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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물결·무성한 갈대 따라 맨발 산책 어때요

홍성식기자
등록일 2022-12-06 19:52 게재일 2022-12-07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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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기자, 포항을 산책하다<br/>연일전통시장서 조박지 둘레길 4.5㎞
초겨울 포항 조박지. 쓸쓸하지만 낭만적인 풍광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2년 12월 첫날이었다.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 11월 말까지 봄처럼 따스했던 날이 그날은 맵고 찼다. 북쪽에서 불어온 찬바람 탓에 체감온도가 영하 5도는 됐을 듯.

포항 남구 대송면 조박지 인근을 걸어보기 위해 정오쯤 북구청에서 출발하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이니 빈속으로 산책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서 내리니 연일전통시장이 지척. 따끈한 순두부찌개가 겨울 점심으로 제격이기에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딸려 나온 밑반찬이 깔끔했다. 게다가 음식을 가져다준 베트남 결혼 이주 여성의 생글생글 웃는 친절까지. 일금 8천 원의 저렴하고 만족스런 식사였다.

어딜 가건 아직도 인정과 사람살이의 따스함이 남아 있는 한국 전통시장 내 식당에서의 끼니 해결은 선택 실패의 가능성이 낮은 법. 배가 부르니 마음도 훈훈해졌다.

연일시장을 나와 도로를 건너니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인 조박지가 가물거렸다. 일직선으로 뻗은 농로 끝에 자리한 조박지는 남구 연일읍 인주리와 대송면 남성리에 걸쳐 자리했다.

‘적계못’으로도 불리는 조박저수지는 한국전쟁이 있기 전 1949년 가을에 만들어졌으니 일흔을 넘긴 나이다. 그 세월 때문일까? 농업용 저수지 치고는 풍경이 점잖고 의젓했다(?).

차가운 날씨 탓인지 봄이나 가을처럼 저수지 주변을 걷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러나, 무인지경(無人之境)은 아니었다. 1시간 30분쯤 산책을 즐기는 동안 10여 명의 사람들을 봤으니.

 

1949년 가을 조성된 농업못

'적계못'으로도 불리워져

원점회귀 순환형 산책로로

황금빛 들판·철새 감상 가능

매트·마사토 두가지 구간

맨발로 걷기에 '안성맞춤'

초겨울 포항 조박지. 쓸쓸하지만 낭만적인 풍광/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초겨울 포항 조박지. 쓸쓸하지만 낭만적인 풍광/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양말만 신고, 혹은 맨발로 산책하는 ‘조박지 사람들’

 

잘 정돈된 저수지 둘레길 위로 올라서니 30대 여성 하나가 양말만 신은 채 걷기운동을 하고 있다. 건강을 위해 맨발로 흙길을 걷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온 터. 그러나, 외투 깃으로 얼굴까지 가려야 하는 겨울 한복판에서 그 모습을 실제로 보니 놀라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놀라운 광경과 만나게 됐다. 이번에는 족히 일흔은 넘겼을 어르신이었다. 그분은 아예 양말도 없이 맨발이었다. 혹여 동상에나 걸리지 않을까 싶어 걱정을 전하며 물었다.

“추운데 괜찮으세요?”

주름진 얼굴임에도 티 없이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가 이런 대답을 들려줬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아직 마음은 청춘인데요 뭘. 젊은이도 한 번 맨발로 걸어 봐요. 기분이 상쾌해.”

기자는 쉰둘. ‘젊은이’로 불릴 나이는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그 단어가 듣기 좋았다. 사실 조박지는 이전부터 ‘맨발 산책로’로 유명한 곳.

포항시는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친환경 도시 건설을 위해 ‘포항 그린웨이 프로젝트’를 장기간 진행했고, 그 일환으로 조박저수지 둘레길 조성사업을 추진해 지난해 봄 완료한 바 있다.

추운 날씨에도 저수지 인근을 걷는 산책자들/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추운 날씨에도 저수지 인근을 걷는 산책자들/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이와 관련한 포항시청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조박지 둘레길은 오어지 둘레길과 함께 원점 회귀가 가능한 순환형 수변 산책로다. 조박지에선 황금빛 들판과 갈대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철새가 서식하고 있기에 편안하고 아름다운 힐링 공간으로 다가온다. 1.5km의 산책로 구간엔 폭 3m 중 1.5m는 편의를 위해 보행 매트를 설치했고, 나머지 1.5m는 마사토로 돼있어 맨발로 걸으며 건강을 챙길 수 있다.”

동장군의 위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발을 벗은 채 저수지 둘레를 걷는 사람들. 그들 앞에선 동짓달 겨울 추위도 무색했다.

바람에 서걱거리는 갈대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적계못의 풍경은 재론의 여지없이 근사했다. 멀리서 온 산책자를 위해 이 계절이 준비한 선물 같았다.

추운 날씨에도 저수지 인근을 걷는 산책자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추운 날씨에도 저수지 인근을 걷는 산책자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반면교사’ 해야 할 전설 속을 걷는 저수지 둘레길

 

어딜 가나 우리나라 시골 마을엔 전해오는 설화나 전설이 한두 개쯤은 있기 마련. 조박지도 다르지 않다. 그곳엔 이런 이야기가 떠돈다.

옛날 조박곡(적계못 뒤쪽 마을)에 부자가 살았다. 당연지사 어려운 형편을 호소하는 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들었다.

그들이 귀찮았던 부자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승려에게 사람들이 제 집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할 방법을 물었다.

“집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없애면 된다”는 대답을 듣고는, 적계못(조박지)에 바위를 빠뜨려버린다. 그날 이후 찾아오는 이들은 없어졌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 그 부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산을 모두 잃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워졌다고 한다.

이 설화는 우리에게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배울 것은 벤치마킹(Bench marking)하고, 어떤 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조박지에 얽힌 전설은 분명 반면교사의 대상일 듯.

세월과 무관하게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나무./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세월과 무관하게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나무./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30분가량 저수지 둘레길을 걷다가 아래쪽을 보니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이 휑했다. 저 들판을 채우는 건 결국 더불어 땀 흘리는 걸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함께 나누는 인간들이 아닐지. 예나 지금이나. 또한, 앞으로도.

하루 중 가장 기온이 높은 오후 3시가 가까워 오는데도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조박지 둘레길에 추위를 피해 잠시 쉬어갈 찻집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문드문 놓인 벤치에 앉아 꽤 오래 저수지를 바라봤다. 어떤 철학자는 “수면을 응시하는 건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말없이 상념에 잠겼던 그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건강에 좋은 ‘맨발 걷기’는 차가운 날씨에도 지속된다/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건강에 좋은 ‘맨발 걷기’는 차가운 날씨에도 지속된다/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걷기’는 스스로를 비우고 삶을 일으키는 방법

 

잔잔한 물결과 무성한 갈대, 길에서 만난 산책 동지들과 새 몇 마리가 함께 해준 조박지 둘레길에서의 걷기운동. 아무리 추워도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보단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오는 게 좋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12월 겨울 산책은 앞서 언급한 어르신의 말처럼 ‘상쾌’했다.

‘나는 걷는다’란 제목의 책이 있다. 30년 이상 프랑스의 여러 신문과 잡지를 거치며 정치부·사회부 기자로 활동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저자다.

그는 발로 걷는 여행을 통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며 스스로를 비우는 법을 배웠고, 은퇴 이후 사회적 소수자가 되어버린 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출판사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천99일간 그가 남긴 여행의 기록에는 순례자의 경건한 침묵과, 30여 년간 숨 가쁘게 뛰어왔던 퇴직 기자의 한결 여유로워진 사유, 그리고 엄청난 독서량으로 시공을 넘나드는 지식이 묻어난다. 홀로 바람처럼 걸어온 그는 이제 함께 걷기를 제안한다”는 설명으로 이 책을 권하고 있다.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나라를 거치며 꿈꾸던 도보 여행을 실현한 그를 부러워할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일상에 갇힌 보통의 사람들이야 겨우 집 주변이나 지척의 산책로만을 맴도는 게 전부니까.

하지만, 지레 실망하거나 푸념할 필요는 없다. 걷기운동, 도보 여행, 산책은 결국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온전히 자신만의 힘으로 만들어낸 그 새로운 길은 터키와 중국에도 있고, 스페인과 캐나다에도 있고, 여름이면 가시연꽃 피는 포항의 조그만 저수지인 적계못 근처에도 있지 않겠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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