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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잔잔한 물결·무성한 갈대 따라 맨발 산책 어때요

2022년 12월 첫날이었다.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 11월 말까지 봄처럼 따스했던 날이 그날은 맵고 찼다. 북쪽에서 불어온 찬바람 탓에 체감온도가 영하 5도는 됐을 듯.포항 남구 대송면 조박지 인근을 걸어보기 위해 정오쯤 북구청에서 출발하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이니 빈속으로 산책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차에서 내리니 연일전통시장이 지척. 따끈한 순두부찌개가 겨울 점심으로 제격이기에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딸려 나온 밑반찬이 깔끔했다. 게다가 음식을 가져다준 베트남 결혼 이주 여성의 생글생글 웃는 친절까지. 일금 8천 원의 저렴하고 만족스런 식사였다.어딜 가건 아직도 인정과 사람살이의 따스함이 남아 있는 한국 전통시장 내 식당에서의 끼니 해결은 선택 실패의 가능성이 낮은 법. 배가 부르니 마음도 훈훈해졌다.연일시장을 나와 도로를 건너니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인 조박지가 가물거렸다. 일직선으로 뻗은 농로 끝에 자리한 조박지는 남구 연일읍 인주리와 대송면 남성리에 걸쳐 자리했다.‘적계못’으로도 불리는 조박저수지는 한국전쟁이 있기 전 1949년 가을에 만들어졌으니 일흔을 넘긴 나이다. 그 세월 때문일까? 농업용 저수지 치고는 풍경이 점잖고 의젓했다(?).차가운 날씨 탓인지 봄이나 가을처럼 저수지 주변을 걷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러나, 무인지경(無人之境)은 아니었다. 1시간 30분쯤 산책을 즐기는 동안 10여 명의 사람들을 봤으니. ▲양말만 신고, 혹은 맨발로 산책하는 ‘조박지 사람들’잘 정돈된 저수지 둘레길 위로 올라서니 30대 여성 하나가 양말만 신은 채 걷기운동을 하고 있다. 건강을 위해 맨발로 흙길을 걷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온 터. 그러나, 외투 깃으로 얼굴까지 가려야 하는 겨울 한복판에서 그 모습을 실제로 보니 놀라웠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놀라운 광경과 만나게 됐다. 이번에는 족히 일흔은 넘겼을 어르신이었다. 그분은 아예 양말도 없이 맨발이었다. 혹여 동상에나 걸리지 않을까 싶어 걱정을 전하며 물었다.“추운데 괜찮으세요?”주름진 얼굴임에도 티 없이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가 이런 대답을 들려줬다.“아무 문제없습니다. 아직 마음은 청춘인데요 뭘. 젊은이도 한 번 맨발로 걸어 봐요. 기분이 상쾌해.”기자는 쉰둘. ‘젊은이’로 불릴 나이는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그 단어가 듣기 좋았다. 사실 조박지는 이전부터 ‘맨발 산책로’로 유명한 곳.포항시는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친환경 도시 건설을 위해 ‘포항 그린웨이 프로젝트’를 장기간 진행했고, 그 일환으로 조박저수지 둘레길 조성사업을 추진해 지난해 봄 완료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한 포항시청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조박지 둘레길은 오어지 둘레길과 함께 원점 회귀가 가능한 순환형 수변 산책로다. 조박지에선 황금빛 들판과 갈대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철새가 서식하고 있기에 편안하고 아름다운 힐링 공간으로 다가온다. 1.5km의 산책로 구간엔 폭 3m 중 1.5m는 편의를 위해 보행 매트를 설치했고, 나머지 1.5m는 마사토로 돼있어 맨발로 걸으며 건강을 챙길 수 있다.”동장군의 위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발을 벗은 채 저수지 둘레를 걷는 사람들. 그들 앞에선 동짓달 겨울 추위도 무색했다.바람에 서걱거리는 갈대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적계못의 풍경은 재론의 여지없이 근사했다. 멀리서 온 산책자를 위해 이 계절이 준비한 선물 같았다. ▲‘반면교사’ 해야 할 전설 속을 걷는 저수지 둘레길어딜 가나 우리나라 시골 마을엔 전해오는 설화나 전설이 한두 개쯤은 있기 마련. 조박지도 다르지 않다. 그곳엔 이런 이야기가 떠돈다.옛날 조박곡(적계못 뒤쪽 마을)에 부자가 살았다. 당연지사 어려운 형편을 호소하는 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들었다.그들이 귀찮았던 부자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승려에게 사람들이 제 집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할 방법을 물었다.“집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없애면 된다”는 대답을 듣고는, 적계못(조박지)에 바위를 빠뜨려버린다. 그날 이후 찾아오는 이들은 없어졌다.그러나, 세상사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 그 부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산을 모두 잃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워졌다고 한다.이 설화는 우리에게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배울 것은 벤치마킹(Bench marking)하고, 어떤 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조박지에 얽힌 전설은 분명 반면교사의 대상일 듯. 30분가량 저수지 둘레길을 걷다가 아래쪽을 보니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이 휑했다. 저 들판을 채우는 건 결국 더불어 땀 흘리는 걸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함께 나누는 인간들이 아닐지. 예나 지금이나. 또한, 앞으로도.하루 중 가장 기온이 높은 오후 3시가 가까워 오는데도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조박지 둘레길에 추위를 피해 잠시 쉬어갈 찻집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드문드문 놓인 벤치에 앉아 꽤 오래 저수지를 바라봤다. 어떤 철학자는 “수면을 응시하는 건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말없이 상념에 잠겼던 그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걷기’는 스스로를 비우고 삶을 일으키는 방법잔잔한 물결과 무성한 갈대, 길에서 만난 산책 동지들과 새 몇 마리가 함께 해준 조박지 둘레길에서의 걷기운동. 아무리 추워도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보단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오는 게 좋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12월 겨울 산책은 앞서 언급한 어르신의 말처럼 ‘상쾌’했다.‘나는 걷는다’란 제목의 책이 있다. 30년 이상 프랑스의 여러 신문과 잡지를 거치며 정치부·사회부 기자로 활동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저자다.그는 발로 걷는 여행을 통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며 스스로를 비우는 법을 배웠고, 은퇴 이후 사회적 소수자가 되어버린 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출판사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천99일간 그가 남긴 여행의 기록에는 순례자의 경건한 침묵과, 30여 년간 숨 가쁘게 뛰어왔던 퇴직 기자의 한결 여유로워진 사유, 그리고 엄청난 독서량으로 시공을 넘나드는 지식이 묻어난다. 홀로 바람처럼 걸어온 그는 이제 함께 걷기를 제안한다”는 설명으로 이 책을 권하고 있다.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나라를 거치며 꿈꾸던 도보 여행을 실현한 그를 부러워할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일상에 갇힌 보통의 사람들이야 겨우 집 주변이나 지척의 산책로만을 맴도는 게 전부니까.하지만, 지레 실망하거나 푸념할 필요는 없다. 걷기운동, 도보 여행, 산책은 결국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것 아니겠는가.온전히 자신만의 힘으로 만들어낸 그 새로운 길은 터키와 중국에도 있고, 스페인과 캐나다에도 있고, 여름이면 가시연꽃 피는 포항의 조그만 저수지인 적계못 근처에도 있지 않겠나./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2-06

솔향 머금은 바닷바람과 추억이 만나 발길 이끄는 곳

동빈큰다리를 건너니 불어오는 바람에 소나무 향기가 실렸다.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질이는 좋은 냄새다. 초겨울 도심의 회색 거리가 환해졌다.5분이나 걸었을까? ‘울울창창(鬱鬱蒼蒼)’이라 불러도 무색하지 않을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쭉쭉 뻗은 키 큰 소나무와 계절을 잊고 피어난 새하얀 장미, 거기에 산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조각상들까지.이름 하여 ‘포항 송도 솔밭 도시숲’이다. 도시와 숲이라는 이질적 두 단어가 여기선 불협화음이 아닌 최상의 하모니를 이룬다.송도 솔밭 도시숲은 어떻게 생겨나고 조성된 공간일까? 여행 플랫폼 ‘트립어드바이저’가 이 궁금증을 풀어준다.“이 소나무 숲은 1929년 어부보안림(魚付保安林)으로 지정됐고, 1945년 해방 후 더 많은 나무를 심어 포항의 대표적 방풍림이 됐다. 이후 솔밭으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1968년 철강산업단지 조성 이후 백사장 손실과 함께 솔밭이 훼손되기 시작했고, 고층 아파트와 아스팔트 길이 생겨나며 솔밭의 이미지가 위기를 맞았다. 이에 2017년 솔밭 재생을 목적으로 도시숲 사업을 시작해 각종 편의시설, 조형물, 솔내음 둘레길, 족구장 등을 만들어 도시숲으로 재탄생했다.” ▲ 그리운 사람 떠올리는 소나무 숲길낮에도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한 소나무 숲 저편에 차가운 푸른 보석의 색채로 바다가 빛난다. 송도 해변이다.소나무 숲길과 해변 길이 지척이라 한꺼번에 걸어볼 수 있으니, 이곳을 ‘걷기운동의 최적지’라고 불러도 탓할 사람은 없을 듯했다.짧아서 아쉬운 가을을 보내고, 길고 지루할 게 분명한 겨울을 맞이하는 시기. 그래선지 솔잎 사이로 쏟아지는 11월 오후의 햇살 한 줌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여기에 소나무 향기가 더해져 어떤 산책로보다 쾌적했다.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안기거나 안아주고 싶은 누군가의 체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이럴 때면 너나 할 것 없이 애틋한 기억으로 남은 지난 시절의 인연이 그리워진다. 아프고 시린 사랑 없이 성장하는 인간은 세상에 없으니까. 시인 김이하(63)도 그랬던 것 같다. 그가 포항에 와서 송도 솔밭 도시숲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다.허나, 김 시인의 포항 방문 여부와 무관하게 아래 인용하는 시 ‘오늘, 그대에게’는 솔숲 길을 산책하며 낭송하기 안성맞춤이다. 귀 기울여 들어보자.울먹거리던 마음이끝내 산을 넘지 못했다나무 끌텅을 딛기도 전에새소리에 귀를 내기도 전에바람에 귀밑털을 날리기도 전에마음이 뭉텅뭉텅네 생각에 베이고우울한 한 생이끝내 너를 넘지 못했다…(후략)그렇다.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의 결핍과 불화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울먹거리기도 하고, 뭉텅뭉텅 베이는 마음에 우울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우울한 한 생이/끝내 너를 넘지 못했다’는 슬픈 고백도 나온다.그러나, 결국 상처를 주며 떠나간 ‘너’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있을 수 없는 법. 김이하의 시는 그걸 노래하고 있는 게 아닐지.사라지는 가을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잠시 섬세한 감상에 휩싸였다. 산책자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자, 이제 기운을 차리고 걷는 속도를 조금 높여 바다로 가보자. ▲ 한 시절 ‘동해안 최고 해수욕장’으로 불렸던 송도몇 주 전 포항운하관 전시장에서 송도해수욕장의 1970년대를 찍은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커다란 모래사장에 송곳 꽂을 틈 하나 없었다.포항에서 태어나고 자란 60대 후반의 상인은 그 시절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약간의 과장이 섞였을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으니.“포항 사람은 물론이고, 대구와 부산에서 온 가족들, 방학을 맞아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동해까지 달려온 서울 대학생들이 여름 내내 끊이질 않았어. 거기서 8월 한 달 쭈쭈바(합성수지 용기에 담아 얼린 얼음과자)만 팔아도 1년을 먹고살았다니까.”오른편으로 송도 해변을 끼고 15분가량 걸었다. 바다 건너로 포항제철이 보였다. 몇몇 조형물을 지나며 그게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작품인지 알아보는 재미도 만만찮았다.대규모 철강공장이 들어서기 전 송도해수욕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반세기 전 풍경이니 기자는 알 수 없는 일. 그래서 ‘나무위키’에서 포항 송도를 검색했다.“일제강점기에 포항이 읍으로 승격되던 1931년 정식으로 해수욕장으로 개장되며 백사송림(白砂松林·새하얀 모래와 소나무 숲)의 휴양지로 알려졌다. 1935년 형산강 제방 축조공사의 여파로 규모가 반으로 줄었지만, 1945년 해방 후에도 포항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이었다.”그랬던 송도해수욕장이 제 모습을 잃은 건 1960년대 후반부터다. 철강단지 조성과 함께 송도 자체가 도시화되면서 소나무 숲을 잠식했고, 1970년대 두 차례의 큰 해일로 백사장이 사라진 것. 방파제로도 모래 유실을 온전히 막기 어려웠다고 한다. ▲ 부활 기다리는 송도해수욕장 지나 ‘포항함 체험관’으로송도 해변이 최고의 주가를 올릴 때 엄마 손 잡고 물장구치던 아이들은 이제 중년이 됐다. 송도해수욕장의 50년 전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낭만적 추억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그러나,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최근 들려온 낭보(朗報)가 있으니 ‘내년에 송도해수욕장이 재개장 한다’는 것. 2012년부터 포항시와 포항지방해양수산청이 주도한 ‘송도해수욕장 복원사업’이 막바지 작업을 끝내고 2007년 폐장 이후 16년 만에 다시 문을 연다.잊고 살았던 유년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2023년엔 적지 않은 50~60대 피서객들이 송도 해변으로 몰려오지 않을까?오후 4시경 시작한 산책을 이어가던 시간. 솔밭과 해수욕장에 초저녁 어둠이 찾아들었다.젊은 연인들이 적잖게 보였다. 아마도 조개구이와 통닭을 파는 ‘송도 해변 맛집’을 찾아온 것이리라. 내년 여름엔 송도해수욕장이 청춘과 중년이 어우러지는 공간이 됐으면.1시간 조금 넘게 소나무 숲과 백사장을 오가며 4㎞를 걸었다. 이제 걷기운동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 아까 건너온 동빈큰다리 쪽을 향했다.다리 아래 군함 한 척이 정박해 있다. ‘포항함 체험관’이다. 그날은 시간이 늦어 그냥 지나쳤는데, 다음날 다시 가보니 한 번쯤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30여 년간 우리 바다 수호의 임무를 완수하고 퇴역한 해군의 1천200t급 초계함인 포항함은 퇴역 후 교류 관계가 잦았던 포항시 동빈내항에 선상 병영체험관으로 꾸며졌다.안내를 맡은 직원의 위트와 친절함이 돋보였던 포항함 체험관. 무료 관람이니 부담 없이 찾아볼 수 있는 송도 산책의 마무리 코스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1-29

총천연색 터널 이어지는 보석 같은 길에서…

“먹는 것 조절하고 많이 걷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자신과 아들 둘 모두 당뇨병을 앓고 있는 시인 A씨의 말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당뇨로 고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걸 알 수 있다.당뇨는 소변에 당분이 많이 섞여 나오는 병으로 탄수화물 대사를 조절하는 호르몬 단백질인 인슐린이 부족해 생기는 것이다. 갈증과 잦은 소변으로 고생하는 당뇨병 환자들. 정도가 심한 경우엔 인슐린 주사까지 맞아야 한다.인체에서 인슐린은 만들어지지만 그 양이 적은 경우인 ‘제2형 당뇨’는 고지방·고단백 음식이 일상화된 식단 변화와 운동 부족이 병의 원인인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걷기 좋은 포항의 산책길’ 관련 기사를 쓰면서 당뇨에 관한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주절대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다 이유가 있다.당뇨는 ‘관리가 가능한 질병’으로 불린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식이 조절과 더불어 꾸준히 운동을 이어간다면 당뇨의 급작스런 악화와 합병증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게 의학계의 일반화된 견해다. ▲‘걷기운동’은 당뇨 환자 위한 효과적 치료법이제 가을도 끝자락에 이르렀다. 빨갛고 노란 낙엽이 거리 곳곳을 뒹군다. 며칠 후면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만추의 풍경이 곧 사라질 듯하다.더 늦기 전에 단풍 아래를 걷고 싶어 선택한 이번 산책로는 옛 포항역에서 덕수공원을 거쳐 학산동 포항도시숲을 오가는 구간. 대략 1시간 남짓이면 왕복이 가능한 도심의 보석 같은 길이다.지금은 철거됐지만, 지난 세기 많은 이들이 추억이 묻어 있는 옛 포항역. 현재는 폐철도공원으로 변화되고 있는 출발지에 서서 다시 한 번 시인 A의 말을 떠올렸다. “나 같은 당뇨 환자에겐 걷기운동이 무엇보다 좋은 약이지.”실제로 그렇다. 대한당뇨병학회는 “당뇨병 환자라면 매일 최소 30분씩 걷는 것이 좋다. 걷기는 당뇨인들에게 많이 권장되는 운동이다.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고 특별한 장비나 기술이 없어도 되며, 장소를 따질 것도 없이 집 근처, 혹은 회사 근처에서 언제든 할 수 있다는 것이 걷기운동의 장점”이라고 권유하고 있다.비단 당뇨 환자만이 아니다. 현대인들의 안고 사는 성인병 대부분이 운동 부족과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온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바로 이 성인병의 주범 중 하나인 운동 부족을 비용 들이지 않고 해결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 걷기, 즉 ‘산책’이 아닐까?옛 포항역 부지에서 시작해 덕수공원으로 가는 길엔 정겨운 풍경들이 자주 눈에 띈다. 커피는 물론 향긋한 전통차와 과일주스 등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조그만 카페가 여럿 있다.아기자기하게 장식된 가게 안에서 커피나 차를 마셔도 좋겠지만, 기왕지사 산책에 나섰고, 한낮엔 아직 추위를 느낄 정도가 아니니 테이크아웃 한 음료를 길 곳곳에 마련된 벤치에서 즐겨도 좋을 것 같았다. 기자 역시 진한 커피 향을 느끼며 한참을 길가에 앉아 있었다. 머리 위로 붉은 단풍잎 몇 개가 떨어졌고, 잠시잠깐 삶에 단풍이 들기 전 푸르렀던 청춘의 한 시절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짤막한 등산을 원한다면 덕수공원으로‘이 길이 예전엔 기차가 지나던 철길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해주는 차단기와 철로를 지나니 서산터널이 보인다. 거길 스쳐 포항초등학교 뒷길로 들어서니 단풍은 더 농밀하고 짙어졌다. 곧게 뻗은 나무들이 만들어낸 총천연색 터널 같았다.노부부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책을 즐기다가 잠시 쉬기 위해 길 옆 나무 의자에 앉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애틋해지는 게 부부의 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우리 영감님이 관절이 많이 안 좋아요. 그래서 격한 운동은 하지 못하고, 하루에 한두 시간쯤 함께 걷는 것으로 건강을 챙기고 있어요. 내가 사는 동네에 이런 산책길과 공원이 있다는 게 행운이죠.”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말이 다정하고 따스하게 들렸다. 부부는 거리가 얼어붙는 한겨울이나 폭우 쏟아지는 장마철이 아니면 언제나 이 길에서 가벼운 걷기운동을 한다고 했다.반세기 이상을 함께 살았을 두 사람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해로(偕老)하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다시 산책을 이어갔다.길의 왼편으로 ‘덕수공원’이라 쓰인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포항에서 7년 넘게 살았지만 기자는 처음 와보는 곳.어떤 곳일까? 이 궁금증에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대한민국 구석구석’이 자세하게 답한다.“덕수공원은 포항시 북구 덕수, 우창, 중앙, 용흥동 일부 지역으로 수도산에 위치한다. 부지 면적은 45만4천650㎡로 조경시설, 휴양시설, 운동시설(체력단련장·다목적운동장·게이트볼장), 지압로, 사찰, 사당, 전망대 등의 시설과 녹지로 구성돼 있다. 덕수공원은 인근 지역민들의 운동, 여가 보내기 장소로 사랑받고 있으며, 수도산을 찾는 관광객들도 꼭 한 번 들러보는 곳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충혼탑과 향토문화 창달에 기여한 재생 이명석의 문화공덕비가 설치돼 있다.”덕수공원 입구에서 멀지 않은 충혼탑과 작은 연못 위쪽으로 수도산을 오르는 길이 보였다. 갖가지 장비와 단단한 결심 없이도 누구나 가볍게 오를 수 있는 등산 코스라고 한다.곧 우리 곁에서 사라질 가을 산의 아름다움과 정취를 느껴보고 싶은 이들은 따끈한 차 한 잔 보온병에 담아 수도산에 올라도 좋을 것 같다. ▲포항도시숲에서 오랜만에 들어본 새 소리10년 전쯤이다. 2주가량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라오스에서 며칠 머물렀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라오스 북부.그때 숲 속 조그만 호텔에서 묵었는데 새 소리에 잠을 설쳤다. 아침에 일어나 숲길을 걸었을 때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몇 마리가 날아와 구슬프게 울었다. 자주 듣거나 보지 못한 모습이었기에 그 기억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사실 현대화된 도심에서 새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다. 서울과 부산 등의 대도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고층 아파트를 옆에 두고 버스와 택시가 도로를 달리는 포항 한가운데서 청아한 새 소리를 듣다니….덕수공원에서 내려와 길 하나만 건너면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선 풍경이 산책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학산동 포항도시숲이다. 바로 거기서 새가 울었다.규모는 크지 않지만 잘 정돈된 나무들과 인상적인 조형물, 거기에 편하게 쉴 수 있는 여러 개의 벤치까지. 포항도시숲은 시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또 하나의 근사한 공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칼국수 가게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도시숲을 가로질러 커피숍으로 걸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다들 얼굴에 웃음꽃이 환했다.답답한 도시의 일상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온 그들의 웃음은 곱게 단풍 든 나무가 선물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다시 새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서 노래하는 것인지 궁금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11월 중순의 하늘이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푸른 비단처럼 펼쳐져 있었다.그 가을 하늘은 포항도시숲을 나와 다시 옛 포항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기자를 따라왔다. 아주 친절한 산책 파트너였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1-22

짙푸른 가을바다와 작은 어촌의 고요함에 스며들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물리적인 움직임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산책, 도보, 걷기 등의 단어 속엔 ‘철학적 함의(含意)’가 담겨 있다.승려들은 일정 기간 동안 좁은 방이나 토굴에 스스로를 가두고 거기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찾기 위해 정진한다. 우리가 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라고 부르는 수양의 방식이다.그러나, 동안거나 하안거는 종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이들이 취하는 수양의 방법. 일상에 쫓기는 보통 사람들에겐 그럴 여유와 시간이 없다.승려들이 움직임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으로 어떤 지향점에 이르고자 한다면, 일반인들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임으로써 사념(思念)이나 잡념을 떨치고 육체적 건강을 찾고자 하는 게 아닐지. 10여 년 전쯤이다. 너나들이로 지내던 선배의 아들이 큰 병에 걸렸다. 겨우 중학교 2학년인 자식이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 있으니 아버지는 넋이 나갈 수밖에.그즈음이다. 선배는 하루에 5~6시간을 목적지 없이 걸어 다녔다. 강변이나 호숫가, 심지어 동네 좁은 골목길까지 헤집고 다니는 그에게 물었다.“왜 그토록 걷기만 하는 겁니까?”돌아온 답은 간명했다.“그래야 지금의 아픔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으니까.”맹목적인 산책 혹은, 의도적으로 고민과 고뇌를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는 행위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치료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됐다. ▲잡스런 생각 떨치며 ‘설머리 물회지구’를 출발아들의 생사를 걱정하던 선배만큼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한두 가지의 고뇌와 고민은 안고 살아간다. 삶이 지속되는 한 그것들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인간의 생이다.갱년기에 들어서며 우울증을 호소하는 40~50대가 한국 어디에나 적지 않다. 의사들은 “그럴 땐 의식적으로라도 걱정거리를 떠올리지 말고 산책을 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한다.짙푸른 가을 바다의 풍광과 작은 어촌마을의 고요함 속을 걷는 건 비단 우울한 중년만이 아닌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생활에 지친 사람들 모두에게 위안을 선사할 듯하다.그래서다. 이번에 선택한 산책 코스는 설머리 물회지구에서 포항 해상스카이워크까지.3㎞가 조금 넘는 이 구간에선 청량한 동해의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맑은 햇살 아래 멸치를 말리는 목가적인 풍광도 만나보는 게 가능하다.출발지점인 설머리 물회지구에 섰다. 수십 개의 횟집과 각종 해산물로 만든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가득하다.포항시 문화관광 홈페이지가 설머리 물회지구의 ‘특미’라고 불리는 포항물회에 관해 상세한 설명을 들려준다.“영일대해수욕장 끝에는 설머리 해안마을이 있다. 이곳은 바다를 끼고 있어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포항물회는 고기를 잡느라 바쁜 어부들이 급하게 한 끼를 때울 요량으로 방금 잡은 물고기를 회쳐 고추장과 물을 넣고 훌훌 들이마신 것에서 유래된 음식이다. 처음엔 어부들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차차 주민들에게 알려지면서 포항물회라는 특유의 음식으로 정착했다. 물회의 재료로는 가자미, 광어, 도다리 같은 흰살생선을 주로 사용하지만, 오징어와 한치, 해삼, 성게 등의 해산물도 물회의 재료가 될 수 있다.”TV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식당에서 물회 한 그릇과 서비스로 나온 매운탕을 먹고 해상스카이워크가 있는 여남동을 향해 출발했다. 테트라포드에 앉아 있던 갈매기 몇 마리가 길을 안내하듯 앞장섰다. ▲영화배우 하정우가 하루 3만보를 걷는 이유는설머리 물회지구를 지나 환호공원을 왼편에 끼고 해안 길을 걷는다. 바다 건너편으로 포항제철이 보이고, 멀리 구룡포가 가물거린다.평일 한낮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주말이면 포항의 새로운 관광 랜드마크(Landmark)가 된 스페이스워크와 해상스카이워크를 보려는 시민과 관광객들로 인해 주변 도로가 막힐 정도라고.환호공원 안에 설치된 스페이스워크는 길이 333m에 717개의 계단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형물이다. 낮에 올라가면 포항 바다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고, 밤이 되면 조명이 밝혀져 색다른 정취를 자아낸다.이번 산책의 종착점인 해상스카이워크는 유리로 만들어진 400여m의 보행로 아래 새파란 영일만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환호공원 해안로를 지나 여남동으로 가는 길엔 여유로운 모습으로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들이 몇몇 보였고, 날씨가 제법 차가운데도 반바지 차림으로 바다 곁을 달리는 이들도 있었다.포항의 산책로를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연예인들 중에도 ‘걷기운동’을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그중 영화배우 하정우는 하루에 3만보를 걷는 ‘산책 마니아’인 동시에 2018년엔 ‘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책까지 냈다고 한다. 의외다.책을 낸 출판사에 따르면 하정우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 세상의 맛있는 것들을 직접 두 손으로 요리해 먹고, 두 발로 열심히 세상을 걸어 다니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이, 오래 걷느냐”는 질문 앞에 설 때면 하정우는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고.“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밖에 없는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연기를 보여줄 사람도, 내가 오를 무대 한 뼘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안에 갇혀 세상을 원망하고 기회를 탓하긴 싫었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막막한 날에도, 잠까지 줄여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이 정도의 진정성을 가진 ‘산책자 하정우’라면 분명 포항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걸을 수 있는 ‘설머리 물회지구-해상스카이워크 코스’도 좋아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포항행을 권하고 싶어졌다. ▲가을 햇살 아래 멸치를 말리는 여남동 사람들뒷목을 간질이는 햇볕을 받으며 항구초등학교를 지나니 정겨운 어촌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여남동이다. 여기에도 크고 작은 카페와 식당, 펜션 등의 숙박업소가 늘고 있다. 그만큼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증거일 터.거기까지 걸어가니 바다 색깔은 더 푸르러졌고, 공기가 한층 달콤하게 느껴졌다. 불과 몇km 거리인 시내와는 전혀 다른 빛깔과 냄새. 오른편으론 ‘미니 해수욕장’이라 불러도 좋을 조그만 백사장이 앙증맞게 자리를 잡았다.해변 주위엔 그물망을 펼쳐 눈부신 햇살에 멸치를 널어 말리는 작업장이 서너 군데 보였다. 잘 건조된 멸치는 현장 판매도 하고, 택배로도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모양이었다.도심에서 겨우 1시간 떨어진 곳에서 바닷가 소읍(小邑)의 풍광을 보게 될 줄 몰랐기에 한참을 멸치 건조장 앞에서 서성거렸다. 할아버지 한 분이 보이길래 물었다.“이거 사진 좀 찍어도 되나요?”“뭘? 멸치 말리는 걸? 허허허. 그걸 뭐 하러 물어봐. 그냥 찍어요.”11월 가을 햇살보다 환한 여남동 어르신의 너털웃음이 좋았다. 그날 산책에서 받은 가장 큰 선물 같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1-15

호젓한 해변길 돌아 돌아서 만나는 낭만포구

11월의 하늘은 티끌 한 점 없이 잘 닦인 유리잔처럼 투명했다. 푸른 보석처럼 빛까지 났다. 선물 같은 날씨 속에서 ‘산책의 공간’을 찾아가는 여정은 유쾌했다.포항 시내에서 209번 버스를 타고 30분 남짓. 도구해수욕장이 지척인 동해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기자를 내려놓은 차는 다음 정거장을 향해 떠났다.행정복지센터 바로 옆엔 동해초등학교가 자리해 있었다. 야트막한 담장 뒤로 키 큰 소나무들이 근사하게 늘어섰다. 파스텔로 색칠한 그림처럼 예쁜 학교다.일제강점기인 1928년 동해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다니 역사가 100년에 가까운 초등학교.‘바다가 지척인 곳에서 꿈꾸며 자라는 이 학교 아이들은 아마도 마음까지 바다처럼 넓고 넉넉하겠지’란 생각을 잠시잠깐 했다.연이어 기억 회로에 새겨진 정일근의 시 한 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유리창 청소’라는 부제가 붙은 ‘바다가 보이는 교실’. 이런 노래다.참 맑아라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놓은유리창 한 장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섬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가을 바다 한 장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놓은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시 속에 등장하는 ‘열이’는 어떤 바다가 보이는 교실에서 공부했던 아이일까. 동해? 서해? 남해?그런 건 궁금해 하지말자. 그곳이 어디면 어떠랴. 바다처럼 맑고 착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야 한국 어디를 가도 흔하지 않겠는가.분명 동해초등학교에도 ‘열이’처럼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아이들이 지천일 것이다. 그것이 사소하게 보이는 ‘유리창 닦기’라 할지라도. 세상은 그런 마음들이 모여 ‘깨끗한 유리창’처럼 조금씩 아름다워지는 법. ▲한적한 가을 속을 걸어 도구해수욕장으로도심에서 벗어나 한적한 길을 걸어보고 싶어 선택한 이번 산책길은 동해초등학교를 출발해 도구해수욕장을 거쳐 임곡항까지 가는 30~40분짜리 코스. 같은 길을 되짚어 오면 약 10리쯤의 거리니 큰 힘 들이지 않고 유유자적 돌아보기에 적당해 보였다. 예상은 틀리지 않아 실제로도 그랬다.동해초등학교에서 2차선 도로를 건너니 바로 아래 해수욕장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있다. 그야말로 손짓해 부르면 들릴 지호지간(指呼之間)이 바다다.포항이 품은 주요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인 도구해수욕장은 연오랑과 세오녀가 거대한 바위에 올라 먼 바다로 떠났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800m에 이르는 백사장은 폭이 50여m. 큰 해변이지만 여름이 지난 바닷가엔 인적이 드물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동네 주민 하나, 운동복 차림으로 해변을 뛰는 젊은이 한 명이 전부였다.도구해수욕장은 많게는 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지 않은 규모다. 게다가 시내에서 멀지 않아 햇살 좋은 주말이면 나들이 하는 식구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고 한다.그러나, 지금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늦가을. 거기다 평일 오후니 사람이 많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그래서다. 조용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이들에겐 이즈음이 좋은 산책 시기.도구해수욕장은 1970~80년대 한국 사실주의문학에 뚜렷한 이정표를 남긴 소설가 황석영의 작품 ‘몰개월의 새’의 무대가 된 공간이기도 하다.베트남으로 떠날 군인들을 훈련시키던 곳. 지울 수 없는 역사의 상처가 배태(胚胎)된 도구 해변을 지나며 전쟁이 인간에게 준 아픔을 떠올렸고, 그 회상 위로 갈매기 두어 마리가 무심히 날아다녔다. ▲육지로 머리 눕힌 소나무 사이를 지나면 임곡항도구해수욕장에서 임곡항으로 가는 방법은 2가지다. 반듯하게 만들어진 아스팔트 길로 가도 무방하지만, 가능하면 바닷가에 접한 소나무 숲 사이로 걸어보는 걸 권한다.300~400m가량 이어지는 숲길은 소나무 냄새가 향기롭고, 나무 사이로 부는 가을바람의 정취를 느끼기에 그만이다. 숲 중간엔 벤치도 몇 개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길 수도 있다.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곳 소나무들이 하나 예외 없이 모두 육지를 향해 비스듬히 누워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마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이리라. 수십 년 이상 그 바람을 맞았으니 머리가 바다 반대편으로 기울어진 건 당연지사.인간의 생은 길어야 100년이다. 그처럼 삶이 유한한 인간과는 달리 바다와 바람은 수천, 수만 년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존재해왔다.그 유구함을 새삼 곱씹으며 소나무가 만들어낸 그늘 아래를 걸었다. 쉽게 잊기 힘든 산책이 분명했다.걷기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건 이미 다수가 알고 있다. 그러나,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하는 산책은 외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실수를 미연에 막기 위해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알려 주는 정보 하나를 공유한다. 이런 것이다.“걷기 운동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자의 경우 운동 강도가 30~40% 정도인 완보나 산보로 걷기를 하다가 점차 운동 강도를 높여 40~70% 정도인 속보, 급보로 걷는 것이 효과적이다. 운동시간은 자신의 목표 심박수에 도달한 상태에서 30~60분 정도 지속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초보자는 주당 3회 정도가 적당하며 체력이 향상되면 그 횟수를 늘려가도록 한다. 걷기 운동은 운동 강도가 낮기 때문에 속도를 빠르게 해도 목표 심박수에 도달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운동 시간을 늘려줌으로써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왠지 ‘어진 사람들’이 살 것 같은 임곡항도구 해변 한쪽에서 시작되는 소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임곡항이 보인다. 그야말로 ‘20세기풍’의 낭만적인 포구다.블록으로 쌓아올린 담 너머 옛집 마당엔 까치를 위해 남겨둔 빠알간 감 몇 개가 그림처럼 선명했다.방파제와 벽에 그려진 익살스런 그림들도 일부러 그곳을 찾아온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마을 풍경이 유년 시절 외가에 온 기분을 들게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따스한 정취.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이정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방파제 위에 서서 반대편을 바라보니, 멀리 포항제철과 포항 시내가 가물거린다. 자신의 동네에 살지 않는 낯선 사람을 만나더라도 먼저 웃어주는 어촌 노인들의 인심 역시 좋았다.‘논어’ 이인(里仁)‘편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무슨 뜻이냐고?“사람이 사는 곳은 어진 기운이 있어야 한다. 어진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걸 선택하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쯤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무슨 까닭인지 설명하긴 힘들지만,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엔 이웃과 더불어 웃음과 울음을 기꺼이 나누는 어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길을 되짚어 동해초등학교로 돌아올 때 이런 혼잣말을 했다.“조용하고 포근한 임곡항은 40년 전 떠나온 고향과 닮았구나.”/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1-08

해변과 항구 사이 걸음마다 볼거리… 불야성 ‘핫 스폿’은 덤

비단 여름 한철만이 아니다. 포항의 주요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인 영일대해수욕장에선 계절과 무관하게 젊은이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7~8월엔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며 휴가를 보내는 청년들이 많고, 겨울엔 한적한 해변 풍경을 즐기며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20~30대가 흔한 장소가 바로 영일대해수욕장.그렇다면 가을이 무르익은 요즘은 어떨까? 지난 주말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영일대 해변을 산책했다. 드물게 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해수욕장인 그곳엔 크고 작은 카페와 주점을 포함해 젊은이들이 즐길만한 ‘핫 스폿(Hot spot)’이 적지 않다.여름 더위는 이미 물러갔고, 아직은 추위가 도착하지 않은 완연한 가을. 데이트를 즐기거나, 모처럼 휴일을 맞아 바다 정취를 맛보려는 청년들이 영일대해수욕장 주변에 가득했다.시끌벅적 야외에서 조개를 구워 파는 술집과 양고기가 맛있는 식당, 멀리 포스코가 네온사인을 밝힌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며 향기로운 차를 마실 수 있는 커피숍마다 그들이 속삭이는 밀어(蜜語)가 넘쳐나고 있었다.기왕지사 거기까지 갔으니 이제는 멀리 떠나버린 기자의 청춘시절을 추억하며 영일대해수욕장에서 동빈큰다리까지 3.1㎞쯤을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영일대해수욕장은 경북 포항시 북구 항구동과 두호동에 인접한 해변이다. 백사장의 길이가 1천750m, 너비는 40~70m 정도이며 면적이 38만㎡인 이 해수욕장은 물결이 잔잔한 여름엔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포항의 명소.해마다 방문객들을 위한 정비가 이뤄지기 때문에 백사장의 모래도 깨끗하다. 그렇기에 식구들이 함께 찾기에 적합한 동해의 근사한 해수욕장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다. 물론 샤워장과 탈의장,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두루 갖췄다. ▲국내 최초 해상 누각에서 출발하는 산책‘코로나19 사태’가 한국을 뒤흔들기 이전엔 해마다 국제불빛축제와 바다국제공연예술제 등이 열린 곳도 바로 영일대해수욕장. 요트와 수상 오토바이를 타는 이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1976년 개장한 이 해수욕장은 이전엔 포항의 북쪽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북부해수욕장’으로 불렸다. 50대 이상의 포항시민들은 아직도 이 명칭에 익숙하다.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9년 전인 2013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영일대해수욕장’이란 이름을 확정했고, 그해 6월 29일에 명칭이 바뀌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고 ‘위키백과’는 설명하고 있다.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미가 피어있는 영일대장미원은 영일대 해상누각 맞은편에서 위치했다. 꽃처럼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사진 파트너’가 또 있을까?나이 지긋한 중년 여성은 물론, 교복을 입은 10대 여고생들까지 장미와 얼굴을 맞대고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세상사 고민과 걱정거리야 늙은이건 젊은이건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꽃과 함께 하는 그 순간만은 다들 얼굴에 장미보다 화사한 꽃이 피었다. 바로 ‘웃음꽃’이다.코로나19가 힘을 잃기 시작한 후부턴 영일대 해상 누각 인근에서 건강을 위해 에어로빅을 하는 모습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조그만 단상 위에 올라 다이내믹한 춤 동작을 보여주는 강사의 모습을 열심히 따라하는 아주머니들이 적지 않다. 이 광경은 해질 무렵 영일대해수욕장의 진풍경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영일대 해상 누각은 낮에 봐도 좋지만, 불 밝힌 야경이 더욱 매력적이다. 바다 위에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 고풍스런 누각에 도착하면 탁 트인 바다 풍경이 시원스러움을 선사한다.이 누각은 한국 최초의 해상누각으로 이름을 알렸다. 두호동행정복지센터 앞 해상 100m 지점에 자리했는데, 포항을 찾은 지인 중 하나는 해상 누각 지척에 위치한 행정복지센터를 보고는 “이런 경치를 보면서 근무하면 스트레스도 없을 것 같다”는 진심 담긴 우스개를 하기도 했다.젊은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기꺼이 받아 안고, 느슨해진 신발 끈을 다시 묶었다. 영일대해수욕장을 출발해 40~50분 정도면 동빈내항을 거쳐 포항 북구 동빈동과 남구 송도동을 잇는 동빈큰다리까지 갈 수 있다. ▲‘완보’가 아닌 ‘속보’로 보다 큰 운동 효과를해상 누각에서 출발해 영일대해수욕장의 다른 편 끝까지 가는 길에서도 많은 선남선녀를 지나쳤다.만추를 느끼며 정겨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은 야외 테이블에서 ‘치맥’을 즐기기도 하고, 여름보다 인적이 드물어진 해변에서 어깨를 감싸 안은 포즈로 둘의 모습이 담긴 ‘셀카’를 찍기도 했다. 대부분이 느긋한 태도로 산책을 즐기고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제대로 운동복을 갖춰 입고 제법 빠른 걸음으로 해변을 걸었다. 맞다. 운동 효과를 높이기 위해선 저 정도 속도의 걸음걸이가 좋다고 그랬다.천천히 걷는 완보에 비해 빠르게 걷는 속보는 심폐 기능을 강화하고,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해주는데 보다 큰 효과가 있다고 한다.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에서 발간한 ‘운동가이드’는 속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팔을 앞뒤로 자연스럽고 활기차게 움직인다. 운동 강도는 50~70%이고 분당 80~90m의 속도로 시간당 5~5.5㎞를 이동하며, 분당 3.5kcal 이상의 에너지가 소비된다.”20분가량을 걸어 동빈내항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영일만 관광유람선 선착장에 이르렀다. 여기서 울릉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출발한다. 60대 후반인 아주머니 두 분이 잠시 속보를 멈추고 배낭 속에 준비해온 물을 꺼내 마셨다.“추우나 더우나 매일 저녁 이 길을 걷는다”는 그들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앞서 언급한 ‘건강가이드’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이른바 ‘걷기의 효과’다.“걷기 운동은 체지방을 감소시켜 비만을 개선하고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등 성인병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뼈를 자극해 골밀도를 유지하고 증진시켜 골다공증을 예방한다. 이에 더해 스트레스, 불안감, 우울증 감소에도 도움이 된다…(후략)” ▲어둠 내린 동빈내항엔 세월 낚는 낚시꾼이알록달록한 네온이 반짝이고, 철로 만든 갖가지 조형물과 모래조각까지 감상할 수 있는 영일대해수욕장에 비해 11월 초순의 동빈내항은 조금 쓸쓸한 풍경이다.포항에 태풍이 닥칠 때면 바람과 파도를 피하는 배들로 넘쳐나는 동빈내항은 형산강이 동해와 만나는 끝자락에 자리했다. 크지는 않지만 쓰임새가 적지 않은 항구다. 주변으로는 산책로도 잘 정비돼 있다. 이전엔 오염이 심해 악취 피해를 호소하는 주민들도 있었다지만, 지난 2017년부터 3년간 진행된 정화작업으로 지금의 동빈내항 일대는 과거보다 많이 깨끗해졌다.태풍과는 무관한 계절이라 동빈내항에 정박한 배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인적도 영일대해수욕장에 비해 드물었다. 그래서일까? 거기에서의 산책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을 듯했다.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한국은 세계 어떤 나라보다 치안이 좋은 국가다. 게다가 동빈내항 인접 산책로엔 오렌지색 조명 시설이 밝게 켜져 있어 해가 진 이후 걷기에도 어려움이 없다. 항구 한가운데엔 해양경찰서 포항파출소까지 있으니 과한 걱정은 접어도 좋을 것 같았다.짭짤한 바다 내음을 실어오는 가을바람이 볼을 스치는 순간. 낮에 하는 산책 이상으로 밤 산책 또한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일대 해상 누각에서 출발해 동빈큰다리에 이르는 걷기 운동이 끝나가고 있었다.저문 동빈내항엔 낚싯대를 드리운 이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물고기가 잡히기는 하는 걸까? 그러나, 이 의문은 이내 접었다. 낚시꾼은 물고기만이 아닌 세월을 낚는 사람이 아닌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1-01

물결 일렁이는 강과 운하, 다리 건너 다니는 ‘재미 솔솔’"

TV와 라디오에 출연한 의사와 자칭 ‘건강 전도사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걷기만큼 좋은 운동은 없다.” 이는 재론의 여지없이 검증된 사실이다. 특별한 준비물이나 비용 없이도 가능한 ‘걷기’는 건강을 염려하는 이들이 반가운 선물처럼 선택할 수 있는 고효율의 운동이 분명하다. 아무런 노력이 없어도 기본적인 체력과 신체 건강이 유지되는 20~30대를 지나 중년에 이른 남녀들은 예전 같지 않은 몸 상태에 이른바 ‘건강 염려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이때 필요한 게 걷기, 그중에서도 산책이 아닐까?산책(散策)이란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을 지칭한다. 물질적 풍요 이상으로 육체의 건강을 중시하는 21세기. 한국의 지자체들은 이를 감안해 경쟁적으로 ‘OO길’을 만들고 있다. 포항을 포함한 경북 지역 곳곳에서도 적지 않은 OO길, 즉 산책로를 만날 수 있다. 이는 마음만 다잡는다면 얼마든지 ‘건강을 위한 걷기운동’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다. 시간과 돈을 들여 헬스클럽에서 개인 코치를 받는 것도 건강을 위해 나쁠 것 없다. 하지만, 그런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산책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해보는 게 어떨까?소슬한 바람이 불어 덥지도 춥지도 않고, 푸른 하늘과 더 짙푸른 바다, 여기에 물결 일렁이는 강과 운하가 있는 포항의 가을. 휴일이면 종일 가벼운 읽을거리와 텔레비전을 끼고 살며 외출을 잘 하지 않는 게으른 기자가 동년배 중년들을 위해 큰 힘 들이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는 포항의 산책길 몇 곳을 소개하려 한다. ▲죽도시장에서 출발해 포항운하관으로…사람살이의 웃음과 눈물이 넘쳐나는 공간 죽도시장. 아귀와 고등어, 오징어와 청어 등 싱싱한 생선이 대량으로 거래되는 포항수협 죽도어판장 지척엔 송도교가 있다. 그 아래로 내려서면 포항운하를 따라 근사한 산책길이 펼쳐진다.평일 낮에 걸어본 그 길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많았다.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속도로 걸어가며 주변을 살피는 그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몇몇은 자전거를 타고 같은 길을 지났다.얼마나 걸었던 것일까? 해도1동 어린이공원 벤치에서 쉬고 있던 60대 어르신 한 분은 “말없이 혼자 걷다보면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 그의 눈망울이 청년의 그것처럼 빛났다.일본의 의사 구리타 마사히로(栗田昌裕)는 지난 2005년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펴냈다. ‘산책의 즐거움’이다. “15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꽤 많다. 카트라이더, 커피 한 잔, 잠깐 동안의 수면 내지는 수다. 저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효과가 있지만 체력과 지적 능력을 동시에 향상 시킬 수 있는 15분 산책은 어떨까?”라고 권한 구리타는 ‘걷는다’는 행위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한 사람인 듯하다.책이 출간된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유롭게 걷는 ‘산책의 즐거움’은 변하지 않았을 터. 그래서다. 구리타의 이런 문장을 눈여겨 읽게 된다.‘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자세히 보면서 걸어 보라. 걷기는 운동의 기본으로 일정 시간 꾸준하게 걸으면 건강에 좋다. 이는 최근 들어 의학적으로 속속 증명되고 있는 사실이다.…(중략) 몸과 마음의 병이나 지적 능력의 부족함 혹은, 정신적 불행을 호소하는 것은 기본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해서다. 산책은 이런 활동의 기본을 배우는 실천의 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후략)’포항운하길을 걷는 이들 모두가 구리타의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독서 없이도 지속적이고 꾸준한 산책 이후의 몸 상태가 달라졌음을 알게 될 것이니까.70대 중반인 기자의 모친 역시 ‘산책 중독자’다. 또래 친구들 두어 명과 매일 1시간에서 2시간가량 집 주변 공원이나 야트막한 산을 찾는다.그렇게 10년 이상을 보내니 “찌뿌둥했던 몸이 가벼워지고 밥맛도 좋아졌다”는 것이 걷기운동 신봉자인 모친의 자평.고요하고 가볍게 출렁이는 운하의 물결을 보며 죽도시장에서 포항운하관까지 가는 1.5km 거리. 중년은 물론 노년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산책 코스다.거기선 흥미로운 조형물도 여럿 만나게 된다. 포항 스틸아트 페스티벌을 통해 제작된 작품들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 것. 포항운하길을 ‘아트 웨이(Art Way)’라고도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20~30대 젊은이들이라고 산책의 즐거움을 모를까? 밤이 내린 포항운하길을 찾은 그들은 카약(Kayak)에 몸을 싣고 이색적인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해양스포츠 탐험’으로 명명된 이 프로그램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운영된다. 카약과 페달보트를 대여하는 비용은 성인이 2만 원, 청소년은 1만 원이다. ▲돌아올 땐 반대편 길을 걸어보면 어떨까20~30분이면 송도교에서 운하를 오가는 크루즈 운행의 출발점 포항운하관까지 갈 수 있다. 짤막한 산책도 나쁠 것 없지만 30분은 걷기운동의 효과를 보기엔 다소 짧은 시간.포항운하길 주변엔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3개 있다. 이름이 재밌다. 탈랑교(橋), 말랑교(橋), 우짤랑교(橋)란다.영남 사람이 아니면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라며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다. 다리 이름의 뜻을 궁금해 할 사람들을 위해 “(운하를 오가는 저 배를)탈래요? 말래요? 어떡할래요?”라는 해석을 덧붙인다.위트 가득한 명칭이 재밌는 이 다리를 통해 포항운하를 건너 출발할 때의 반대편 길로 산책을 계속했다. 기왕 포항운하길을 걷는 것이니 포항운하에 대해서도 알아보는 게 좋겠다. 아래 관련된 간략한 설명을 인용한다.“포항운하는 2012년 5월에 착공해 2014년 1월에 준공됐다. 포항운하 건설사업 지역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포항시 송도동과 죽도1동 사이로 동빈대교에서 형산강을 남북 방향으로 잇는 지역에 해당한다. 옛 포항역에서 반경 1km, 포항고속 터미널에서 0.5km내에 인접해 있다.”운하의 과거와 현재, 구체적 건설 과정이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잠시 산책을 멈추고 포항운하관에 들르면 된다. 무료입장이니 금전적 부담도 없다. 불과 10~20여m 떨어진 길이지만, 걸어온 방향과 반대쪽으로 산책을 이어가니 건너편에선 보이지 않던 새로운 풍경이 눈에 띈다.매일 같이 봐오던 건물과 분홍빛 꽃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이런 작고도 사소한 ‘생활이 발견’이 가을날 길을 걷는 산책자의 소소한 행복이 아닐지. ▲햇살 속이 아닌 달빛 아래 산책은 어떤 매력이매달 셋째 주 목요일 저녁 7시엔 ‘해도동 건강마을 달빛걷기’란 행사가 열린다. 산책의 매력과 즐거움은 낮이 아닌 밤에도 빛나는 것이기에 마련된 건강 프로그램인 듯했다.환한 햇살 속이 아닌 교교한 달빛 아래서 만나는 포항운하의 매력은 어떠한 것일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이 아마도 기자를 다음번에 열릴 ‘달빛걷기’에 참여하게 할 것 같다.“걷기는 누구나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인간이 하는 운동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운동이다. 걷는 것은 몸 전체를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 시키는 것으로 단순해 보이는 동작이지만, 이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관절, 뼈, 근육, 신경 등이 모두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중략) 걷기는 시간, 장소, 비용문제 모두에 구애 받지 않으면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게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의 설명.걷기 중 첫 단계가 완보(천천히 걷기)다. 운동 강도가 20~40% 이며, 분속 50~60m의 속도로 시간당 3~3.5km를 이동하는 완보는 분당 2kcal 이내의 에너지가 소요되니 몸이 느끼는 부담이 덜하다.죽도시장에서 포항운하관까지 오가는 1시간쯤의 산책은 바로 이 ‘완보’에 맞춤한 코스로 보였다.출발할 때와 비슷한 속도로 걸어 죽도시장이 눈앞에 보이는 우짤랑교에 도착했다. 올려다본 하늘이 사파이어처럼 투명한 푸른빛이다. 늦은 점심으로 시장 수제비골목의 따끈한 칼제비(칼국수와 수제비를 섞은 음식) 한 그릇 먹어야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