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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문경새재를 걷다 (20)

돌길 따라 구름 위로 올라가니굽이굽이 삼십 리나 이어졌네사람들은 높은 나무 끝으로 지나고말은 푸른 병풍 속으로 들어가네….가는 날이 장날, 북새통이다.위의 시는 영남학파 소세양(蘇世讓)이 당시 넘기 힘든 고개인 문경새재를 표현한 것이다. 찻사발 축제가 열리고 있는 문경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몇 해 전 와본 경험만 믿고 다시 찾은 문경새재, 그때보다는 더 잘 정비돼 있고 볼거리들이 더 많아진 느낌이다. 문경은 수백 년에 걸쳐 전통도예의 맥을 잇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군데군데 도자기 상설집들이 많이 보이는 곳이다. 도자기 축제라 그런지 엄청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아무래도 한적한 둘만의 여행은 틀렸다 싶었다.문경은 지역명이며 새재는 고개이름을 말한다. 그러니까 다 아는 이야기지만 문경새재는 대관령, 추풍령 등과 같이 큰 고개의 순수한 우리말이라 할 수 있다. 그 옛날 지금으로 치면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1번 국도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은 문경과 충주를 오가는 길에 있는 큰 언덕으로서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갈 때는 반드시 거쳐 가야만 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드라마 전설의 고향 단골메뉴의 공간적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곳이라 한다. 지금 봐도 산적들이 많이 있었음직한 곳이다.새들도 날다가 쉬어간다는 높고 험준한 문경새재. 이 고개는 지금 가장 아름다운 옛길로 사람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매년 100만명 이상이 다녀갈 정도라고 하니 한여름 바닷가 백사장을 붐비는 비키니가 있다면 이곳은 연중 주말이면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의 물결이 장관을 이루는 곳 아닐까 싶다. 역시 여행의 참맛은 먹거리. 출출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행렬을 보아 먼저 먹고 움직이는 것이 유리할듯해 주차장에 억지로 주차를 한 후 지난번에 들른 식당을 찾아 오미자 고추장 석쇠구이와 더덕구이에 오미자 막걸리 한잔, 원체 술이 센 나이지만, 한잔에 벌써 취기가 슥 오른다. 식당 역시도 인산인해. 무슨 TV맛집에 소개된 곳이라 그런지 더한 것 같았다. 아무튼 미식가라면 이곳의 소문난 음식 몇 가지는 한번쯤 지나칠 수 없는 매력이 분명히 있다. 조금만 먹어도 배가 남산만 해지는 특징 탓인지 주변의 음식 다 먹은 배를 해가지고 식당 문을 나왔다. 입구에서 몇 발자국 떼자마자 오른쪽에 옛길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작년부터 새재박물관에서 옛길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확장됐다고 한다. 1, 2층 전시실엔 옛길과 관련된 유물과 자료가 가득 차 있는 테마박물관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옛날 고향 길의 신작로를 연상케 하는 널찍한 길을 500m 정도 걸으면 `주흘관(主屹關)이라는 영남제1관`이 턱하니 버티고 있다. 문경새재 세 개의 관문 중에서 제일 폼나고, 웅장하며 옛 모습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다. 전에 없던 `문경새재 과거길`이라고 쓰인 바위 앞에는`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동판이 있다. TV드라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을 공략하는 장면들 대부분이 촬영되는 곳이기도 하다. 전에 왔을 때는 드라마 액션 장면을 그대로 보고 간적이 있는 곳이라 더 친숙하다.주흘관을 지나자 개울을 벗삼아 깨끗하게 정돈된 흙길을 걷는다. 흙의 부드러운 모성애가 나의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 옛날 선비들이 도포입고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듯 나도 한번 따라 해보니 역시 아스팔트길보다는 편안하면서 발길이 가볍다. 그리고 마음 또한 성급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 속이라 툭툭 서로가 어깨가 부딪히는 속에서도 도리어 여유감이 나타난다. 한주일의 뻑뻑한 스트레스가 온몸 구석구석에서 빠져 나가는 느낌이다. 한 10여분 걸어 올라오니 드라마 촬영장이 보인다. 2만여 평의 부지에 조성했다는 이 세트장에는 광화문, 시접전, 교태전, 근정문 등 조선조 건물 126동이 조성돼 있어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대의 사극 촬영장이다. 합천에도 드라마 촬영지가 있지만 사후관리가 부족한 탓인지 이곳보다는 잘 정리돼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계곡이 좁아진다는 느낌이 들수록 물소리는 더 청명해져경상도서 한양으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중요한 길목영남제1관은 관문 중 제일 웅장하며 옛 모습 많이 보존몇 해전보다 더 잘 정비돼 있고 볼거리도 많아진 느낌매년 100만여명 다녀갈 정도… 울긋불긋 `백사장` 연상한국의 아름다운 100선에 선정…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져문경새재를 많이 택했다는데…주흘관을 지나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 까지는 3km. 옛날에는 지금보다 어려웠을 고갯길이겠지만 경사가 낮아 역시 슬슬 걷기가 좋다. 이곳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 이길은 조선 태종이후 약 500여 년 동안 한양과 영남을 잇는 가장 반듯한 길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고개는 모두 3개로 추풍령과 문경새재, 죽령이 있었는데 문경새재가 열나흘 길로 가장 빠른 길이었다고 한다. 당시 과거 시험을 보러가는 선비들 사이에는 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아 이곳 문경새재를 많이 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계속 산길을 걸어가다 보니 계곡의 청아한 물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양쪽계곡이 좁아진다는 느낌이 들수록 물소리는 더 청명하다. 집사람이 이제 그만 갔으면 한다.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이 있지만 나 역시 사실 아까 먹은 점심 탓인지 이쯤에서 그만 가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 내려와 찻사발 축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수많은 사람들이 축제장에서 체험활동을 하고 있었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차향을 음미하는 현대의 선비족, 도자기를 만드는 진흙더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문경은 주말이면 사람들의 북새통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끝※지금까지 이철진의 여행스케치를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12-06-25

봉화 청량산 매력에 빠지다 (19)

이상한 일이다. 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 청량산에만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한계절 빠짐없이 언제나 그대로의 절경을 보여주는 봉화 청량산. 청량산이라는 이름 탓, 아니 그것보다는 이곳을 오기 위해 달려보는 꿈같은 드라이브길이 주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국도의 매력은 고속도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에 난 웬만한 여행길은 국도를 통해 달린다. 도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이나 바위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때로는 마음대로 차를 세워 계곡에서 커피 한 잔을 끓여 먹고 달릴 수도 있고, 어떨땐 산딸기 나무를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한바구니 산딸기를 따기도 하는 그런 여유로움 때문이다.모처럼의 맑은날 영덕 방면으로 드라이브를 하고 있는 나에게 부산의 친구 몇몇이 청량산을 가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이미 주왕산을 지나고 있다는 친구들의 연락에 청량산에서 보자는 기약을 하고, 나는 영덕을 지나 송천교차로에서 창수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점심은 각자 해결한 후 청량산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 만큼 조금은 여유롭게 주변 풍광을 즐기면서 차를 몰았다. 영양쪽의 도로는 몇 번 와본 경험이 있는지라 익숙한 풍경들이 많았다. 5월의 푸르름이 극에 달해 아카시아 꽃내음과 소나무의 싱그른 향내음이 차창 밖으로 진하게 느껴온다. 며칠전 잠시 내렸던 비 탓인지 계곡의 물들도 적당해 자연이 만들어 놓은 풍경화가 내 눈 앞에 어디 한군데 빠지는 것 없이 꽉 차여있다.영양을 지나 한참 달려오니 고계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부터는 도로와 계곡이 맞붙어 환상의 드라이브 길이 시작된다. 물살을 가로 지르며 여름에는 래프팅이 극치를 달리는 곳이다. 아이들이 어릴때부터 시작해 몇해전 성인이 된 큰 녀석이 군에 가기전에도 와서 타본 래프팅이다. 차량을 지프로 바꾼 후 오프로드를 꼭 해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약간의 구름이 있어 적당히 햇볕도 가려주고 바람 또한 선선하다. 마주 달려오는 어느 동호회의 차량 행렬이 제법 길다. 같은 색의 차종이 있어 서로 손을 흔들어 주며 지나치기도 한다. 도산서원 방면으로 한 7km 달려오니 청량산 입구가 보인다. 작년 여름 군에간 큰 녀석이 특박을 나와 펜션 하나 잡으려고 생 고생을 한 슈퍼집에서 간단히 간식거릴 준비하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니 청량사에 올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산을 잘 못타는 난, 친구들을 내려오라고 독촉하니 한 10분만 올라오면 된다고 극구 위에서 보자고 했다. 사실 청량산을 몇 번이나 와 봤지만 청량사는 한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입구까지 차를 몰고 갔다. 표지판에 1.9km, 친구 녀석 또한 한 10분 거리라 하니 만만하게 생각하고 올라간 청량사는 나에겐 솔직히 죽을 것 같았던 악몽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파른 길의 연속…. 중도에서 포기하기도 아깝고 해서 저기만 가면, 저기만 가면 하면서 올라가다보니 겨우 정상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솔직히 남들은 20~30분이면 올라오는 곳이라 하는데 난 거의 2~3시간이 넘게 걸려 올라온 느낌이었다.“켁켁” 거리며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들이다. 그만큼 운동 부족이 실감났다.그 고통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깜짝 놀랄 풍경에 또 한번 가슴이 뛰었다. 산 꼭대기에 세워진 석탑과 그 배경으로 보이는 금탑봉, 눈앞을 휘감는 연적봉…. 말문이 막힌다. 매번 산밑에서만 바라보기만 한 이 곳의 풍경은 올라와 보지 않은 사람은 죽어도 느껴보지 못하는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청량산은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의 도산면과 예안면에 위치한 도립공원으로서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며 일명 소금강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명산이다. 또한 산 곳곳이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에 요상한 모양의 암봉들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절대절경이다. 크고 둥글둥글하게 생긴 봉들이 여덟개나 있고 그 봉들이 품고 있는 동굴만도 열두개에 이른다고 한다. 입구에서 등산로를 따라 보통 사람들은 20~30분거리, 산 정상에 거대한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아래는 아득한 낭떠러지…. 바위들이 마치 층으로 이뤄진 금탑 모양을 하고 있고, 층층마다 소나무들이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청량산 주변에는 신라시대 최치원의 유적지로 알려진 고운대와 명필 김생이 서도를 닦던 김생굴이 있고, 암릉을 따라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반야굴, 방장굴, 고운굴, 감생굴 등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청량사, 왜 퇴계 이황 선생님이 도화라는 표현으로 청량산을 아끼고 사랑했는지 그 답이 청량사에 서서 청량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알 것 같다.가파른길을 올라가며, 옷이 비를 맞은듯 땀은 왜 그리도 흘렸는지 모르지만 청량산의 매력은 나에게 더 커져 버렸다.가을이 오면 다시금 꼭 한번 찾아오리라 맘 먹고, 내려오는 발길내내 후들후들 다리가 떨리는 내 모습에 친구 녀석들은 박장대소하며 재미있다는듯 웃고만 있었다.

2012-06-18

울진 불영계곡을 가다 (18)

여행을 다니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의 발길에 유린 당하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비경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특히 비경으로 이름나기만 하면 그 모습을 온전히 간직 하기란 더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방송이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름난 곳이다 하면 곧바로 물밀듯이 모여들어 주변환경을 변화시켜 버린다. 이러한 우리의 상황에서 볼때 아직 울진에 있는 불영계곡은 단연 돋보인다. 오래전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숨겨진 비경은 더욱 감동적이다.이끼한점 없는 바닥에 티끌없이 비춰내는 선유정 계곡짅진잠교서 불영사 입구 이십리 중 최고의 백미로 꼽혀의상대사 창건 불영사·덕구온천 등 `또다른 즐길거리'불영계곡을 처음 만난 것은 수년전 겨울, 강원도 정선쪽으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길에 강원도 태백에서 소천면을 끼고 울진방향으로 내려오는데 그해 겨울이 워낙 눈이 많이 내린 해 였다. 처음엔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채 눈길 치워진 곳을 따라 조심조심 차를 몰고있는 내 눈에 처음 들어온 풍경의 불영계곡은 그냥 현실이 아니라 꿈속의 모습, 신선들이 날아다니는 그런 신비, 그 자체였다.수천년 동안을 거치며 빗물이 바위틈을 흘러 내리면서 만들어낸 물길과 물에 닳아 반들반들해진 넓은 청석들. 항아리같이 패여진 암석들…. 웅장하고 이름난 폭포하나 없지만 기암절벽사이를 뚫고 바위틈을 흘러내리는 청류와 소나무사이로 보이는 계곡의 그 시원함이나 맑고 깨끗함은 과히 최고라 할만하며 어디엔들 비할곳이 생각나지 않는다. 계곡옆을 달리는 아스팔트 도로가 개통되어 계곡 특유의 한적함이나 적막함은 없어졌지만, 계곡으로 들어서는 곳곳에로의 발길을 막아놓아 태고의 계곡미는 그대로다. 역시 불영계곡의 최고의 자랑거리는 맑은 청류와 계곡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 기암절벽, 그리고 노송들이다. 차창밖으로 내려다 보노라면 절로 아찔해 진다.불영계곡으로의 여행의 출발점은 울진의 젖줄이라 하는 왕피천에서 부터다. 포항에서 울진으로 가다보면 수산교차로에서 왕피천을 왼쪽으로 끼고 영주와 봉화방면으로 좌회전하면 불영계곡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게 되는데 진잠교를 지나 삼근 2리에 이르는 15km 구간이 불영계곡이라 명명되는데, 이 중에서도 진잠교에서부터 불영사 입구까지의 이십리가 진짜 불영계곡의 묘미를 느낄수 있는 곳이라 한다. 한참 달리다 보면 중간에 2층의 팔각정인 불영정과 선유정이 경치좋은 곳에 세워져 있고, 곳곳에 관광버스에서 내린 행열들이 삼삼오오 식사를 하고 있다. 불영계곡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은 선유정에서 200여m 올라간 지점에서 내려다 보는 계곡미. 스~윽 둥글게 휘어진 계곡 주위로 노송과 기암들이 저마다의 폼새를 뽐내고, 크고 흰 화강암과 청아한 물길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물줄기는 이끼 한점 없는 바닥에 티끌하나 남김없이 다 비춰내고있어 물을 바라다보면 그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다.불영계곡의 중심에 천축산 불영사가 있다.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고, 보물 1201호인 대웅보전은 안에 있는 탱화의 기록으로 영조 원년(1725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불영사는 별로 눈에 뜨이는 특이한 것도 웅장함도, 그렇다고 모자란것도 없는 고찰이다. 전설에는 약 1천300백년전 의상대사가 절을 창건 할 당시 다섯 마리의 용이 이곳을 떠나지 않아 주문으로써 퇴치하려 하였으나 그 중 한 마리가 폭포로 숨어 들었다는 곳이 지금의 불영폭포이다. 법영루 앞에는 제법 커다란 연못이 있는데, 산 위의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가 이 연못에 비쳐 구룡사에서 불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얘기가 전한다.물과 산이 서로 얽혀 산태극 수태극의 지형을 이룬 곳 답게 수면에 돌부처의 모습이 비쳐 불경 이란 이름이 유래 된 이 곳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왕피천으로 연결 된 광천을 헤엄치는 은어가 꽤 많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은어가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다.주변관광지로는 대게로 유명한 죽변항 가까이 TV 드라마 `폭풍속으로' 세트장이 있다. 언덕 위에 선 흰 등대와 옛스럽고 이국적인 한 채의 집, 배경으로 펼쳐진 바다가 많은 연인들의 로맨스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여행에 온천이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덕구온천을 여정에 넣어도 좋을 듯. 덕구온천은 자연용출 약알칼리성 온천으로, 데우거나 식히지 않아도 항상 41.8도를 유지한다. 목욕을 마치고 나면 피부가 매끈매끈해지고 근육통도 한결 덜하다는 입소문이 자자한곳이다. 또한 덕구온천 스파월드는 기포욕, 마사지 시설, 노천온천, 액션스파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춰 덕구온천지구에서 가장 인기 있다. 그밖에도 많은 코스가 있지만 역시 불영계곡의 정취만큼 더 좋은것이 있을까.희뿌연 넓적바위 위에 걸터 앉아 스케치북에 연필을 대는 순간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갑자기 스쳐지나간다.

2012-06-11

여수 금오산 향일암과 오동도를 가다 (17)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내게 들려 주고파 전화를 걸어/뭐하고 있냐고/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여수 밤바다….”요사이 라디오에서 많이 나오는 노래중에 하나인 여수를 주제로 한 노래이다. 지금 여수는 2012년 해양엑스포가 열리고 있어 도시가 시끌벅적 하다. 전국의 많은 관광객이 북새통을 이루는 요즘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지는 노래다 싶다. 얼마전 가 보았던 곳이라 느낌이 더 친근한 것일까. 노래 가사처럼 여수 밤바다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이 곳 포항과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다. 거친 동해의 바다에 비해 호수같은 잔잔한 바다. 노을 질 때의 바다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돌산 끝자락의 금오산 향일암과 동백꽃의 오동도가 눈에 선하다. 지난 여행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여행의 목적지는 금오산의 향일암과 오동도였다.시원한 남해고속도를 타고 가다 광양에서 순천을 지나 여수시에 들어와 돌산대교를 건너 바로 대교밑에 즐비한 횟집에 우선 들렀다. 1984년에 완공되어 돌산과 여수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돌산대교는 교각에 비해 굉장히 높게 지어진 다리이다. 다리 아래로 조류가 빠르고, 여수항과 석유화학 공단을 출입하는 대형선박들을 위해 수면에서부터 20m의 높이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점심으로 작은 회 한접시를 시켜놓고 바다건너 여수항을 바라본다. 약간은 작지만 이국적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역시 사람들이 많았다. 몇장의 스케치를 하면서 회 한접시를 뚝딱 해치우고 다시 금오산으로 향했다. 여수는 갓김치가 유명한 곳이라 알고는 있었지만 이곳 금오산이 본 고향인듯 갓김치 파는 곳이 즐비하였다. 저녁에 먹을 요량으로 소(小)자 하나 구입하여 돌산 끝까지 왔다고 여겨지는 순간, 이곳이 금오산이란다.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예쁜 펜션 하나를 먼저 잡았다. 오늘은 여기서 1박을 할 작정이므로 좀 늦으면 방이 없을것이 뻔하다 싶어 방부터 구했다.이곳 금오산에는 유명한 사찰이 하나 있다. 향일암이 그 곳이다. 향일암, `해를 바라본다'고 해서 붙여진 사찰이라고 한다는데, 사람들은 `해를 머금고 있는 사찰'이라고 한다고 한다.`해를 머금고 있는 사찰' 향일암 291개 계단의 고통 뒤 큰 선물 몇해전 일출 행사때 화재로 인해 사찰 곳곳이 유실됐다고 크게 언론에 대서 특필된 곳이기도 하다.향일암을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다. 길가 양쪽으로는 돌산 갓김치를 판매하고 있는 식당들로 가득 들어차 있다. 언덕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향일암 매표소가 있다.매표소에서 표를 끊은 후 향일암 암자까지 가는 거리는 짧지만 계단이 장난이 아니다. 평길이라 해서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경사도가 꽤높다.금오산 향일암이라 적힌 일주문, 향일암을 지키는 대문역할을 함과 동시에 동쪽을 쳐다보고 있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열심히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정확히 291개라고 하는데 숨이 차서 세어볼 수가 없다.한참 올라가다 이 길을 지나 몇개의 계단만 더 오르면 그 유명한 바위틈 길이 보인다. 한사람이 겨우 통과할 정도의 돌틈 사이로 작은 공간이 보이는데 바로 바위굴인 반야굴과 해탈문이다. 그 공간이 어찌나 좁은지 요새 배가 더 나온 탓인지 정말 지나가기가 불편할 정도지만 재미있는 길이다. 가파른 계단을 몇단 올라가다보면 시야가 확 밝아지며 바다가 나타나는데, 그곳에 서서 밑으로 내려다보면 유명한 거북이 머리 같이 보이는 섬의 형상이 보인다. 그리고 저멀리 오밀조밀 작은 섬들이 여수의 정취를 그대로 보여준다.향일암은 남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멋진 사찰이지만 사실 더 유명한 건 향일암의 일출이라고 하는데, 매년 새해 첫날이면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이 때는 향일암을 방문한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죽포까지 이어지기도 한다고 하니 엄두도 못내겠다. 아무튼 향일암은 신라 선덕 여왕때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전해지고 있으며 창건 당시에는 원통암이라 불려지기도 했고, 현재의 향일암이라는 이름은 조선 숙종 41년 인묵대사에 의해 전해진 이름이라 한다.남해바다를 바라보며 큰소리로 한번 기도하고 다시 내려오니 날이 어둑해 졌다. 숙소 뒷마당에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가 있어 그곳에서 라면 몇 개를 끓여 갓김치랑 먹으며 밤바다를 바라보니 이것이 바로 그 노래가사에 나오는 `여수 밤바다'다 싶었다.오동도 제방둑길 걷는 재미 솔솔 색다른 밤바다 정취도 가슴 설레 다음날 아침, 어제 먹은 숙취가 아직 깨지 않아, 얼얼 한 채로 여수로 다시 나와 오동도로 향했다.한참 여수해양엑스포 준비가 막바지였던 탓에 주변이 어수선했지만 금방 도착한 느낌이었다.요즘은 오동도까지 도로가 생겨 자동차로 갈 수는 있지만 옛날에는 이 곳이 섬이었다고 한다. 일반차는 들어갈수가 없고 매번 여러대 달린 왕복 버스가 있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제방 둑길을 걸어 들어가는 재미가 솔솔하다.걸어서 섬에 도착하면 두 갈래 길이 보이는데 화장실 옆 길을 선택하여 올라가 보았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몇 년전 싱가포르 쥬롱새 공원이 생각났다. 명물로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백나무꽃이 울창한 사이로 이름모를 새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몇몇 대나무랑, 동백나무들로 만들어내는 이벤트 터널속을 걷다보니 그냥 섬을 한바퀴 돌게 되며 어느새 다시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오동도에서 바라보는 엑스포의 상징건물이 웅장함으로 다가온다. 야경이 잘 어울릴것 같은 느낌이 들어 1박을 더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질 않았다. 지금 생각 해보면 오늘도 오동도에서는 `여수 밤바다' 노래를 들으며 많은 연인들이 사랑 고백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사랑이 식어가는 연인들에게 여수의 밤바다를 추천해주고 싶다.

2012-06-04

땅끝마을로의 여행 (16)

여행은 나름 계획속에서 떠나는 여행이 대다수지만 우연히, 아니면 가다보니까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재미는 그어떤 여행보다도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몇해전 떠난 전라도로의 여행이 나에겐 그런 추억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때 이후, 같은 하늘아래에 있는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은 몇 번이나 계속 되었다.찌는 듯한 더위, 그때 초여름은 어찌나 더웠던지, 무기력하고 10m도 채 걸어가기 싫은 나에게 부인이 온종일 떼를 쓰다시피하며 결국 짐을 챙겨 출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목적지가 어딘데” 라는 나의 물음에 “땅끝마을”이라는 짧은 대답한마디에 바로 주저 앉고 싶었다. 어디 가까운 옥계 계곡쯤 물놀이 가지 하고 차를 몰았는데 전라남도 해남의 땅끝마을이라는 청천병력같은 대답이 나온것이었다. 그 시간이 오후 3시, 그 순간부터 나의 고행 시간은 시작 되었다. 일하기 싫어하는 소를 몰고 밭갈이 하는 심정이랄까.전망대서 만끽하는 다도해의 장관… 사계절 내내 관광객 북적 자전거와 연인들의 천국`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도 감동더운 날이라 그런지 차도, 내 마음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벌써 헥헥 숨이 차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징징 거리며 차를 몰고가다보면 대구쯤 가다보면 돌아가자 하겠지. 설마 이시간에 땅끝마을 까지 정말 가자는건 아니겠지 하는 내심 맘속에 기대하며 천천히 차를 몰고 가보지만 그런 말은 나오지 않고, 어느덧 차는 남대구를 지나 88고속도로를 타고 있었다. 떠나기 싫은 여행이라 그런지 머리도 아파오고 몸도 아파오고 , 슬슬 짜증도 나기 시작할때쯤 막내녀석이 차안에 냉냉한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평소 안하던 온갖 재롱을 피우며 억지 개그도 하고 하는 모습에 대한민국 아버지의 근성이 나에게도 발동되었다. 그래 이왕 나온거 즐겁게 가자 싶어 “출발”이라는 구호에, 금세 차안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그때 차창 밖으로 거창IC 가 지나가고 있었다. 순천을 지날때쯤, 언젠가 보성차밭에 한번 가보고 싶었던 기억에 차를 보성으로 몰았다. 목포나 광주 등에서 전시회 기회로 한번씩 올때마다 느꼈던 동해안 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이 눈앞에 계속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의 종착역 보성차밭, 감탄사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더넓은 차밭을 거닐며 온산 가득한 차향을 마시며 아이들과 숨바꼭질도 하고 녹차 국수도 한그릇하고, 사진도 찍고 하다보니 주변에 어둠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순간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것은 숙박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 보성 차밭에도 몇동의 숙박시설이 있었지만 벌써 방은 하나도 없다. 주인에게 숙박할만한 곳을 물어보니 조금만 내려가면 해안가가 나오는데 그곳을 가보란다. 그렇지만 오늘같은 날은 예약을 하지 않았으면 방이 없을거라고 하며 몇군데 전화를 해보더니 순천을 비롯해 반경 30km안에는 방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급히 서둘러 해안가로 내려올때는 어둠이 짙어졌다. 율포솔밭 해변을 내려가니 제법 번화한 곳인데도 방이라곤 한군데도 남아 있지않아 해안을 따라 굽이굽이 내려오는 해안도로가 동해 바다길 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조금더 내려오니 수문해수욕장(?) 해안가가 보인다. 몇군데 알아보니 역시 방이 없어 체념한채 마지막 큰 모텔이 있어 포항에서 왔다며 사정을 애기하니 역시 방이 없단다. 씁쓸히 돌아나오는 우리를 보곤 잠시기다려 보라더니 어느 곳에 전화를 돌렸다. 밤 9시에 예약을 한 손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 있다며, 그때가 밤 9시5분. 집사람과 눈치를 보며 대화내용을 멀리서 듣고있는데 “예약시간 이 지났으니 다른 사람에게 방을 주겠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방값은 5만원. 감개무량이었다. 방도 방이지만 최소 이런 성수기면 15만은 족히 부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밤늦게 아이들과 멀리서온 손님을 위한 마음, 그리고 바가지 요금이 없는곳. 이곳의 인심은 나의 뇌리에 그렇게 박혀 주위사람들에게 해남쪽의 인심을 지금도 자랑하곤 한다. 주인의 배려로 큰방에서 첫밤을 기분좋게 지낸 우리 가족은 다음날 일찍 다시 땅끝마을로 달렸다. 이런 시간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안개가 어찌나 많은지, 안개속으로 파도하나 없는 해안가는 신비감마저 들게한다. 아름다운 드라이브길, 해안길이라는 이정표들이 없어도 그길은 정말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길이었다.한참을 달려 어느작은 어촌마을에 들러 간식이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에 차를 주차하는데 앞에 큰 돌하나가 서있는데`땅끝마을`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는게 아닌가. 주변 풍경들에 매료되어 이미 땅끝마을에 도착하는 줄도 모르고 도착한 것이 우스워, 모두가 한참 웃었다.암튼 이곳이 우리나라 땅의 끝이라는게 뭔가모를 신비감마저 들게하였고 가슴까지 뛰는 이상한 기분을 맛본 경험이었다.땅끝마을은 상상 밖으로 꽤 번화했다. 본래 지명인 `토말`에서 2008년 `땅끝`으로 개명하면서 국토순례단을 비롯한 관광객들이 사계절 내내 국토 최남단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곳 사자봉 정상에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았다. 전망대가 세워지고 전망대에 오르는 모노레일이 개통되면서 한적하던 반농반어 마을은 해남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변신했다.봉화대 위쪽, 사자봉 정상 바로 옆에 세워진 전망대에 오르니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남쪽으로 노화도와 보길도가 보였다. 또 눈을 돌리면 진도를 비롯하여 어룡도, 백일도, 흑일도, 조도 등 크고 작은 섬 20여 개가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해질 무렵, 서해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펼쳐지는 낙조는 땅끝이 갖는 신비감과 함께 더 없는 황홀감을 안겨줬다.돌아오는 길, 큰아들 녀석이 어디서 들었는지 담양에 있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가보자 한다. 광고에서 몇 번 봤지만 이쪽에 있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었다.메타세쿼이아가 길은 담양읍 학동교차로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순창까지 이르는 길에 조성된 가로수 길로, 국도 바로 옆으로 새롭게 국도가 뚫리면서 이 길은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로를 만든곳이다. 그 외에 15번 지방도, 29번 국도, 금성면과 순창군을 잇는 24번 국도 일부 구간에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가로수길의 총 길이 약 8.5km,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 길가에 높이 10~20m의 메타세쿼이아가 심어져 있는데 입이 쩍 벌어진다. 차를 한가운데 세워두고 영화를 찍듯 온가족이 연출을 하고, 집사람과 팔짱을 낀채 걸어가면 아이들이 연신 카메라를 돌려된다. 1970년대 초반 전국적인 가로수 조성사업 때 담양군이 3~4년생 메타세쿼이아 묘목을 심은 것이 현재의 울창한 가로수 터널길이 되었다고 하는데, 국도 24번 확대포장 공사 당시 사라질 뻔 했던 것을 담양군민의 노력으로 지켜낸 결과 현재 담양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나무는 경주 첨성대쪽 능을 따라 가면 내가 즐겨찾는 커피집 앞에 몇그루가 높이 서있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한 그 나무이다. 자전거와 연인들이 즐비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서 극치를 보여주었고 무심히 떠나는 여행이 주는 또다른 세계의 맛을 느끼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오늘 가까운 경주에라도 가서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보며 커피나 한잔 해야겠다.

2012-05-14

청정자연 영덕을 만나다 (15)

모처럼의 주말, 작업 한답시고 매 주말마다 화실에만 박혀 있다 보니 남들이 흔히하는 봄 산행 한번 해보지 못했다. 올 봄은 비도 잦고 날씨도 을씨년스럽고, 이런 저런 핑계로 집사람에게 벚꽃구경도 한번 못 시켜 줬다는 자책감이 생겨 오늘은 하루 투자를 하기로 맘먹고 배낭 챙겨나오라 하니 집사람이 여간 신이난게 아니다. 상가에서 김밥 두어줄 사고 바로 동해안으로 달렸다. 강구항서 축산항까지 동해안 최절정 드라이브 코스가슴 탁 트이는 걷기길 `블루로드` 색다른 풍경 연출풍력발전단지·복사꽃곷 절경도 빼 놓을 수 없는 명소목적지는 지난번 스케치를 위해 알아둔 고래불 해수욕장 바로 밑에 있는 영해 대진해수욕장까지 올라가서 반대로 축산항, 경정해변을 돌아 강구항까지 내려오는 동해바다의 최절정 드라이브 코스를 소개해주겠다는 야심찬 나의 말에 집사람은 연거푸 환호성이다. 라디오에는 Julie London 의 `Sway`가 흘러나오고 있다.`영덕 대게`로 유명한 영덕은 탁 트인 바다와 멋진 해돋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고운 모래사장 등 묵은 마음을 차분히 비워 낼 분위기를 모두 갖추고 있는 곳이다.7번국도를 타고 강구항을 지나 한참을 달려오니 첫 번째 코스 대진해수욕장이 나온다.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되는 폭 200m의 송천천이 있어 여름이면 담수욕까지 즐길 수 있다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이제 30여km의 해안도로 드라이브는 환상적이라 할 수 있다. 절대 혼자는 달리지 마라. 연인과 달려라고 전하고 싶다.해안의 비경은 생각보다 거칠고 동해안의 생동감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한참 달려오다 보면 축산항이 나온다. 규모는 강구항에 비해 작지만 4, 5월에 열리는 물가자미 축제나 죽도산의 끼고 동해안을 연결한 블루로드가 잘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곳이다. 전망대로 오르는 산책로 계단도 예쁘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숨이 차다. (에고, 담배 끊어야 겠다.)전망대에 오르니 푸른 동해와 더불어 그림같은 경관이 펼쳐진다. 저 멀리 영덕의 풍력 발전소 단지가 가물가물 보인다. 정자 아래 주차를 하고 잠시 영상비디오를 촬영하기 위해 해안 바닷가에 오르니 2~3m 파도가 장관이다.시간만 되면 블루로드를 끝까지 한번 걸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차를 몰아 내려간다. 멀리 보이는 풍력 발전기만 보며 좁은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니, 예쁜 펜션들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있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바람개비 모양의 발전기는 영덕군 전체 전력 소비량을 모두 소화해 낼 수 있는 풍력발전기다.청정 자연에 딱 어울리는 청정 에너지인 셈이다.강축도로 중간쯤인 영덕읍 창포리 해맞이공원에는 등대 전체가 대형대게 형상으로 뒤덮인 창포말등대와 절벽을 따라 해안까지 내려가는 계단에 설치된 대게형상의 루미나리에는 영덕에서만 볼 수 있는 색다른 볼거리다.또한 해맞이공원 위쪽 태백준령자락에는 지난 2005년 가동에 들어간 영덕풍력발전단지가 있어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날개길이만 41m에 이르는 24개의 풍력발전기가 동해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타고 `휘~익, 휘~익`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다보면 어느새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에 서 있는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든다.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은 `블루로드`라는 트레킹 코스. 강구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50km의 가슴 탁 트이는 걷기길이다.`블루로드`를 아는 사람들은 이름을 참 잘 지었다고 입을 모은다. 비록 순우리말은 아니라지만 해변을 끼고 걷는 코스의 특성을 곧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영덕 블루로드는 세 코스로 이뤄져 있다. 각 구간 마다 색다른 풍경과 정취를 담아낸다.A코스(17.5km)는 강구항에서 고불봉과 풍력발전단지를 거쳐 창포리 해맞이공원에 이르는 산길이다. 싱그러운 피톤치드 속에 멀리 펼쳐진 동해의 푸른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숲길이다. 아울러 해맞이공원~대탄~석리~경정~차유~축산항을 거치는 B코스(15km)는 영덕 해안의 진수를 맛보는 코스이다. 아름다운 바닷길을 굽이돌며 표주박처럼 들어선 갯마을 포구를 경유하는 그림 같은 트레킹 길이 펼쳐진다. 마지막 C코스는 축산항~대소산 봉수대~목은 이색(고려시대 학자)의 산책로~괴시리 전통마을~고래불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문화유산 답사길이다. 아름다운 자연 이상으로 영덕의 내력과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다.블루로드의 시작은 영덕대게의 집산지 강구항이다. 포구 뒤편 산등성이 마을로 올라가는 좁은 길이 그 출발점이다. 버스정류장에서 부터 길바닥에 노란색 화살표를 그려두었다.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10분 남짓이면 마을 뒤 언덕배기에 오를 수 있다. 자그만 오두막이며, 빈집이 섞여 있는 전형적인 바닷가 산동네의 모습이 정겹다.국내 최대 복숭아 산지인 영덕의 복숭아 꽃 절경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다.무더운 날씨가 시작된다. 여행객들에게 영해 축산항에서 강구항까지의 드라이브 코스를 꼭 알려주고 싶다.큰 맘먹고 대게 한마리 시켜 집사람 앞에 놓으니 스스로 뿌듯하다. 이번 여행은 모처럼 집사람에게도 좋은 추억하나 만들어 준 기분좋은 여행이었다.

2012-05-07

포항 구룡포 (14)

호미곶으로 널리 알려진 동해안 어업전진기지 포항 구룡포.1920년대 일본인들이 항구를 만든 이후 어업 기지로 유명해졌다. 우리가 겨울철에 좋아하는 대게, 오징어, 고래, 과메기는 상당 부분 이 곳에서 잡히고 생산된다.구룡포항이 최근 대게의 주산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전국 최대 대게 생산지인 구룡포는 맛좋은 대게가 저렴하게 판매되면서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전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다.고래고기는 울진에, 대게는 영덕에 명성을 빼앗겼다지만전국 최고 수산물 항구의 명성은 줄 잇는 관광객들이 입증내달 11일까지 펼쳐지는 `수산물 한마당잔치` 즐겨 볼만 해지난 2월15일부터 오는 5월11일까지 `구룡포 수산물 한마당 잔치`가 열리고 있는 이곳은 아홉 마리 용이 승천 포구라고 불리워지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예로부터 수산물의 본고장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구룡포 사람들은 “고래고기는 울진에 빼앗기고 대게는 영덕에 명성을 빼앗겼다”고 말한다. 그래서 포항시와 구룡포수협은 구룡포항을 되살리기 위해 지난 2월 중순부터 3개월 동안 `수산물 한마당잔치`를 거방지게 열고 있다.이 축제는 포항이 어업 전진기지임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고 수산물을 싸게 팔기 위해 마련한 장터다.구룡포를 대표하는 수산물인 문어와 70% 정도만 말린 반건조 오징어도 다른 지역보다 값이 싸다.맛과 영양이 풍부해 봄철 보양식으로 알려진 동해안 돌문어는 인기가 높다. 싱싱한 횟거리도 군침을 돌게 한다. 아직은 바닷바람이 찬 포항 구룡포는 청정해역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수산물들로 들썩이고 있다. 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이곳 저곳을 둘러봤다.구룡포의 자랑인 과메기 문화거리와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거리인 일본인 가옥거리, 공원, 장기 목장 성, 장길리 바다낚시공원, 호미곶 해맞이광장 등 명소를 둘러봤다. 포항시는 구룡포항 인근 장길리에 `낚시공원`을 만들었다. 오는 6월 전국에 바다낚시대회를 유치해 구룡포항을 전국 최고의 수산물 항구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가는 곳곳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과메기 문화거리는 포항시가 과메기 특화사업의 하나로 구룡포항에 조성했다고 한다. 포항시는 구룡포항 부두 280여m(6천700여㎡)에 두 곳의 과메기 광장을 만들고, 각각 `미르광장` `아라광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미르는 구룡포(九龍浦)의 이름 중 용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고, 아라는 바다를 뜻하는 또 다른 우리말이다. 광장에서 각종 문화행사와 축제를 펼치거나 과메기 특판행사도 열 수 있다.불포화지방산이 많아 겨울철 영양간식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대량 생산체제도 이뤄졌다. 과메기는 이제 영일만 어민들의 중요한 소득원이 됐다.주변에는 어부가 일렁이는 파도를 뚫고 꽁치를 잡는 모습을 형상화한 벽면 조각이 있다. 또 불가사리·고래 같은 바다와 관련된 여러 생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조형 벤치와 분수대·야외무대도 꾸며졌다.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구룡포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가옥이 100년 가까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적산가옥은 일제 잔재라는 이유로 그동안 방치돼 왔지만, 보존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정식 문화재로 등록을 기다리고 있다. 해안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색다른 풍의 목조건물들이 즐비하다.1930년대엔 이 일대에만 모두 200여 채가 들어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지금은 수십여 채만 온전히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일제시대 구룡포항이 동해안의 어업 전진기지로 발전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했는데, 구룡포가 지금처럼 큰 어항이 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구룡포항의 수산물 잔치마당은 북방파제(활어 위판장) 입구의 넓은 바닷가다. 입구에 `구룡포 수산물 한마당잔치`란 큼직한 간판이 내걸려 금방 눈에 띈다.지역에서 생산, 위판되고 있는 대게, 오징어, 문어, 과메기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구룡포 수협이 마련한 잔치마당 안으로 들어가면 20여 개의 천막이 줄지어 서 있다.행사장에는 관광객들을 위해 특산품별 부스가 설치돼 있다. 대게 판매장과 간이식당 6동 등 12동의 식당과판매부스가 설치돼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한 수산물을 즉석에서 맛 볼 수 있다. 지금은 축제 초기보다 조용한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주말이면 차량과 인파가 몰려든다. 중간 유통마진을 최소화해 저렴한 가격으로 직거래 판매하는 탓인듯 했다.

2012-04-30

경남 통영 욕지도 (13)

시인 백석은 `통영`이라는 시에서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며 통영의 활기찬 삶을 부러워했다.경상남도 통영시 최남단에 위치한 욕지도는 한려수도 끝자락에 흩어진 연화도·두미도·거칠리도·노대도 등 39개의 섬을 아우르는 욕지면의 본섬이다.비록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에서 비켜나 있지만 빼어난 경관은 숨어 있는 보석과도 같은 곳이다.욕지도는 통영항에서 뱃길로 32㎞ 떨어져 있다. 욕지(欲知)는 `알고자 한다`는 뜻인데 주변의 세존도, 연화도와 함께 불교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화엄경의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에서 따 온 말이라 한다.푸른 숲이 어우러진 기암절벽과 갯바위, 점점이 떠 있는 새끼섬들, 그리고 티 없이 파란 바다가 마치 지중해의 작은 섬을 연상하게 한다. 섬 중심에 우뚝 서 있는 해발 382m의 천왕산은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울창하고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욕지도 관광 안내판에서는 “욕지도는 경남 통영항에서 뱃길로 32km 거리에 떨어져 있는 섬으로 연화도·상노대도·하노대도·초도 등 39개의 섬을 아우르는 연화열도의 본섬”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면적 14.62㎢에 해안선은 31km에 이르는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아담한 섬으로 `알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섬`으로 해석하고 있다.또한 동네 어른들은 “처자가 시집가기까지 쌀 서말도 못 먹고 간다”는 이야기로 애환을 말한다.욕지도는 사방이 탁 트인 바다요,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 절경이 명품이다.어느 방향으로 가도 명품 풍경이 펼쳐지지만 이를 좀더 자세히 말하면 선착장을 기준으로 방향을 정하는 것이 좋다. 왼쪽 방향은 노적마을과 삼여전망대 구간으로 일출이 멋지고 오른쪽은 선착장에서 덕동마을까지 코스로 낙조가 멋지다. 단 덕동마을 가는 길은 요즘 공사구간이 있어 S-OIL 주유소 뒤편 길을 이용해 산 언덕에서 KT 전파탑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섬 일주도로로 진입해야 한다. 여기서 전자는 아주 특별한 일출과 거북바위, 삼여도 등 욕지도의 대표적인 비경을 볼 수 있는 코스다.후자는 낙조와 연화열도를 이루는 연화도와 노대도와 두미도의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특히 `낙조 좋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해넘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하여 욕지도에서 여행 방향을 정할 경우 오전 시간이면 일출을 겸한 시계방향으로, 오후는 일몰을 겸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보는 것이 좋다.욕지도 섬 일주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촛대바위와 세 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삼여도, 공룡발자국바위 등 수려한 해안 절경이 그것이다. 특히 삼여도 고갯마루는 1970년대 당대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출연한 이영하·윤정희 주연의 영화 `화려한 외출`(1977년작)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하여 욕지도 여행은 네 가지로 집약된다. 섬을 일주하는 드라이브와 등산 그리고 걷기. 여기에 요즘 유행하는 달빛·별빛 여행은 욕지도의 숨겨진 또 다른 풍광을 볼 수 있다.특히 달빛여행의 경우 보름달 기준 전후 3일이 최적기임을 잊지 말자.먼저 드라이브의 경우 욕지항 선착장에서 방향에 상관없이 섬을 한 바퀴 도는 데 40분 정도 걸린다.중간중간에 해안 구경을 여유롭게 할 경우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등산은 천황봉(392m)을 비롯해 약과봉(315m), 대기봉(355m), 망대봉(205m), 일출봉(190m)을 아우르는 5개의 등산 코스가 있다.각각 1시간 30분~2시간 정도 소요되며 이를 전부 아우를 경우 4시간 30분~5시간 걸린다. 산세가 높지 않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등산은 야포버스정류장과 부두가 등산의 시작과 끝 지점에 해당한다.일반적으로 일출과 연화열도의 서정적 풍경을 보려면 망대봉 코스(205m)가 좋고, 삼여도와 항구조망은 천황봉 코스(392m)가 일품이다.그 중에서도 천황봉이 가장 인기.천황봉 중턱에 있는 태고암 입구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후 산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전망대까지 도착한다. 아니면 새천년기념탑에서 가로지르는 지름길도 있다.욕지도는 산지 지형이라 논이 거의 없고 비탈밭이 많다. 밭은 끈적한 찰황토가 아니라 물이 잘 빠지는 마사토에 가까운 황토밭이다. 그래서 고구마 농사가 잘 된다.욕지 고구마는 해남 화산 고구마만큼이나 맛있다. 고구마를 잘라서 말린 고구마 빼떼기도 유명하다. 욕지도에서는 고구마를 `고메`라 하는데 욕지도 고메 막걸리는 고구마 케이크 속의 고구마 속살보다 더 달콤하다. 이번 욕지도 여행길에는 욕지도의 할머니가 집에서 항아리에 직접 담근 고메 막걸리를 맛볼 수도 있다.또 하나, 욕지도의 명물은 밀감이다. 사람들은 제주도에서만 밀감이 나는 줄 알지만 남해안의 거의 모든 섬들에 밀감나무가 자란다. 특히 욕지도의 밀감은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토질을 조사한 후 시험재배하면서 재배가 시작됐다. 노지에서 나는 욕지도 밀감은 달고 새콤한 맛이 야생의 밀감 맛 그대로다.욕지도에는 과거 물질을 왔다가 욕지도 총각에게 다리가 잡혀 몇십 년째 못 떠나고 사는 제주 해녀들이 여럿이다. 그래서 욕지도 뱃머리에는 욕지도 해녀가 직접 물질해 온 전복, 해삼, 소라, 합자(조선홍합)는 물론 해녀의 남편인 어부가 낚아온 싱싱한 횟감들을 맛볼 수도 있다.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한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e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준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2012-04-23

전남 순천시 송광사 (12)

보조국사 진각국사 등 16명 국사 배출 `무소유` 법정스님이 입적·출가하기도“평화의 적은 어리석고 옹졸해지기 쉬운 인간의 마음에 있다. 평화를 이루는 것도 지혜롭고 너그러운 인간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이기보다는 인간의 심성에서 유출되는 자비의 구현이다.”(법정 스님 말씀)이번 주는 평생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했던 법정 스님의 입적 및 출가 본사인 전남 순천시 송광사로 여행을 떠난다.남도의 영산인 조계산의 넉넉한 품을 끼고 있는 송광사는 1200여년 전인 통일신라 말엽에 혜린선사가 송광산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후 고려 중엽인 12세기에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정혜결사 운동을 펼치고 조계산 수선사로 개칭했고 이후 고려 말에 조계산 송광사가 됐다.송광사는 법보사찰인 해인사와 불보사찰인 통도사와 함께 삼보(三寶)사찰을 이루는 승보(僧寶)사찰이다.보조국사 진각국사 등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대사찰이다. 송광사의 이름 높은 스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지눌이다. 1190년 지눌 스님은 불교 쇄신 운동인 정혜결사 운동을 이곳 송광사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후 자신을 포함한 16국사를 이 절에서 배출하게 하는 등 수행도량으로서 기반을 닦았다.대웅전을 중심으로 50여 개의 크고 작은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국보와 보물, 지정문화재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대사찰이다. 본전 위쪽으로 오르면 2010년 입적한 법정스님이 17년 동안 머물던 불일암이 있다. 불일암에는 스님의 유골도 안치돼 있다. 불일암은 광원암, 천자암과 함께 송광사의 암자다.기록에 송광사에는 열여섯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여섯 암자 중 하나이다. 송광사 매표소 입구의 주차장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차량이 장악하고 있었다.불일암은 송광사 매표소에서 북서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매표소를 지나 개울을 끼고 경내로 들어섰다. 물소리와 산새소리가 교향곡보다 아름답게 들려온다. 대숲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가니 대숲으로 꾸며진 불일암 입구가 나온다.대숲 출입구의 아치를 보면서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생각난다.“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스님이 35년 전 심었던 후박나무와 해우소도 눈에 들어온다.이제 800년 수령의 곱향나무 쌍향수로 유명한 천자암을 찾아 나선다. 천자암은 송광사의 산내암자다. 천자암으로 들어서는 길은 마루건물인 법왕루 아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천자암 절집이다. 옆으로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유명한 쌍향수가 고개를 들어야만 보일만큼 크게 서 있다. 웅장한 모습이다. 이 곳엔 800년 남은 두 그루의 곱향나무(높이 13m·천연기념물 88호)가 자란다. 두 마리의 용이 솟구쳐 오르는 듯한 나무의 모습이 영험스럽다.나무의 주름진 기둥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가지를 휘감으며 800년을 자랐다는 나무다. 두 마리의 용이 솟구쳐 오르는 듯한 나무의 모습이 영험스럽다. 귀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위용이 대단하다. 조계산에서 수도하던 보조국사와 제자가 지팡이를 나란히 꽂아 놓은 것이 뿌리를 내려 자랐다고 전해진다. 천연기념물 88호인 이 나무에선 길고 긴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천자암은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나란히 꽂은 곳에 절집을 짓고 천자암(天子庵)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두 그루의 나무만 남고 절집은 스러져 갔다. 현재의 절집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송광사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腹藏)유물이 있는데 조선 시대 복식사와 서지학사 인쇄문화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돼 2010년 8월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송광사의 많은 건물들이 한국전쟁 통에 불탔지만 16국사의 영정을 모시는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감, 고종제서 등 국보 3점을 포함해 32점의 문화재가 보존돼 있다. 쌀 7가마 분량의 밥(4천인분)을 담아둘 수 있다는 대형 밥통 `비사리구시`도 볼 만하다.

2012-04-16

쌍계사 벚꽃길을 가다 (11)

봄 전령사 벚꽃이 절정이다.경남 하동에서 가장 유명한 명물인 쌍계사에도 벚꽃이 활짝 피었다.이곳에 가기까지 화개장터에서부터 이어지는 도로변을 수놓은 십리벚꽃길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나무마다 풍성하게 핀 벚꽃의 아름다움에 그저 탄성만 나온다. 하얀 눈처럼 피어난 벚꽃은 터널을 이뤄 더욱 운치를 더한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선 꽃터널 아래로 바람이 불면 꽃잎이 휘날리면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걸으면 영원한 사랑 얻는 `혼례길` 로도 불려신라 성덕왕 때 창건한 쌍계사 차(茶) 시배지로서의 인연도 간직서울 여의도 윤중로 벚꽃은 비교도 안 되는 수많은 꽃들이 눈처럼 휘날리며 향기를 뿜어대는 장면은 장관이다십리벚꽃의 출발지인 하동 화개장터는 1948년 나온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다. 소설 `역마`에는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의 시오리길은 언제 걸어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10리벚꽃길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길 100선 가운데 최우수상을 수상한,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아름다운 꽃길이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5km에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1929년부터 2년여에 걸쳐 주민들이 직접 심은 것이다. 신작로가 완성된 뒤 하동군의 유지들에게 자금을 갹출했고, 복숭아 200그루와 벚나무 1천200주를 가로수로 심어 지금의 꽃을 피웠다.이곳 10리벚꽃길은 `혼례길`이라고도 불린다.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이 길을 함께 걸으면 사랑이 이뤄지고, 영원하다고 한다. 이 길을 따라 수년 전 하동군이 만든 산책로에는 영원한 사랑을 바라며 두 손을 꼭 잡고 어린 아이처럼 걸어가는 청춘남녀들이 수두룩하다. 이때 날리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으면 그해가 가기 전에 큰 행운이 온다는 이야기도 있다.옛날 시골장터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화개장터에는 도토리묵, 국밥을 파는 주막과 산나물, 녹차 등의 특산품을 파는 노점들이 줄지어 들어서 흥겨움을 제공한다. 또 호미, 낫 등 전통 농기구 등을 만드는 대장간이 있어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이들과 동행한 가족여행자들에게는 더욱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십리벚꽃길 외에도 쌍계사 곳곳에서도 벚꽃을 감상할 수 있다. 사찰 안팎으로 군락을 이루며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하얀 잎이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년(서기 722년), 선종 육조 중 하나인 혜능스님의 정상(頂相·머리)을 모시고 당나라서 돌아온 대비, 삼법 두 화상이 꿈에서 `눈 쌓인 계곡 가운데 칡꽃이 피어있는곳(雪裏葛花處)에 정상을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고 찾아다니던 중, 지리산 자락서 호랑이의 안내를 받아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신라 성덕왕 때(722년) 지어진 절로 고색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국보 한점과 보물 여섯 점을 보유하고 있으니 꼭 찾아보시길. 문화재 이외에도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쌍계사 입구 차시배지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차는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여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재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쌍계사는 차와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의 명령에 따라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쌍계사 입구에 차시배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확인할 수 있다. 쌍계사는 사시사철 자랑하는 멋과 맛 때문에 사찰이 지닌 진정한 보물을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아니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쌍계사의 진정한 멋과 맛은 창건역사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흔적도 경내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쌍계 석문을 지나면 차 종자를 가져와 처음으로 심은 것을 기념해 세운 차 시배지를 만나게 된다. 대 이슬을 먹고 자라 생로병사를 초월한 신선들이 즐겼다던 죽로작설차(竹露雀舌茶)의 향을 좇아 쌍계사를 찾는 일은 품격 높은 여정이다.쌍계사 안에는 최치원이 진감선사를 기리며 글을 지었다는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47호)가 있다. 여기에는 `그가 범패를 매우 잘하여 금옥 같은 소리가 구슬프게 퍼져 나가면 상쾌하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여 능히 제천을 기쁘게 할 만하였다`라는 대목이 기록돼 한국 불교의 옛 멋을 느끼게 한다.

2012-04-09

밀양 표충사를 가다 (10)

신라 진덕여왕때 창건…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임란 당시 공 세운 사명대사 충절 기리기 위한 `표충사당` 지어통일신라시대 추정 3층석탑 등 문화재 즐비… 템플스테이도 유명“花流水認天台半醉閑吟獨自來”`떨어지는 꽃이 강물 위로 흐르는 데서 넓은 세상을 알고 술에 반쯤 취하여 한가하게 읊으며 혼자서 왔다`낙화유수(花流水)…. 당나라 시인 고변이 지은 시의 구절에서 유래된 성어로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을 남자와 여자에 비유하여 남녀가 서로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정을 지니고 있음을 뜻하기도 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뜻하기도 한다.오랜만에 보는 봄비는 훈훈한 바람마저 있어 방금 터져 나오는 홍매(紅梅)의 자태가 더없이 아름답다. 붉은 매화꽃에 촉촉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노라니 잠시나마 나 역시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 놓는 듯 편안함이 찿아온다. 조선시대의 대승 사명대사가 상동암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또한 구구절절 이해가 되는듯하다. 참 오랜만에 밀양을 왔다. 어릴 적 부산에 살면서 기차타고 친구들과 여름이면 참 많이 와본 곳이지만 지금은 주변환경이 너무 많이 바뀌어 낯설기까지 하다. 먼저 영남루에 올라 강을 굽어 보며 옛 선비들이 저 강을 보며 시조타령을 한 것처럼 나 역시 노래 한 곡조 올리고, 맞은편에 있는 천진궁을 잠시 둘러본다. 천진궁은 역대 창조 시조의 위패를 모시는 공진관의 부속건물로 단군, 부여, 고구려 등의 시조를 모시고 있었으나 일제시대 때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맘이 찹찹, “에이 일본X, 나쁜XX” 하지만 1957년에 보수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단다.여기서 차로 15km쯤 가면 이번 여행의 목적지 표충사가 있다.표충사는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에 위치해 있다. 천황산 산기슭에 위치한 사찰을 병풍처럼 두른 산새가 일품이다. 사찰 내로 들어서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는 표현이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표충사를 둘러싼 산세는 기골이 장대한 의병들이 병풍처럼 믿음직스럽게 서 있는 모습을 떠오르게 할 만큼 웅장하다. 이곳에 모셔진 3대 선사의 기개가 절을 감싸고 흐르는 듯 범상치 않은 기운마저 느껴진다. 완벽한 조화미를 뽐내는 표충사 3층석탑과 표충사 템플스테이가 유명하다.경상남도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절로 고풍스러운 사찰건물과 주변경치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탬을 자아낸다.신라 진덕여왕 8년(654년)에 창건돼 사명대사의 호국혼이 깃든 사찰로 유명하다.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서산대사를 모신 사당. 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 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해 제자들이 1669년에 건립했는데, 정조대왕이 친히 표충사라 사액했으며,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표충사 앞엔 편안한 표정으로 차단지를 들고 앉아계신 노스님의 동상이 있으니 바로 초의선사다. 16세에 출가한 후 40여년간 일지암에서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었던 선사는 시와 글과 그림에 능통한 명인이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를 정립한 다성(茶聖)이었다.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의 격으로 표충서원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해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뀐 것이다.임진왜란 당시 승려로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이겨낸 사명대사의 충의가 서려 있어 역사와 불교문화를 만나볼 수 있다.표충사의 옛 이름은 대나무가 많아 죽림사였다. 대나무 밭은 지금도 표충사를 감싸고 있는데, 그 대나무들이 바람에 어지러이 흔들릴 때 영남 알프스처럼 웅혼했던 사명대사의 혼이 용이 돼 스치는 것처럼 보인다.표충사는 사명대사에 얽힌 스토리텔링 이외에도 문화재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7.7m의 3층 석탑은 기단부가 한 층으로 돼 있고 1층 몸돌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아 2층 기단의 기능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이런 구성은 탑의 키가 실제보다 커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어 절 뒤의 재약산과 잘 어울린다. 네 단의 층급받침을 가진 지붕돌 처마 끝마다 풍탁이 걸려 조심스럽게 바람에 몸을 흔든다.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인 대광전, 팔상전, 명부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인 만일루, 표충서원 등이 있다. 또한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은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현존하는 최고의 고려시대 향로이다.이 밖에도 보물 제467호인 표충사 삼층석탑, 중요민속자료 제29호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인 표충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인 표충사비 등이 있다. 절 일원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돼 있다.비 오는 날의 표충사. 홍매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나 또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큰 뜻하나 새기며 돌아왔다.

2012-04-02

영천 은해사에서 사색을 즐기다 (9)

대구~포항 고속도로를 타고가다 청통IC에서 내려 청통방면 919번 도로를 타고 조금만 가다보면 은해사라는 푯말을 볼 수 있다. 영천시 청통면 팔공산 동쪽자락에 자리한 은해사는 사찰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해안사`가 그 유래이다. `안개 낀 팔공산 자락이 구름으로 뒤덮일 때 절 마당에서 바라본 광경이 마치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고 해서 `은해사(銀海寺)`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조선 4대 부찰의 하나였으며 조선 인종의 태실을 수호하는 천년고찰인 은해사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보화루, 대웅전, 불광 등 편액마다 추사체가 보인다.신라 헌덕왕 창건 이후 잇단 화마로 창건·중수 거듭한 아픔 간직거조암 영산전 등 문화재 3점·사중 보물 60여점 등 볼거리 수두룩은해사는 팔공산 동쪽 기슭 한 곳 전체가 경내를 이뤄 풍광이 빼어나다. 일주문을 지나면 300m에 걸쳐 조성된 송림이 아름답다. 이 길을 금포정이라 불렀다. 일체의 생명을 살생하지 않는다는 뜻. 사찰로 가는 길 중간에는 1천년을 산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엉켜 있는 모양이 시선을 잡는데, `사랑나무`라 이름 붙인 재치가 재미있다.은해사는 입구에서 대웅전까지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연인들이 걸으면 참 좋을 듯 한 코스이다. 엄청나게 높은 소나무길 사이로 가느다란 햇살이 눈부시게 비춰지고 태고에나 빚어진 듯 한 지층들이 군데군데 그 모습이 드러나 있어 사뭇 노송들과 함께 어우러져 신비감마저 돌게 하는 곳이다. 또한 소나무 사이사이로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어 여름에는 시원한 냉기가, 가을에는 단풍잎이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의 감성을 어루만진다.전국 31본산(本山)의 하나이자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신라 헌덕왕(809년)때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출발했으나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돼 중창과 중수를 거듭했다. 1545년 조선 인종 때에 소실돼 1546년 명종 때에 천교(天敎)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으며. 법당과 비석을 세워 인종(仁宗)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하였다고 한다.특히 1847년 헌종 13년에 일어난 화재는 은해사 창건 이래 가장 큰 불로, 극락전을 제외한 1천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됐다고 한다. 이후 대웅전을 비롯해 여러 건물이 중창됐는데, 이 때 다시 지어진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각의 3대 편액이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그리고 이 절과 부속 암자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3점의 문화재와 기타 60여 점의 사중 보물, 24동의 건물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중국식 건축양식을 본뜬 국보 제14호의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須彌壇), 보물 제514호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운부암·거조암·기기암·백흥암·묘봉암·중암암·백련암·서운암 등 8개가 있다.대웅전 옆 다방(茶房)에선 스님과 신도, 방문객이 자유롭게 어울린다.대웅전의 현판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특히 본찰 자체보다 거느리고 있는 암자들이 유명한 사찰이다. 대표적인 암자로 거조암과 백흥암을 들 수 있다.거조암은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있다. 신라 경덕왕때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설과 효소왕때 원효가 창건했다는 두 설이 있다. 창건할 때 이름은 거조사(居祖寺 )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영산전이라는 국보 제14호가 있는데 불단의 장식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 건물은 단청이 없다. 이런 집을 백골집이라고 한다는데 처음부터 단청이 없었다고 한다. 긴 장방형 건물에 살창까지 있는 점으로 미뤄볼때 본디 법당이 아닌 경전을 보관하던 곳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그 건축물이 아주 볼만하다. 고려 우왕 원년에 처음 지은 이 건물은 옆으로 긴 건물에 출입구가 하나고 통풍을 위한 트인 창살만 달려 있다. 이런 건물의 특징 때문에 원래의 용도는 경판과 서책을 보관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전각 안에 모셔진 526분의 석조나한상이 인상적이다. 돌아보다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나한상이 전생의 자신의 모습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곳은 경북도에서 손꼽히는 `소원명소`로 사흘간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백흥암 역시 극락전이 보물 제790호로, 또 수미단이 보물 제486호로 지정돼 있어 암자라기보다는 거의 사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성보박물관은 주지를 지낸 일타 스님의 유품을 비롯해 추사 글씨 등을 보관한 성보박물관은 지난 2009년 5월에 개관했다. 일타 스님의 집안은 친가, 외가를 통틀어 49명이 출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은해사의 역사의 깊이를 살펴볼 수 있는 이곳에서는 보물 제1604호인 금고 및 금고거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을 볼 수 있다. 불화, 나한상, 범종, 경궤 등 진품을 감상할 수 있다. 건축 면적 462㎡(약 140평), 전면 9칸, 측면 5칸의 전통 목조건축물로 전시관과 유물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은해사 괘불화, 대웅전 아미타삼존도 등 불화들은 사찰에 걸린 복제품보다 색깔이 선명하고 훨씬 더 화려한 진품이다. 이와 함께 일타 스님의 친필화, 장삼, 사진 등 유품을 전시해 스님의 행적을 알 수 있다.은해사는 몇 번 와본 곳이지만 매번 올 때마다 그 기분이 달라진다. 그리 관광객도 많지 않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삼삼오오 이곳저곳에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들이 어디 한적한 공원에서 사색을 즐기고 있는 듯 평온하게 보인다. 인공폭포등과 함께 주변 산새가 좋고 천년의 고찰의 기운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이곳 은해사를 봄이오는 길목에 한 번씩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2012-03-26

운보의 집을 가다 (故 운보 김기창 화백의 사저) (7)

청주에 내가 아는 지인 중에 한의원 원장님이 한분이 계신다. 차(茶)를 너무 좋아해서 진료는 일찌감치 그만두고 차에 빠져, 발효차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계시는 분이다. 원래는 전주 쪽에서 한의원을 하시다가 이 곳 청주로 작업실(?)을 옮겨 온지가 벌써 오랜 세월이다. 집에 차가 떨어질 때쯤이면 어김없이 보내주시며 “한번 올라오쇼” “이번에 제대로 된 게 하나 나왔소” 하시는 게 마음이 무거워 작업실도 구경할 겸 무엇보다 그곳에는 평소 존경했던 운보 김기창(1913~2001) 선생님의 운보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해서 냅다 차를 몰았다. 요사인 도로망이 좋아 김천에서 중부내륙선을 타고 낙동JC에서 새로난 당진~상주고속도로를 타고 문의IC에서 내리면 청주가 금방이다. 도착한 원장님의 작업실은 꽤 산속 깊은 곳에 자릴 잡았다. 녹차의 향이 진하게 배어 있는 원장님의 작업실에는 수없이 많은 단지들과 냉장고에서 차들이 발효되고 있었다. “진료나 하시지 뭐하신다고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라는 물음에 “사람 그만큼 살려 놨으니 이제 내 하고 싶은 것 해야지요”라고 큰 웃음 지으시는 모습이 대인(大人)의 모습 그대로였다. 입가에 녹향이 묻어 있는 상태로 작업실을 나와 청원 공설운동장 쪽으로 차를 몰아 운보의 집으로 향했다.운보 선생님은 1990년 내가 대학을 졸업 후, 대구의 갤러리에서 큐레이터 일을 잠시 보고 있을 때 처음으로 뵈었다. 흰 수염 날리며 하얀 한복에 조금은 짧아 보이던 바지 사이로 빨간 양말과 흰 고무신이 인상적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크게 인사하고 옆에 서서 기념촬영을 하는데, 큰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듯한 기운을 느꼈었다. 어린 나에겐 그만큼 근접할 수 없는 위엄까지 뿜어져 나오는 그런 선생님이셨다.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428-2. 설레는 가슴을 않고 도착한 곳.운보 김기창 선생이 71세 되던 해인 1984년에 완공해 2001년 1월 작고 할때까지 생활한 곳이란다.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인적이 전혀 없었는데, 드라마 `김탁구`의 어머니가 살던 촬영장소로 쓰이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져 조금 더 유명해진 곳이다. 운보 선생님은 7세 때 청력을 잃었으나 그의 작품은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한국미술계의 거장이다. 최소한 몇 해 전 친일로 분류되기 전 까진 말이다. 이 곳은 운보 선생의 어머니 고향으로 인연이 된 곳으로 높은 대문을 지나 정원까지 2개의 중문을 지나면 안채가 나온다. 일반적인 고택의 웅장함과 격식의 복잡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넓은 정원에 여러 가지 희귀수석과 노송들이 즐비한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는 한 채의 한옥은 그저 한번 살아 보고픈 그런 아름다운 가옥이다. 이곳에는 고택을 비롯해 미술관, 연못과 정원, 조각공원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운보의 묘 등이 있다.고택 안에 들어서면 생전에 바깥을 보며 무료한 시간을 낚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단조로운 의자하나가 그곳에 앉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낸 선생님의 모습처럼 홀로 있다.고택을 다시나와 약간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보면 운보 미술관이 나온다. 모처럼 먼저 온 이가 있어 홀로 그 길을 따라 올라 가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친일로 분류된 후 사람들의 인적이 끊겨 버렸고 지난번 방문했을 때 주변 이들의 말로는 군에서의 지원도 끊겨버려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최근 전면 개·보수해 재개관했다고 한다. 드라마 촬영장소로 쓰인 탓일까. 이 곳엔 선생님의 독창적 예술세계와 전 생애를 걸친 주옥같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부인 우향 박래현 화백의 작품과 북한에 있는 동생 김기만 화백의 작품도 볼 수 있다. 한때는 한국미술의 거목으로서, 또한 한 TV에서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1위, 타계하시기 몇 년전 한국예술평론가협회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됐던 선생님이 지금은 친일로 분류돼 교과서에서도,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이 거대한 거목이 사라져 버렸다.사람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까? 아니, 한의원 원장님처럼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모든 것이 풍족한 세상, 하지만 36년이라는 긴 식민지 그시절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었을까?“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듣지 못한다는 느낌도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지금까지 담담하게 살아 왔습니다.//더구나 요즘같이 소음 공해가 심한 환경에서는//늙어 갈수록 조용한 속에서 내 예술에 정진 할수 있었다는 것은//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생각도 듭니다.//다만, 이미 고인이 된 아내의 목소리를//한번도 들어보지 못한게 유감 스럽고//또 내 아이들과 친구들의 다정한 대화 소리를//들어보지 못한 것이 한이라면 한(恨)이지요….”(운보의 어록 中)이 어록을 읽어 내려가며 난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었다.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한 사람의 화가로서, 난 다음에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선생님, 바라건대 이제는 두분 다 고인이 되셨으니 저 세상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사랑하는 아내와 대화를 마음껏 하시며 웃고 계시겠지요.

2012-03-12

영주 부석사 (6)

지난번에 의상대사와 선묘 낭자의 사랑이 얽힌 `부석`이라는 바위에 얽힌 전설을 잠깐 언급했는데 좀 더 자세히 언급해보자. 여행에서 어떤 곳이던 전설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으니까 말이다. 멀리 한쪽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해설사의 이야기를 잠시 빌린다.신라 문무왕 원년(661년)에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갔을 때 의상을 연모한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고 한다. 스님이 장안 종남산에서 지엄 문화에 10년 수학을 하던중 당 고종이 신라와의 전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묘가 의상대사가 간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해 스님의 배를 호위해 무사히 귀국하게 한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을 펴기 위해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하니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도둑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바위를 공중에 들어 올려 물리쳤는데 그 바위를 `부석`이라고 불렀다 한다.여행의 참맛 선사한 의상대사의 전설 `부석`과 `선비화`에 감개무량하고…세상을 다 가진 듯 드넓은 세계로 이끌어준 무량수전 앞 절경에 또 감탄해설사의 말로는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두 바위사이가 공중에 떠있다고 하지만 사실여부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전설은 그렇게 믿을 때가 더 가치가 있다고 보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도 고적지나 명승지마다의 전설이 내가 어릴 적에는 참 많았던 것 같은데, 요사인 그런 이야기들이 참 인색해진 것 같다. 여행에서의 참맛은 바로 이런 전설들인데 말이다. 몇 년 전 중국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아직도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길가에 홀로 서있는 비석의 시 구절 하나에도 의미를 두고 관광객을 다시 찾게하는, 문화에 대한 자부심 하나는 정말 배우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소주를 여행하면서 들은 많은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한산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은 당나라의 시인 장계의`楓橋夜泊`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는 비석 하나로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곳으로 月烏啼霜滿天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하늘 가득 서리가 내리네)江楓漁火對愁眠 (풍교에는 고깃배 등불을 마주하여 시름 속에 자고)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 밖 한산사에는) 夜半鐘聲到客船 (한밤중에 종소리가 객선에 이르네) 라는 시가 그것이다. 소주의 상징인 호구(虎丘). 원래 이름은 해용산(海涌山) 이었는데, 호랑이가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춘추시대 오왕인 합려가 이 곳 연못 아래에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합려의 무덤을 만들 때 관 속에 검 3천개를 함께 묻었다고 하여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이 이 검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도굴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와 도굴은 중단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에 물이 들어차서 연못이 되었고, 돌 한쪽부분에 검지(劍池)라는 한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또한 언덕 정상에는 호구 탑이 있는데, 높이가 47.5m이며 수나라 때 지어진 것으로 소주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건축물이다. 합려의 무덤에 보물이 많다고 믿는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치려 할 때마다 조금씩 기울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한수의 시가 이렇듯 작은 사찰을 유명세로 만들고, 전설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있는 중국인들의 기예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다시 부석사 경내를 좀 더 자세히 소개해 보자.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라고 한다. 무량수전 앞에 있는 석등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 4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보살상은 보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보통은 석등대신 탑을 세우는 게 정석인데 이곳 부석사는 석등이 서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광명극락의 세계를 밝히고자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고 했다.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드넓은 세계로 내 눈에 들어온다. 긴숨을 들여 마시며 태백산 줄기의 기를 다 받아들이는 기분으로 삼층석탑옆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의상대사의 진영을 모신 조사당 건물이(국보 19호) 나오는데 지난번에 못본 것을 오늘은 꼭 볼 것이 있다. 바로 조사당 처마 밑에 닭장같이 울타리가 쳐져 있는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의 한산사나 호구탑과도 비교되지 않는 그 유명한 전설,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꽃았더니 그 지팡이에서 잎이나고 자라났다는 전설의 꽃 `선비화`. 처음 보는 나도 신기하리 만큼 잘 자라고 잎이 무성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비화를 보기 위해 찾아와 자꾸만 만지다 보니 훼손의 우려가 있어 철망을 해놓은것이 다소 맘이 걸렸지만 어쩌랴….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감개무량할 따름인 것을…. 부석사는 경내를 걸어 다니는 자체가 천년의 역사를 경험하는 일이다. 무량수전, 조사당, 조사당벽화, 소조여래좌상, 석등 등 모두가 국보로 지정돼 있다. 그래서 부석사는 나의 짧은 언어로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자체보다 노오란 은행잎이 절정을 이루는 가을이나, 흰눈이 드문드문 보이는 겨울에 이 곳에 한번 들러, 아름다운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과, 선비화의 전설을 직접 보고, 느끼며 경내를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2012-02-20

영주 부석사를 가다 (5)

“일요일 면회 한번오시지요”라는 군에 가있는 큰 아들 녀석의 어투에서 지난 휴가 이후 뭔가 이곳 사회생활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아쉬움의 뉘앙스가 풍겨나와 집사람과 겨울 여행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지라, 눈도 많이 왔다고 하니 겸사겸사 모처럼 여행도 할겸 흔케히 오케이 하고선 일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 경북 영주로 향했다. 전날 하루 날씨가 봄날같이 따뜻했던 탓인지 기대했던 설경은 보질못하다가 안동을 지나면서 주변 산들에 잔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에 보초서면 영하 20도가 넘어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막상 영주에 도착하니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 장난이 아니다. 도로 곳곳에는 몇 일전 왔던 눈들이 아직도 쌓여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 영주는 봉화나 안동 등을 여행하며 몇 번 찾았던 곳이지만 매번 볼 때마다 정겨움이 묻어나는 곳이다. 사람들의 인심도 후할 것 같고, 무엇보다 아직도 주변에 많이 남아 있는 고택들 때문인지 나에겐 고향 같은 그런 모습으로 항상 다가온다. 방랑시인 김삿갓도 탄복한 태백산맥의 절경그 속살에 품어 안긴 극락세계 `무량수전`화엄의 큰 가릋르침 펼치던 고승의 전설이…몸이 휴가 때보다 더 많이 빠져 얼굴이 길어 보일만큼 야윈 것 같아 안쓰럽다는 지어미의 표정이 보였는지 “요새 살 뺀다고 운동좀 많이 합니다”라고 먼저 선수 치듯 웃으며 내뱉는 말에, 입대 할 때의 철없던 모습과는 훌쩍 커버린 녀석이 대견해 보였다. 많이도 챙겨온 집사람과 음식을 나누며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조잘조잘 몇 시간을 떠들고 나더니 그제야 환하게 돌아온 얼굴을 뒤로한 채 조금 일찍 면회를 마치고 영주시내로 나와 늦은 시간이지만 부석사로 향했다.길가에 은행나무가 가로길에 즐비해 지난 가을에 한번 왔을 때 노란 은행잎에 반해 겨울에 눈 내린 이곳에 꼭 한번 다시 오고 싶었던 곳이다. 유독 은행나무가 많아 지난번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곳 영주의 시목이 은행나무라고 했다. 자가용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가을에 이곳을 한번 드라이브 해보면 담양의 메타세콰이어 길, 전라도 정읍 쪽의 배롱나무길, 벚꽃으로 유명한 하동 쌍계사 가로수길 에서 느껴보지 못하는 노란 은행나무 잎이 주는 환상의 황금 길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부석사 입구에 즐비한 식당들은 어느 한 곳 맛집이 아닌 곳이 없고 인심 또한 후하다. 전에 먹은 비빔밥과 동동주 한잔이 간절하지만 점심을 너무 포식한 후라 여름이면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분수가 있는 작은 연못앞 노점에서 간단히 오뎅 하나에 잠시 휴식을 하며 스케치 도구와 짐을 간단히 하고 본격적으로 올라간다. 연못에서부터 오르막길을 계속 오르다 보면 좌우로 은행나무 가로수, 좌측 산쪽 적송 가지런한 곳으로 인삼밭이 있고 오른쪽으로 사과 밭이 눈에 들어온다. 은행잎은 온데간데없고 사과도 없는 빈가지만이 앙상하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가을이나 겨울이나 그 수가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매표소 밑으로 펼쳐 놓은 할머니들의 노전풍경도 여전하다. 호박, 사과, 산나물 등 이것저것 구경하며 올라가는 재미가 솔솔하다. 입구에서 일주문과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은행나무길이 잔설과 함께 눈에 확 들어온다. 지난 가을의 기억을 더듬으며 스케치 한 장을 해본다.조선 후기 우리의 방랑시인 김삿갓 선생은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안양루에 올라 장쾌한 태백산맥의 경관을 내려다보며 다음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백발이 다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오듯/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인간 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광경 보겠는가./ 세월이 무정하여 나는 벌써 늙어 있네./봉황산 중턱에 있는 영주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성벽과 같은 위엄의 9단 대석단의 돌계단을 한발 한발 오르다 안양루 누각의 마루 위로 고개를 내밀면 석등하나가 눈앞에 다가서며 밝고 환한 극락세계가 나를 반겨준다. 바로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이다. 팔작지붕의 기와선과 그 아래 여섯 개의 배흘림기둥, 소박한 격자 창문살 등이 눈에 확들어온다. 지금의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에 피난 와 있는 시기에 쓴것이라 했다. 전체적으로는 안진경체에 가깝고 현판 뒤에는 공민왕이 썼다는 사연이 적혀 있다고 한다. 무량수전 좌측 뒤편으로 고개를 돌려 조금 가다보면 `부석(浮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요상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이 설화가 재미있다.삼국유사에 있는 설화에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하던 선묘라는 여인이 용으로 변해 이곳에 까지 따라와 줄곧 의상 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해진다.

2012-02-13

덕동마을을 가다 (4)

“녹수청산(水靑山), 만고강산(萬古江山), 무위자연(無爲自然)….”어줍잖는 주변머리에도 몇 가지 고사성어가 머리를 스쳐 지난다. 옛 선인들이 바로 이런 곳을 보고 글귀가 떠올랐을까? 눈이 시리게 파아란 하늘에 태양과 달이 동시에 있다. 신비하다.혼자서 상념하며 어제 힘들었던 심신을 달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곳에 와 보라 하고 싶다. 몇 일간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매서운 바람에 온 계곡이 얼어붙고 아직 남아 있는 잔설이 굵은 소나무 밑에서 며칠전의 흔적을 이야기하는 이 곳.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에 있는 덕동마을에 왔다. 지난번 여행한 옥산서원의 이언적 선생과 다소 연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덕동마을은 양동마을에서 살던 사의당(四宜堂) 이강(1621~1688)이 거처를 정하면서 세거지(世居地)를 이룬 곳이다. 이강은 오늘의 양동마을을 있게 한 두 거두 중 한 명인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동생인 이언괄(李彦适) 선생의 현손(손자의 손자)이다. 여강 이씨의 세거지가 된 덕동마을은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하면서 우리 전통문화에 한 획을 긋게 됐다. 신라 때 죽장부곡 과 성법이부부곡이 형성된 이래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제철과 연관된 철물기구와 무기 생산 공장이 있었던 곳으로 관인이 아니면 통행도 잘 못했다고 한다.덕동마을에 있는 용계정(龍溪亭)과 덕동(德洞)숲은 조선 선조 임진왜란 때 북평사를 지낸 임란공신 농포 정문부의 별장(경북 유형문화재 제243호)과 마을 수구막이 숲으로 조성된 덕동숲, 자연계류 등이 잘 어우러진 명승지이다. 이곳 덕동은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2006)`에서 대상을 차지한 덕동 숲이 있는 곳으로 용계정, 사우정 고택, 애은당 고택, 이원돌 가옥 등 고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용계천의 바위 벼랑에 세워진 정자가 바로 용계정인데, 경관이 수려한 벼랑 암벽위에 계천을 굽어 볼수 있도록 세워진 정루다. 용계정은 임진왜란 당시 북평사를 지낸 농포 정문부 선생의 별장으로 조선 명종 원년(1546)에 건립되어 숙종 12년(1686)에 증축돼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다, 또한 사우정은 살림집, 애은당은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정각의 왼쪽에는 호산지당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이 못은 “산강수약”이라 산세는 강하고 물이 적어 인물이 배출되지 않는다 하여 현 위치에 인위적으로 물을 가두어 후세 인물이 많이 나도록 만들어진 곳이 바로 호산지당이라 한다. 현재 일반 여행객들은 잘 모르고 그냥 연못 주변을 거닐다가 별 생각 없이 지나치겠지만 이 뜻을 알고 보면 옛선조들의 지혜와 멋스러움을 다시 한 번 감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곤 오른쪽에는 큰 아름누리의 소나무 군락이 이어져 있다.4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를 지나 뒷짐을 지고 마을을 슬슬 걸어 다니다 보면 구구절절 소담한 황토담장 너머 살짝 살짝 보이는 기와지붕들이 정겹기 그지없다. 애은당 고택에서 부터 일반 집들에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마주하는 어르신들마다 인사를 하면 반갑게 맞아주신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잠시 언덕에 올랐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내려가면 사우정 고택이 나온다. 웅장하고 앞마당에서 바라보면 고택의 기운이 그대로 남아있는 느낌이다. 이곳 언덕에서 호산지당쪽 앞산을 보니 청아한 대낮 하늘에 달이 떠 있다. 말 못할 신비감이 온몸을 휘어 감는다. 다시 구비구비 골목을 지나며 스케치 몇 장을 하다 보니 어느새 주차장 까지 내려와 버렸다. 주차장 앞에는 조그마한 민속전시관이 있다. 이 곳에는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덕동 여강이씨 문중 소장 552호 67점과 각종 민속자료 1천여점이 있다고 한다. 항아리에서부터 고서적까지 많은 역사적 자료들이 좁은 공간에 진열되어 있었다. 전시관에는 많은 소중한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어 앞으로 오랜 세월 보관이 이뤄지려면 현재의 전시관보다 습도 조절시설이나 환경 등을 고려해 좀더 크게 확충을 해서 다시 지어져야 되겠다 싶었다. 이곳 관장님으로 계시는 이동진옹은 양동마을에서 30세에 이곳으로 이주해 와 50여년째 이곳에 살고 계신다. 1992년 지금의 박물관 옆 옛 동사무소 건물 2층에서 처음 전시관을 오픈 했을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좋아진 공간이라 하면서도 2층에 있는 농기구들이 자기들도 1층으로 내려달라고 떼를 쓴다는 농담을 하신다. 그만큼 현재의 공간이 부족하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덕동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아 관람하며 해설을 들어줄 때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하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값어치를 논하지 말고 옛 것을 지속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으면 좋겠고 앞으로 후손들이 누가 이 일을 이어갈 것인지가 가장 큰 걱정이시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으시던 그 모습이 돌아오던 내내 마음이 걸렸다.

2012-02-06

내연산 보경사 가다 (2)

호젓한 해안가서 겨울바다의 싱싱한 에너지를 마시다 외지의 여행객들이 포항을 찾는다면 하나는 7번 국도를 이용한 울진 영덕 쪽으로의 코스, 또 하나는 죽도시장이나 구룡포 정도를 여행의 목적지로 잡을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객들이 아닌 대구~포항 고속도로를 자가용을 이용한 여행객이라면 죽천이나 영일만항에서부터 펼쳐지는 아름다운 해안 도로를 타고 보경사 까지를 드라이브로 여행 재미를 느껴 보는것은 어떨까 싶다.몇 년전 서해안 해안가를 여행하다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라는 푯말의 도로를 접한적이 있다. 수려한 경관과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는 맛은 연인들에게 또 다른 추억을 안겨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붉은 노을이 지는 서해안이 있다면 붉은 해가 솟아오르는 동해안은 어떤가?동해안은 7번 국도가 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 도로는 포항의 아름다운 해변을 보여주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도로다. 여행객들에겐 잘 뻗어있는 도로보다 다소 불편하지만 낭만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해안도로가 더 재미있으련만, 7번 국도는 화진 해수욕장까지 가야만 바다를 보며 달릴 수 있다.그렇지만 포항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포항에도 외지의 여행객들이 잘 모르고 지나치는 멋진 해안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오늘 나는 외지 여행객들을 위한 포항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숨은 도로를 소개해 볼까 한다. 아울러 최종 목적지는 내연산 보경사로 정했다.출발은 흥해에서 법원간 새로난 도로를 타고 법원을 지나 죽천해수욕장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죽천해수욕장 주변도로는 확장 공사로 다소 어수선 하지만 공단이 언제 저렇게 조성되었나 싶을 정도로 대규모 공사가 한창이었다. 새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약간 오르막을 오른다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눈앞에 장대하게 펼쳐지는 동해 바다의 푸르름이 한눈에 들어 왔다. 겨울 바다의 시리도록 차가운 색감은 역시 일품이다. 잠시 차 안의 오디오 볼륨을 한층 더 높이고 좀 매서운 바람이지만 창문을 열어 젖혀 겨울 바다의 싱싱한 에너지를 직접 마시며 달려본다. 조오타. 한적한 해안도로를 얼마쯤 달리니 거대한 영일만 신항이 나타난다. 포항의 새로운 심장이 될 공단이지만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해안가에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차가운 개울물·앙상한 나묷뭇가지만이 반겨도 외롭지 않더이다칠포해수욕장을 지나 언덕을 넘어 조금 달리면 칠포교가 나온다. 다리를 지나 잠시 우측 길로 접어들면 마을앞 방파제에 빨간색의 작은 예쁜등대 하나가 있다. 잠시 이곳에서 사진도 찍고 길거리 커피 한잔에 휴식을 하고 다시 출발…. 좁은 마을길을 돌아 언덕을 올라서면 이제부터 몇 년 전부터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던 펜션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작은 해수욕장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오도 해수욕장이다. 작은 백사장을 가지고 있지만 여름에는 조용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이 찾는 곳이다. 차를 모래사장 깊숙이 까지 몰고 갔다. 희뿌연 회색구름이 너무 멋져 기념 스케치 한 장을 했다. 사방공원을 지나 또다시 해안 비경을 감상하며 달리다 보니 월포해수욕장.. 각종 조형물과 벽화 등이 잘 조성되어 있는 이곳에서 또다시 잠시 휴식을 하며 스케치 몇 장을 하곤 바로 조사리에서 좌회전해 목적지인 보경사로 접어들었다. 원래는 화진해수욕장에서 다시 내려 오려했으나 급 수정. 요사인 해가 짧아 최소 관음폭포까지 올라가려면 좀 서둘러야 했다.보경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다. 보경사는 웅장하고 수려한 종남산을 등에 업고 좌우 뻗어난 내연산 연봉에 쌓여 있으며, 12폭포로 이름난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껴안고 포근하게 배치되어 있는 곳으로. 602년(진평왕 25)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명(智明)법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한다.지명은 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하여, 왕이 그와 함께 동해안 해아현 내연산 아래 있는 큰 못 속에 팔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한 뒤 `보경사`라 하였고, 723년(성덕왕 22)에는 각인과 문원이 “절이 있으니 탑이 없을 수 없다”하고 시주를 얻어 금당 앞에 오층석탑을 조성했다고 전해지고 있다.먼저 일주문을 지나면 입구 쪽 좌측에 송덕비가 모셔져 있고 아름드리 울창한 소나무를 지나 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정면에 오층석탑, 좌측엔 범종각이 있다.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231호이기도 하며, 조선 숙종 때 새로 지었다고 한다.대웅전 뒤에 있는 비사리구시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나라의 제사때 절을 찾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쓰인 도구며 쌀 7가마(약 4천명분)의 밥을 담았던 통으로 보경사의 명물, 이 곳을 찾는 여행객은 꼭 한번 이 비사리구시를 보며 그 옛날 번창했던 절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그 외 영산전과 명부전, 원진각, 산령각, 팔상전이 있으며 그뒤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빽빽히 둘러싸여 신비감이 더하다.경내를 나와 계곡을 따라 걸음을 시작하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길이 폭포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약 30분정도를 올라가면 제 1폭포인 상생폭포가 보인다. 소나무의 절경과 바위들의 조화 속에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듯하다. 투명한 맑은 물과 조약돌을 벗 삼아 조금 올라가니 삼보폭포, 잠룡폭포가 있고, 몸이 그사이 또 무거워 졌는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왔을 때 드디어 이번 여행의 종착지 관음폭포에 도착했다. 구름다리위에 올라서 아무도 보지 않는 듯해 큰소리로 “야호”를 외쳐본다. 가슴속에 남아 있던 어떤 덩어리가 한순간에 빠져 나가는 듯하다.한적한 겨울의 산속, 눈이 시리도록 차가운 얼음속 개울물, 여름내 울창하던 그 숲과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앙상한 나뭇가지 만이 나를 반기지만…. 혼자 찾은 내연산이 그렇게 외롭지 않게 느껴지는 여행이었다.

2012-01-16

이철진의 여행 스케치...포항 죽도 어시장 (1)

오가는 말 한마디에도 `철철` 넘치는 정이 있더라 임진년 흑룡의 해가 힘차게 솟았습니다. 경북매일은 한국화가 이철진씨와 함께 전국의 명소와 풍물들을 찾아 현장에서 스케치한 그림으로 매주 월요일 독자 여러분들을 찾아갑니다. 첫 회는 동해안 최대 어시장인 포항 죽도시장을 찾았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애독과 성원을 바랍니다.아침 일찍 분주하게 움직였다.어제 저녁에 좀 무리한 탓인가? 좀처럼 눈이 뜨이지 않는 것을 가까스레 일어났다. 포항에 살면서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침 죽도 어시장 풍경을 경험해보고 싶어서였다.죽도 어시장의 맛은 회맛도 회맛이지만 진정한 참맛은 아침 일찍 가 보면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주변 지인의 권유로 꼭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던 곳이었다.새벽 아침 한적한 시내를 지나 죽도시장에 다달았을때 난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분주하게 움직이는 활어차들,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가격을 흥정하는 왁자지껄한 소음들…. 그 소란함 속에 활어회 차의 생선들은 펄쩍거리며 뛰쳐오르고…. 희뿌연 안개 속으로 동빈 내항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하아….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차라리 숙연함이 느껴졌다고 표현함이 맞지 않을까. 포항에 살면서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포항다운 진풍경이다.죽도어시장의 첫 인상은 힘이다. 포항의 모든 에너지가 이곳에 모여 있는 듯한 강한 힘이 느껴진다. 시장 상인들의 모습에서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삶의 활력이 끊임없이 느껴진다. 상인들의 표정 속에서 죽도시장의 매력을 바로 알 수 있다. 외지 사람들이 포항을 방문했을 때 꼭 한번 들러 봐야 할 곳이 바로 이곳 죽도 시장이라고 한다.포항에 오기 전 내가 처음 이곳을 들렀을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일단 동빈 내항 주변에 만들어진 산책로..연인들이라면 이곳을 한번 꼭 걸어보면 좋겠다. 어시장에 들어가기 전 스케치 한 장…. 추운 아침에 포장마차에서의 커피한잔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그런데 보이지 않던 큰 건물이 하나 보인다. 새로 지은 위판장 및 공영주차장으로 시설은 지하 1층, 지상 4층 및 옥상으로 구성돼 있다고 하는데 1층은 위판장, 2층부터 옥상까지는 주차장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외관이 다소 어지러울 정도로 산만한 디자인이라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론 죽도시장에 걸맞는 건축물 같기도 하다.죽도시장은 부지면적 약 14만 8,760㎡, 점포수 약 1천200개에 달하는 포항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이라고 한다. 1950년대 갈대밭이 무성한 포항 내항의 늪지대에 노점상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시장으로, 과거의 죽도시장은 경북 동해안 및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 집결지인 동시, 유통의 요충지였다고 한다.취급품목은 수산물,·건어물·활어 회와 의류·채소·과일·가구류 등 일용잡화로 도매 및 소매가 이루어진다. 시장에는 200여 개의 횟집이 밀집되어 있는 회센터 골목과 수협 위판장, 건어물거리 등의 어시장 구역, 농산물거리와 먹자골목·떡집골목·이불골목·한복골목 등이 조성돼 있다.포항 최대 규모의 시장이니 만큼 들어가기 전부터 헤매기 시작할 것이라는 우려는 잠깐, 두 시간 정도를 걸어 다녀 봐도 큰 규모에 비해 판매하는 코너들이 잘 나뉘어져 있어 불편함이 없고 다양한 구경거리로 시간가는 줄 모른다. 큼직한 고래 한마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있고 그 옆에는 포항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무색, 무맛의 엄청나게 큰 개복치 한 마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내가 단골로 다니는 회센터 골목안의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커피 한잔을 건넨다. 역시 죽도시장의 매력은 정이다. 고기를 고를 때도 적다고 투정 부리기보다는 “오늘 더 많이 주시네예”라는 말에 바로 한 마리 더 올라 오는 곳이 바로 이곳 죽도 시장의 참맛 아닐까.휴일이라 그런지 점점 사람들로 인산 인해다.모처럼 나온김에 어디가서 매운탕 한그릇으로 해장이나 해야겠다 싶어 단골 집으로 향했다.한국화가 이철진은…○영남대 미술대학 졸업 및 동 교육대학원 졸업(1993) ○개인전 24회(뉴욕·서울·대구·부산·포항·수원·경주 1994~2011) ○대한민국 작은그림미술제초대전(서울·갤러리 이즈 2011) ○한국미술 컬렉션전(서울·한국미술센타 2011) ○스위스바젤 아트페어(스위스 2011), 상해국제아트페어 초대(중국·상해마트) ○홍콩호텔아트페어(홍콩 2011), 광저우아트페어초대(중국) ○200여회의 그룹전을 통해 작품 활동△대구시미술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역임 (96~현재) ○동대해연구소연구위원, 현대한국화회·한국화동질성회복회·영남한국화회·한국미협회원 ○현재 포항예술고등학교 교사, 동국대 외래교수

2012-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