳의 도심 미니시장이다. 당연히 인근 주민들의 수요를 반영한 식료, 생활용품, 식당, 잡화점이 주류를 이룰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전체 상가의 절반 정도가 반찬가게, 분식점이었고 나머지도 식재료 관련 숍이 대부분이었다. 진열대마다 가득 쌓여 있는 반찬들이 시장의 정체성을 잘 설명하고 있었다. 단일 업종이 시장 점포의 절반을 넘는 경우는 전국적으로도 사례가 드물다고 한다. ‘상도동의 부엌’‘대도동의 주방’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남부시장을 돌아봤다. ◆1970∼80년대 상도동 일대는 갈대밭 무성 포항 도심에 전통시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갑작스런 인구의 증가와 국민 소득이 늘어나면서 시장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남부시장의 설립연도는 1989년으로 대체로 이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이런 ‘일반 등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1980년대 상도동은 미개발 지역으로 인구 밀집 지역이 아니었다. 1970~80년대 이 일대는 형산강변의 늪지, 억새 숲이 무성하던 뻘밭이었다고 한다. 황무지처럼 방치되던 이 일대에 시외버스터미널, 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며 차츰 교통의 거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989년 근처에 대왕예식장(지금은 없어짐)이 들어서며 상도동 일대는 포항 남부의 교통, 상업지역으로 변신을 거듭해 갔다. 그러니까 남부시장은 1980년대 주민들 필요에 의해 들어선 행정시장, 관(官)주도 시장이 아니라 상인들 스스로 골목상권을 일으켜 도시와 함께 성장한 자립형 시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때마침 주변에 ‘쌍사’(쌍용사거리) ‘빠사’(빠리바게트 사거리) 같은 번화가들이 들어서며 시장 주변은 주점·음식점, 유흥거리, 젊음의 거리로 변모해 갔다. 상인회 임종진 회장은 “1980년대 도심 주변의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에 이렇게 번화한 상가가 들어섰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며 “시장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들이 없음에도 일찍부터 상업의 요지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이 지역이 포항의 남북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교통의 요지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989년 상도동 생필품 공급시장으로 출발 남구 상공로 220에 포항상공회의소가 들어선 것은 1984년. 당시 포항시는 건물 앞을 지나가는 도로에 특별히 ‘상공로’라는 이름을 따로 붙여 지역 상공업의 발전을 염원했다. 그 기원에 부응해서인지 상공회의소 일대는 상업지대로 크게 번창했고, 그 위세를 업고 남부시장이 들어서게 됐다. 초창기 시장에는 채소, 생선, 정육점, 옷·신발가게, 분식집, 잡화점 등 생활용품 위주로 점포가 구성됐다. 시장 주변에 터미널, 예식장, 시장이 들어서면서 상도동 일대에 아파트 단지와 학교, 관공서, 금융기관들이 들어서며 상권도 확장됐다. 먼저 상대동행정복지센터, 대한노인회포항시지회, KBS포항방송국, 포항시대도관, 시립영암도서관 포항실버카페, 포항종합사회복지관, 농협, 신흥초등학교, 상도중학교, 대도중학교 등 각급 학교, 관공서들이 들어섰다. 각종 관청의 입지로 거주, 생활 여건이 좋아지면서 아파트들도 줄지어 입주를 시작했다. 현림VIP맨션, 상도신성펠리스, 명성대도타운, 동해삼미아파트, 홍안빌라, 청운아파트, 대흥빌라, 아이팰리스 1·2차, 민들레아파트, 상도 2차 세미아트리움 등이 시차를 달리하며 둥지를 틀었다. 남부시장 상가는 50여 곳에 불과하지만 시장 주변의 가로(街路) 상권도 상당히 활성화돼 있는 편이다. 시장 주변 200여 점포들은 시장과 상권을 공유하며 활발하게 상업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남쪽으로 600여m 거리엔 남구청, 포항종합운동장, 차량등록사업소, 포항문화예술회관, 뱃머리마을문화숲 등 남구청 행정관서들이 두텁게 포진해 있어 시장의 주요 고객 및 단골층을 형성하고 있다. ◆핵가족, 1인가족 시대 맞는 반찬세트 개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십여 년 전 서너집이 반찬 가게를 시작했는데 장사가 잘 되니까 주변 여러 점포들이 따라 하면서 골목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임 회장은 반찬거리 형성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시장을 다녀간 블로거, 시민들은 다양한 후기를 남겨 놓았는데, 이런 기록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찬 가게들의 성공 이유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블로거들이 주목한 건 소량 다품종 세트의 개발과 저렴한 가격. 1인 가구 증가 시대를 맞아 시장 수요에 대응하는 적절한 전략으로 풀이 된다. 시장에서 만난 한 주부는 ‘5분 상차림’ ‘반찬 8종’ ‘국·반찬 세트’ 같은 가족 맞춤형 상품들이 다양하게 준비된 점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도심 속 생활 밀착형 시장을 콘셉트로 한 핵가족 시대를 공략한 것이다. 저렴한 비용 역시 주부들이 시장을 자주 찾는 이유다. 주말 부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직장인 여성은 “식재료를 다 사서 반찬을 하는 것이 오히려 비용이 더 든다”며 “반찬가게를 찾는 것이 시간도 아끼고 입맛에 맞는 반찬을 직접 선택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자취를 한다는 한 남성은 “3~4일치 반찬을 위해 시장에 나왔는데 연근조림, 미역줄기볶음, 육전, 육개장을 다 합쳐도 2만 원 안쪽에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양한 메뉴 조리법의 연구와 밀키트 개발 등 다양한 전략도 손님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다. 현재 몇몇 점포에서는 닭발·닭갈비, 제육볶음, 오징어볶음 같은 반(半) 조리식품을 개발해서 팔고 있다. 편의점, 온라인에서 파는 밀키트 제품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한 반찬가게 주인은 “반조리 식품팩은 단돈 1만원으로 소비자들이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을 가격”이라며 “메뉴도 한·중·일식을 모두 갖춰 다양한 입맛에 맞추었다”고 설명했다. 몇몇 점포는 이런 인기를 배경으로 포항시 전역은 물론 전국에 택배서비스도 해주고 있다. 택배로 30~40% 매출을 올린다는 한 주인은 “10년 넘게 가게를 하다 보니 단골들이 생겨 이젠 배민의 ‘반찬 배달 맛집’에도 이름을 올리게 됐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포항시 전통시장 관계자는 “강경젓갈, 영광굴비나 수산시장처럼 지역 특산물과 관련된 시장이 전문상가를 형성하거나 점포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우는 많지만, 일반 도심시장에서 특정 아이템이 점포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례는 매우 드문 경우”라며 “전통시장 행태, 유통 역사 측면에서 남부시장은 특별한 사례로 연구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5-01-02

조선·일제강점기·근대에 이르기까지 포항 도심 상권 요충지

영일대 북부시장(이하 북부시장)은 포항의 상업과 전통시장 역사뿐만 아니라 인문학, 건축, 음식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공간이다. 포항 도심권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데다 단순한 상업 공간 외 역사, 문화 등 인문학적 요소도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구룡포와 함께 일제강점기 식민지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블랙 투어리즘’ 코스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북부시장을 들여다보는 목적이나 시각에 따라 다양한 접근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크게 4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대신동’(大新洞)이라는 지명이고, 둘째는 동빈내항과의 관계, 셋째는 등 푸른 생선, 마지막은 물회다. 물론 이 네 개의 코드로 북부시장 전체를 조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겠지만, 이 얼개들을 잘 조합해 시장의 실체에 접근해 보기로 한다. ◆나루끝 일대는 상업, 물류 중심지 북부시장 인근에 있는 나루끝(나루터) 지역은 일찍부터 흥해와 영일 경계에서 육상, 해상 교량 역할을 담당했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영일만 어촌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이 나루끝을 거쳐 내륙으로, 또 육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바닷가로 운반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전기 나루끝 근처에 포항 지역 유일 ‘국립호텔’인 여천원(余川院)이 들어선 것만 봐도 현재 대신동 일대가 교통, 상업, 행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흥해와 포항장이 서던 중앙동(남부) 사이에서 교통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나루끝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다시 한 번 발전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일제는 1908년 ‘한일어업협정’ 이후 본토민의 조선 이주 사업을 벌이기 시작하는 데, 1920년대 이후 포항에 일본인들의 조선 이주가 본격화 된다. 이들은 주로 여천, 중앙동 일대에 모여 집단거주지, 상권을 형성했다. 당시 포항의 중심이었던 중정(仲町), 본정(本町)과 북부시장 근처 동빈정(東濱町)에도 일인들의 집단촌, 상가가 형성됐다. 특히 일인들은 이 일대를 ‘큰 터에서 새롭게 일어난 동네’라 해 대신동(大新洞)이라고 명명했다. 새 지명까지 지어가며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은 그만큼 자신들이 이 지역 거주에 큰 의미를 두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일인들의 포항 거주가 식민지 경제 침탈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시장 역사 측면에서는 상업과 유통, 물류를 일으키는 큰 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포항의 해양 물류, 어업 중심 동빈내항 1872년 제작된 ‘포항진지도’(浦項鎭地圖)를 들여다보는 것도 재밌다. 지도상으로 보면 현재 나루끝, 대신동 일대에 포항창진(浦項倉鎭)의 진지가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진’은 조창(漕倉), 세곡(稅穀) 등 호조(戶曹)의 재정 기능과 군사 목적의 진(鎭)이 복합된 관청이다. 1749년 영조 최악의 기근 때 구휼(救恤) 목적으로 설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동해안 지역을 제치고 포항에 창진이 설치된 것은 영일만 일대가 동해안 해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이 포항창진의 전통을 이어받은 곳이 바로 북부시장이 위치한 동빈내항이다. 동빈내항은 1917년 ‘지방항’으로 지정되면서 1930년대 포항의 수산, 해양 물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또 동해안의 풍부한 어족자원을 바탕으로 청어, 정어리, 오징어, 가자미, 꽁치, 멸치 등 수산기지로도 이름을 떨쳤다. 일제강점기 경제 침탈 기지로, 한국 전쟁 당시 전략상 군사항구로 기능하던 동빈내항은 1953년 휴전 이후 다시 동해안 상업·물류기지, 어업 전진기지로 크게 번창했다. 6·25 전쟁 직후 동빈내항, 형산강 일대에는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전후(戰後) 일자리와 음식이 나름 풍부했기 때문이다. 이 난민 라인은 동빈내항-죽도시장-연일 부조장 등으로 이어졌는데 그중 동빈내항 북부시장 근처 난민 규모가 가장 컸다고 한다. ◆위판장 들어서며 한때 포항 최대 시장으로 북부시장이 포항 도심 주류 전통시장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1960년대 수협위판장이 시장 인근에 들어서면서부터. 위판장이 들어서면서 영덕, 흥해, 감포 등 동해안 일대에서 잡은 모든 활어, 수산물들이 북부시장으로 몰려들었다. “1960년대 북부시장은 생선을 실은 나무 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 사이를 상인, 장꾼, 어부, 일꾼들이 하루 종일 북적거렸습니다. 시장에는 온종일 활어들이 넘치고 가판, 식당마다 손님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죠.” 북부시장 근처에서 나고 자랐다는 상인회 이성관 회장은 60여 년 전 북부시장 풍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시장 한 켠엔 고래고기 경매장(현 롯데백화점 근처)까지 들어섰다고 하니 그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특히 북부시장의 설립(1955년)은 죽도시장보다 6년이나 빨라 당시 북부시장이 포항의 북부 상권의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부시장의 중개, 도매, 위판시설 입지는 상권만 키운 게 아니었다. 위판장에서 쏟아지는 생선들, 어선에서 갓 잡아 올린 활어들을 이용한 음식들이 다양하게 개발됐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시장을 들락거렸다는 한 어르신은 “당시엔 가판에서 선어(鮮魚)는 물론 활어들을 막 썰어서 파는 노점들이 많았다”고 말한다. 고급 횟칼로 활어 결을 따라 ‘한점 한점’ 써는 방식이 아닌 지느러미와 껍질만 대충 날리고 부엌칼로 막 썰어 파는 요리였다. 이 요리가 현재 북부시장의 시그니처 메뉴가 된 ‘등푸른생선막회’의 출발이었다. 이 막회는 북부시장의 메인요리로 자리 잡으며 명성을 쌓아갔다. 막회 이후 북부시장의 미식(美食) 계보를 이어 받은 요리는 물회였다. 1960년 ‘새포항물회식당’에서 개발되었다는 물회는 큰 인기를 얻은 후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회장은 “옛날 뱃사람들이 조업 중에 잡은 생선들을 고추장에 비벼 먹었는데, 이를 좀 더 빨리 먹기 위해 물을 부었던 것이 물회의 유래”라고 설명했다. 이 작은 발상의 전환은 포항을 ‘맛의 도시’ ‘미식의 도시’로 부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한때 TV에 소개되며 수십미터 장사진 반세기 동안 포항 북부 상권의 중추를 담당하던 영일대북부시장은 2006년 포항 시청사가 남구 대잠동으로 이전하면서 상권이 급속히 위축됐다. 급격한 상권의 위축 속에서 생존전략으로 등장한 것이 ‘등푸른 막회 특화거리’였다. 당시 막회거리를 기획했던 이성관 상인회장은 “40~50년 전 시장 노점, 가판에서 맛있게 먹었던 막회를 특화요리로 개발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며 “마침 포항시에서 행정, 재정적으로 도움을 줘 빛을 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막회거리는 2016년 ‘백종원의 3대 천왕’에 이어 수요미식회, 생생정보통 등 TV에 소개되면서 전국 미식거리로 데뷔했다. TV 방영 이후 골목엔 수십미터씩 대기 줄이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덕분에 주변 횟집에도 손님들이 모여들어 시장에 활기가 돌았다. TV 방영 이후 8년이 지났지만 시장엔 아직도 막회, 물회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TV 방영 시점만은 못하지만 포항 물회, 막회에 대한 기억이 워낙 강렬해서 인지 아직도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 회장은 “북부시장이 전국적인 맛집 거리로 도약한데는 TV, 매스콤의 소개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 바탕에는 수많은 시장의 부침 속에서 자리를 지켜온 아낙네들과 물회, 막회라는 메뉴를 꾸준히 지켜온 횟집 상인들의 끈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2-19

1970~90년대 해도동·상대동 주민들의 쇼핑·외식 ‘일번지’

양학시장, 큰동해시장, 북부시장, 죽도시장…. 포항 도심에는 많은 전통시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장들은 1970~90년대 도심 유통, 상업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서민, 생활경제를 지탱하는 든든한 배경이었다. 포항에서 도심 시장의 등장을 논할 때 1980년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우리 일상에서 전통시장은 늘 우리 주위에 있어 왔기에 매 순간, 매 시기가 중요했겠지만, 이 시기(1980년대)에 이르러 전통시장은 양적,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뭘까. 1980년대 전통시장이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이유는? 학자들은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첫째 이유로 든다. 인구 팽창은 국민 수의 양적(量的) 증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의식주 등 생활필수품의 급격한 수요 증가를 뜻하기 때문이다. 경제 개발이 본격화 되고,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민소득이 급속히 높아진 점도 시장과 유통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늘어난 소득과 생활수준의 향상은 쇼핑이나 외식 문화 수요를 급속히 신장시켰고, 이런 흐름이 전통시장 발전으로 연결됐음은 물론이다. 이런 등식에 정확히 일치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포항대해불빛시장’(이하 대해시장)이다. 설립 시기도 1981년이고 앞에 열거한 여러 요인들과도 정확히 겹친다. 1980년대 대해시장이 어떻게 포항 남부 도심의 주요 상업, 유통거점으로 부상했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보자. ◆1970∼80년대 해도동, 상대동 인구 급증 우선 대해시장의 공간적 근거가 되는 해도동과 상대동의 인구 변화에 주목해 보자. 1985년 해도동의 인구는 4만1000명, 1990년 상대동의 인구는 4만6000명에 이른다. 두 지역의 인구 합계는 웬만한 지방 소도시를 초과하는 규모다. 현재 해도동 인구가 1만6000명, 상대동 2만6000명이니 당시 인구 밀집도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해도동, 상대동 인구 증가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자료가 있다. 바로 1970~90년대 이 일대에 들어선 아파트, 연립주택들이다. 연도 별로 살펴보면 △동아아파트(1979년) △상대주공아파트(1981년) △해도대보아파트(1982년) △반도맨션(1984년) △대명뉴타운맨션(1984년) △금강맨션(1985년) △명성제2광장(1987년) △태양아파트(1988년) △신흥주택1차(1988년) △대림힐타운(1988년) △학산타워(1989년) △현대종합금속사원아파트(1989년) △선화아파트(1990년) △상록수아파트(1990년) △명성해도타운(1990년) 등이다. 대략 헤아린 것만 해도 15개가 넘고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고층 아파트나 대단지 규모는 아니지만 이들 주택들이 시장 근처에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유동인구와 시장 수요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8년 포항제철의 설립과 1973년 용광로의 가동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철강산업의 발달은 포항의 경제를 수직적으로 끌어올렸고, 안정된 일자리와 고임금 근로자를 발생시켰다. ◆대해불빛시장의 정식 설립과 발전 대해시장의 정식 설립은 1981년으로 기록돼있다. 하지만 시장 관계자와 원로 상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1970년대 이미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인연합회 김하일 회장은 “마을 어르신들 증언에 의하면 1970년대 이미 노점 형태의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고 말한다. 아마 허름한 장옥(場屋)과 가건물 위주의 점포들이 상가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80년대 들어와 부쩍 비대해진 상대동, 해도동 일대의 인구나 경제규모는 기존의 노점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포철 근로자들이 이 일대에 대거 입주하면서 생필품 수요가 증가하자 포항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생활근린형 시장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 대해시장은 여타의 전통시장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오후 3시부터 6시 사이에 가장 붐볐는데 가게마다 손님으로 물결을 이뤄 교행이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구내식당이나 학교 급식시설이 없어 직장이나 학교에서 식사를 모두 도시락으로 해결하던 때였다. 이에 주부들은 오후가 되면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으로 나왔는데, 마침 학생들 하교 길과 겹쳐 시장이 북새통을 이뤘다는 것. 대해불빛시장은 2019년까지 대해종합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2020년 ‘포항국제불빛축제’를 계기로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당시 불꽃축제장이 시장과 가장 가까웠고 포항시의 대표 야경 명소인 포스코가 500여m 거리에 있어 이런 이미지를 시장과 접목하기 위한 시도였다. ‘큰 바다’라는 이름처럼 시장 내에는 다양한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각종 채소, 금은방, 생선점, 옷 가게, 분식점 등 100여 개의 점포가 구색을 맞추고 있다. 대해시장은 상인들 특유의 단결력과 끈끈한 유대감으로 유명하다. 98%를 웃도는 상인회 가입률이 이를 입증한다. 김하일 상인회장은 상인들 의식의 큰 변화 계기를 ‘시장첫걸음 사업’ 때 진행했던 ‘상인대학’을 든다. “나만 성실하게 일하고 좋은 물건 싸게 팔면 장사가 잘되겠지. 하던 상인들이 자신의 점포보다 ‘시장’이라는 더 큰 틀에서 상업을 이해하기 시작한 거죠. 상인회가 단결해 시장 전체 분위기를 이끌고 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 이벤트를 진행함으로써 시장 전체의 가치와 이미지를 올려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게 된 것입니다.” 변화된 상인들이 ‘무언가 한 번 해보자’고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면서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현재 시장에선 카드 단말기 설치, 온라인 결제, 원산지 표시제, 가격 표시제는 기본이고 구획선 지키기 등 질서들이 잘 유지되고 있다. 특히 2020년에는 전국 전통시장 우수 시장에 선정되었고, 중소벤처부 장관상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상인회의 단합과 문화 공간 조성의 비전 상인들의 단결과 높은 상인회 가입률은 시장 활성화에 큰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결집을 바탕으로 상인회는 다양한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정기적인 봉사활동은 물론 플리마켓과 바자회 등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위한 행사들도 열고 있다. 특히 상인회는 향후 시장 내 120평 유휴공간에 대형 문화공간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공간이 완성되면 각종 축제 행사와 버스킹, 바자회, 경로잔치, 심지어 연예인 초청공연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는 대불빛시장을 단순한 쇼핑 공간을 넘어, 지역 사회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김 회장은 대해시장을 한마디로 ‘정(情)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또 인심과 활력이 넘치고 저렴한 가격에 모든 종류 상품을 원스톱으로 구매할 수 있어 전통시장과 대형마트의 장점이 골고루 갖춰진 곳이라고 자랑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해시장이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현재 상인회는 ‘문화관광형시장’ 공모 준비에 전념하고 있다. 이 제도는 정부에서 전통시장의 대표상품 개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공모에 선정되면 연간 5억원 정도 정부지원금을 확보하게 돼 시장 환경 개선, 건물, 가로 정비 등 상인회 활동에 탄력을 받게 된다. 이제까지 포항의 도심시장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대해시장이 이번 ‘문광형시장’ 선정을 계기로 포항의 전통 상업 공간, 시민 경제의 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1-21

‘3대 시장’ 부조장 명성 이어받아 연일지역 전통시장으로 우뚝

포항에서 고대사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근기국’(勤耆國)의 실체다. 3~4세기 동해 소국들이 신라에 복속되기 전 포항에는 바로 근기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소국의 실체에 대해선 자료에 간헐적으로 등장하고, 체계화된 연구도 없어 각종 사료에 편린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철기시대를 막 벗어날 무렵 국가 단계는 아니지만 꽤 큰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은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해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 근기국의 위치에 대해서 학계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연일설(延日說)’이 다수설로 인정받고 있다. 연일은 지금 포항 남부의 소도시로 큰 존재감이 없지만 연일이야말로 한때 일개 국가를 일군 터전, 왕경 터였다는 사실만으로 도시 자존심을 세우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오늘 방문할 포항의 전통시장은 바로 이 근기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시민들에게 생활 경제를 펼치고 있는 연일시장이다. 옛 왕조의 터에 시장을 열어 서민 경제를 든든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연일시장으로 들어가 보자. ◆근기국 왕경 터는 오천, 연일읍 일대 다음은 연일 지역과 근기국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사학계에서는 근기국의 왕경터를 옥성리고분군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왕족, 귀족의 대규모 장례시설이 있는 곳이면 그 일대가 수도 기능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분이 향토 사학자 배용일 전 포항문화원장이다. 배 원장은 근기국의 읍터를 오천읍 고현리(현재 원리, 원동) 일대로 보고 있다. 이곳은 포항의 젖줄인 형산강과 냉천 사이 중심에 위치해 있고, 동해와 내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배 원장은 근기국이 바로 이 고현, 연일읍, 오천읍, 대송면 일대에 왕경을 형성했다고 보고 있다. 고현성 반경 5km 내 고분군, 지석묘, 건물 터 등이 집중 분포한 점도 소국의 존재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근기국은 기원전을 전후한 시기에 소국을 형성했다가 신라가 동해 남부 맹주로 부상하면서 주변의 약소국들을 병합할 때 압독국(경산), 골벌국(영천) 등과 함께 경주 세력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근기국 멸망 당시 신라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연오랑세오녀의 스토리는 다음 오천시장 편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 동해 3대시장 부조장 전통 계승 연일은 동쪽으로 포항시와 철강산업단지를, 서쪽으로는 경주시 강동면, 남쪽으로는 대송면 공수리, 북으로는 학전-달전리와 접하고 있다. 옛날부터 교통이 발달해 조선시대 역원(驛院)의 하나였던 대송역(大松驛)이 장기를 거쳐 경주와 연결되었고, 형산강의 옛 포구를 이용한 해운도 크게 성했다. 삼국시대부터 지금의 시군격인 현(縣)이 설치됐고 한말엔 8면(面) 102개 리(里)를 거느릴 정도로 읍세를 자랑했다. 근대 기록에도 ‘현청(縣廳) 북쪽에 큰 어시장이 있어 동해안의 관문 역할을 했다’고 나와 있다. 지금도 전체 지도를 보고 놓고 볼 때 지리적으로 포항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혹자들은 철도를 형산강 남쪽으로 유치했다면 연일이 포항시 중심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시청사가 있는 대이동, 포항공대가 있는 효곡동이 모두 연일의 관할이었을 정도다. 연일시장과 관련해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부조장’(扶助場)과 관계다. 조선시대 3대 시장으로 불리며 동해안 유통, 상업의 중심지였던 부조장은 현재 경주와 포항의 경계인 경주시 강동면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경상도 읍지에 의하면 ‘영일만, 형산강 지역엔 윗 부조장과 아래 부조장 두 곳의 장시(場市)가 개설되었다. 아랫 부조장은 연일읍 중명리 일대에서 1750~1905년까지 융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부조장터에서는 함경도 명태, 강원도 오징어, 포항의 청어·소금을 내륙에 팔고, 전라·경상도의 농산물을 교역하는 등 상거래의 요지 역할을 했다. 부조장의 상권과 전통은 연일시장으로 이어져 300년 가까이 그 상맥(商脈)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포항 경제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1970~80년대 장꾼, 우마차, 리어카 북적 연일시장이 개장한 건 1968년으로 인근 죽도시장의 설립과 비슷한 시기다. 당시 연일읍의 인구가 20만 명이었으니 생필품 조달지로써 시장이 절실하던 때였다. 당시 형산강 이북 포항시의 인구가 6만 명에 불과했으니 유동인구는 오히려 연일시장이 많았던 셈인데, 당시 죽도시장은 신도시 개발붐을 타고 포항의 대표시장으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다. 어쨌든 두 시장은 1960년대 포항의 신, 구도심을 양분하며 형산강의 남북에서 전통시장 상권을 주도해 갔다. 인구 팽창에 따른 사설(私設) 시장으로 영업을 계속 해오던 연일시장은 2011년에 들어와서야 포항시가 인정하는 관인(官認)시장으로 인정 받게 된다. 1905년까지 부조장의 상권과 전통을 이어받은 덕에 1970~90년대 연일시장은 여타 전통시장과 마찬가지로 전성기를 이뤘다. “당시 장날엔 나뭇짐, 장작부터 토끼, 닭, 오리, 한약재까지 모든 물산들이 시장에서 거래됐습니다. 농민들은 집에서 재배한 배추, 무 등 각종 채소와 참외, 수박, 복숭아 등 각종 과일을 광주리에 실고와 팔고는 옷, 농기구, 신발 등 공산품과 바꾸어 갔습니다.” 조영만 상인회장은 1970~90년대 시장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장날 지게꾼, 짐꾼, 리어카, 우마차가 몰려들어 난전을 통과하는데 큰 애를 먹었지만 당시엔 그게 시장 풍경이었고, 장터의 낙(樂)이었다. 한때 포항 상권을 양분할 만큼 큰 위세를 자랑했던 연일시장의 현재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우선 이농현상으로 인해 유동인구가 줄었고, 특히 젊은층의 전통시장 외면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4~5곳이나 들어선 대형마트, SSM, 연쇄점 등도 전통시장 상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죽도시장이 위치해 주민들 상당수가 연일대교를 건너 큰 시장으로 향하고 있다. 조영만 상인회장은 “주민들이 지역 시장을 외면하고 타지로 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며 “이분들의 발길을 붙잡아 두는 것이 절실한 과제”라고 말한다. 이에 상인회에서는 3, 8일에 열리는 전통오일장에 큰 기대를 걸어 보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유동인구가 적으니 노점상들이 잘 오지 않고, 거래가 시원찮으니 한두 번 오던 행상들도 다른 곳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부추 먹거리 개발 등 특성화 사업 추진 현재 연일시장은 3만여㎡ 부지에 150여개 점포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상인회는 2015년 ‘1시장 1특색’의 특화사업을 육성하는 ‘골목형 시장’에 선정돼 지역 특산물 먹거리 특성화 사업을 진행했다. 상인회는 연일의 특산품인 부추, 시금치와 연계한 음식, 식품을 개발해 먹거리 골목을 조성했다. “옛날 연일은 전국 부추시장의 20%를 점유할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이에 상인회에서는 부추전, 부추통닭, 부추국, 부추빵, 부추두부 등 먹거리를 개발해 관광객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조 회장은 시장 특성화 사업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또 매년 10월에 형산강 둔치에서 열리는 ‘연일 부조장터 축제’도 상인회가 역점을 두는 행사다. 연일시장 정체성의 근거, 상권의 뿌리가 되는 행사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시장을 대표하는 축제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일시장은 현재 주차장 편의시설 확충과 입간판 정비 등 시장 현대화 작업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시민들이 쾌적한 공간에서 쇼핑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조 회장은 “고대에 근기국의 왕경 터를 이루고, 근대에 부조장 터의 상권을 이어받은 연일시장이 포항 남부의 유통, 상업 도시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 달라”고 강조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0-24

1970∼80년대 시장 인파로 북적, 명절 땐 밤샘 장사도 예사

죽도시장과 함께 포항 전통시장의 ‘빅2’를 형성하고 있는 큰동해시장.(물론 외형, 규모 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만) 전통시장으로서 포항시 정식 인증을 받은 게 2008년이니까 역사도 그리 길지 않다. 죽도시장이 1500개 점포의 매머드급 상권을 자랑하는 데 비해 큰동해시장은 150여 개 점포에 하루 유동 인구도 2000여 명 남짓하다. 포항시 남부 조그만 근린시장으로 그다지 주목할 요소가 크게 없어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뜻밖의 내공(內功)에 놀라게 된다. 송도, 해도동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소금을 생산, 유통하던 동해안 제염(製鹽)의 전초 기지였고, 1960~70년대 포항종합제철 태동시기 근로자들의 애환이 깃든 삶의 터전이었다. 또 바로 옆 지역 최대 물류거점 죽도시장과 함께 포항의 상권을 양분하며, 서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생활경제 현장이기도 하다. 포항에 상업을 일으키고, 물류 전통을 세웠던 큰동해시장으로 들어가 보자. ◆해도동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소금 생산 기지 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실세였던 이의민(李義旼)의 부친은 경주의 소금 갑부였다고 한다. 경주에 염전이 있을 일은 없고, 그렇다면 이 소금은 포항 송도, 해도동 일대에서 생산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생산된 소금들은 형산강-부조장(扶助場)을 거쳐 경주를 거쳐 영남의 내륙으로 유통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포항 해도동 일대 소금 생산 기원을 신라시대까지 소급하고 있다. 해도동 일대의 미네랄이 풍부한 염수(鹽水), 풍부한 일조량에 형산강 교역루트까지 소금 생산의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진흥왕 조(條)’에서도 형산강과 서형산성(西兄山城)에 ‘염고’(鹽庫)가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 소금은 단순 생산을 넘어 집하(集荷)-도매-유통을 망라하는 산업 단계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생산된 소금은 주로 형산강 뱃길과 보부상을 거쳐 내륙으로 팔려 나갔고 일부 상등품은 왕실에까지 진상됐다고 한다. 과거 해도동의 지명은 ‘염동골’(鹽東谷). 1961년까지 이 지역엔 8만평(26만4462㎡) 정도 소금밭이 경영되었고 100여 명의 염부(鹽夫)가 연간 2000가마를 생산 했다고 한다. 해도동 소금은 전통 방식으로 생산된 자염(煮鹽)으로 염도를 높인 함수를 가마솥에 끓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영양소가 풍부해 서민들의 반찬, 양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자염은 일제강점기 이후 천일염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송도해수욕장 배후이자, 형산강 하류에 위치한 해도동은 1960년대만 해도 갈대밭, 연밭, 염전으로 이뤄진 저습지대였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이 들어서면서 짧은 기간 내에 주거지역으로 변모했다. 지반이 약한 늪지대라는 핸디캡 때문에 그 흔한 대단지 아파트 하나 들어서지 못했지만, 철강공단과 시가지를 연결하던 길목이라는 입지를 배경으로 해도동은 포항 남부의 대표 주택단지로 부상했다. ◆1980년도 본격 상가 건물 들어서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포항제철과 철강단지 근로자들이 해도동으로 몰려들면서 1970년대 주택가 공터, 대로변에 노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 남짓 거리에 죽도시장이 있었지만 당장 급한 생필품 조달처가 따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설 장옥(場屋)이나 비닐하우스가 얼기설기 노점 형태로 이어져 오던 시장은 1980년에 들어와 본격 상가 건물을 짓고 전통시장 외형을 갖추게 됐다. 현재 시장 안쪽에 좌우로 늘어선 복합건물이 그 당시 완공된 상가다. 시장은 들어서자마자 꽤 큰 상권을 형성했다. 1980년 당시 해도동 인구만 4만여 명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포항제철, 철강단지 근로자들이 대거 몰려 살면서 시장은 성장을 거듭했다. 1980년대 들어 인근에 갑자기 들어선 아파트도 상권 형성에 큰 도움이 됐다. 1979년 ‘동아아파트’를 시작으로 ‘코스모스빌라’ ‘동부타운’ ‘점보맨션’ ‘명성 송도타운’ 등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유동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뭐니뭐니해도 큰동해시장의 상권에 큰 영향을 끼친 건 포항제철, 철강공단 근로자들이었다. 고(高)임금군에 속했던 이들은 구매력을 바탕으로 시장의 주 고객이자, 소비자로 부상했다. 근로자들은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삼삼오오 모여 소주 한잔으로 하루 피로를 풀었고, 귀갓길엔 가족들을 위해 간식이나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가는 것이 당시 흔한 풍경이었다. 제철소와 공단 근로자들이 들락거렸던 술집, 칼국숫집, 분식집 등 몇몇 가게들은 지금도 시장을 대표하는 맛집으로 남아있다. ◆1980년대 밤샘 장사 예사, IMF 이후 쇠퇴 큰동해시장의 전성기는 1970~80년대였다. 당시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외식이나 쇼핑을 나온 시민들로 넘쳐났다. 발이 밟히고 어깨가 부딪혀 교행이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산업화 시기 막강한 배후 인구와 구매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이나 명절 전날에는 새벽까지 손님들이 몰려들어 가족들이 돌아가며 밤새 영업을 하는 것도 당시엔 흔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시장에서 자전거 점포를 했다는 한 어르신은 “어린이날엔 자전거를 사러 온 손님들이 새벽까지 문을 두드려, 밤새 자전거를 수십대씩 팔았다”며 “그 때는 송도해수욕장 자갈을 가져다 팔아도 장사가 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기억 했다. 40년간 떡집을 운영했다는 한 어르신도 “그땐 정말 명절을 전후해서는 밤새도록 쌀 불리고, 가루 내서, 찌고, 썰고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가족들은 물론 멀리서 친척들 일손까지 불러들여야 겨우 주문을 맞춰 냈다고 한다. 한때 짐자전거를 몇 대씩 둘 정도로 번창했던 전통시장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다. 우선 4만여 명에 달하던 해도동 인구는 1만6000여 명으로 줄면서 유동인구가 급감했고, 공장의 설비 자동화로 많은 근로자들이 해도동을 떠났다. 시장 상권, 외형의 뚜렷한 변화는 1997년 IMF 이후부터였다. 신자유주의가 부상하며 유통업계도 무한경쟁 시대가 열렸다. 마을마다 대형마트, SSM들이 생겼고 홈쇼핑 등 온라인 업체들이 들어서며 전통시장 등 오프라인 상권은 급속히 쇠락했다. ◆‘문광형 시장’ 등 선정되며 상권 활성화 갈수록 위축되는 전통시장의 위상, 상인들도 대안 모색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상인회에서는 먼저 전통시장 정부 지원사업에 주목했다. 우선 예산과 행정지원이 있어야 상인회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큰동해시장은 정부 지원사업 첫 번째 단추인 ‘특성화 첫걸음’(2018년)에 선정되면서 상인들은 큰 자신감을 얻었다. 내친 김에 2019년엔 ‘도약 단계’인 ‘문화관광형 시장’에 응모했다. 까다로운 심사 조건 때문에 선정이 힘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철의 기상, 운하의 낭만’을 컨셉으로 한 스토리텔링이 평가를 받아 문광형 시장에 선정돼 예산(10억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상인회는 2021년 ‘문화관광형 시장’에 또다시 선정되면서 상인회 활동에 연속성을 갖고 활발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상인회의 저력을 보여주는 쾌보(快報)는 계속 이어졌다. 전국에 5곳만 지정해 지원한다는 ‘카카오 전통시장’에 선정되는가 하면, 상거래 IT 정책을 지원하는 ‘디지털 전통시장’에도 뽑혔다. 이런 예산 지원과 정부 지원을 배경으로 상인회는 많은 활성화 작업을 펼치고 있다. 전국 최초로 ‘고객회원제’를 실시했고, 모바일 장보기 앱 ‘달려라 큰동해’ 사업을 펼쳤다. 매주 토요일엔 ‘세일거리’가 열리고 매주 마지막 주는 ‘고객 회원 할인 주간’이 운영된다. 또 큰동해시장 만의 특산품, 밀키트 등을 개발하고 지역 대표상품인 과메기, 대게 전국배송을 통해 상인들의 수입을 늘린다는 계획도 진행하고 있다. 김병석 상인회장은 “각종 시장 활성화 사업을 통해 시장의 매출이 30~40% 이상 상승했고 상인, 소비자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 이라며 “이 모든 성과는 삶의 터전인 시장을 살려 보자고 팔을 걷어붙인 상인들의 노력, 희생, 협조 덕”이라고 강조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0-10

포항제철 사택·효자역 화물·여객 후광 업고 1970년대 전성기

물류의 집산(集散), 유동인구, 특정 작물 대량 재배, 장인(匠人) 집단 활동 여부, 교통의 요지…. 전통시대 시장의 성립 요인은 다양하다. 열거한 요인 중 한두 가지만 중복돼도 쉽게 시장은 형성되고, 더 많은 요인이 겹치면 대형 상권이 조성되기도 한다. 이번에 소개할 효자시장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효자시장은 앞서 언급한 시장 성립 요인 중 교통, 그 중에 철도역과 관련이 깊다. 잘 알려져 있듯 포항에는 경동선(1927년 개통), 동해선 (1945년 개통), 괴동선이 운행됐다. 이 중 효자시장과 직접 관련이 있는 곳은 괴동선(槐東線)이다. 1971년 개통된 이 철도는 부조(지금의 부조장터)와 효자-괴동-제철(포항제철역)을 잇는 10.6km 노선을 말한다. 짧은 노선이지만 이 철길로 철강 공단의 화물, 제품, 원자재들이 수송되었고 포스코 근로자들을 위한 국내 최초 통근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화물의 집산과 근로자, 인구의 유입은 필연적으로 시장을 필요로 했고, 효자시장은 그 ‘수요’에 대한 대안이었다. ◆지역 3대 시장 중 하나인 부조장 전통 계승 효자동 일대는 조선시대 연일현 북면에 속했었다.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흥해, 영일, 청하, 장기 4개군으로 개편될 때 영일군 북면에 귀속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4개군이 영일군으로 개편될 때 연일면에 편입됐고 효자동과 지곡동을 통합해 효곡동이 됐다. 효곡, 효자동은 포항의 서쪽 관문에 위치해 옛날부터 신라, 경주 세력들의 관문 역할을 했다. 고대에는 형산강 줄기를 따라 신라나 내륙의 문물이 동해로 진출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육로를 따라 동해의 문물이 양동-경주를 경유에 영천-경산으로 드나들었다. 효자동의 서쪽 형산강 변에는 지역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부조장터가 있는데 효자시장은 바로 이 부조장의 전통과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 부조장이 형산강을 배경으로 포항의 청어, 소금 등 해산물을 전국으로 유통시킨 물류의 중심이었다면, 효자시장은 효자역 철도, 포항제철 유동인구를 배경으로 지역의 전통시장을 일으킨 골목상권의 디딤돌이었다. 효자시장의 태동은 포항제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68년 포철이 들어서면서 효자동 일대에는 포철 직원들을 위한 대규모 사택 단지가 조성됐다. 갑작스럽게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근에 상가, 학교, 관공서들이 따라서 들어왔다. 이때 설립된 학교, 연구소가 포항제철초-중-고교와 포스텍, 포항테크노파크, 방사광가속기연구소였다. 효자역 인근엔 포항제철 직원들과 인근 공장 인부들, 학생들을 위한 식당, 생필품점, 노점상인들이 대거 들어섰고 이런 수요를 바탕으로 1971년 효자 시장이 정식으로 개설됐다. ◆1970년대 밀려드는 손님으로 골목 북적 “당시 1970년대 주말에는 시장에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손님들이 넘쳤습니다. 하루 종일 리어카 소리, 짐자전거 소리로 늘 소란스러웠죠. 장사도 얼마나 잘 됐는지 배추를 트럭 채 가게 앞에 부려 놓으면 반나절도 안 돼 한 차씩 다 팔아 치우곤 했죠. 그땐 다들 정직해서 분에 넘치는 이윤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냥 손만 바쁘고 계산하느라 정신만 없었지, 살림은 늘 그대로였어요.” 한 야채가게 어르신의 증언처럼 1970~90년대 전국의 전통시장은 전성기를 누렸다. 아직 백화점, 대형마트, 인터넷 쇼핑몰이 등장하기 전이었고 유통체계는 생산자-도매업자-소매로 연결되는 단선(單線) 라인이 주류를 이룰 때였다. 무엇보다 풍부한 ‘인구’는 시장을 견인하는 가장 든든한 원군(援軍)이었다. 당시엔 가구당 4~7자녀가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고, 인구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생필품은 대부분 전통시장에서 조달됐다. 앞서 언급한 대로 ‘효자시장의 8할은 포항제철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둘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수천 세대에 이르는 포철 직원, 주민들의 생필품 공급처이자, 수천 명에 이르는 포철재단 학생들의 간식, 군것질거리, 학용품 조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만난 야채 가게 어르신은 “1970년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사택, 학교들이 들어서면서 기존 시장 규모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며 “당시 효자역 부근 논밭을 따라 노점상들의 비닐하우스, 가건물들이 들어서며 시장이 급속히 확장됐다”고 증언했다. ◆포철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시장도 가동 재미있는 것은 효자시장의 모든 운영이 포철 직원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 1970년대 보통 효자시장은 4시 무렵이면 문을 열었다. 당시 효자역 포철 통근기차 첫차가 5시57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효자시장엔 미처 아침을 챙기지 못한 직원들이 국수, 국밥, 간식을 먹느라 식당마다 북적거렸고, 아침 일찍 찬거리를 사기 위해 나온 주부들로 혼잡을 이뤘다. 당시 포철 출퇴근 열차가 하루 열 번 정도 운행되었는데 매 시간 마다 시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상인회 김병근 회장은 “당시 안전화에 제복을 입은 포철 직원들이 수백 명씩 여명을 뚫고 효자역으로 출근하는 모습은 자체로 감동이었고 풍경이었다”고 말한다. 이미 반세기 전의 일이고 당시 근로자들은 대부분 노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이런 노력과 희생들이 쌓여 오늘날 포항 경제를 이룬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통근열차가 가고 나면 이제 학생들이 통학 행렬이 시장을 쓸고 지나갔다. 포항의 다른 지역 아이들보다 살림이 나았던 아이 학생들은 시장에서 떡볶이, 어묵, 라면, 튀김 등 간식거리를 소비하고, 학교준비물과 학용품을 준비해 갔다. 당시 포철초교 학생들은 노랑 모자에 노랑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등하교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상인들이 ‘병아리들’이라고 부르며 반겼다고 한다. ◆효자역 사라진 시장, 급격히 쇠락의 길로 2000년대 이후 전통시장은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인구의 감소, 온라인 쇼핑몰, 대형마트의 등장, 소비 행태의 변화 등이 주 원인이었다. 효자시장이 있는 효자, 지곡동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1970년대 건축됐던 포항제철 사택들이 민간에 분양되고, 상당수는 효자동을 떠났다. ‘제철(製鐵) 빌리지’를 이뤘던 효자, 지곡동 사원 아파트에는 이제 소수의 직원들만 남아 당시를 추억할 뿐이다. 포철과 효자시장을 끈끈하게 이어주던 효자역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30년 동안 657만 명을 실어 나르던 괴동선은 이제 통근버스나 시내버스, 자가용으로 대체돼 효자시장의 유동인구에 큰 타격을 입혔다. 포항제철과 효자역과 반세기를 함께해온 효자시장. 이제 괴동선엔 하루 30여 차례 화물열차만 운행된다. 2015년 4월 마지막 여객열차가 멈춰선 이후 효자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효자역 플랫폼엔 안전화 소리도 사라지고, CDC 기관차의 거친 엔진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기적소리라도 한번 울려 퍼지면 거친 음파(音波)를 따라 옛 추억이라고 소환해 보고 싶지만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올까요?” 한 시장 어르신의 넋두리를 배웅 삼아 시장 골목을 빠져 나온다. ◆괴동선은? 30년 동안 포항제철 직원들 657만 명 출퇴근길 실어날라 포항시 효자역과 괴동역을 연결하는 철도로 포항과 부산진역을 이어주던 동해남부선의 지선(支線)이다. 제철선 또는 포항제철선으로 불렸다. 1968년 4월 25일에 착공하여 같은 해에 효자역-괴동역 구간이 완공됐으며, 총공사비는 2억3313만원이었다. 1970년 10월에 괴동역에 포항제철전용선이 부설돼 1975년부터 포항제철 직원 전용 통근열차로 기능했다. 포철 통근열차는 30년 동안 운영 되며 하루에 총 10회, 약 109만km를 운행했다. 총 이용 승객은 약 657만명. 30년 동안 운행하면서 사고는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8년 화물수송량은 263만2172t으로, 무연탄 103만1847t, 잡화 159만901t을 처리했다. 1975년 7월 1일 운행을 시작할 당시 운임은 일반 이용객은 40원. 제철 근로자는 할인 혜택이 주어져 28원만 냈다. 2005년 폐선 당시 운임은 353원. 새벽 교대근무자를 위해 첫차가 오전 5시 57분에 출발했으며, 야간 근무자를 위해 막차는 밤 11시 30분에 들어왔다. 한국철도공사와 포스코 간의 운행 협상이 결렬되면서 2006년부터 운행이 중단됐다. 현재 괴동선은 화물전용으로 운행되고 있으며, 여객수송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글·사진/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